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차
인유, 다른 예를 끌어다 쓰자
2. 역사적 사건의 인유
인유는 역사적이든 허구적이든 인물과 사건, 그리고 어떤 작품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인유를 너무 자주 채용하면 작품이 관습적 상징이 되어 감동이 반감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인유는 단순한 원천의 차용이 아니라 흥미와 의미를 풍부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역사와 정치적 사건의 인유를 활용하는 방법은 신경림시에서 자주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골목마다 똥오줌이 질퍽이고
헌장판이 너풀거리는 집집에
누더기가 걸려 깃발처럼 퍼덕일 때
조국은 우리를 증오했다 이 산읍에
삼월 초하루가 찾아올 때.
실업한 젊은이들이 골목을 메우고
복덕방에서 이발소에서 소줏집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음모가 펼쳐질 때
조국은 우리를 버렸다 이 산읍에
또다시 삼월 일일이 올 때,
이 흙바람 속에 꽃이 피리라고
우리는 믿지 않는다 이 흙바람을
타고 봄이 오리라고 우리는
믿지 않는다 아아 이 흙바람 속의
조국의 소식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
계집은 모두 갈보가 되어 나가고
사내는 미쳐 대낮에 칼질을 해서
온 고을이 피로 더렵혀질 때
조국은 영원히 떠났다 이 산읍에
삼월 초하루도 가고 없을 때,
- 신경림, 「3월 1일」 전문
시의 제목이 ‘3월 1일’이라는 역사적 인유와 ‘조국’이라는 정치적 인유를 통하여 정치적 상상을 가능케 합니다. 일제하 핍박 상황에서 저항의 기치를 들었던 ‘3월 1일’은 “삼월 초하루가 찾아오고”, “삼월 일일이 올 때”, “삼월 초하루도 가고 없을 때”로 각각 문장 속에서 변주됩니다. 현재 시적 화자인 ‘우리’는 ‘산’이라는 공간에 있으며, 산읍의 민중적 삶이 다양하게 열거되면서 ‘조국’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조국은 민중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민중의 염원을 배반할 뿐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시에서 “조국은 우리를 증오했다”, “조국은 우리를 버렸다”, “조국의 소식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 “조국은 영원히 떠났다”로 변주됩니다. 결국 창작자는 조국이 민중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국가 허무주의적 민중관을 통해 강조합니다.
1
빗발이 치고 바람이 울고 총구가
일제히 불을 토한다. 통곡하라
나무여 풀이여 기억하라 살인자의
얼굴을, 대지여. 1950년 가을
죄 없는 무리 2백이 차례로
쓰러질 때, 분노하라 하늘이여 이
강의 한줄기를 피로 바꾸어라.
그러나 살인자는 끝내 도주했다.
부활하라 죄 없는 무리들아, 그리하여
증언하라 이 더러운 역사를.
어둠이 깔려 시체를 묻고 비가 내려
피를 씻었다. 아무도 없는가
부활하는 자. 모두 흙 속에서
원통한 귀신이 우는가.
2
10년이 훨씬 지난다, 이제 그 자리엔
나라를 다스리는 높은 분네의
별장이 선다. 거실에서 부정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추악한 음모가
꾀해지는 밤. 폐를 앓는 딸은
꿈을 꾼다, 맨발로 강을 건너가는
소년들의 꿈을. 한밤중에 눈을 뜨면
뒷 수풀에서 까마귀가 운다.
소슬한 바람이 와서 애처롭게 창을
넘본다. 아무도 없는가 부활하는 자.
그리하여 증언하는 자 아무도 없는가.
이 더러운 역사를, 모두 흙 속에서
영원히 원통한 귀신이 되어 우는가.
- 신경림, 「1950년의 총살」 전문
신경림은 1950년의 한국전쟁을 인유로 자주 활용합니다. 위 시는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인유로 채용하고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이니, ‘1950년 가을’은 한국전쟁 중일 것입니다. 전쟁 중에 전세가 뒤바뀌면서 숱한 양민들이 북한, 또는 남한 쪽의 군대에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서로 학살을 자행하는데, 이 와중에 죽은 양민들이 “원통한 귀신”이 됩니다. 2백여 명의 양민이 학살되었는데, 살인자는 도주하였기 때문에 누가 살인자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화자는 “통곡하라/ 나무여 풀이여 기억하라 살인자의/ 얼굴을, 대지여”라며 명령적 감탄조로 나무나 풀, 대지에게 통곡하고 동시에 살인자의 얼굴을 기억할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인자는 도주하여 알 수 없으니 학살당한 “죄 없는 무리”인 양민들이 부활하여 살인자와 더러운 역사를 증언하라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부활하는 자는 없고 흙 속에서 원통한 귀신이 되어 울 뿐입니다. 2부에서는 1부의 사건 후 10년이 지난 시간입니다. 양민이 학살되어 매장된 곳에 “나라를 다스리는 높은 분네의/ 별장이 선다. 거실에서 부정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추악한 음모가/ 꾀해”집니다. 그럼에도 학살의 상황을 증언하는 자는 없고, 그래서 학살당한 사람들은 “영원히 원통한 귀신이 되어” 울 뿐입니다.
그날 끌려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리개차가 감석을 날라 붓던 버럭 더미 위에
민들레가 피어도 그냥 춥던 4월
지까다비를 신은 삼촌의 친구들은
우리 집 봉당에 모여 소주를 켰다.
나는 그들이 주먹을 떠는 까닭을 몰랐다.
밤이면 숱한 빈 움막에서 도깨비가 나온대서
칸델라 불이 흐린 뒷방에 박혀
늙은 덕대가 접어준 딱지를 세었다.
바람은 복대기를 몰아다가 문을 때리고
낙반으로 깔려죽은 내 친구들의 아버지
그 목소리를 흉내내며 울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마을 젊은이들은
하나하나 사라져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빈 금구덩이서는 대낮에도 귀신이 울어
부엉이 울음이 삼촌의 술주정보다도 지겨웠다.
- 신경림, 「폐광」 전문
「폐광」에서도 역사적 사건의 인유를 통한 독자의 정치적 상상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나 이미 관습화된 인유를 무심코 사용할 경우 오독으로 인한 혼란을 주기도 합니다. 신경림은 “내가 시를 쓰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광산으로 인해서였던것 같다.”⁸⁴⁾고 할 만큼 그의 초기 시의 소재로 광산이 자주 등장합니다.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관련된 산문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갱구 가까이의 언덕에는 빨간 양철지붕을 한 이 층집 광산 사무실이 있었는데, 사무실 뒤는 일인(日人) 기사들의 관사였고, 그 한 기사의 아내는 우리 학교의 교사였다. 키가 작달막하고 은테 안경을 쓴 그 여교사는 매우 상냥했다. 여선생 앞에서 미리 주눅이 들어 쭈뼛대는 우리들에게 번번이 요깡이니 미루꾸리니 하는 귀한 과자들을 나누어주었다.
나는 여선생에게 과자 얻어먹은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일로 인해 삼촌에게 매를 맞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왜 이 상냥한 여선생과 일인 기사들을 삼촌은 반드시 죽일 놈들이라는 말로 부르는지 어린 내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서 광산이라는 것이 그토록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기실 삼촌으로 인해서였다. 전쟁 말기에 삼촌은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는데, 그 얼마 뒤에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이어 광산은 폐쇄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광산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삼촌은 자본주를 끌어들여 덕대로서 분광(分鑛)의 경영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아버지마저 연상이 되어 광산에 손을 대게 되었다. …6.25는 다시 광산을 폐쇄시키고 말았다. 그 전후해서 삼촌이 젊은 나이로 죽는 비운이 닥쳤지만 또 우리는 우리대로 목숨을 구해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⁸⁵⁾
위 인용한 글을 보면 실제로 존재했던 삼촌은 1950년 6.25를 전후로 죽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에 광부였던 삼촌은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전쟁말기’에는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기도 한 정치적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의 내용으로 볼 때 그 시기가 아마 1950년 전쟁 직후 “그냥 춥던 사월”로 추측됩니다. 삼촌의 친구들은 “우리 집 봉당에 모여 소주”를 마시며 정치상황에 분개하며 “주먹을 떠는”데, ‘전쟁’이 끝나도 전쟁에 희생된 “마을 젊은이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시를 읽는 독자는 3행의 ‘사월’때문에 13행 ‘전쟁’이 나오기 전까지 1960년의 4.19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오독할 우려가 있습니다. ‘사월’은 관습화된 역사적 인유로서 상징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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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신경림,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전예원, 1982, 291쪽.
85) 앞의 책, 291-293쪽.
2024. 3. 14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