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설교(55)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11:28-30
<인류가 메어야 할 멍에>
멍에란 무엇입니까?
가축의 등에 씌우는 나무로 만든 기구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를 때 멍에가 없으면,
맨 가죽이 눌려서 고통스러우니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등에
덮어씌우는 기구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멍에를 메는 순간 꼼짝없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종종 인간의 억압된 삶을
‘멍에를 맨 짐승’에 비유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인류는 몇 가지 무거운 멍에를 메고 살아왔습니다.
첫째는 죄의 멍에입니다.
모든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죄라고 하는
어쩔 수 없는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 같은
인간의 실상을 분명한 어조로 고발하였습니다.
롬3:9-12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죄가 우리들이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이 죄의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멍에가 심히 무겁다는 것은
그 죄 값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율법의 멍에입니다.
율법을 받은 백성은 이스라엘이지만
이방인들은 양심이라고 하는
마음의 율법을 멍에로 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을 지키면 생명을 얻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신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이처럼 율법은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
저주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이 율법을 지키는 일로
하나님의 의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했습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원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를 얻거나
생명을 얻으려는 노력은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육신적으로 저야 할 멍에가 있습니다.
이 짐은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의 저주로
내려졌기 때문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소위 먹고 살기가 힘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1:12-14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들은 위와 같은
멍에를 메고(마치 소처럼) 삶의 피곤에
지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청>
이처럼 삶의 무게에 지쳐있는
우리를 예수님은 초청하십니다.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구절은 교회를 조금만 다녀 본 사람이라도
다 알 정도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시기를 원하십니다.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예수님의 초청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자격 조건이 제시된 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얼마나 자격조건을 따집니까?
회사에 취직을 하려도, 결혼을 하려도..
심지어는 디스코텍에 가려도...
언젠가 물 흐린다고 출입을 제지당한
농촌총각이 휘발유를 입구에 뿌리고
불을 붙여 많은 사람들이 죽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든지 다 초청되었습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과거도 묻지 않으십니다.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조건 없이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만 안하셨어도
우리교회를 명확한 자격조건을 붙여 회원제로^^
교회는 예수님의 초청을 대행하는 기관입니다.
철저히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사도교회를
철저히 열린 공동체로
만들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초청의 두 가지 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에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한 면은 인간의 측면이요
다른 면은 하나님의 측면입니다.
먼저 “다 내게로 오라”는 말은
나 자신이 해야 할 부분을 말해 줍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믿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예수님 앞에 나올 때 시작됩니다.
아무리 은혜의 복음이 전파된다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 나오지 아니하면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는 것은 사람의 책임입니다.
이것을 선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주려고 해도 받지 않으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비가 아무리 와도 그릇을 엎어 놓으면
물이 고이지 않는 것처럼…….
다음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는 말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영역을 나타내 줍니다.
‘쉰다’는 말은 ‘새롭게 한다’,
‘다시 살려준다’, ‘해방시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선포입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에
진정한 구원의 기쁨,
곧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안식을 얻는 비결>
그런데 예수님은 참된 쉼을 말씀하시면서
아주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29-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더니
이 무슨 말씀입니까?
“나의 멍에를 메라니```”
주님께서는 멍에를 풀어준다고 하시지 않고,
당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환경 자체를 바꾸어
주시지는 않습니다.
주의 환경, 나의 현실이 바뀌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바뀐다”는 뜻입니다.
전에 내가 지던 짐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해 지던
짐이었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지던 짐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 할
‘주님의 멍에’는 자발적인 멍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해방시켜주셨기 때문에
기꺼이 메는 멍에입니다.
종의 멍에가 아니라 아들의 멍에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의 멍에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멍에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당당히 지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이루는 길이요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무슨 일이든 기쁨으로 하면,
자발적으로 하면 쉽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멍에를
지기 위한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멍에를
가볍게 멜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29) 때문입니다.
즉 순종적인 마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이란
철저한 자기 부정과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마음입니다.
곧 십자가를 지는 마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마음을 배울 때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 지신 멍에를 함께 지고 갈 수 있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져야 할 멍에를
대신 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자유를 얻었습니다.
쉼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주님을 우리에게 주님의 멍에를
메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멍에는 가볍습니다.
왜냐하면 온유와 겸손의 멍에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우는 생활로 우리의 마음에
참된 안식과 쉼을 얻고 소망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