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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박사님 아들 계 목사의 10월 말 사진
-계의돈박사의 생애와 업적-
계의돈박사님음 미국 플로리다 주 게인스빌(gainesvill)에 사는 독일계 미국 플로리다 대학교 사범대학 교수이면서 사법대학의 p.k.yonge(사람이름) 부속학교에서 일반과학, 물리학, 화학을 가르치고, 게인스빌에 있는 남장로교 교단 소속 제일장로교회의 장로인 아비지 William L. Goette와 고등학교 영어교사이면서 게인스빌 제일장로교회의 신자인 어머니 Nancy Harris Goette 사이에서 G1929년 5월 12일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34년 9월, 그의 나이 5세 때에 플로리다 대학교 사법대학 p.k.Yonge 부속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10년 8개월만인 1945년 5월 그의 나이 16세 때에 플로리다 대학교 사법대학 p.k.Yonge 부속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그 당시에는 교육제도상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는 졸업 없이 교육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고등학교 시절에 좋아했던 과학과목의 방향을 따라서 1945년 9월 그의 나이 16세 때에 개인스빌에 있는 플로리다 대학교 의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1년 뒤인 1946년 9월 17세 때에는 생물학보다는 화학을 더 좋아하여 전공을 화학으로 바꾸고 입학한지 4년만인 1949년 6월 그의 나이 20세에 화학사 학위를 받고 대학을 졸업했다. 또한 1949년 7월 게인스빌에 있는 플로리다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년2개월만인 1950년 9월 그의 나이 21세에 “유기화학과 특수한 4차 암모니움 화합물(Organic chemistry and Quaternary ammonium compounds in particular )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써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석사과정을 마치자마자 1950년 9월 21세 때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전 과목 모두 A학점을 받고 2년8개월만인 1953년 1월 23세의 젊은 나이로 ”이온교환 수지형성을 위한 4차 암모늄 화합물의 합성과 중합반응 및 수지교환에 미치는 다양한 유기 작용기의 치환반응의 고찰(Working the preparation and polymerization of quaternary ammonium compounds to form ion exchange resins and seeing how substitution of different organic groups on the compounds affected the exchange capacity of the resins,“ 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써서 유기화학 전공의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계 박사님은 태어나서부터 1953년까지 약 24년간을 미국 플로리다 주 게인스빌에 있는 제일장로교회에 다니면서 Dr. U.S. Gordon 의 탁월한 성경지식과 성경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는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선하심과 하나님의 영원하신 약속을 믿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단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책임들을 잘 감당하면서 교회에서나 학교에서나 학창시절을 성실히 보냈다. 그는 유명한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유명한 회상에 취직을 해서 남보다 좋은 대우를 받고 아리따운 여성과 결혼하여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면서 즐기는 인생의 목적을 가졌을 뿐 특별히 화학자나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마침내 1953년 3월, 그의 나이 23세 때에는 South 주 Camden에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듀퐁 화학회사 섬유부의 화학연구원으로 취직하게 되었고, 그로부터3개월 뒤인 6월 27일 그의 나이 24세 때에는 아리따운 미모와 지성을 갖춘 에밀리(Emily)여사와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그 후에는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직장이 있는 South Carolina 주 camden이라는 곳으로 이사하여 베세다 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과 아울러 직장생활을 했다.
계 박사님은 그 곳에 살면서 두 아들과 한 딸을 얻었으며 자가용 비행기(A 4 place piper pacer airplane)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얻고 싶었던 모든 것을 얻은 채 당시 미국국민의 평균수준 보다도 훨씬 높은 생활을 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회사에서 일한지 4년 반이 지난 1958년 9월, 그의 나이 29세 되던 어느 날 계박사님은 자가용 경비행기를 조종하고 하늘을 날은 후 땅위로 내려오다가 옆바람으로 인해서 비행기와 함께 추락하게 되었다. 그는 그 사로로 자기 생명은 겨우 건질 수 있었으나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노력과 업적으로 얻은 자기 인생의 꿈이자 목적이기도 했던 비행기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을 체험하고 난 후 자기 소유물들 중의 그 어느 것도 자기의 내적인 공허감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비행기를 조종하는 일에 대해서 불안을 느꼈으나 부가적인 훈련과 함께 계속함으로써 비행기 조종에 대한 공허감과 화학 연구원직보다도 더 중요한 다른 일이 있다는 생각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 에밀리에게 내가 공허감에 사로잡혀 괴로운 나날을 보내느니 차라리 듀퐁회사를 그만두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그 때 그녀의 대답은 당신이 좋은 데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공허감에 사로잡힌 채 나날을 괴로워하며 보내다가 자기가 갖고 싶어 했던 모든 것을 가져다 준 듀퐁 화학회사를 6년 반 뒤인 1959년 9월 그의 나이 30세에 스스로 사퇴하게 되었다.
그분은 분명히 어린 시절에 선교사나 교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인본주의 과학만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비행기 사고 후 그의 생각을 바꾸어 장로교 계통의 기독교학교 (Presbyterian School of Christian Education)에 가서 기독교 교육의 지도자나 선교사로 봉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했다. 그래서 자기 아내와 3아이를 데리고 기독교인을 교육하기 위해서 세운 1960년 5월까지 9개월 동안 학생으로 교육을 받는 중에 한국 대전에 있는 장로교 계통의 한남대학(당시 이름 대전대학)으로부터 화학과 설치를 도울 교육 선교사로서 세 차례나 초청장을 받았다. 그렇지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인 여러 가지 어려운 한국의 상황을 이유로 내세워 그 때마다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네 번째의 초청장이 왔을 때에는 한국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들어 네 번째의 초청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지 않은 체 1960년 그의 나이 31세 때인 여름 한국에 도착하여 서울 신촌에 있는 연세대학교 부설 한국어 학당에서 1961년 5월까지 1년 동안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해서 배운 후 한국어 가정교사와 함께 대전에 내려와서 6개월간 한국어를 더 배우면서 1961년 6월 1일 그의 나이 32세 때부터 한남대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분이 한남대학교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이다.
계의돈 박사님은 1961년부터 1970년 화학과 학과장으로 10년 동안 일하면서 한국의 제일가는 화학과를 만들 목적으로 화학과 공학 뉴스라는 미국화학회 소식지의 편집장에게 미국과 미국 밖의 여러 나라에 있는 화학 정기 간행물의 지난 호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다. 그 편지 내용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사는 한 화학자와 루이지애네 주에 t가는 한 화학자는 그들의 주에 사는 미국 화학회 회원들에게 각각 화학 정기간행물의 지난 호를 보내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마침내 두 헌신적인 화학자들의 노력으로 큰 상자로 여러 상자 분의 좋은 화학 정기 간행물들이 미국으로부터 부쳐오게 되었다. 그리고 플로리다 주 게인스빌에 있는 계 박사님의 부모님과 계 박사님이 출석했던 게인스빌에 있는 제일 장로교회의 담임목사 Dr. U. S. Gordon은 계 박사님이 일하는 한남대학의 건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개의 실험실을 만들 기금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모아 보내주었다. 특히 계 박사님이 1953년 3월, 그이 나이 23세부터 출석하여 1978년 49세까지 25년간 교적을 두고 있었던 south carolina 주 Camden 교회와 1979년 교적을 옮긴 조지아 주의 채플 우드(Chapel Woods) 장로교회에서도 계 박사님을 도와주었다.
계 박사님은 그 후원금으로 화학과 실험실을 만들었고, 화학과의 각종 실험실습용 시약을 학기가 시작되기 전 미국으로부터 직접 구입하여 방학 중에 계 박사님이 직접 예비실험을 한 다음 미국기준에 따라 소량의 실험 시스템에 의해서 학생 개인 별로 철저히 실험을 하게 했다. 그리고 교수들이나 학생들이 화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참고서인 chemical abstract를 미국기준에 맞추어 처음(1970)부터 마지막 권까지 모두 갖추어 놓게 되었다.
미국 국민들은 1957년 옛 소련이 인공위성(sputnik: traveling companion)발사에 성공하지 미국이 우주개발에 있어서 소련에게 뒤진 것은 미국의 고학교육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1960년대 초기에 새로운 과학교육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게 되었다.
계박사님은 미국의 새로운 과학교육제도를 한남대학교 이과대학 화학과에 받아들여 주변의 빈 깡통 등으로 직접 실험 장치들을 만들어 학생들을 교육하는 새로운 화학교육방밥인 chem study 를 한국 최초로 적용했다.
그리고 자기가 맡은 유기화학, 실험, 과학영어 과목 등에 대한 강의도 1시간 강의하기 위하여 4시간 이상 철저히 참고문헌을 찾아가며 미리 실험해 보고 성실히 준비하여 임했다. 그리고 1966년 그의 나이 37세 때는 한국 최초의 자연과학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충남지역의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모아 그들에게 미국의 새로운 화학교육방법을 연수시켰으며, 모든 재ㅔ학생들이 화학을 교직과목으로 배우도록 하기도 했다.
화학과 초창기에는 졸업생들을 1년에 2명씩 수년 동안 자기모교와 자매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 보내어 기속사비와 학비를 면제받으면서 공부하도록 도와주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모두 마치고 돌아온 정일남 박사를 한국KIST소장에게 소개하여 그곳에 연구원으로 취직시켰으며, 우리 한국과 미국의 맨 처음 합작회사인 여천공단의 호남 저유회사가 설립될 때 미국과 한국의 교량 역할을 한 계 박사님은 1969년 한 해에만 화학과 졸업생인 김성동, 노현우, 박상언, 김익동 네 사람을 많은 노력 끝에 취직시켜주었다.
그리고 김종익 학생이 입학 할 때는 장학생으로 합격하여 1년 동안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었으나 어려운 교육환경에 더 이상 적응하지 못한 나머지 성적이 떨어져 2학년 때에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대학을 떠날 수밖에 없는 그의 처지를 알 고 화학 실험실에서 일하게 한 후 장학금을 주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등록금(정우, 김용희, ...최중호(CCC훈련비)을 도와주었는가 하면 병원 수술비가 없어서 장애인(서선애)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고생하는 학생의 수술비를 부담하여 정상인으로 회복시켜주기도 했다. 계박사님은 이 처럼 미국사람이면서도 한국 사람처럼, 그리고 착하고 좋은 아버지처럼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었다.
1970년 그의 나이 41때에는 화학과 졸업예정자인 김박수가 대한 비타민 제약 회사에 취직하게 되자 사장은 졸업도 하기 전에 회사에 와서 근무하라고 했다. 그러자 계박사님은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학생이 4학년 수업을 다 마치기도 전에 회사로 데려가는 것은 불법이고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기다렸다가 졸업 후에 데려가라고 하자 사장은 다른 사람을 뽑지도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졸업하기를 기다렸다가 데려갈 수 없었다. 이처럼 계박사님은 원칙을 무시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철저히 원칙을 지키려고 하는 원칙주의이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본교 화학과의 발전을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헌신적인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 결과 교육부가 한남대 화학 실험실의 기자재 시설을 전국 1위로 평가함으로써 화학과의 위상과 계 박사님의 헌신적인 노력을 전국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970년 여름 안식년 미국 빌 브라이트 박사가 인도하는 CCC천막 수련회에 참석했다가 “당신이 구원받은 것은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해서이고 업적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남의 제조품이고, 선한 일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 만들어졌으며, 하나님께서 행하도록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들어졌으며, 하나님께서 행하도록 우리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엡2:8-9)라는 말씀을 듣고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회개하게 되었으며 거듭 태어나는 확신을 체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화학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인간을 변화시킬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신앙 서적들을 구입했고, 영화 필름과 여상기도 장기간 사용하는 조건으로 빌리게 되었다.
본교에 돌아온 후 1972년 그의 나이 42세부터 1986년 57세까지 15동안은 과학의 제한성, 성서의 신뢰성, 그리고 창조와 진화에 관계되는 ‘성서와과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한편 기독교 서적센타를 설치하여 한남의 구성원들이 국내외의 기독교 서적은 물론 찬송가나 복음성가의 테이프도 쉽게 빌리거나 싼 가격으로 살 수 있도록 함으로써 문서나 찬양전도에도 힘썼다. 또한 초·중·고급 기독교지도자(LTC)훈련과정을 만들어 학생, 직원, 교수들을 대상으로 이론 강의, 찬양, 간식, 영화상영, 전도실습 등으로 이어지는 훈련을 시켰다. 모든 과정에 끝나는 토요일에는 12인승 자동차에 교육받는 사람들을 태우고 대전역이나 고속 터미널 같은 곳에 가서 낯선 승객들을 대상으로 직접 전도실습을 하게 했다. 그 교육은 생동감이 넘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분은 그 훈련을 받은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기독교서적센터의 공간에 남·녀 성경공부 반을 편성하여 틈틈이 성경을 지도하게 했고, 주일에는 각 교회에 흩어져서 가르침으로써 일찍이 세계화 운동을 실천에 옮겼고, 한국의; 복음화를 가속화시키기 위하여 창조과학회 창립회원과 성서연구 연합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계 박사님은 1972년 2월 그의 아니 42세에 당시 숭전대학교 대전캠퍼스의 학장이 되어 행정책임을 맡았었으나 행정책임이 선교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사살을 알고 1년 뒤인 1973년 2월에는 스스로 사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1974년 성령폭발 대성회(Expol 74) 기간에는 그 대회준비를 위해 9개월 동안 활동했다.
그는 전화나 볼펜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도 학교의 일인 경우에만 학교의 것을 사용했고 개인적인 일인 경우에는 개인의 것을 사용했다. 1960년대에 교육용 시각투영기인 overhead projector(오버헤드프로젝터)를 아버지로부터 학생들을 교육하는데 사용하도록 선물로 받아 사용해 오다가 1987년 2월, 그의 나이 58세에 미국으로 떠나면서 제자인 이수민 박사에게 내가 내 아버지로부터 개인적으로 받았던 것으로 개인적으로 주는 것이나 화학에 주지 말고 개인적으로 사용하다가 성서와 과학을 강의하는 심영기 박사가 빌려달라고 하면 비려주라고 부탁하고 떠났다. 이처럼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분명히 가려서 했다. 그리고 한 면만 쓰인 종이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 메모지로 활용하고, 큰 봉투나 포장용 끈을 모아 재활용했다. 그는 편지나 소포 등 미미 저울로 무게를 확인한 후 필요한 우표만 부치는 생활을 했고, 가정에서 한번 사용한 물도 거저 내버리지 많고 화장실의 정화조 물통에 부어 청소용 물로 재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또한 그는 테이블 위에 항상 오늘의 할 일을 계획해서 순서대로 적어놓고 계획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옷도 새 옷을 맞추어 입거나 새로 사서 입지 않고 남들이 입다가 버린 헌 옷을 시장에 가서 싸게 사다가 깨끗이 세탁한 후 다리미로 다려서 입곤 했다.
한번은 그가 살고 있는 집 옆에 몹시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 그냥 돈으로 도와주면 그가 부끄러워 할 테니까 그가 보다도 떳떳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일부러 정원 청소의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매월 봉급을 줌으로써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삶을 살았다.
계 박사님은 학생들에게 성경을 20분 지도하기 위하여 4시간씩 준비했고 지도하기 전에는 먼저 두 손을 모으고 겸손히 기도부터 했다, 그처럼 철저히 준비해서 가르치기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성경을 배운 후 신학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얼마나 성실하고 신앙이 좋은지 교수님들이 그들을 대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이미 신앙적으로 성숙해 있었고 모든 면에서 모범적이었다. 계 박사님의 제자들은 이처럼 그들의 스승을 닮는 생활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들을 수 있었다.
계 박사님은 학생들이 4학년이 되면 자기 집에 초대하여 미국에서 식품 영양학을 전공한 자기 아내 에밀리(Emily) 여사와 함께 호박, 통밀, 비타민 C를 넣어서 개발한 음식으로 학생들을 대접했고, 부인 에밀리 여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화학과 1학년 신입생들을 방과 후에 자기 집으로 오도록 해서 영어 회화를 무료로 가르쳐 주었는가 하면, 미국 유학을 앞두고 영어 회화를 배우고 싶으면서도 어려워하는 생물학과 심정자 교수를 연구실까지 직접 방문하여 가르쳐 주는 친절까지 베풀곤 했다.
그가 한남에 온 후 9년 동안은 한국에서 제일가는 화학과를 만들고 화학만 열심히 가르치면서 자기의 모든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알고 성경을 크게 오해한 나머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하여, 그리고 선한 일들을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그 일에 자기의 온 힘을 기울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라(골3:17)”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라(골 3:23)” 는 두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생활해야 한다고 그의 나이 70세인 1999년 1월 9일(토)일 그의 이메일에서 술회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여러 해 동안 여러 교회와 계 박사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한남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돕도록 했다.
계 박사님의 부모님은 외아들인 계 박사님과 며느리와 손자들이 한국을 행해서 떠날 때 너무 멀리 가는 것을 걱정했었고, 가까이 남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한국에 외아들을 선교사로 떠나보낸 후에는 늘 기도로 도왔고, 아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보내주었으며, 여러 가지 필요한 문서업무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 있는 일들을 도와주었다. 계 박사님의 아버님은 1979년, 그의 50세에 그리고 어머님은 1980년, 그의 나이 51세에 외아들이 곁에서 사는 것을 보지 못 한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나셨다.
계 박사님은 화학과 1회 졸업생 김해리 박사가 미국 오클라호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부임했을 때 취직 축하의 글과 함께 맨 마지막에 줄에“네가 오늘밤에 죽는다면 너는 천국에 갈 자신이 있는가? ” 라는 글을 써서 제자로 하여금 겸허한 마음으로 자기의 신앙상태를 점검해 보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학교가 커지면서 학생들의 질이 떨어지고 공부는 하지 않고 날마다 시위활동을 하며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싸우는 분위기로 전락되어가는 학교의 모습을 보고 몹시 마음 아파했었다.
계 박사님은 개인전도훈련을 위해 자기가 일한 15년 반동안 기간을 자기의 신앙성장의 기간이었고,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 깨달은 바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성장이 필요하며, 그 하나님의 선물을 자기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고 자기에게 과분하다고 1999년 1월 9일 이멜에 적고 있다.
그리고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과 그 지식을 나눌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단계적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그들을 인도하는데 관심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계 박사님은 그 당시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하나의 모범으로서 바라보는 그 어는 것도 원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바라보아야 할 분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읽는 것이 필요하고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이해하도록 인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적고 있다.
그분은 6개월간 기도 후, 1961년 6월1일 그의 나이 32세 때부터 1987년 2월 28일 57세까지 26년 6개월의 선교사생활을 마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1987년 2월 미국으로 돌아기서 선교사의 연금혜택도 거의 포기한 채 당시 평가한 금액으로 2천 7백만 원에 해당하는 기독교 책과 비품을 기증하고 한국을 떠난 후 1987년 6월 58세 때부터 미국 성서연구연합회 연구원으로 성서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연구를 했다.
그 분은 자기의 고국인 미국에 돌아왔지만 26년 반이라는 세월을 떠나 있었던 때문인지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여전히 모든 것이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분은 여전히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 한 채 길가는 나그네처럼 의지할 집이 없어 자동차 뒤에 달고 다니는 트레일러 같은 이동주택에서 생활해야 했고 남들이 버린 테이블을 주워 사용하면서 가난을 스스로 택했다.
그분은 간증문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지시할 것이고 여러분이 가야 할 길에서 여러분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상의할 것이고 여러분을 지킬 것입니다.(NIV) ”라는 시편 32편 8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앞에 가시면서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고 증거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서울대 식영과 김해리 박사, 한남대 김근재 박사, 이수민 박사, 장주환 박사, 권혁봉 박사, 고분자 화학과 이광섭박사, 식품영향과 김종익 박사, 호주 New South Wales 대학교 김규진 박사, 전북대학교 사법대학 화확교육과 이화국 박사, 한국인삼연구소 박영수 박사, 호남대학장 김정수 박사, 전주우석대학교 화학과 정순량 박사, 미국의사 김정웅 박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정일남 박사, 한국과학기술대학 심홍구 박사, 배제대 손 병찬박사 등을 비롯한 대학교수30여명, 박사60여명, 유한양행 중앙연구소 신약물 연구실의 김재규 연구원, 서울 대광고등학교 교무부장 박정수 선생님 등이 있고, 그밖에도 그의 많은 제자들이 교육계나 기업체등의 각 분야에서 실력 있고 성실한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으면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호주 사우드 웨일스 대학의 김규진 박사는 계의돈 박사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화학과 교수와 학과장으로서 교육에 열심과 성실로 임하셨던 분이고 자기가 한국여성의 신분으로 한국최초의 여성환경기술사 자격을 얻고, 호주에 가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오늘날 외국 대학의 교수가 된 것은 일찍이 계의돈 박사님으로부터 세계적인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연구하는 것은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주위 학자들은 김 박사가 멤부레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평가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화확과 졸업생은 1,600여명이나 된다.
화학과 동문들은 계 박사님이 한국을 떠나신 후 계의돈 박사 장학회를 구성하고 기금을 모아 계의돈 박사를 기리는 뜻으로 매년 1명씩 계의돈 박사 장학금을 모범학생에게 계속적으로 지급해 오고 있다.
계 박사님은 1993년 5월 그의 나이 64세에 미국 성서연구연합회 연구원직을 사임하고 1995년, 65세 때부터 미국 창조과학회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하고 있다.
계 박사님은 현재 미국 플로리다 주 나이스빌, 카렌코트에 있는 어느 목사님이 이사가면서 헐값으로 넘겨준 집에서 장로교단으로부터 나오는 약간의 은퇴금, 미국의 사회보장금으로부터 나오는 약간의 은퇴금, 그리고 계박사님의 부모님께서 남긴 유산과 부인 에밀리 여사의 할아버지의 유산으로부터 나오는 약간의 수입으로 생계를 우지하고 있다.
계박사님은 슬하에 2남1녀을 두었으며, 모두 결혼하였다. 9명의 손자손녀를 두었다. 큰아들 로버트(Robert)는 침례교회 목사로서 아시아계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시카고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린다(Linda)는 특수교육 박사학위 소지자로서 미국 미시시피주 해티스버그에 있는 남부미시시피대학교 특수교육하과 교수로 있다. 막내아들 빌(Bill)은 미국 남동부의 테네시주 차타누가에 있는 기독교 학교에서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학과 축구를 가르치고 있다.
1. 한남에서 그이 정신을 이어 가는데 현재 학생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1) 날마다 오늘의 할 일들에 대하여 계획을 세워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2)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믿으며, 생활함으로써 영생(요 17:3) 과 참 행복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딤후 3:16).
3) 젊은 시절부터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바로 세워야 한다. 목적과 목표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어긋나고 만다. 인간의 참 행복과 참 만족은 어떤 물질의 소유에 있지 않고 마음의 기쁨에 잇다. 마음의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전 10:31)
4) 학생으로서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한다(딤전 5:12,13) 그것이 의로운 삶이고 평화와 기쁨으로 이어지는 삶이며 이 땅 위에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삶이다(롬 14:17).
5) 자기의 소유물을 아껴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는 공동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은 그 누구나 항상 서로 돕고 도움을 받으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6) 오늘 내가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는지(마 16:19-31) 우리의 신앙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살아야 한다.
7)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Time and tide wait for no man).
8) 모든 물질을 절약해서 사용해야 한다.
9) 한번 사용한 것은 버리지 말고 재활용해야 한다.
2. 앞으로 한남대학교의 바람직한 발전방향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학교는 세속적인 세계관보다는 오히려 기독교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되는 과목들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큰 학교 그리고 교수의 직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많은 비 기독교인들과 함께 이 일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나는 학교의 어느 노력도 하나님이 누구이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가 등에 관한 기쁜 소식을 분명히 선포하도록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