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신칭의
칭의와 자유의지
…(전략)…
그렇다면 무엇인가? 우리가 구원을 갖기 위해 우리는 동시에 의에 관한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이 의의 어떤 부분도, 그것이 아무리 작은 부분일지라도, 만일 행위 안에 놓인다면 불안전한 기초 위에 머무는 것처럼 비틀거릴 것이다. 그러므로 남는 것은 오직 죄 용서에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분명히 확신하지 않는 한,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 앞에 담대히 올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눈에 의롭게 여겨지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가 아버지의 선한 뜻을 신뢰함으로써 주저 없이 그분을 우리 아버지로 의지하기 전까지는 그분께로 가는 모든 길에서 배제돼 있다. 하지만 양심의 평온과 분명한 신뢰가 없이 어떤 구원이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란 없다.
한편, 양심이 확실한 의에 머문다면, 누가 인간이 의지해야 할 온전한 의가 값없는 죄 용서 안에 포함된다는 걸 의심할 수 있는가? 우리 중재자들은 논쟁의 요점이 칭의의 방법에 관한 것일 때 마치 내재하는 의가 그리스도의 공로와 협력한다고 날조함으로써 위장한다. 이런 협력은 반드시 두려운 갈등을 낳는다. 우리가 행위를 잊고 그것을 언급함도 버림으로써 의의 일부만이 아니라 그 전부를 그리스도로부터 얻을 때까지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죄를 선고만 할 뿐 진짜 의를 주지 못하는 세상 재판관의 방식’대로 우리에게 행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중 은혜를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동시에 주실 때, 우리는 각각의 영향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이제 논의할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가?’다. 만일 행위가 값없는 의의 전가와 섞인다면, 또 다른 질문이 즉시로 발생한다. 즉,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데는 얼마만큼의 행위가 필요한가? 값없는 전가가 주된 위치를 차지하는가, 아니면 열등한 보조물일 뿐인가? 기초를 완전히 전복하는 또 다른 무엇이 있는가?”다. 그러므로 바울은 당연히 믿음의 의를 죄의 용서 안에 포함하고 그것이 “정죄를 당하지 않은 자는 복이 있다.”는 다윗의 선언에 묘사돼 있다고 가르친다(롬 4:6. 시 32:1). 더불어 다윗이 언급한 축복은 의에서 흘러나온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이 안에서 의롭고, 우리 죄는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가랴는 그의 찬송에서 죄의 용서에 대한 교훈을 구원의 지식으로 묘사한다(눅 1:77).
전반적으로, 여기에서 논쟁이 단순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다방면의 은혜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할 수 있는 까닭에 관한 것임을 기억하자. 이 까닭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익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행위의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그리스도로부터 의의 일부만을 빌리지 말라고 말하며 오히려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의가 되셨다고 분명히 선포하기(고전 1:30)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 죄가 더 이상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는 바로 그 상황에 의해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선포한다(고후 5:19).
칭의와 중생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축복의 규모와 다양함은 실로 격찬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직무와 효능을 어느 한 가지로 제한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중생의 은혜에 관해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께서 영원히 결합하신 것을 분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인간이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새로워져 거룩한 생명에 들어감 없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의롭게 여기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불가능함’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또한 ‘중생의 영께서 거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양자 삼으심을 자랑으로 여기는 일이 헛됨’도 배워야 한다. 요컨대,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의로워진 자가 아닌 자는 그 누구도 은혜 가운데로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구분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중생이 그들에게 필요하지만, 그러함에도 그들의 온전한 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라. 그들이 예정됐고 생명의 거룩함과 선행의 수고를 위해 창조됐지만, 그러함에도 그들은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하라. 그들에게 부여하신 생명의 의를 누리게 하되, 그러함에도 그리스도의 순종을 향한 신뢰 이외에 다른 신뢰를 하나님의 법정 앞에 가져오지 않도록 그 의를 불신하게 하라.
모호함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믿음으로 얻으며 우리에게 무료로 주시는 의는 반드시 최고의 자리에 놓여야 한다. 그래야 양심이 하나님 법정에 설 때마다 그 의만이 빛나리라. 이와 같이 행위의 의는, 그것이 우리 안에 어느 정도까지 뻗쳐있든 간에, 자기 위치로 돌아갈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의(믿음의 의)와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행위의 의가 믿음의 의에 의지하기 때문에 믿음의 의에 인간 구원의 온전한 소유권을 넘길 정도로 행위의 의는 믿음의 의에 반드시 복속돼야 한다. 바울이 인간의 칭의를 다룰 때 한 가지 요점, 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호의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인간이 어떻게 확신하는가?’에만 몰두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주입된 자질을 상기케 하지 않는다. 반대로, 바울은 행위에 관한 언급 없이, 의는 반드시 우리 밖에서 추구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모든 곳에서 그토록 강하게 주장했던 믿음의 확실성이 결코 설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하지만 인간의 의가 확실히 무상의 것이 아님을 획책하면서 두 종류의 의를 섞는 사람들은 결코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야고서를 내세우고, 이른바 “협력”이라는 걸 수립하고자 성경에서 칭의가 다르게 사용된 다른 구절들을 수집할 때, 우리는 그들 농간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야고보는 아주 미세한 정도로도 인간이 행위의 공로에 의해 하나님과 더불어 의를 획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의의 승인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약 2:22). 모든 인간이 자기 행위에 의해 자기가 누구임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하지만 네(인간) 마음에 믿을만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과 하나님의 시각에서 구원에 합당한 것은 별개의 것이다. 그러므로 단어의 다른 의미들로 인해 문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언급인지 인간에 대한 언급인지를 관찰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거룩한 삶과 깨끗한 양심을 고려해서 의인이란 곧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름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행위를 하나님의 저울로 무게를 측정해 본다면, 불결한 것들로 덥힌 불구 상태가 아니고는 온전히 순결한 행위는 전혀 발견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의라는 이름을 행위에게 줄 때는 값없는 용서에 기초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행위에 의해 의롭다는 것은, 그들이 행위의 의가 믿음의 의에 달려있음을 알면서 그들이 행위의 공로 없이, 혹은 행위의 덕을 보지 않고 의롭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시 우리는 명백히 행위의 보상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분명, 경건한 자들 노력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다. 이생에서 다양한 상급을 받고, 그 가운데 최고의 상급은 천국에 쌓인다. 하지만 빚을 갚는 것처럼 선행에 대한 상급이 따르리라 생각하는 자들은 대단히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다음의 진리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인 바,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대한 완벽한 순종 이외에 어떠한 의도 없다고 선포하신 대로 어떠한 인간도 율법의 모든 계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히 지키지 않고는 공로로 얻을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만일 엄격한 재판관이 판결한다면, 영원한 저주가 모든 사람ㅡ그의 실패가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ㅡ을 기다린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율법의 성취를 조건으로 내세우는 모든 약속들을 무효로 칭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한 엄격함이 값없는 약속 덕분에 누그러질 때까지 말이다.
…(하략)…
‘{칼뱅 소품집 제2권} 박건택 편역 (용인: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6)’ 391쪽~394쪽.
배경색은 제가 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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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에서 ‘이신칭의’를 논하신 바울 사도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0장: 유효한 부르심]과 [제11장: 칭의] 결론
“성령께서 적당한 때에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실제로 적용해 주시기 전까지 그들은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존 머레이
“진리의 자기주장은 장엄하다.”
김홍전
“우리가 진리를 보호하고 수호하는 게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보호하고 수호한다.”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