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현재를.
그래요, ‘누구(Who)’는 공간이었고, ‘이다(am)’는 현재입니다. 이제 ‘나(I)’가 남았습니다. ‘나는 무엇 무엇이다’가 아닌 ‘나’를, ‘나’만을 말하십시오. ‘나’라는 단어를 말할 때 무엇이 대상이고 주체입니까? 그대는 무엇을 느낍니까? 그대는 무엇을 접촉합니까? 그대는 무엇을 봅니까?
‘나’를 산스크리트로 번역하면 ‘아함(Aham)’입니다. 그러므로 ‘나’ 가 혼동되면 ‘아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십시오. 산스크리트로 “나는 누구인가?”는 코함(Ko Ham)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아함 브람마스미(Aham Brahmasmi), 즉 “나는 그것이다(I am That)!”입니다. 이 안에 기억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베다바키야(Vedavakya)입니다. 따라서 그대는 그것을 논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25,000년 전 리쉬들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문장으로 결론을 냈습니다. 탐구는 수천 년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먼저 그 의미를 이해하십시오. 의미만을. 수행은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 자신의 나를 탐구하십시오. 그대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나는 계속해서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냥 “나는 누구인가?”를 말하십시오. 그리고는 ‘나’의 근원을 찾으십시오. 이것이 탐구의 의미입니다.
카비르는 말하기를, “상상의 것들에 대한 모든 생각을 그냥 버리십시오. 그대 자신인 그것(That)에 굳게 서십시오. 친구여, 그대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손님에게 희망을 가집시오. 그대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경험 속으로 뛰어 드십시오. 그대가 살아 있는 동안 생각하고 생각하십시오.
그대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죽음 후의 시간 속에 있습니다. 그대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그대의 끈을 끊어 버리지 않는다면, 유령이 나중에 끈을 끊어 주리라 생각합니까?
몸이 썩고 나면 영혼이 무아경과 함께 할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지금 찾고 있는 것을 그때도 찾습니다. 지금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있다면 그대는 죽음의 도시에 있는 아파트에서 그냥 끝날 것입니다. 지금 신성과 사랑을 나눈다면 다음 생에서 그대는 욕망을 만족시킨 얼굴을 지닐 것입니다. 그러니 진리 속으로 뛰어드십시오. 진정한 스승이 누구인지 찾아내십시오. 그것 안에 있는 위대한 소리를 믿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