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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영광·고창 40코스
법성버스터미널-굴비거리-홍농읍 시가지-서당마을-상삼마을-하삼마을-
자룡천-동아방조제-가시연꽃길-토안마을 앞-고리포-구시포해수욕장
20230308
1. 영광 홍농읍 야경, 고창 고리포와 구시포 해안 풍경
새벽 4시 50분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법성버스터미널 앞은 가로등 불빛으로 환하다. 거리는 불빛으로 환하게 빛나지만 고요와 적막에 싸여 있다. 그 고요와 적막을 깨뜨리는 소음, 서해랑길 탐방을 위해 이곳에 온 탐방객들의 소리가 왁자지껄하다. 법성버스터미널 옆 서해랑길 40코스 안내도 앞에서 서해랑길 40코스를 출발한다. 일행들은 벌써 탐방길을 따라 내달린다. 이번 코스는 영광군 법성면 법성포에서 출발하여, 홍농읍 상하리 시가지와 진덕리 지역을 거쳐 영광군과 이별하고,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로 넘어간다. 35코스에서 영광군 염산면 옥실리 향화도로 들어와 40코스에서 영광군 지역과 작별한다. 영광군에 대하여 제대로 살피지도 못하고 떠나는 게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더 깊이 있는 영광 지역의 답사를 기약한다.
쌀, 소금, 목화와 눈이 많아 사백(四白)의 고장이라 이르는 영광군(靈光郡)은 그 지명처럼 신령스러운 빛의 고장이다. 그래서 영광군은 '천년의 빛 영광Glory Yeonggwang'을 브랜드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영광군은 고려 태조 23년(AD 940) 무령군(武靈郡)을 영광군(靈光郡)으로 개칭한 후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천년'이라는 말은 영광군(靈光郡)의 오랜 역사와 희망찬 미래를 동시에 의미한다고 한다. 영광군의 특산품인 천일염, 태양초, 쌀, 굴비 등을 생산하는 원천은 풍부한 일조량 즉 햇볕이다. 그래서 '빛'은 영광의 지명이 가지는 신령스런 빛과 태양, 빛나고 아름다운 찬란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Glory Yeonggwang'은 영광(靈光) 지명과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인 영광(榮光)을 의미하는 영어 ‘Glory’를 ‘천년의 빛’과 대응시킨 것으로, '글로리(Glory) 영광'은 '영광군이 찬란한 역사를 바탕으로 장래에 새로운 번영을 이룩하고자 설정한 원대한 목표'를 뜻한다고 한다. 영광군의 브랜드슬로건 '천년의 빛 영광Glory Yeonggwang'이 '미래 천년의 빛'으로 영광스럽기를 기원한다.
법성포 영광 굴비거리는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밝아서 환하다. 인공섬 뉴타운과 매립지 굴비거리를 잇는 한두름교에 조성된 굴비 조형물이 여러 색채로 반짝인다. 굴비 조형물은 법성포 굴비거리의 조형물 중 단연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굴비로의 굴비거리 법성2교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연우로로 들어서서 인의산 자락의 동짓재로 올라간다. 동짓재 아래 쉼터정자가 있는 곳에 팽나무 세 그루 자태가 달빛에 그윽하다. 밝은 대낮이라면 이곳에서 전망이 멋질 것이다. 서북쪽의 대통재, 법성진성, 숲쟁이로 이어지는 풍경, 남쪽으로 법성포와 대덕산 풍경이 멋지게 들어올텐데, 어둠 속 가로등 불빛으로는 그 윤곽만이 잡힐 뿐이다. 이곳이 법성포(法聖浦) 십이경(十二景) 中 '동령추월(東嶺秋月)'에 해당되는 곳인 것 같다.
가을밤 동짓재 팽나무 사이로 떠오른 둥근달이 법성포 칠산바다 서호(西湖)에 달빛을 비추는 '동령추월(東嶺秋月)' 풍경을 3월 새벽의 어둠 속에서 상상한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조운(曺雲, 1900~?)은 동령추월(東嶺秋月)을 이렇게 읊었다. "제월정(霽月亭) 맑은 물에 생가(笙歌)를 아뢰올 제/ 동령(東嶺)에 달이 솟아 고기가 뛰노매라/ 沙工도 사양 마러라 밤새도록 마시자."/(조운(曺雲)의 '동령추월(東嶺秋月)' 전문) 가을밤 동짓재에 떠오른 둥근달이 법성포 서호(西湖)에 밝게 빛나 고기가 뛰노는 모습이 보인다. 제월정(霽月亭)에서 이 풍경을 감상하니 술을 밤새도록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길 수밖에. 법성포 앞 칠산바다는 고요하기가 그지없어 소동정호, 서호(西湖)라고 이른다고 한다. 사라진 제월정(霽月亭)이 보고 싶다. 제월정(霽月亭)을 복원할 수 있을까? 제월정에서 법성포 칠산바다 서호(西湖)에 빛나는 동령추월(東嶺秋月)을 감상하는 날이 오리라. 조운 시인은 1948년 가족과 함께 越北하였다고 한다. 그의 시 '석류'는 빛나는 작품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조운의 '석류' 전문) 우툴두툴한 외모지만 잘 익어 스스로 빠개진 석류가, 그 안에 알알이 붉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절창이다. 임이여, 나는 사랑의 마음을 직접 말하지 못하고 빠개 젖힌 붉은 사랑의 마음을 이렇게 보여 드립니다.
동짓재 아래에서 39코스에서 탐방한 숲쟁이공원이 건너편에 보인다. 공원 입구 정자 옆에 오랜 연륜의 팽나무가 가로등 불빛에 그윽하게 빛난다. 연우로를 건너 서호농악회관 옆 골목길을 지나는데 헤드랜턴 불빛에 들어오는 매화꽃,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 보니 백매였다. 올봄의 백매꽃을 영광 법성리 지역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조선의 대문장가 신흠(申欽)은 매화의 삶을 이렇게 읊었다.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선비는 매화의 절개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기쁨을 품고 검산마을과 검산저수지 앞을 거쳐 구암천 연우교 앞으로 왔다.
연우로, 연우교, 연우가 무슨 뜻일까? 연꽃 연(蓮), 소 우(牛), 연우(蓮牛)였다. 그런데 연우(蓮牛)는, 제3공화국 시절에 내무부장관을 3번 지내고, 체신, 교통부장관 등과 국회의원을 두 차례 역임한 고(故) 박경원(朴璟遠, 1923~2008) 장군의 아호라고 한다. 법성고을은 물 가운데 소가 누워있는 모양의 '수중와우(水中臥牛)' 형국이라고 한다. 이 고장 출신의 박경원 장군은 고향과 연관하여 아호를 연우(蓮牛)라고 하였는데, 그는 고향의 여러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는데 앞장섰으며, 특히 1971년에 구암천을 건너는 줄나룻배의 불편함을 해결하는 다리를 건설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다리 이름을 박경원 장군의 호를 따서 연우교(蓮牛橋), 또 도로명을 연우로(蓮牛路)라고 하였다고 한다. 1981년에 영광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연우교' 옆에 ‘홍농교’를 놓았고, ‘연우교’는 상판에 흙을 쌓아 도로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옛 연우교 다리를 건너 법성면 법성리에서 홍농읍 상하리로 넘어갔다.
가까운 듯 먼 듯 칠산바다를 가로막은 전남방조제의 긴 가로등불이 빛난다. 구암천은 전남방조제에 막혀서 유수지에 드넓은 갈대습지가 형성되었고, 상하리에 간척농지가 드넓게 조성되었다. 어둠 속에서 상하리 간척농지를 통과하며 영광대교, 목맥마을을 가늠하면서, 문산마을과 신흥마을 입구를 거쳐, 월봉마을로 들어갔다. 월봉마을을 돌아가는데 버란계 버스정류소가 나온다. 버란계? 무슨 뜻일까? 집에 돌아와서 영광문화원에 문의하니 '벌안개'라고 한다. 그렇다면 버스정류소 이름을 바꿔 적어야 되지 않을까? 이 지역은 예전에 바닷물이 들어왔던 포구였고, 이후 간척에 의해 들판으로 바뀌었음을 '벌안개' 지명이 증거한다. 그렇다면 상하리 들판을 걸어올 때 신흥마을 입구를 거쳐왔는데, 그 지역도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으로 예전의 지명이 밧싹게와 안싹게였다고 한다. 즉 들판 안쪽과 바깥쪽의 포구인 안쪽개와 바깥개 포구였음을 '밧싹게'와 '안싹게' 지명이 분명히 증명해 준다.
상하리 월봉마을을 거쳐 하봉마을로 들어와 홍농읍 시가지로 나왔다. 홍농읍 시가지가 봉대산 자락에 위치한 이유는 이 아래 상하리 월봉 지역은 예전에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서해랑길은 홍농로를 따라가지 않고 봉대산 자락의 상하길을 따라 홍농읍 중심지 상봉마을을 통과한다. 홍농파출소, 홍농읍사무소, 굴비골농협, 홍농초등학교, 홍농유치원, 홍농중학교를 거쳐 홍농119안전센터로 나와 홍농로와 재회하였다. 뒤돌아보니 안전센터 뒤 봉대산 위에 음력 2월 열이렛날 새벽달이 걸려 있다. 현재의 위치도, 마을 풍경도 분명히 확인하지도, 제대로 살피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걸어왔다. 이제 가로등 불빛 빛나는 상하길과 헤어져 봉대산 동쪽 망덕산 자락의 홍농로를 따라 현대오일뱅크주유소를 지나 홍농읍 진덕리로 넘어간다. 홍농로에서 영광테마식물원&영광승마장 입구를 지나니 동이 튼다. 희끄무레한 것들이 형체를 갖추고 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홍농읍 진덕리 일대는 동아방조제에 의하여 드넓은 간척농지가 조성되었다. 자룡천은 영광군 홍농읍 진덕리와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를 가로지르며 동아방조제에 갇혀 유수지에 넓은 갈대습지가 형성되었다. 진덕리 서당마을, 상삼마을, 하삼마을을 거쳐 진덕리 들판을 가로질러 자룡천 둑방으로 나왔다. 둑방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고창 선운산 산줄기가 붉게 물들며 해가 솟아오르고 있다. 영광과 고창의 경계 지역에서 찬란히 솟아오르는 일출 광경에 도취한다. 서해랑길을 새벽의 어둠 속에 탐방하면서 만나는 일출 광경은 처음에 무한한 감동이었다. 지금은 그 일출 감상이 거듭되면서 처음보다는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감동은 여전히 폭발적이다. 아름답다. 희망, 삶의 의지가 샘솟는다. 평화의 염원이 날갯짓한다. 선운산 아래 심원면 면사무소가 있는 곳이 41코스 종점으로 오늘 최종 목적지가 된다. 선운산이 옛 추억을 불러일으켜, 미당 서정주 시인, 그의 시 '선운사 동구', 송창식의 대중가요 '선운사', 최명미의 시 '선운사에서' 등을 상기시킨다.
영광과 작별하는 순간이 일출 광경과 맞물려 새 출발의 의지를 샘솟게 한다. "천년의빛 영광이여, 안녕! 선운사 동백꽃의 고창이여, 안녕!" 똑같은 인사말 '안녕'으로 영광과 헤어지고 고창을 맞이한다. 헤어짐의 아쉬움과 맞이함의 반가움이 선운산 아침노을 속에서 붉게 탄다. 아침의 기분으로 동아제방길을 걸어나가니, 연꽃가시길. 서쪽으로 고리포 방향, 동쪽으로 용대가시연꽃군락지와 동학농민혁명기포지 방향이다. 동쪽 자룡천 위쪽에 용대연못이 있는데 이곳이 가시연꽃군락지라고 한다. 고창에 들어와 가시연꽃길, 가시연꽃군락지 지명을 대하니, 이 고장 출신의 시인 미당 서정주의 명품 시가 생각난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서정주(1915~2000)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 고창 지역에 들어오니 만남과 이별, 삶의 운명을 노래한 미당의 시 작품이 가슴을 물들인다. 우리의 삶은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거자필반(去者必返)의 순환처럼 느껴진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러나 영원한 이별, 죽음 앞에서 우리는 슬픔을 달랠 길이 없다. 그 슬픔을 담담히 노래한 시 작품에 가슴이 물결친다. 그렇게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떠나는 것, 내세는 믿지 않으련다. 다만 즐거운 상상으로 죽음 이후의 만남을 떠올릴 뿐이다.
서해랑길은 서쪽 칠산바다 고리포 해안으로 이어진다. 고리포 해안 북쪽 자룡리 토안마을 서쪽에 나즈막한 안산 아래를 거쳐간다. 안산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고리포 봉수는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산(弘農山), 즉 봉대산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소응포 봉수로 전달해 주었다고 한다. 고리포 바다는 칠산바다에서 좁은 해협을 거쳐 내륙으로 깊숙하게 들어오는데 동아방조제에 의하여 막혀 있다. 물이 빠진 고리포 모랫벌에 배 한 척이 누워 있다. 찬란한 아침빛에 몸을 떨며 움직여야 하는데 밀물 때는 아직 멀었다.
고리포재 언덕을 향하여 고리포마을을 지나가는데, 팽나무인 듯 세 그루가 늠름하게 솟아서 마을의 수호신처럼 자리하고 있다. 겨울을 견뎌낸 팽나무가 봄을 맞아 나뭇가지 끝까지 물길을 끌어올리느라 분주해 보인다. "새싹을 틔우고/ 잎을 펼치고/ 열매를 맺고/ 그러다가 때가 오면 훨훨 벗어버리고/ 빈 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 새들이 날아와 팔이나 품에 안겨도/ 그저 무심할 수 있고,/ 폭풍우가 휘몰아쳐 가지 하나쯤 꺾여도/ 끄떡없는 요지부동./ 곁에서 꽃을 피우는 꽃나무가 있어/ 나비와 벌들이 찾아가는 것을 볼지라도/ 시샘할 줄 모르는 의연하고 담담한 나무.// 한여름이면 발치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워/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쉬어 가게 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덕을 지닌 나무...// 나무처럼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저것 복잡한 분별없이/ 단순하고 담백하고 무심히/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법정(1932~2010)의 '나무처럼' 전문) 나무는 단순, 담백, 무심의 삶을 산다. 그런데 탐방객은 복잡, 다채, 탐욕의 삶을 추구하는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나무처럼 살 수 있을까? 서해랑길 탐방에서도 끝없이 탐욕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 길이 탐방객의 목적처럼 보인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리포재를 넘으니 구시포 파란 바다가 펼쳐진다. 아름다운 풍경에 가슴이 벅차다. 그 파란 바다가 욕망을 뒤흔들어 놓는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4.23km
전체 소요 시간 : 3시간 15분
왼쪽에 서해랑길 39·40코스 안내도와 그 오른쪽 가로등 기둥에 서해랑길 40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13.9km, 4시간 30분 소요라고 적혀 있다. 실제 탐방하니 14.23km, 3시간 15분이 걸렸다. 어둠 속에서 무작정 바삐 걸은 탓이다.
법성3교 다리 건너 마을이 독바우마을일 것이라 추정한다. 서해랑길은 다리를 건너 왼쪽 영광 굴비거리로 이어간다.
"법성6리 독바우마을은 1910년에 이곳 앞을 지나 법성포-영광 사이에 차도가 개통되고, 1934년에 망재 일원에서 금을 채굴하면서 한 집 두 집 터를 잡으며 마을이 생긴 곳이다. 지금 법성주유소 뒤에 있는 굴이 당시에 금을 채굴했던 현장이다. 마을지명은 돌(독)과 바위(바우)를 조합한 것으로 뜻이 중복되어 있다. 한때는 한시랑을 오가는 독암진(獨岩津)나루터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독바우를 한문 표기로 독암(獨岩) 또는 석암(石岩)으로 쓰기도 했지만 사실과 달라 지금은 이 지명을 쓰지 않는다. 참고로 [조선지지자료, 1911년]에는 독암진이 '백수 한시랑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66년에 법성포우체국과 영광군 통신설비기계실이 이 일대에 신축되어 자리하고, 1970년대에 이르러 이 일대를 매립하여 버스터미널이 들어서 마을세가 크게 커졌다. 1994년에 법성5리 일부와 1970년대 매립지 약 5만평을 합하여 법성6리로 신설하였다." - 영광군청
이 일대는 법성리에 속하는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때 매립에 의하여 신시가지로 형성된 곳이다.
"법성리(法聖里)는 조선시대에 진량면 외리(外里)에 속한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과 1915년에 택지를 조성하기 위해 마을 앞 갯가를 매립하여, 법성면사무소와 주요 관공서 그리고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인 농장과 상가 등이 들어서서 마을세가 크게 확장하였다. 1916년에 이르러 외리, 검산(檢山), 호장동(虎壯洞)과 내리(內里)와 화천동(化泉洞) 일부를 합쳐 그 지명을 법성리라 하였다, 1934년에는 면 청사 뒤에 있는 홍삭거리와 밤모실을 이어주는 마을길을 경계로 하여 북쪽지역을 외법성리(外法聖里)로, 남쪽지역을 내법성리(內法聖里)로 나눴다. 그 뒤 1964년에 운영리제로 재편되어 현재는 7개리로 구획되어 있다. 법성면 전체 인구 대비 45%가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으로, 2009년에는 포구 앞, 속칭 '걸레바탕'을 매립한 뒤 지역이름을 공모하여 뉴타운이라 하였다." - 영광군청
영광 굴비거리 법성5리 농장마을 앞을 통과한다. 다른 지역에 비하여 가로등이 유난히 밝게 빛난다.
"농장마을은 원래 밀물 때는 바다였고, 썰물 때는 갯벌 천지였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전남농장에서 소위 해안통(海岸通)이라 불렀던 옛 법성중, 고등학교 운동장 앞 해안에 매립공사를 하여 조성한 약 6천 평의 택지에 사무실, 창고, 직원사택, 야적장, 경작지를 조성해 일본인들이 특권을 누리고 살던 지역이다. 광복 후에 법성실업중학교 학교재단인 양영회(養英會)에서 사택을 제외한 나머지를 불하받아 창고는 교실과 강당으로, 야적장은 운동장으로, 경작지는 실습장으로 바꾸어 학교를 만들고 5년제로는 영광군에서 최초인 법성수산중학교를 개교하여 운영했다. 이후 법성 중,고등학교가 대덕리 교정으로 이전하여 민간인들이 이곳에 있는 학교재산을 모두 불하받아 아파트와 상가 등을 건설했고, 이에 따라 마을이 탈바꿈했다. 1916년에 법성리에 속한 이 지역은 1964년에 법성1리에 속했다가 1985년에 법성5리가 신설되어 이곳으로 편입되었고, 예전부터 농장이라 불렀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그대로 농장이라 하였다. 2019년 현재 법성상수도 정수장과 법성포우체국, 굴비골신협이 이 마을에 있다." - 영광군청
영광 굴비거리와 뉴타운이 한두름교에 의해 이어지고 한두름교에 굴비 조형물이 조성되어 밤에도 빛난다.
법성리 법성면사무소가 있는 지역을 밤모실마을이라 이른다. 밤모실마을 앞 영광 굴비거리를 통과한다.
"법성1리 밤모실마을은 조선시대에 외리에 속했고, 법성진성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밤모실(성 밖 마을)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연동거리, 하촌거리, 옥터거리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1911년에 갯가였던 지금의 면 청사 터 일대가 매축되어 1915년에 일본인 소학교(법성포공립심상소학교)가 진내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자리하고, 이 학교 왼쪽 지역(지금의 법성2리 지역)에 우리 고을의 주요 관공서가 들어서 마을세가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이후, 1916년에 법정리인 법성리에 속했고, 1964년에 운영리인 법성1리로 편제되었다." - 영광군청
서해랑길 39코스에서 앞에 보이는 법성면 진내리 법성1교를 건너 뉴타운으로 들어갔었다.
서해랑길은 법성2교 북쪽 연우로를 따라 인의당약국 방향으로 이어간다.
연우로에서 오른쪽 수산물가공업체인 해미락굴비수산 골목으로 진입한다.
동지재(동짓재) 아래 쉼터정자 옆에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아 아랫마을이 호장동마을인가 보다. 건너편 언덕에 법성진성이 있다. 동짓재에 뜨는 가을달은 '동령추월(東嶺秋月)'이라 하여 법성포 12경 중의 한 풍경이다.
"법성4리 호장동은 일본에서 이주한 시라이(白井一佐)라는 사람이 우리 고을에 사는 일본인들에게 채소 등 농산물을 공급하기 위해 밭작물을 재배했던 곳이다.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전남농장 뒤 동짓재 너머의 지역이기 때문에 뒤를 뜻하는 후(後)에 농막을 뜻하는 장(庄)을 조합하여 후장동이라 부르다가, 1990년대에 '마을 뒷산인 인의산 호랑이 바위'에서 유래된 전설에 따라 마을이름을 호장동(虎庄洞)으로 바꿨다. 1964년에 법성3리에서 분리하여 법성4리가 되었다." - 영광군청
쉼터정자 위에서 법성포를 내려보지만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팽나무 3그루가 그윽하다.
인의산 동지재 아래이다. 연우로 위의 육교는 법성진숯쟁이로 이어지는 다리이고 서해랑길은 연우로 간선 윗길을 따라간다.
6.25 전쟁 중 1950년 11월 영광군 법성면 등각면 수복 전투 중 전사한 방위군 소위 백인기 지사의 충용을 기리는 비
연우로 건너편에 서해랑길 39코스에서 통과했던 법성진 숲쟁이공원과 팽나무, 쉼터정자가 보인다.
"법성3리 숲쟁이, 홍삭거리는 조선시대에 법성진 초입으로 홍살문이 있던 곳이라서 홍삭거리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내법성리와 외법성리를 가르는 경계길이었다. 이곳에는 1912년에 우리 고을 처음으로 양의원이 자리했고, 1925년에 양의학을 이수하고 우리 고을 최초로 한의사 면허를 받아 개원한 한의원이 자리했던 곳이다. 1934년에 이 길을 경계로 남쪽은 법성2리로, 북쪽은 법성3리로 나누었다. 법성3리에는 홍삭거리외, 조선시대부터 전해오는 시거리와 솟대거리가 있는데, 시거리에는 대장장이, 목공 등 장인들이 주로 살았고, 솟대거리에는 무속인들이 많이 살았다." - 영광군청
연우로를 건너 영광굴비전시판매장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에 영광굴비전시판매장이 있다. 서해랑길은 표석 뒤 서호농악회관 옆 골목으로 이어간다. 법성포 앞 바다는 마치 호수와 같다고 하여 대서호(大西湖)라고 이른다. 그래서 법성포 농악회를 서호농악회라 이르는 것 같다. 서호농악회관은, 영광군에서 6천만원의 보조금과 2,500만원의 자부담으로 영광굴비전시판매장 옆에 2005년 2월 신축되었다고 한다.
중앙에 영광대교 주탑이 불빛을 반짝이고 그 앞쪽으로 전남방조제와 방조제 유수지가 가늠된다.
검산저수지를 지나 법성7리 검산마을로 들어간다.
"검산마을은 지금부터 230년 이전에 생긴 마을이다. 조선 정조 때 발간된 [호구총수, 1789년]에 단속할 검(撿) 字와 메 산(山) 字를 조합한 검산(撿山)으로 수록되어 있다. 우리말 금메와 같은 뜻이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법성리로 통합하였고, 1964년에 법성3리가 신설되어 안앙금메와 함께 법성3리가 되었다가, 1994년에 법성7리로 바뀌었다. 2009년에 준공한 법성, 홍농하수종말처리장이 이곳 안앙금메에 있다." - 영광군청
서해랑길은 검산양수장을 거쳐 검산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마을 표석 앞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연우교 줄나룻배 나루터와 연우교를 건너 영광군 홍농읍 상하리로 이어간다.
연우교가 생겨나기 이전 1910년대~1971년 운행되었던 줄나룻배 나루터에 줄나룻배를 복원했다고 하는데 살피지 못했다.
공사 기간 1970년 9월 26일~1971년 5월 21일, 총연장 100m 다리가 구암천에 건설되었다. 지금은 도로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연우교는 1971년에 법성면 금메와 홍농읍 우봉을 이어 주던 나룻길에 가설된 다리다. 1981년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이 다리 옆에 ‘홍농교’를 놓고, ‘연우교’는 상판에 흙을 쌓아 도로공원을 조성하였다. 교명인 연우(蓮牛)는 고(故) 박경원(朴璟遠) 장군의 아호다. 법성출신인 박우수 홍농읍장 재임 때 도로공원으로 조성하였다." - 영광군민신문(2022.3.24)
연우교를 통하여 구암천을 건너 홍농읍 상하리 들길을 걸어간다.
"九岩川은 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를 관류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구암리는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龜岩]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구암천은 고창군 무장면 신촌리 유역에서 발원하여 두암저수지를 지나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에서 남서쪽으로 유로를 바꿔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과 법성면의 경계를 지나 서해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구암천의 지류는 신흥천(新興川)·두암천(斗岩川)·내동천(內洞川)·장동천(壯洞川)·석교천(石橋川)·칠암천(七岩川)·장곡천(壯谷川) 등이다. 구암천이 발원하는 무장면 신촌리는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지방도 796호선을 따라 가면 3.5㎞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하천의 주변에는 동학 농민 혁명의 발상지가 있고, 이를 지나 남서류하여 영광군 홍농읍과 법성면 주변의 들을 지나 서해로 흘러들고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바로 옆에 구암천, 맨 왼쪽은 전남방조제, 그 오른쪽은 홍농읍 칠곡리 목맥마을, 중앙 왼쪽 움푹 파인 곳이 칠곡삼거리일 것이다.
구암천변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상하리 문산마을 방향으로 향한다.
문산마을 방향으로 이어오다가 오른쪽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이 지점으로 왔다. 왼쪽 뒤에 불빛 반짝이는 곳은 전남방조제, 중앙 뒤에 솟은 산봉은 금정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왔다. 앞쪽은 상하리 문산마을, 그 뒤쪽으로 신흥마을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앞쪽 연우로를 건너 월봉마을을 거쳐 상하리 하봉마을로 이어간다.
상하리 신흥마을과 문산마을은 월봉마을 서쪽에 위치한다. 밧싹게와 안싹게는 바깥개와 안쪽개로 이곳이 포구였음을 알려준다.
"상하(上下)4里 문산(文山)마을은 김해 김씨(金海金氏) 김일혁(金一爀)이 법성면에서 임진왜란 당시 이거하여 이곳 지명이 원래 광산(光山)이었으나 1910년 농산(農山)이라 고쳐 부르다가 1914년에 문산(文山)이라 칭하였다. 상하(上下)4里 신흥(新興)마을은 밀양 박씨(密陽朴氏) 朴文一이 1869년 함평에서 이거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혼인 입주(入住)하였고, 밧싹게라 불러오다 다시 안싹게로 불렀으며 1914년 김종국(金鍾國)이 신흥(新興)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 영광군청
건너편에 보이는 마을이 월봉마을이다.
연우로를 건너 상하(上下)4里 월봉(月峰)마을을 돌아간다. 이곳은 예전에 섬이었던 것 같다.
"월봉(月峰)마을은 장수 황씨(長水黃氏) 황재일(黃在日)이 1860년경 고창군 무장면에서 입향하여 입주하였으며 미역섬이라 불러오다 박도섬 등으로 칭하였다. 1940년 마을 형태가 반달 같다 하여 월봉(月峰)이라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영광군청
버란계는 '벌안개'로 이곳이 들판 안쪽의 포구였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홍농읍 상하리 해주아파트를 보면서 하봉마을로 향한다.
시멘트농로를 따라 하봉마을을 돌아간다. 중앙 뒤에 봉대산이 솟아 있다.
하봉마을 앞에 농기계보관창고가 있다. 상단3길을 따라 하봉마을을 거쳐 홍농로로 나간다.
상하(上下)2리 하봉(下峯)마을 하늘에 음력 2월 열이렛날 새벽달이 떠있다.
홍농읍 상하리 548 지역으로, 상단3길에서 홍농로로 나간다.
홍농로를 따라가다가 늘봄회관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하봉마을로 진입한다. 이곳이 상하리 하봉마을 중심지인 것 같다.
"시랑공(侍郎公) 하진(河振)의 14대손 하자아(河自阿)가 무오사화(1498) 때 전북 고창군 상하면 정동마을에 유배되어 그 후손들이 이주해와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봉대산(峯大山) 아래에 위치하면서 망덕산(望德山) 줄기를 따라 위에 위치한 마을을 상봉(上峯), 아래에 위치한 마을을 하봉(下峯)이라 하였다. 유물로 지석묘 1기가 있다." - 영광군청
이곳은 하봉마을에 속하는 것 같은데 상하8리라고 적혀 있다.
서해랑길은 홍농로에서 아래 보이는 횡단보도를 건너 홍농로 위쪽 이면도로인 상하길을 따라간다.
상하길을 따라가며 여러 관공서를 지난다. 홍농파출소 오른쪽에 홍농읍사무소가 있다.
홍농읍사무소 뒤 봉대산 위에 음력 열이렛날 새벽달이 밝게 빛난다. 홍농읍 상하리 해발 286m 봉대산에는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는 수단인 봉수(봉대)가 있다. 홍농읍 봉대산은 순천 돌산도를 기점으로 경상우도와 전라우도의 연안대를 경계감시하는 임무를 띤 봉수로이며, 특히 고려 성종 이래 줄곧 조세창을 두고 있는 법성포가 조선 중종 때는 국중 최대의 조창이었기 때문에 홍농산 봉화대(현 봉대산)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봉화대였다고 한다.
홍농읍사무소 옆에 설치되어 있으며, 봉대산 뒤 해안에 영광원자력발전소가 위치해 있다. 불안함이 깃들었다.
홍농초등학교 입구 지역 일대를 상하1里 상봉(上奉)마을이라 이르는 것 같다.
"상봉마을은 은진 송씨(恩津宋氏) 송극기(宋克己)가 1757년 전북 고창에서 이거한 뒤 봉대산(峯大山)(224m) 능선에 자리를 잡고 상봉(上峯)이라 칭하고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혼인 후 성촌하였다." - 영광군청
봉대산 오른쪽 뒤에 새벽달이 환하게 빛난다. 119센터 앞에서 홍농로와 재회하여 홍농로를 따라간다.;
현대오일뱅크주유소 방향으로 홍농로를 따라 상하리에서 진덕리로 넘어가 영광테마식물원&영광승마장 입구를 지난다.
진덕삼거리 서당마을 버스정류소를 조금 지나 오른쪽 방향의 농로로 진입하여 상삼마을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농로를 따라 돌아서 앞에 보이는 진덕리 상삼마을을 오른쪽으로 돌아나간다.
진덕리 서당마을 뒷산에 새벽달이 아직 떠있다.
서당마을은 1870년경 밀양 박씨(密陽朴氏) 박창일(朴昌一)이 산세(山勢)가 좋고 수려한 곳을 찾아다니던 중 이곳에 정착 문맹인을 가르쳐 왔는데 교육하는 곳이라 하여 서당(書堂)이라 칭하였으며 옛 서당은 현재 박씨(朴氏)의 재실로 변하였다." - 영광군청
왼쪽 뒤 도로표지판이 있는 진덕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걸어오다 농로로 들어와 이곳으로 왔다.
홍농읍 진덕리 301-2 지역으로 오른쪽 농로를 따라 상삼마을을 거쳐 하삼마을로 이어간다.
상삼마을을 오른쪽으로 돌아 하삼마을 앞 들녘으로 이어간다.
"상삼(上三)마을은 1880년 전북 남원에서 남양 방씨(南陽房氏) 27대손 방극원(房極原)이란 사람이 삼(蔘)밭을 웃삼밭이라 부르다가 1914년 삼(蔘)밭 위에 위치한다고 하여 상삼(上三)이라 칭하고 아랫마을을 하삼(下三)이라 하였다." - 영광군청
홍농읍 진덕리 1132-8 지역 하삼마을 입구에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40코스 종점 4.6km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앞쪽 하삼마을 앞 들판의 농로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왼쪽 뒤에 보이는 동아배수장 건물 앞 방조제로 이어진다.
"진덕(眞德)2里 하삼(下三)마을은 1800년경 김해 김씨 김인주(金仁株)가 어업을 하기 위해 입향, 그후 전주 이씨, 수성 최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빈촌마을로서 옥녀가 머리를 산발하고 있다 하여 옥녀 산발마을이라 칭해오다 1910년 삼(蔘)을 무성히 조성하는 마을이라 아래 삼밭 또는 갯삼밭이라 부르다 1914년 삼밭 밑에 있다하여 하삼(下三)이라 한다." - 영광군청
서해랑길은 자룡천 둑방을 따라 동아방조제로 이어진다.
왼쪽 뒤에 망덕산, 그 자락에 영광승마장이 있다. 중앙 뒤 상삼마을을 거쳐 농로를 따라왔다. 오른쪽 마을은 하삼마을이다.
영광군 홍농읍 진덕리 자룡천 둑방에서 고창 선운산 산줄기 뒤쪽으로 솟아오르는 태양을 조망한다.
동아방조제 제방에서 뒤돌아보았다. 오른쪽 뒤 하삼마을 앞 농로를 걸어 자룡천 둑방으로 나와 둑방길을 걸어 방조제로 나왔다.
왼쪽은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오른쪽은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도리포이다. 칠산바다가 그 사이로 깊숙하게 들어온다.
왼쪽에 도리포 봉수터가 있는 안산, 방조제 뒤는 자룡리 일대이다.
영광군 홍농읍 진덕리 1132-1 지역으로, 자룡천이 영광군과 고창군의 경계가 된다. 왼쪽에 고창의 선운산이 솟아 있고 태양이 완전히 솟아올랐다. 40코스 종점 3.7km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동아방조제 제방을 왼쪽으로 돌아가며, 방조제 왼쪽은 자룡리 토안마을, 오른쪽은 신자룡리라 이르는 것 같다.
자룡천이 방조제에 갇혀 유수지와 습지를 형성하였다. 이 위쪽에 용대저수지가 있는 듯. 태양은 완전히 솟아서 이글거린다.
서해랑길은 왼쪽 방조제 제방을 따라 고리포로 이어진다. 오른쪽은 신자룡리 지역으로 이어진다.
고창 지역에 가시연꽃길 탐방로가 있는 듯. 용대저수지는 가시연꽃 군락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학농민혁명기포지는 오른쪽으로 6.7km 지점에 있는데,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高敞 茂長 東學農民革命 起包地)를 이르며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에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2014년 10월 31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무장기포(茂長起包) 또는 무장봉기(茂長蜂起)라고 이른다.
"무장봉기(茂長蜂起)는 1894년 3월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공음리 당산마을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 1894년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을 축출하고 백산 등지에서 머물렀으나 후임 군수 박원명의 설득으로 3월 초에 해산하였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가 도착하여 고부봉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에 대한 횡포가 극심해지자, 무장으로 피신하였던 전봉준 등의 농민군 지도부는 3월 16일경부터 무기를 제작하고 군사 훈련을 시키는 등 재봉기를 준비하여 3월 20일경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하였다. 전봉준은 손화중·김개남과 연합하여 고부뿐만 아니라 호남 일대의 각 군현에 통문을 보내 농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따라서 무장봉기는 고부 지역에 한정되었던 농민 봉기가 전국적인 농민 봉기로 나아가는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의하면 무장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백산에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하는 군사 대오를 갖추고 중앙정부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전국적인 농민 전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무장에서 봉기한 농민군들은 고부·태인·부안을 차례로 점령하고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대파하였다. 사기가 충천한 농민군 진영은 남진하여 흥덕·고창·무장·영광·나주까지 진출하여 장성에서 중앙군을 대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일반적으로 동학 농민 혁명은 1894년 1월 고부봉기를 1차 봉기로, 9월 삼례봉기를 2차 봉기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동학 농민 혁명은 고부봉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동학 농민 혁명에 대한 연구 성과는 고부봉기와는 별개로 무장에서 농민 봉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곧 고부봉기가 해산된 이후 다시 무장에서 재봉기한 사실과 무장봉기는 고부봉기와 달리 1개 고을에 한정된 농민 봉기가 아니라 호남 전역에 걸친 농민 봉기로서 전국적인 농민 봉기 단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무장봉기(茂長蜂起)는 19세기 후반의 ‘민란’이라고 불리던 고을 단위의 농민 봉기가 민란의 국지성을 극복하고 전국적인 농민 봉기로 발전해 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일 뿐만 아니라 동학 농민 혁명 과정에서 고부봉기가 전국적인 무장봉기(武裝蜂起)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중앙 뒤에 고리포항이 보인다. 맨 오른쪽 산봉은 고리포봉수(古里浦烽燧)가 있었던 안산이다.
"고리포봉수는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산 69-1에 있었던 조선 시대 통신 시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경우, 봉수대는 고창현[현 고창읍]과 흥덕현[현 흥덕면]에는 없었고, 무장현[현 무장면]에만 두 곳이 설치되었다. 그 이유는 무장현이 바닷가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무장현 봉수조를 보면 “고리포봉수재현서이십리남응영광군홍농산북응소응포(古里浦烽燧在縣西二十里南應靈光郡弘農山北應所應浦)”라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고리포 봉수는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산(弘農山)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소응포 봉수로 전달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고리포 봉수는 고리포 북동쪽에 있는 안산의 정상부에 있다. 신자룡리 버스정류소에서 내리면 바라다보이는 야트막한 앞산에 있는데, 뒤편에는 구시포해수욕장이 있다. 조선 후기에 고리포 봉수는 없어졌다. 지금은 고리포 봉수 자리에 정자가 건립되어 있다. 고리포 봉수를 통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국가 방어 태세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으므로, 사적지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방조제 제방 북쪽에는 상하면 자룡리 토안마을이 자리한다. 양식장이 해안 옆에 언덕에 한우농장이 있다.
"자룡리(紫龍里)는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에 속하는 법정리. 뚜렷한 명칭유래는 확인되지 않는다. ‘자여포(自予浦)’라 부르다가 1592년 이후에 자룡으로 불렸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자룡리’라 바꿔 불렀다고 한다. 한편, 산에 나무가 없고 헐벗은 붉은 산이라 ‘자룡(紫龍)’이라는 의견도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남양 방씨(南陽房氏)가 터를 잡아 살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나, 1500년경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가 마을을 형성했다는 견해도 있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상리면(上里面)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구시포(九市浦)와 하리면(下里面) 고니포(古尼浦)·석남리(石南里)의 일부가 병합되어 자룡리가 되었고, 상하면에 편입되었다. 지형은 중앙과 서남쪽, 서북쪽은 얕은 산지이며, 동남쪽은 대체적으로 평지를 이루고 있다. 구시포 앞에는 가막도라는 섬이 있다. 고리포(古里浦) 백사장의 남단에는 천연동굴인 비둘기굴이 있다.
자룡리는 상하면 남서부에 있다. 자룡리·신자룡리(新紫龍里)·구시포리 3개의 행정리와 자룡·토안·신자룡·고니포·구시포 5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구시포는 1998년 2종 항구에서 1종 항구로 승격되었으며, 2013년 완료를 목표로 어항개발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주요 시설로 구시포해수욕장과 구시포해수찜월드 등이 있다. 문화 유적으로는 자룡마을에 남양 방씨의 효열비(孝烈碑)가 있고 그 위에는 고인돌 1기가 있다. 또 고창군과 전라남도 영광군 경계인 서쪽 바다 돌출부 약 80m 산봉우리에는 조선시대에 설치된 고리포 봉수가 있다. 자룡리의 중앙에 지방도 733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구시포해수욕장과 상하면 소재지로 나 있고, 지방도 5호선의 일부가 북쪽에서 지방도 733호선에 합류하고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서해랑길은 고리포(古里浦) 또는 고니포(古尼浦)라고도 이르는 고리포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구시포해수욕장 방향으로 이어진다. 왼쪽에 거북선숯불풍천장어 음식점이 거북선 모양으로 지어져 있다.
"고리포는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에 있는 조선 시대 봉수대 관련 포구. 조선 시대 고리포는 봉화를 올렸던 고리포 봉수대가 있었던 포구로 유명하며 봉군들이 머물렀던 마을로 추정된다. 봉수대는 포구 북동쪽 600여m 지점의 안산[120m]의 정상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리포의 봉수가 무장현의 서쪽 20리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구시포의 남서쪽 약 1.8㎞ 지점으로 고창군의 남서단 해변에 해당한다. 고리포 남쪽은 바다를 경계로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와 마주하고 있다. 현 고창 지역의 포구 중 유일하게 그 위치가 이동되지 않고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포구이다. 2010년 현재 고리포 마을에는 약 20여 호 정도의 가구가 거주하며, 모래사장에 있는 고리포 포구는 10척의 소형 선박들이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안쪽의 해변에는 1.3㎞정도에 걸쳐 양어장이 건설되어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건너편은 전남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지역이다. 왼쪽은 국사봉, 오른쪽은 계양산, 오른쪽 맨 뒤는 금정산이다.
거북선숯불풍천장어음식점이 고리포해안에 자리하고 있다. 건너편은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지역으로 계양산 아래에 영광원자력홍보관이 있는 한마음공원과 청경아파트가 보인다. 맨 뒤에 금정산이 손짓한다. 오른쪽으로 꺾어 언덕으로 올라간다.
팽나무 세 그루가 꼭 한 그루처럼 붙어서서 고리포마을을 보호하고 있다. 고리포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간다.
고리포마을과 거북선숯불풍천장어음식점이 고리포 해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을 수호하는 팽나무가 가운데에 서 있다. 건너편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지역에는 왼쪽에 국사봉, 중앙에 계양산, 오른쪽 뒤에 금정산. 중앙 맨 뒤는 봉대산일 것이다.
고리포길을 따라 고리포재를 넘어 구시포해수욕장으로 향한다.
고리포재를 넘어 구시포안길을 따라 내려가며 구시포를 조망하였다. 구시포와 바다의 가막섬이 제방으로 이어져 있다.
고리포길을 따라 고리포재를 넘어 구시포안길을 따라 이곳으로 내려왔다.
구시포 경찰충혼비가 세워져 있고, 오른쪽에는 구시포 하수처리장이 있다.
"이곳은 경찰 대간첩작전사에 길이 남을 전적지이다. 북한 공작원 이응선은 1975.9.11. 00:25 고창군 상하면 구시포 소재 가막도 섬에서 북한 공작선과 접선 복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해안내륙으로 회귀하던 중, 순찰중인 경찰전경요원들에게 발각되자 AK소총 4발을 발사하고 도주, 인근 폐 초소에 은신하다가 수색중인 전경 3명을 총격 사망케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충원된 전북도 경찰특공대와 교전끝에 사살되었다. 따라서 대간첩작전중 산화하신 님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주민들의 뜻을 모아 이곳에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2009년 6월" - 층혼비 건립비문
구시포안길에서 구시포노을오토캠핑장을 지나 왼쪽으로 꺾어 흰구름펜션 앞을 거쳐 구시포해안으로 나간다.
구시포 해안으로 나와 구시포 해안 남쪽을 바라보았다. 구시포 남방파제와 등대, 끝에 고리포 구릉이 있다.
오른쪽에 가막도 외항이 있고, 중앙 뒤에 서남해해상풍력단지 풍력발전기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구시포 포구 끝단에서 가막섬까지 약 1㎞의 제방이 연결되었으며, 가막섬에 외항이 건설되어 있다.
중앙 끝에 구시포 포구가 있다. 구시포 포구 끝단에서 가막도로 이어지는 제방이 끝에 보인다.
구시포 해안 구시포글램핑을 지나 진암구시포로를 따라 구시포해수욕장으로 향한다.
"글램핑(Glamping)은 다양한 편의시설과 서비스를 갖춘 고급스러운 캠핑을 뜻하는 말. 영단어 'glamorous'와 'camping'의 합성어이며, 야외에서 즐기는 작은 호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텐트 안에는 TV를 포함해 소파나 침대 등이 기본적인 시설로 갖추어져 있으며, 나아가 고가의 가구나 무선 인터넷, 자동 온도 장치 등이 설치된 텐트도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은 1900년대 초 아프리카 사파리에서 생활했던 유럽인과 미국인의 생활양식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실내에만 있을 경우 호텔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캠핑 입문자에게 좋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글램핑이 시도되고 있다." - 다음백과
진암구시포로를 따라 이마트편의점 앞을 지나 구시포해수욕장 앞으로 이어간다.
구시포(九市浦)해수욕장 해안에 구시포해수욕장 표석과 조형물 그리고 서해랑길 41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구시포(九市浦)는 조선 전기부터 확인되는 옛 포구이며 한자로 구시포(仇時浦)로도 표기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의하면 구시포의 위치는 “무장현의 북쪽 30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구시포마을 앞 동쪽에 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3월에 법성포를 출발한 세곡 선단이 첫 번째 정박하는 곳이었으나 조운 제도가 폐지된 1895년 이후에는 마을 어항으로서의 기능만 유지해오고 있다.
조선 시대 구시포는 두 번의 위치 변동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구시포 마을의 앞이 포구였다. 당시에는 구시포 마을 안쪽에 있는 섬포(蟾浦)마을까지 바다였고 조수가 구시포 마을 앞 좁은 물목을 통하여 섬포까지 왕래하였다. 그러나 구시포 마을 앞을 막는 간척으로 인하여 섬포는 바닷물이 차단되어 1955년 구시포 염전으로 변화되었다. 따라서 구시포의 포구도 제방의 북쪽으로 이동되었으며 현재 30여 척의 마을 소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 이후에 다시 구시포 포구 끝단에서 가막섬까지 약 1㎞의 제방이 연결되면서 가막섬에 신 외항이 건설되었다. 한편 현 구시포는 1914년 자룡리의 일부였던 원래의 구시포의 마을에 고리포와 석남리 일부가 합쳐진 것이다. 1989년에는 지방 어항으로 개발해왔다. 1999년에는 국가 어항으로 지정되어 어항 기본 설계와 환경 영향 평가 실시 등 적극적인 개발을 수립하고 있다. 개발 이후 북방파제 605m, 남방파제 330m, 물양장 300m, 선양장 50m를 완공하였고 연륙도로 200m를 개축하였다.
현재 구시포마을 앞에는 구시포 염전이 운영되고 있으며 인근 서쪽 해변에는 명사십리 해수욕장과 해수월드찜질방이 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로 와인 글라스(win-glass) 형상의 구시포 국가어항 개발이 시작되었다. 2002년부터 2015년까지 14개년 사업으로 추진되는 이 사업은 1단계 사업으로 연육도로, 물량장, 호안 설치를 마쳤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가막도에 외항 시설, 백등대와 홍등대 한 쌍이 있다. 가막도 왼쪽 뒤에 서남해해상풍력단지 풍력발전기들이 보인다.
서해랑길 40코스를 마치며 서해랑길 고창 41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