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살리(vesali)는 교통의 중심지이고 넓은 평야지역이다. ‘넓은 지역’이라는 뜻의 웨살리는 7개의 연맹체가 운영하는 공화국이었다. 웨살리에서는 《보배경》이 설해졌고, 비구니승단이 생겨났다. 유명한 암바팔리기녀가 살았고 원숭이의 공양을 받으셨고 제2차결집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자이나 교주인 니건타나타뿟다가 태어난 곳이고 마하비라는 이곳에서만 12안거를 지냇듯 자이나교도들이 많았던 곳이다.
부처님은 이곳에서 2안거를 나셨고 《작은 삿짯까경》(M35), 《큰 삿짯가경》(M36), 《수나캇따경》(M105)등 을 설하셨다. 나는 이전에 웨살리를 여러 번 찾았지만 이번 순례에서 처음으로 제2차결집이 거행 된 곳을 순례할 수 있었다.
제2차 결집으로 승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뉘게 된다. 아난다의 제자였던 야사존자가 웨살리로 유행을 하다가 마하와나의 중각강당(kūṭāgārasālā)에 머물게 되었는데 웨살리 비구들이 신도들에게 금전 은전을 요구하는 등 10가지 계율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10가지 계율이란 뿔에 소금을 저장하는 것, 3가지 경우에 오후불식(午後不食)을 완화하는 것, 동일결계안에서 별도의 포살을 하는 것, 불완전한 대중이 갈마를 하고 사후 승인을 구하는 것, 은사와 계사에 관련된 것을 관례에 따라 처리 하는 것, 완전하게 숙성되지 않은 술을 먹는 것(치료를 위해 사용할 때), 테두리없는 좌구의 사용 그리고 금ㆍ은을 소유하는 것 등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금은을 소유하는 것인데 금화은화를 가지게 되면 다른 모든 것들을 허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웨살리 비구들이 객스님인 야사비구에게도 자신들이 탁발한 금은을 나누어 주려고 하자 야사비구는 계율이 아니라고 설득하면서 받지 않았다. 웨살리 비구들은 야사의 행위가 보시를 한 재가자들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재가자에게 사죄해야 하는 사죄(謝罪)결정을 내렸다. 야사비구는 이번에는 재가자들을 설득하다가 웨살리 승가로부터 구족계를 줄 수 없고 사미를 둘 수 없는 권리정지(權利停止)를 당하였다.
야사비구는 혼자서는 웨살리 비구들을 설득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자신에게 동조하는 비구들을 모으기 위하여 다른 지역으로 사람을 보내고 자신이 직접 선배들을 찾아 나섰다. 그는 빠와지역에서 60명과 아완띠지역에서 80명의 스님들을 모으고 아라한 레와따존자를 찾아가서 협조를 구했다. 레와따존자는 웨살리에 사는 아난다존자의 제자 삽바까민존자에게 미리 동의를 구하고 금화를 받는 등의 10가지 문제에 대해 대중공사를 진행하였다. 비구들간의 논쟁이 끝나지 않자 웨살리승가를 대표하는 4인과 빠와승가를 대표하는 4인을 선출하여 승가의 동의하에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들은 웨살리 남쪽에 있는 ‘왈리까아라마’로 가서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10가지 계율들은 모두 비법(非法)이라고 결정하였다. 이것은 제2차결집 혹은 칠백명이 참석하였다고 하여 칠백결집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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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각강당(kūṭāgārasālā)에서 바라보는 아난다탑 |
현장스님은 ‘웨살리성의 동남쪽으로 14∼15리를 가다 보면 커다란 솔도파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7백 명의 현성(賢聖)들이 다시 한 번 모여서 결집한 곳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지금은 야자수와 연못만이 남아있다. 이곳은 그동안 정글로 남아 있어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기에 현지인들에게는 ‘정글리마트’라고 불리어 왔다. ‘왈리까아라마’는 자취도 없고 다만 힌두교사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데 다행히 그곳 건물 벽에 왈루까아라마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지 가이드에 의하면 이곳에 안치된 불상이 있었는데 힌두교인들에 의해서 다른 힌두사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나는 그 안내원의 도움으로 옮겨진 불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2차 결집지를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순례자는 깊은 허망함을 느낀다. 하나는 왈루까사원이 흔적도 없이사라져 작은 힌두교사찰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야사비구의 숨 가쁜 노력으로 제2결집에서 모두 비법(非法)으로 결정되었던 10가지 문제들이 현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실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야사비구가 이 사실을 안다면 “내가 이러려고 제2차 결집을 주도했나...”라는 탄식을 할 것이다.
대승불교권은 물론이고 남방불교권에서도 승려들이 돈을 소유하고 보시 받는 것이 일반화되었고 그 소유가 이제는 부익부빈익빈의 빈부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 빈부차이가 승려 간에 고용주와 노동자의 갑을관계를 만들고 있다. 승단은 가난해지는데 승려 개개인은 부자가 되는 기이한 현상, 승려들이 부동산 임대료, 관람료수입, 상품 판매등으로 재가자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그 재산을 다시 토지, 주식 투자등으로 자본을 관리하는 자본가가 되었다. 재가자들보다 더 호화로운 귀족이 되었고 이제는 거꾸로 출가자의 가난함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면에서 보면 현재의 승가는 10가지가 아무런 문제없다고 판단한 웨살리 비구들의 후예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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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결집이 이루어졌던 왈루까아라마 |
제2차 결집 후 2500년이 지났다. 스님들이 통장을 가지고 있고 토굴을 소유하고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는 현실에서 다시 야사비구처럼 스님들은 금ㆍ은을 받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타당할까? 이미 하나씩 다 가지고 있는 통장을 어떤 식으로 빼앗을 수 있는가? 금ㆍ은의 논쟁이, 당시 가장 무역이 활발했던 웨살리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금은 모든 곳에서 화폐와 카드가 빈번하게 사용되고 신도들의 보시, 스님들의 월보시, 객스님 차비, 병원비, 사찰운영의 예산과 결산도 모두 돈으로 운영된다. 이제는 금ㆍ은을 갖지 말아야한다는 주장을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승가 안에서 부익부빈익빈의 문제를 해결하고 각자도생의 문화를 척결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금ㆍ은을 갖는 것이 율장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면 이미 우리가 종헌종법과 총무원장제도, 중앙종회제도, 총무원장간선제, 가사승복의 착용, 천도재, 각종기도, 소의 경전 등 모든 것들이 율장에 어긋나는 것이다. 승려의 출가나이 및 학력제한, 교육체계, 법계품수, 승가고시, 탁발금지, 창건주 및 중창주 권한 등 모든 것이 율장에 어긋나고 있다.
만장일치도 그렇다. 웨살리 비구들은 동의하지 않았는데 웨살리에 살지도 않는 비구들이 모여서 비법으로 결정한 제2차 결집은 만장일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야사비구의 의견에 동의하는 700명의 입장에서는 만장일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웨살리 비구를 포함한 전체승가의 입장에서는 제2차 결집은 다수결의 원칙을 따른 것이다. 그러한 전통이 지금의 승려대회이고 그것이 다수결에 의한 승단의 운영이다. 그동안 조계종에 있어 왔던 모든 승려대회가 승려전체가 참여한 만장일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장일치가 얼마나 어려우면 부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덮어두어 문제를 문제삼지 않는 해결방법까지 제시하고 있을까?
지금의 종단은 부동산과 문화재와 임대료와 관람료 등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정기적인 수입이 있다. 부처님시대와는 다른 승단이다. 이러한 물질적 유산을 제대로 공정하고 공평하게 관리하지 못해서 승단이 타락하고 화합이 깨지고 있다. 지금은 이미 불멸후 100년이 지나면서 깨졌던 금ㆍ은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승단은 부유해도 수행자는 가난하게 살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각자도생하느라 뿔뿔이 흩어져 살고 객스님을 반기지도 않고 대화와 토론도 없고 돈이 최고가 된 승가를 자주 모여 토론하고 공정하게 분배하는 화합승가로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첫댓글 지당하신 사고에 동의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객승은 찬밥이 되어 버리고 각자 도생을 위해
신도들에게 온갖기도를 강요하여 재물을 탐하니 진정 수도
자가 되기 어렵고 기업가가 되어야하니 시주들에게 비위 맞
추기 위해 온갖 아양을 하니 여기에 보살들은 혹하여 불법은
사라지고 사심에 젖어 사찰을 다니니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빨리 정화하여 정심으로 거듭 났으면 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