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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怡 : 1441 ~ 1468 시호는 충무
남이는 1441년(세종23)에 남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이다.
17세 때인 1457년(세조3)에 무과에 장원 급제한 남이는 세조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벼슬에 올랐다. 그리고 세조의 신임이 두터운 권람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1467년 남이는 세조의 명을 받아 포천, 영평 등지의 도적을 토벌했다.
같은 해에 세조가 왕권을 강화하여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우대장이 된 남이는 싸움터로 나아가 반란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의산군에 봉해졌다.
이어서 서북쪽 국경 부근에 있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진에 쳐들어가 적의 기세를 꺾었다.
이때 남자의 기개를 드높이 세우겠다는 결의를 담아 읊은 남이의 시는 유명하다.
白頭山石 磨刀盡 豆滿江水 飮馬無 男兒二十 未平國 後世誰稱 大丈夫
백두산석 마도진 두만강수 음마무 남아이십 미평국 후세수칭 대장부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
남이의 용맹을 높이 평가한 세조는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방을 책임지는 병조 판서라는 중책을 맡겼다.
한계희를 비롯한 일부 신하 들이 외척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세조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남이를 총애하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형조 판서 강희맹과 한계희 등이
남이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해직되었다.
이 무렵 남이는 궁궐에서 숙직을 서다가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무심결에 '옛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했는데 평소에 남이를 시기하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는 남이가 역적 모의를 꾸민다고 모함하였다.
더구나 남이의 유명한 시조 가운데 '나라를 평정 못하면'이라는 말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바꾸어 남이를 대역 죄인으로 몰았다.
이 일로 남이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 뒤 400여 년이 지난 1818년(순조18)에 남이는 억울한 누명을 벗고 벼슬과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남이의 묘는 강원도 춘천시 남면 방하리에 있는 남이섬에 있다.
현 용산구 용문동 106번지에는 남이장군의 사당이 있는데 남이 장군의 전설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남이장군은 여주에서 출생하였는데 현 대성리 남이터 앞 산의 승적 (僧籍)이 여주까지 와서 남씨에게는 물론 부민들에게도 괴로움을 끼쳐 생명과 재산을 탈취하였다.
장군은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남이터로 이사와서 도적들의 동정을 살피니 도적질 나갈 때마다 앞산 산정에 있는 바위를 들춰서 샘물을 마시고 떠나는 것이었다.
장군은 도적들의 눈을 피하여 갈대를 바위 틈에 넣어 물을 빨아 마신지 10여일 만에 능히 바위를 들만한 원기가 생기고 1개월 후에는 공깃돌을 다루듯이 하여 무적장군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당 8명을 토벌하니 경내가 평온하고 부민이 안심하고 생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남이장군 전설이 있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이장군이 소년시절에 하루는 큰 길에 나가 놀고 있으려니 어떤 작은 하인이 보자기에 무엇을 싸서 지고 가는데 그 보자기 위에 하얀 분면 (粉面)의 사귀(邪鬼)가 앉아 있으므로 기이하게 여겨 슬그머니 그 뒤를 따라 간 즉 그 하인이 재상 권람(權擥)의 집에 들어가길래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있다가 집안에서 곡성이 나길래 집안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집 대감의 딸이 갑자기 죽었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래서 사귀의 작간(作奸)임을 아는 남이는 그 집 하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어가면 그 처녀를 살리겠다」 고 하니 그 말을 전해들은 재상집에서는 별로 믿으려 하지 않다가 그래도 행여나 하고 그를 들어오도록 허락해 주었다.
남이가 처녀의 방에 들어가 본 즉 과연 어여쁜 처녀가 숨을 거두고 죽어 있는데 가만히 살피니 아까 보았던 사귀가 처녀의 가슴에 눌러 앉았다가 남이를 보더니 곧 피해서 달아나므로 그로부터 처녀는 차차 소생하였다.
그러나 남이가 나오자 처녀는 또 숨을 거두게 되고 남이만 다시 들어가면 처녀는 다시 소생하고 하였다.
이 때 남이가 보자기에 싸온 물건이 무엇인가를 집안 식구에게 물어보자 조금 전에 가져 온 홍시를 먹자마자 가슴이 막혀 기절하였다고 말하였다.
그제서야 남이가 아까 보았던 사귀의 이야기를 권재상에게 하고 그에 적합한 약을 처방하여 죽었던 처녀를 마침내 살려내니 그 처녀가 바로 권재상의 넷째 딸이었다.
권재상이 살려 준 은혜를 생각하고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겨 남이를 사위로 삼게 되었다 한다.
그 뒤 권부인은 결혼 후에 소생이 없었고 남이 장군이 화를 당하기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註]
<남이장군설화>
조선 초기의 명장 남이에 관한 인물전설. <연려실기술>,<청야만집>, <대동기문>에 문헌자료가 전해지고 있으면, 구저설화도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문헌자료는 순수설화라기보다 여러 문집에 소재하여 있는 남이에 관한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서 모두 같은 내용이다.
특기할 것은 <연려실기술>중 <국조기사>의 자료를 인용한 남이의 결혼과정은 현재 구전되는 설화와 같은 것으로 보아, 민간 전승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이장군설화>를 정리하면 출생, 결혼, 입공, 죽음의 4단계로 요약 할 수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 각편이 모두 남이는 짐승의 원혼이 환생한 것이라고 한다.
인신공회를 받는 거대한 지네 또는 뱀이 그 폐해를 없애려 한 어느 이인(異人)에 의하여 퇴치된 뒤 원수를 갚으려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비범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몇 차례 스승 또는 아버지인 이인을 해치려는 시도 끝에 원한이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결혼에 관한 내용은 남이가 어렸을 때 거리에서 놀다가 어린 종이 보자기에 작은 상자를 싸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위에 분바른 여자귀신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 뒤를 따라갔더니 권람의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그 집에서 우는 소리가 나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주인집 낭자가 갑자기 죽었다."고 하므로, 남이가 "내가 들어가서 보면 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허락해 주었다.
남이가 들어가니 낭자의 가슴을 타고 앉았던 귀신이 곧 달아나니 낭자가 일어나 앉았다. 남이가 나오니 낭자는 다시 죽었다가 남이가 들어가자 되살아났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자 남이는 자기가 본 바를 이야기하고, 약으로 치료하였다.
이 일로 남이는 권람의 사위가 되었다.
입공부분에는 제주도 정벌과 두만강 정벌로 요동 700리 땅을 차지하였다는 것이 이야기된다.
제주도를 정벌하였다는 것은 허구이자만 설화에서는 제주도 정벌 때 남이에게 죽은 제주도 여왕의 원혼이 남이의 억울한 죽음의 원인이라는 각편도 더러 있다.
남이의 죽음은그가 읊은 시의 글귀가 그에게 쫓겨간 분바른 여귀 또는 제주도 여왕이라는 여귀의 장난에 의하여 임금에게 '미평국(未平國)'이 '미득국(未得國)'으로 잘못 읽혀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4단계는 모두 원혼과 관계있는 것들이다.
실제로 남이는 의산위 휘의 아들이고 태종의 외손이라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음에도 설화에서는 그같은 신분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남이의 죽음을 억울한 것으로 인식해온 설화향유층의 동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는 향유층은 그것을 원귀의 작용으로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 설화의 향유층은 남이를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세계의 횡포로 좌절당하는 민중적 영웅으로 이해하고 그와 맥락을 같이하는 설화유형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 유형은 인물의 실제 행적과 상관없이 향유층에 의하여 민간영웅화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자료이며, 뒤에 민간신앙에서 '남이장군신'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받들어져오기도 하였다.
(자료 출처 : 한국사전연구사간. 국어국문학자료사전)
<남이장군대제>
서울 한 복판에서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당집이 들어선 곳은 지대가 높아 건물이 빽빽한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남산 타워도 동네 앞산의 송신탑처럼 아주 가까이 서 있다. 그곳에 가기 위해 전철을 타게 되면 용산 전자상가 쪽 출구로 나가야 되고 즐비하게 늘어선 전자제품과 마주치게 된다.
현대인을 지배하고 있는 물신과 같은 이 첨단 과학제품들은 미신에 불과한 굿을 뭐하러 보러 가냐고 한꺼번에 눈총을 주고 있다.
그러나 미신이란 단어는 원래 우리말에 없었고 일제가 우리 민족문화를 억누르기 위해 사용한 일본말에 불과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무속에는 우리가 미신이라고 부르던 그 어떤 부정적인 것이 있지 않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색해진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무속을 하나의 종교로 보고 있으며, 서울 근교 산에서 밤마다 은밀하게 벌어지는 개인 발복을 위한 굿이나 무꾸리가 역기능이 많다고 해서 무속을 무조건 미신으로 몰아붙일 수만은 없다는 수준에서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10월 27일. 첨단을 자랑하는 용산 전자상가의 지척에서 벌어지는 굿은 용문동의 남이장군 당굿이다. 마을굿으로 마을 전체의 안녕과 풍요를 빌며 주민의 결속력도 다지는 뜻깊은 행사다.
풍농 풍어에 목을 매달고 있는 농어민이 굿에 열성이듯이 도심지인 이 용문동에서는 시장 상인들이 걸립 때 적극적이다. 바로 그 시장을 끼고 올라가다 보면 금세 당집으로 오르는 비탈길이 보인다.
마당에 차일을 쳐서 그냥 지나쳤지만 당집 현판에는 남이장군 사당 이라고 새겨져 있을 것이다.(새 건물을 짓기 전에는 본전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사당은 아니다. 당집 안을 들여다보면 남이장군 신상 좌우로 무녀들이 신격으로 모시는 최영장군, 호구아씨, 산신령 내외분, 천신대감 등의 신상을 그린 영정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성동구 사근동에 있는 남이장군 당의 경우는 장군상만 있고 유교식 제사만 지내고 있어 순수한 사당에 가깝다. 당에 다른 이름을 붙이려고 해도 마땅한 이름이 없기는 하다. 이성계를 주신으로 모시는 인왕산 국사당도 사당이란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니면 한동안 정말 사당처럼 제사만 지내왔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다.
남이장군 당에서는 72년까지는 3년마다 한번씩 당굿을 해왔지만 그후 11년간 중단하고 제사만 지내다가 83년 남이장군 대제로 이름을 바꾸고 서울 대표축제로 화려하게 부활을 한다.
연도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72년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가 출범한 해이고, 83년은 군사정권이 정통성 확보를 위해 전통문화를 부흥시키는 중요한 법안이 제정된 해이다.
이것만 보아도 굿은 세상과 동떨어진 변함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부대끼면서 늘 변화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남이장군 당은 300여년 전에 지금의 원효로 2가에 세워졌다가 1904년 철도가 생기면서 용문동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남이장군은 이시애난의 평정으로 큰 공을 세운 후 26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에 오르지만 유자광의 모함을 받아 27세에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된다.
그때가 1468년이고 그가 복권되는 해가 1818년이니 모르긴 몰라도 300여년전의 남이장군 당은 공식적인 사당은 아니었을것 같다.
지금처럼 남이장군을 주신으로 모신 신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남이장군이 무신이 되는 과정은 무속 세계에서는 아주 보편 타당한 것이다. 최영 임경업 홍경래처럼 주로 억울하게 죽은 영웅들이 무속신이 되기 때문이다.
남이장군 당굿을 보면 무복에 옛 무관복장이 많고 무녀는 별상거리 같은데서 반드시 오른손에 언월도, 왼손에 삼지창을 들고 나와 춤을 춘다.
칼에는 칼을 쓰다 죽은 영웅의 고통을 달래주는 힘이 있다. 또한 무녀 자신이 부정한 것과의 싸움을 벌이는 전사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무엇보다 영웅신은 우리나라 사람의 독특한 정서인 한과 관련이 있는 듯 싶다. 한을 품고 죽은 귀신은 신령으로서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믿었을 것이며, 한이 많은 백성들은 영웅의 원혼을 달래주면서 자신의 한도 풀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별상거리에서는 연산군이나 사도세자 같이 비극적인 왕이나 왕세자가 모셔지기도 한다.
남이장군 당굿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별상거리에서 사실을 세우는것이다.
쌀을 담은 그릇에 통돼지를 꿴 삼지창을 세우는 것으로 돼지 등을 탁탁 쳐도 쓰러지지 않으면 한해 운수가 좋다고 풀이한다.
그런데 왜 삼지창에 돼지를 꿰어 세우는 것일까? 왜 우리나라에서는 돼지를 꼭 제물로 바치는 것일까?
과문한 탓인지 이에 대한 깊은 천착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도 제사 상에는 꼭 돼지를 올렸다고 하니 동서고금의 희생양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마빈 해리스의 책을 보면 중동지역에서 돼지 사육이 금기시 되었던 것은 산림이 황폐화하면서 돼지를 사육하기 힘든 풍토로 바뀐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고기 이외는 아무 쓸모없는 돼지를 무모하게 키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돼지가 주로 희생양으로 쓰였던 것도 젖을 제공하는 소나 양처럼 쓸모가 적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최영장군을 모시는 어느 굿당에서는 돼지를 성계육이라고 부른다.
최영장군의 한을 풀려면 이성계 제물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는 발상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어쩌면 돼지는 진흙탕에 뒹구는 지저분해 보이는 습성 때문에 만신들이 물리쳐야할 사악한것의 상징물로 발탁된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돼지는 어느 한 이미지에 고정될 수 없는 기호이다. 재수를 비는 대감거리에서는 무녀가 통돼지를 업고 당집 주위를 도는데 그 때 비로소 재수 좋은 동물이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되찾는다.
그런데 무녀는 통돼지를 업은 게 아니라 등을 돼지 배안으로 넣고 옆구리를 뚫어 팔을 꿰고 있다. 이런 동작은 무거운 돼지를 업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지만 이렇게 해야 무녀는 돼지의 신성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돼지가 당집 주위를 돈 다음에는 무감을 선다.
주민들이 모두 나와서 무복을 걸쳐입고 한바탕 춤을 춘다.
특히 아낙네들이 나와서 서슴없이 팔짝팔짝 뛰며 도무를 추는 것을 보면 무녀 못지않은 신기를 느끼게 한다.
마을 주민들을 굿으로 끌어들이고 함께 춤과 노래로 엑스타시를 느끼게 하는 중요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당굿에서는 무감이 마을주민의 결속을 이끌지만 전체 축제로 볼 때는 걸립 꽃등행렬 장군출진이 그런 역할을 해낸다.
걸립은 당제가 있기 3~4일 전에 제수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풍물패를 앞세우고 동네를 돌며 쌀이나 돈을 걷는 것으로 여느 마을굿과 다르지 않다.
꽃등행렬은 제사 전날 남이장군의 부인신을 모신 당집으로 가서 연꽃을 바꿔오는 꽃받기 행사다. 장군출진은 당제를 지내고 당굿을 하기 전에 마을을 돌던 전래의 길놀이를 발전시킨 것이다.
대취타, 말을 탄 장군과 좌우 부장, 군졸, 제관과 무녀 등 300여명의 남녀가 행진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브라질의 카니발은 150여년 전 행진이 도입되기 전에는 집에서나 하던 잔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행진이 시작되면서 이 잔치는 거리와 집의 구분이 없어지고 공적 사적인 구속이 사라지는 해방감을 느끼는 진정한 축제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브라질 카니발은 순식간에 거리를 극단적인 해방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거리는 차량이 전면 통제되고 미쳤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비일상적인 행위가 판을 친다.
물론 장군출진이 브라질 카니발의 행진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주민이 참여하여 해방감을 느끼는 길놀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굿이 되어야 한다. 유일하게 비일상적인 공간으로 남아 있는 당굿에서 그 아우라(기)를 얻어내야 한다. 당굿도 잘 연출되어야 한다.
장군출진에 몰려있던 사진가들이 정작 굿을 할 때는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그런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남이섬>
강원도 춘천시(春川市) 남면(南面) 방하리(芳荷里)에 있는 섬.
북한강 상류의 하중도(河中島)이다. 총면적은 13만여 평에 이르고, 둘레는 약 6㎞이다.
본래 방하리 주민들이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던 땅이었는데 1960년대 중반 관광회사에서 사들여 잔디밭과 오솔길을 만들고 위락시설을 갖추어 유원지로 꾸몄다.
섬 중앙부에는 약 8만 평에 이르는 잔디밭이 있고, 섬둘레에 밤나무·은행나무·포플러 등이 둘러쳐져 있다.
축구장·배구장·테니스장·수영장·활터·낚시터 등의 시설과 모터보트·사이클보트·유람선·수상스키 등이 마련되어 있다. 숙박시설로는 산장과 방갈로·간이숙소·캠프촌 등이 있어 편리하다.
남이섬 선착장에는 이 섬의 이름이 유래된 남이(南怡)장군의 무덤이라 불리는 묘가 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아니며, 다만 그가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이 섬의 돌무더기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 것이다.
서울에서 2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는 서울 근교생활권에 속하기 때문에 수도권 지방의 관광객과 학생들의 캠프로 많이 이용된다.
북한강에 떠 있는 반달 모양의 남이섬은 원래 섬이 아니었으나 청평댐이 세워지면서 주위가 물에 잠겨 섬이 되었다.
조선 세조 때 병조판서를 지내다 역적으로 몰려 28살 젊은 나이로 요절한 남이장군의 묘가 이곳에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남이섬이라 부른다.
1970~80년대에는 젊음의 상징인 강변가요제가 열렸고 80년대에는 영화 '겨울나그네'의 촬영무대이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드라마 '겨울연가'로 유명해지면서 추억에 젖은 40~50대 중년층에서부터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고 싶은 젊은 연인들까지 다양한 연령층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섬의 숲길은 사계절 내내 가지각색의 아름다움과 운치를 지니고 있다.
선착장에 내려 섬으로 들어가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 섬을 가로지르며 서 있는 잣나무 숲길이다.
400m 정도 이어지는 이 숲길은 마치 흡인력 있는 나무 터널인 것처럼 우리를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 숲길은 잣을 모으는 청설모들의 천국인 듯 사람의 지척에는 아랑곳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메타세쿼이아길은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연인들이 자율학습을 빼먹고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하던 곳으로 나무 사이로 드는 아침 햇살이 무척 아름답다.
거기다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뻗은 웅장한 나무들은 이국적이면서도 당당하게 뻗어 있다.
이외에도 곧지는 않으나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좁은 잣나무길, 타조농장과 야외 음악당을 갈라놓는 은행나무길, 강변을 끼고 있는 연인의 길 등 낭만에 젖고 싶은 연인들의 발목을 붙잡는 숲길들이 저 나름대로의 자태를 풍기고 있다.
중앙광장에는 이곳을 찾는 연인과 여행객을 위하여 테마형 가게들이 모여 있다.
그 중에서 사각 철 도시락에 밥, 김치와 달걀 프라이를 얹어 뚜껑을 덮은 뒤 난로 위에서 데워 흔들어 먹는 '옛날 벤또'가 남이섬의 명물이다.
그 외 1950~80년대의 풍경을 재현한 전시관, 동쪽 강변을 끼고 늘어선 예술가들의 체험 공방인 방갈로 등이 있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