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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태인동 출신 가수 김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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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으로 못 박힌 나이 60. 여기저기 치이고 떠밀려 설 곳을 잃을 나이 60에 뒤늦게 가수의 꿈을 실현한 트로트가수가 있어 화제다. 1집 앨범 취입 후 펴보지도 못한 채 져버렸다가 37년 만에 2집 앨범을 발매한 가수 김재실 씨가 그 주인공이다. 고향 광양에 대한 그리움을 듬뿍 담아 만든 ‘광양으로’라는 곡을 선보여 광양의 인기 스타로 자리매김한 김재실 씨를 만나봤다.
7080 가요계의 산증인, 김재실
알고 보니 그의 과거는 화려했다. 묻혀있던 37년의 세월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인맥이 감춰져 있었다. 지금의 ‘가수’ 김재실이 될 수 있도록 토대를 닦아준 이들과의 인연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재실은 “고등학교를 서울로 오게 되면서 태진아 선배님의 사모곡을 작곡한 작곡가 서승일 선생님을 만났어요. 태진아 선배도 그땐 서승일 선생님께 노래 레슨을 받고 있는 연습생이었죠.”라고 처음 가수의 꿈을 품었던 때의 기억을 털어놨다.
김재실이 모교 선배이자 사촌 지간이었던 서승일 작곡가 밑에서 심부름을 해주며 노래를 배우던 당시, 가수 태진아는 이미 서승일 선생에게 노래 레슨을 받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연습생 동기인 셈이다.
여기에 당시 유일했던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최고의 작곡가였던 황문평 선생이 힘을 보탠다. 서승일 작곡가에게서 노래만 배우고 있던 그에게 작곡과 작사의 기초를 가르쳤다. 6개월간 황문평 선생에게 작곡이론과 가사쓰는 법, 드럼 등을 사사받았다.
김 씨는 “황문평 선생님께 배우고 있을 때 여자분 한 분이 왔는데, 그 분이 장미화 누나였어요. 황문평 선생님이 콩쿨에서 1등한 장미화 씨를 캐스팅해서 가수로 만든 거죠. ‘장미화’라는 예명도 황문평 선생님이 지어주신 거에요. 장미처럼 예쁘니까 장미화로 하라고.”하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가수 장미화 씨와의 인연도 소개했다.
당대 최고였던 작곡가들에게 배운 덕에 최고의 가수로 성장한 스타들과 함께 연습생시기를 거친 김 씨는 영화배우 박노식과 최무룡의 중간에서 편지를 전달한 일이며, 아직 어린 아이였던 가수 이미자 씨의 딸 정재은, 영화배우 박준규와 함께 보냈던 당시의 추억, 이들의 인연 바탕으로 가수 김국환과 인연을 맺게 된 사연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김재실의 노래, 세상에 나오다.
서승일 작곡가 밑에서 1년간 함께 노래 레슨을 받던 태진아는 먼저 영화배우 박노식을 따라 극장무대를 돌기 시작했고, 얼마 후 김재실도 드디어 음반에 곡을 취입하게 됐다. ‘원두막’이란 타이틀로 앨범을 낸 박노식 앨범의 마지막에 서승일 작곡가의 ‘보내는 마음’이 담겼다. “그때가 1974년이었어요. 당시에는 레코드판으로 제작이 됐고, 사이드1, 사이드2에 각각 6곡씩 담았는데, 마지막에 제 노래가 들어갔죠.”라며 자신의 첫 노래가 세상에 나오던 순간을 전하는 김 씨다. 태진아, 장미화와 비슷한 시기에 앨범을 냈으니 따지고 보면 원로가수라고 부르기에도 손색없다.
그런데 당시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던 김 씨는 앨범을 내자마자 군대에 가게 됐다. 아파서 학교를 늦게 들어갔던 터라 앨범만 내놓고, 제대로 활동한번 해보지 못 한 채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했던 것이다. 김 씨가 군대에 간 사이 ‘보내는 마음’을 작곡했던 서승일 선생은 그 곡을 태진아에게 부르게 했다. 그렇게 ‘보내는 마음’은 세상에 드러났다.
위기, 노래로 바꾸다.
‘보내는 마음’은 세상에 나왔지만 김 씨의 사정은 달랐다. 군 제대 후, ‘생활’이라는 현실에 내몰린 그는 벽지 회사에 취직했다. 생활에 떠밀려 가수의 삶을 꿈꿀 겨를이 없었다. 1978년부터 벽지업에 종사했던 그는 89년, 특수벽지 사업을 시작했고, IMF가 터지자 시련이 닥쳤다. “IMF가 터지고 6개월이 지나니까 어음이 터지기 시작해서 4억 8천 만 원을 부도맞았어요.
당시에 6명의 직원이 전부 뿔뿔이 흩어지고 저 혼자 사무실만 지키고 있는데, 땅바닥이 아니라 완전 지하까지 파고들어가는 과정이었죠.”라고 당시의 참담함을 표현했다. 자포자기한 심정을 술로 달래다보니 3개월간 마신 소주병을 치우니 214병이나 됐었다는 고백도 더했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김 씨의 사촌동생은 당시 12대뿐인 귀한 차였던 체어맨을 팔아 김 씨를 도왔다. 자신을 돕겠다고 나선 동생에 대한 고마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포자기한 인생을 살던 김 씨에게 잘 될거라는 위로의 말은 큰 힘이 됐다.
“잘 될겁니다”하는 동생의 말에 “그래, 그래 잘될거야”하고 답하던 김 씨의 머릿속에는 그 순간 ‘앗! 이 말을 가사로 써보자’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작가이던 동생이 토대를 만들어주고 김 씨가 살을 붙여 가사를 완성했다. 황문평 선생에게 공부할 때 다른 사람의 곡을 보고 기타를 만지며 닦아온 작곡실력도 더해졌다. 2집 앨범의 ‘잘 될거야’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노래로 고향을 말하다.
사촌동생과의 환상의 호흡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고향으로 내려간 사촌동생은 김 씨를 지원해주며 성공해서 광양으로 오라고 부추겼다. “동생이 옛날식으로 섬진강에서 배 타고 내려오라고 하는데, 그걸 듣고 또 가사가 떠올랐어요. 그렇게 동생이 아이디어를 주고 뼈를 만들어주면 제가 살을 붙여 가사를 만들었죠.” 그리고 그 가사는 고향을 노래하는 곡, ‘광양으로’로 탄생했다.
이어 “광양의 백운산을 두고 서울대와 대립하면서 시위를 한 적이 있거든요. 시위대가 노래를 하는데 기존 노랫말에 ‘강릉, 울릉도’하는 식의 지명에 가사만 광양의 지명으로 바꿔서 가사를 만들었더라고요. 그때 백운산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라며 ‘백운산’이 노래로 만들어지기까지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백운산 노래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그는 사촌동생을 데리고 백운산에 올랐다. 두 번을 올라갔지만 한번은 완전히, 한번은 일부가 구름에 덮인 봉우리만 보였다. 결국 본 모습 그대로, 구름에 잠긴 백운산의 모습을 그대로 악상과 가사로 옮겼다.
‘잘될거야’와 ‘광양으로’, ‘백운산’의 세 곡을 만들었지만 음악을 다시 할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쓰러져가는 사업에만 전념해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야 했다. 그렇게 열심히 사업에 매진한 김 씨는 결국 '그린벽지 김재실‘하면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단순히 생업을 위함이 아니라 벽지업계에서는 내로라는 전문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경제적 안정과 성장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잃어버린 듯 허전함이 남았다. 그 허전함의 정체를 눈치 챈 그는 더 늦기 전에 앨범을 내자는 생각에 2집 앨범을 세상에 내놨다. 김재실이라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자랑스러운 이름 그대로. “요즘은 예명도 많이 쓰는데, 재실이라는 이름은 남자이름도 되고, 여자이름도 되고 부드럽기도 하고 좋아요.”라는 이유를 대며 김재실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길 원하는 그다.
고향을 노래하는 가수가 되다.
결국 그는 꿈을 이뤘다. 고향의 무대에서 고향을 노래했다. 김 씨는 “첫 무대가 광양숯불갈비축제였는데 살면서 그렇게 창피를 당해본 게 처음이에요.”라며 웃었다. 앨범만 냈지, 무대경험이 없었던 김 씨는 흘러나오는 MR를 따라가지 못하고 가사를 잊어버리고, 없는 가사를 붙이고, 가사를 틀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광양 사람들의 기억에는 아직도 ‘노래 못하는 가수’로 남아있다고 한다.
첫무대의 알싸한 경험은 그를 성숙하게 만들었다. 노래는 본인이 만들었지만 마음만 앞서 노래는 노래대로, 몸은 몸대로 따로 놀고, 사람들은 웃었다.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계를 위해 사업에 전념해야 하니 연습할 시간이 따로 없다는 그는 차만 타면 연습을 해댔고, 지금은 무대 위에서 장난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는 김재실 씨다.
그가 유난히 ‘고향’에 관한 노랫말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그에게서는 “저는 항상 어딜 가도 내 고향이 최고라는 걸 아니까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직도 고향노래를 더 만들고 싶다는 소망도 내비쳤다. 고향에 대한 애정이 무한히 넘치는 그는 고향에서 불러만 준다면 언제든지 가서 노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향후 계획을 묻자, 역시 고향 얘기만 나오는 김재실 씨. 노래가 히트를 치든 안치든 고향에서의 봉사는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본업이 있으니 해외에 머물러있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달려가겠다고 했다. 사례금의 문제를 떠나 광양을 알리고, 광양을 위해 봉사하는 가수가 되겠다는 포부다.
“남들은 이 나이에 골프치고 놀러도 다니고 하는데 저는 가수에 대한 미련이 항상 남아있어서 내가 이대로 주저앉아야 되나, 하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한동안은 먹고 사느라 바빴고 이제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추고 나니까 잠재적으로 묻어있던 가수에 대한 열정이 드러난 거죠.”라고 말하는 그는 매체를 통해 유명해져도 고향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덧붙였다.
김재실, 희망을 쓰다.
사실 김 씨가 행사의 사례금에 구애받지 않고, 헌신적으로 고향에 봉사할 수 있는 이유는 가수가 본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재실 씨의 노래는 소리바다와 벅스에 등록되어 있고, 컬러링도 다운받을 수 있다. 이 곡들은 모두 저작권협회에 등록되어있고, 가수협회에도 등록됐다. 한 마디로 김 씨가 정식 가수라는 말이다.
하지만 정식으로 가수협회에 등록돼 있어도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이 많다. 출중한 실력을 갖췄음에도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요즘은 야간업소 같은 곳에 들어가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란다. 매스컴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진 사람들만이 밥 먹는데 지장이 없다. 그 밖의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서 다른 일을 겸하며 노래하거나 생계 때문에 재능을 접어야만 한다.
참 아쉽다. 김재실의 ‘잘 될거야’는 각 방송사의 심의위원회를 거치며 “요즘 시대에 딱 맞는 곡”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광양으로’는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광양에서만큼은 사랑해줘야 하는 곡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스컴에서 흘러나오는 곡만 ‘인증된 곡’이라 생각하고, 좋은 곡이라 느낀다. 매스컴의 힘을 빌리지 못하는 이들은 좌절을 맛보게 된다. 이런 현실의 벽에 주눅 들지 않고 맞설 수 있는 용기 있는 자가 이 시대엔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김재실의 등장이 반갑다. 왠지 곧, 묻혀있던 제2, 제3의 김재실이 나타날 것만 같다. 단순히 매스컴을 통해 얼굴을 알리는 ‘스타’가 되기보다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으로 진정한 ‘가수’가 되기를 꿈꾸는 이들에게 용기와 꿈을 심어준다. 열정만 있다면, 가슴 한켠에 꿈을 지니고 산다면 나이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보였다. 60의 나이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신인가수’라 소개하는 아이돌 못지않은 패기와 열정은 심지어 부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의 순수한 열정과 빛나는 패기에 더 큰 응원과 박수를 보내고 싶다. 머지않아 그의 이름 세 글자가 광양을 넘어 전국 방방곡곡 퍼져나가길 바라본다.
시사한국 이호근 기자 / 사진 박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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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광양으로' 노래 박자도 신나고 흥겹습니다. 그래그래 잘될꺼야 가사도 긍정적이고 신나고
김재실 선배님 대박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광양노래가 많이 많이 소개되었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