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8:1~15)
마지막 사도행전 설교. 마지막이 아님. 나의 사도행전은 계속 진행. 하나님과 함께 나의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중요. 헨리 나우엔, '우리의 삶은 영원의 막간.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짧은 막간.' 우리의 삶은 영원의 막간.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이 깨달아지고 배울 수 있는 것. 그 짧은, 유일한 시간. 그것의 증빙은... 이런 것이 찾아오는 것. 무엇이냐면, 지난 수요일 저녁 힘들게 느껴졌음. 여러 생각, 분주함, 불안함... 일들로 인해 힘든 때. 언제 끝이 오려나..그때 들려온 음성. '단지 사랑하기만 하는 되는 일이라고 했잖아' 갑자기 여유, 평안의 틀이 생김. 동시에 여러 책을 읽는데, 그 중 하나 '정원에서 ~' 그 안에 엽서.. 도예가의 글. 뒷장에서 달항아리 사진, 그 위에 '사랑으로' 놀람. 두 달 전에 받았는데 그 글이 그 시간에 처음 들어옴. 음성을 확인하듯이. 갑자기 자유와 평안이 찾아옴. '사랑'만 하면 되지. 사랑하다 죽을거야. "주님, 사랑합니다!" 고백. 현실을 마주할 힘이 생김. 주어진 시간이 사랑하는 시간이라는 각성. 요새 묵상으로 은혜, 황옥경 사모님 잘 인도. 톡방에서 이번 주 말씀 중에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내 마음을 묵상하게 된다.' 말씀으로 이끌리지 않으면 마음에 끌리게 된다. 환경으로부터 환대를 받으면 업, 적대를 당하면 침륜. 그래서 계산하고 예민하게 다룬다. 환대와 적대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나의 사도행전을 적어가는 삶일 수 없다. 바울이 그런 삶이었으면 그의 사역을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 골로새서 3:1.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환대와 적대 사이에서 쉽게 휘둘리지 말라. 말씀 묵상을 통해 '사랑'이 이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임. 말씀 묵상은 그런 것임. 우리 삶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 없이 환대와 적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게 되어 있음.
바울, 광풍을 지나니 '몰타섬'이 기다리고 있음. 광풍은 죽음, 적대... 섬은 생명, 환대. 조난자들을 위해 섬 주민들이 불을 피우고 있음. 환대. 광풍의 적대 한 가운데 있는 성도가 있을 것임. 그 분들에게 섬이 보이길. 주민들이 피워 놓은 불을 보기를.... 그러나 적대와 환대는 또다시 반복될 것임. 그러므로 약속하신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을 견고하게 붙드는 것이 중요. 환대의 불을 더 키우려고 바울이 섬김. 나무를 잡아서 불에 넣음. 넣는 순간 나무단에 숨어 있던 뱀이 바울의 손을 물었음. 치명적 적대. 섬 주민들의 세계관 중에, 독사에게 물려 죽는 것은 숨어 있는 죄에 대한 정의적 현상. 정의의 여신. 독사가 무는 것은 죄에 대한 신적 계시, 심판의 몽둥이. 그런 세계관. 그래서 섬주민들이 바울에 대한 적대감. 바울은 살인자라는 인식. 이때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기준, "기억과 섬김". 섬주민들은 놀라지만 바울은 놀라지 않음. 바울은 악화되지 않음. 섬주민들의 세계관은 '두려움'을 기반으로 함. 바울의 담대함은, 마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을 것으로 예측. 마가복음 16:17~18 '뱀으로부터 해를 받지 않는다'는 내용.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 세계관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지금의 사건이 그런 것임. 몰타 섬주민의 세계관을 깨뜨리는 방식. 바울이 믿는 것은 며칠 전, 로마에 갈 때까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 가볍게 뱀을 불에 떨어뜨려 죽임. 허위의 세계관이 사라지는 현상. 갑자기 적대가 환대로 바뀌어 몰타인이 바울을 '신'으로 여김. 하나님, 말씀이 중심이기에 '균형(발란스)'가 잡히는 것이 은혜. 성숙한 성도. 좌,우로 너무나 크게 흔들리는 것은 말씀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임. 원주민 바바리안(야만인?) 원래 뜻은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자. 헬라어는 지금의 영어같은 것임.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을 것임. 몰타인 중에서 최고 지도자였던 자가 호의적이 되어서 바울을 식사 초대. 그 가정에 문제가 있음. 모든 가정에게는 문제가 있음.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과정. 병에 걸린 사람이 있음. 섬주민들이 그들이 떠날 때 풍성한 선물. 바울 한 사람을 통해서 276명의 승선객들이 한 공동체가 됨. 그리고 몰타섬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전염됨. 환대와 적대 사이에서 휘둘리지 않은 한 사람으로 인해 이러한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남. 그 1인으로 하나님께 사랑으로 접붙이게 되는 역사. 바울이 로마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로마에는 이미 크리스천들이 많았음. 바울은 이미 그들에게 유명했음. 그래서 그 신자들의 환대를 로마 들어가는 걸음에 받음. 트레이스 타베르네에서는 바울이 담대한 마음을 얻음(15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가지만 여전히 힘든 것이 사실. 그런데 믿고 가는 그 길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음. 15절과 같이. 그런 의식이 주는 선물 --- 담대함. 이제 내가 끝까지 이 길을 가도 되겠구나...모쪼록 우리에게 그 마음이 있기를 기원. 우리의 의지가 만들어내는 것은 결연함의 얼굴.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평안함의 얼굴. 결연함의 얼굴보다 평안함의 얼굴이 더욱 강한 것임. 그때 자유와 강렬한 새 힘이 찾아 옴. 로마에 도착했을 때 여전히 구금 상태. 초대는 가능, 외출은 금지. 자유를 받은 것은 천부장의 서류가 호의적, 또는 호송자의 호의적 메시지 때문이었을 것임. 만약 바울이 외출 자유가 있었다면 회당에 갔을 것임. 17~20절, 로마에 있는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대화를 위한 서언.
로마에 온 목적과 소망을 전함. 마음을 연 대화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 로마의 유대인이 바울에 대한 부정적 언사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대화를 시작하기 좋았음.(21~25절). 강론할 때, 하나님 나라/예수 이야기를 하자 믿는 자와 못 믿는 자로 갈라짐. 믿는 자는 맡기면 되니... 믿지 않는 자와 변론을 이어갔을 것임. 끝낸 불신을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인으로 경고'하게 됨. 26~28절, 너희가 안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 들으려 하는 것임.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보다 크다고 생각하거나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 하나님의 것이 더 큰 것이라고 여기면 듣게 되지 않겠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에 불과함. 두려운 마음으로 알기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임. 듣는 듯하나 듣지 않은 것. 불순종의 전통, 듣는 듯하나 듣지 않는 것. 목사인 자신도 그런 경향이 있음. 반대편에 있는 것은 듣지 않음 유투브의 알고리듬 중에서 자신의 성향과 안맞는 것은 전혀 안 들음. 전자기기 일체에서 유튜브를 완전 삭제. 12월 말까지 곰곰히 생각하기 위해. 겸손히 귀를 기울이면 비밀을 깨달을 수 있었을텐데 끝내 거절함으로 이방인에게 진리가 흘러간다. 결국 로마에서의 열매는 신통치 않았음. 그런데 열매가 중요하지 않음.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복음의 열매와는 관련 없음. 중요한 것은 바울의 견고함, 흔들리지 않음에 있다. 바울은 찾아온 모든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섬겼다는 사실이 중요함. 사람은 연륜이 들수록 자신의 드라마틱한 경험을 드러내는 성향.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음. 30~31절.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영접.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 "담대하게, 거침 없이"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는 상황에서, 비주류가 주류 세계에 있는 사람을. 그 이유는 내가 전하는 복음, 그리스도가 나와 당신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임. 죄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신에게 함께 하는 그리스도가 유일한 살 길. 그렇게 사도행전은 끝남.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채 끝냄. 만약 이어졌다면 바울의 죽음을 기록했을텐데... 나의 사도행전은 계속 쓰여질 것임. 박용호 목사님은 사도행전이 애매하게 끝난 것을 멋있게 해석. "우리는 바울과 함께 더블 캐스팅된 자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좀 쉬고 우리고 무대에 올라갈 순서이다. 불안하고 두렵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드라마가 그동안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안다. 그러므로 드라마의 핵심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이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도행전은 새로운 창작물이 아니라 아슬아슬하지만 휘둘리지 않고 '기억'에 근거해서 적어가는 것이다.
광풍의 절대적 절망. 버티게 한 것은 바울의 약속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 기억이 희망의 씨앗. 싹이 틔우고 희망이 확장. 공동체를 만듬. 피난처를 이룸. Therefore 필요한 것 하나, 하나님의 소망을 지금 여기로 생생하게 끌고 올 수 있는 한 사람임. '사랑으로' '사랑만 하는 것으로 충만해'처럼 시작하는 것임. 우리의 사도행전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임.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을 끌어오는) 한 사람의 여정. 뽀송함이 아니라 불안 위에서도 그렇게 가는 것.
괴테의 전문가인 전영혜 교수, 파우스트를 한 문장으로...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방황하는 이유는 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이퀄라이저3에서 주인공이 총에 맞아 죽어가는 것...의사가 고쳐줌. 회복 때 의사가 물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 나중에 왜 그렇게 질문, 또 극진한 이유?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 대답하는 사람 중에~" 우리는 좋은 사람일 수 없지만 방황하는 것. 분명한 것은 어떤 길이 옳은 길인가를 안다. 넘어지고 깨져도 결국 그 길로 가려고 투쟁. "씨앗은 기억하고 있다. 어떤 잎과 꽃을 내는지, 내었는지, 내게 될 지, 어떤 열매를 내고 또 어떤 향기를 내는지... 땅에 심겨진 때가 곧 기억하는 순간이다." (목사님 해석)씨가 묻힐 때는 광풍과 흑암에 묻히는 시간, 죽으러 가는 시간. 복음으로 사는 삶은 그런 것. 그러나 땅 속에 수많은 미생물과 요소들이 나를 썩힐 때 나는 기억한다. 어떻게 될 것인지.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께서 나를 어떤 존재로 만드셨는지 어떻게 인도할 지를 기억하는 존재' 기억할 수 있다면 다음 세대까지 열매를 이어갈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