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범윤(李範允)
[생년] 1856년 12월 29일(경기 고양군 숭인면/ 現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
[졸년] 1940년 10월 20일(경기도 경성부 공덕정/ 現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 수(壽) 84歲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경하(景夏)이고, 범진(範晉)의 동생으로 헤이그 특사 이위종의 숙부이다.
1881년 청나라가 간도 지방을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조선 농민을 추방하려 하자 간도의 조선인 보호를 위해 1902년 6월 간도시찰원으로 파견되었으며, 1903년 10월에는 간도관리사가 되었다.
토문강(土門江)과 두만강 사이에 거주하는 조선 농민들을 순찰·위로하고 호구를 조사하여 1만 3,000여 명을 편적(編籍)시켰다.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에 병력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정부가 허락하지 않자 장정을 모집하여 사포대(私砲隊:일명 管理兵)를 조직해 군사훈련을 시키고 모아산(帽兒山)·마안산(馬鞍山)과 두도구(頭道溝) 등에 병영을 설치했다.
10호를 1통(統), 10통을 1촌(村)으로 하는 행정체계를 수립하고 도민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군대유지비를 충당했으며 청나라에 납세할 의무가 없음을 선언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 군대에 가담하여 사포대를 비롯한 군대를 이끌고 나가 일본군에게 타격을 줌으로써 러시아 황제에게 훈장을 받았다. 간도에 대한 청의 간섭을 배제함으로써 청과 충돌이 잦아지자 청에서는 우리 정부에 그를 소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1905년 5월 정부가 소환명령을 내리자 이에 응하지 않고 부하들을 이끌고 러시아령 연해주로 갔다. 이곳에서 의병양성소를 건설하기 위해 러시아측과 교섭했으나 여의치 않자 노키에프스크로 가서 최재형(崔在亨)이 세운 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최재형·이위종(李瑋鍾)·엄인섭(嚴仁燮) 등이 조직한 동의회(同義會)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07년 국내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모금활동을 추진했다. 동의회가 일시 해산되자 이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의병부대를 정비하기 위해 최재형·이위종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아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의회(彰義會)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국내의 의병전쟁이 함경도 일대까지 확대되자 최재형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3,000여 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했다.
러시아의 퇴역장교들로부터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5연발총·14연발총 등으로 무장하고 제복도 러시아식의 군복 차림으로 통일했다. 1908년 7~10월에 걸쳐 러시아와 만주 국경에 위치한 합십마구(哈什馬溝)에 전초기지를 두고 100명 내외의 소부대를 편성하여 동간도, 두만강 하류, 동해안 방면으로 나누어 일본군 수비대의 경비가 약한 곳을 골라 기습적으로 도강(渡江)·진공하여 일본군을 공격했다. 1909년 5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인석(柳麟錫)과 회합하여 항일전쟁에서 서로 협조하기로 했다.
1910년 5월 가쓰라[桂太郞]를 비롯한 요인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그해 6월 러시아령 안의 의병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유인석·이상설(李相卨)·이남기(李南基) 등과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여 유인석을 도총재(都總裁)로 추대하고 창의총재(彰義總裁)가 되었다. 그해 8월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했으며, 8월 23일 합병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인석 명의의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선언서를 각국 정부에 보냈다.
또한 러시아와 만주 동포들에게는 합병반대를 위해 무장투쟁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그해 9월 그와 이상설을 비롯한 성명회와 13도의군의 간부 20여 명을 체포·수감하고 한인들의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이르쿠츠크로 강제 추방되었다가 돌아온 그는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인석·최재형·최봉준(崔鳳俊)·이상설·홍범도 등과 함께 권민회(勸民會)를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되었다.
1912년 6월 이후에도 그의 부대는 국내진공작전을 벌여 회령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후 러시아 정부의 간섭으로 러시아령에서의 항일운동이 힘들어지자 지린[吉林] 방면으로 옮겨갔다. 1918년 신채호(申采浩)·김동삼(金東三)·박용만(朴容萬) 등 38명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일합병의 무효와 무력 대항을 선언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진학신(秦學新)·최우익(崔友翼)·김청봉(金淸鳳) 등과 함께 동북만주 일대의 의병부대를 통합하여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그해 7월 서일(徐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동맹을 체결해 합동무장투쟁을 벌였다.
1920년 김성극(金星極)·홍두식(洪斗植) 등이 조직한 복벽주의 독립군 단체인 대한광복단의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청산리 전투 후 서일·홍범도 등 각 독립군부대의 지도자들이 러시아령 연해주로 건너가 새로운 항일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1920년 12월 밀산(密山)에서 전만군사통일체(全滿軍事統一體)로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자 그가 이끄는 의군부도 가맹했다. 러시아령으로 들어갔던 대한독립군단이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을 당한 뒤 1922년 8월 재조직되자 서일의 뒤를 이어 총재로 추대되었다.
1924년 9월 문창범(文昌範)·지청천(池靑天)·이동휘 등과 함께 군사연합회의준비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가 조직되자 참의원 원장에 추대되었다. 노년에 국내로 비밀리에 입국하여 은거하다가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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