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천 전 오현고 교장, 영운집 증보판 펴내
고영천 전 오현고등학교 교장은 최근 고조부인 영운 고경준 선생 문집 ‘영운집(靈雲集)’ 증보판(표지)을 펴냈다.
고경준 선생은 1839년 애월읍 수산리의 속칭 ‘오름-가름’에서 태어났다.
15세 때에 노형동 ‘너븐드르’ 연주현씨 집안에 장가를 들어 처가에 살면서 오현단에 있는 귤림서원에 나가 글공부를 했다.
문과별시에서 을과로 뽑힌 선생은 1865년 승문원의 부정자(副正字)가 됐다.
부사과(副司果)를 시작으로 예조좌랑 등을 거쳐 1883년부터 2년간 제주판관으로 재직했다.
고경준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훼철된 삼성사 창건을 주도하고 제주향교 명륜당을 개수, 향현사 유허비 건립 등 유적의 보존과 수호에도 앞장섰다. 1897년 59세로 서거한 이후 그의 생애를 기리는 선정비가 삼성사와 화북 비석거리 등에 세워졌다.
선생이 타계한 지 90년 만에 증손 고대종씨가 선생의 유고를 모아 ‘영운집’(번역 오문복)을 발간했다. 영운집에는 고경준의 생애와 작품 등이 담겼다.
고 전 교장이 30여 년 만에 다시 펴낸 증보 영운집에서는 유품·유문 사진자료를 보충하고, 인명·지명·고사 등에 대한 설명을 더했다. 이와 더불어 부록에는 김찬흡 선생의 제주인물 대하실록 ‘제주판관 고경준 권학입지 역설’ 등을 함께 실었다.
고시연 기자 sy5556@jejunews.com
▲고경준高景晙:1839(헌종5)~1897(광무1), 문신. 자는 진경晋卿, 호는 영운靈雲, 제주판관.오현중·고교 교장 고영천高永千의 고조부이다.항상 방조인 영곡 고득종高得宗을 공경하고 사모하여 모든 행동과 문장까지도 영곡풍을 따르니 아호도 그래서 영운이라 한 것이다.진해현감 고처량高處亮의 5세손으로 1839년(헌종5) 9월 29일 애월읍 수산리의 속칭 ‘오름-가름’에서 아버지 한주漢柱와 어머니 양梁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15세 때에 노형동 ‘너븐드르廣坪’ 연주현씨 집안에 장가를 들어 이후 줄곧 처가에 살면서 오현단에 있는 귤림서원에 나가 글공부를 하였다.1863년(철종14) 초가을 제주찰리사察理使 이건필李建弼이 내도하여 과장科場을 열어 시제試題는 ‘궐포귤유석공부厥包橘柚錫貢賦(귤과 유자를 보따리에 싸서 조공함)’이었다.문과 별시에서 을과乙科로 뽑혔으며 그의 문장과 재질을 발휘하고 이어 승문원 부정자, 종친부 부정,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 함경도 안변의 고산高山 찰방, 강원 원주의 보안保安 찰방, 예조좌랑, 1865년(고종2) 승문원의 부정자가 되었다.이 해에 고종 임금이 관물헌觀物軒에 납시어 우의정 박규수朴珪壽 등 입시入侍한 모두에게 ‘보작명寶酌銘’을 짓게 하였다.이때 영운靈雲이 지은 글이 최고 수작으로 뽑혀 그의 문장력이 중앙에까지 알려지고 그 글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1866년(고종3)부터 부사과副司果를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함경도 안변의 고산찰방 겸 춘추관 기서관記書官, 전라도사全羅都事, 강원도 원주의 보안保安찰방, 종친부정宗親府正, 편수관, 예조좌랑 등을 거쳐 제주판관으로 등용됐다.제주판관으로 재임하면서는 더욱 민심 순화와 빈민 구호에 남달리 힘쓰는 한편 이조판서 김상현金尙鉉에게 올린 근조상십사謹條上十事라는 상소문을 통해 “식년과, 경과慶科 등을 제주도에서 한성시나 호남시를 보기 위해 출륙하는 번거로움과 제반 경비의 소모를 덜게 하여 달라.”고 호소하였다.영운의 문학성에 대하여서는 소疏·서書·부賦·시詩·발跋·문文 등 할 것 없이 일본을 항상 경계해야 함을 강조하고 특히 고향 제주를 아끼고 제주인을 사랑했던 애향의 진정을 느낄 수 있었다. 관계를 떠난 1880년대 후반부터는 제주의 한 야인으로서 후생들을 가르치고 문묘에 나아가 권학입지勸學立志의 길을 역설했다. 또 향리에서는 충신계忠信契를 중심으로 한 십의(十義:父慈·子孝·兄良·弟弟·夫義·婦聽·長惠·幼順·君仁·臣忠)의 도를 지켜 나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폭넓은 행동은 이조판서 및 대제학을 역임한 김상현金尙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영운이 상경한 후 관계에 있을 때 김상현의 집에서 10여 년간 유숙하면서 사사하였던 일로 미루어 확인할 수 있다. 1897년(광무1) 12월 5일, 관계에 투신한 후 줄곧 살아온 제주시 이도일동 1372번지에서 향년 59세로 타계하였다.따라서 충군애국·육영애민育英愛民으로 일관한 그의 생애를 기려 ‘판관 고경준선정비’가 삼성사 서쪽에, 또 ‘판관 고경준거사비去思碑’가 화북 비석거리에, 또 등영구登瀛丘(방선문) 동벽 암벽에 ‘판관 고경준’이라고 음각된 글씨가 남아 있는데 영운의 고귀한 발자취를 높이 평가한 징표라고 하겠다. 그가 타계한 지 90년 만에 증손 고대종高大鐘에 의해 유고를 모아 오문복吳文福이 번역, 1989년 그의 문집 <영운집靈雲集>이 발간되자 그의 인물됨이 널리 알려졌다.※(필자의 변) : 영곡공이나 영운공은 고씨 집안에서 자랑하는 인물이다. 영운공의 선친묘는 ‘물미-오름’ 자락 명당자리에 터를 잡아 대제학大提學 김상현金尙鉉이 비문을 지었다. 제주도에 대제학의 비문은 오직 이곳뿐이다. 하루는 한학자 오문복吳文福(신풍리) 선생을 모시고 찾아간 적이 있다. 그도 묘자리를 보면서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앞에는 수산水山저수지에 멀리 보이는 한라산 참으로 장하게 보인다고 했다. 영운靈雲의 후손들은 서울에, 또 이곳은 오현중 전 교장 고영천高永千이 유업을 지키고 있다.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