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사 주지 성행 스님
어린이·청소년은 포교 대상 아닌 우리의 도반입니다
▲ 성행 스님은 “산사음악회에서 선율 하나 듣는 순간,
청계사 공양간에 들어서서 수저 든 순간 부처님과 인연 맺은 것”이라며
“1만 명 중 100명이 이 생, 아니 다음 생에서라도, 불연이 닿기를 소망하고 있다”고 전했다.
“어린이 포교는 수미산을 올라가는 수행과 같다!”
1985년 종상스님 은사로 출가, 중앙승가대 입학해 복지 전공
어린이·청소년·군·재소·장애, 전 방위 계층별 포교에 진력
파라미타 경주 지회장 맡아, 순식간 700여명 모집 ‘전설’
희망나래장애복지관 수탁 후, 개관 첫 해에 1500명 운집
포교, 열정만으로는 어려워, 원력 놓지않고 기다려야 결실
산사음악회 선율·점심 공양도, 자연스레 불연 맺어주는 것
▲ 성행 스님은 2016년 여름 ‘적당한 생활’을 선보였다.
2016년 가을 펴낸 ‘적당한 생활’(모과나무)에 새겨진 성행 스님의 일언이 오랫동안 귀전에 맴돌았다.
포교 현장의 지도자와 후방에서 정책지원에 힘쓰는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집중적인 장기 투자 없이 어린이 포교는 성공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집중, 투자, 열정이라는 키워드는 낯설지 않지만 ‘수행’,
그것도 ‘수미산을 오르는 수행’에 비유한 메시지는 낯섦을 넘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어린이·청소년 포교에 있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성행 스님은 확실하게 움켜쥐고 있는 듯해 청계사를 찾았다.
청계산 남쪽 태봉 자락의 청계사. 통일신라 때 의상 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때(1284) 평양부원군 조인규(趙仁規)가 사재를 들여 중창해
명실상부 한 사격을 갖추자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즐겨 찾으며 시를 지었다. 성리학자이면서도 불교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색(李穡)도 이 절에 머물며 시 한 수 썼다.
‘청룡산 아래 옛 절. 얼음과 눈이 끊어진 언덕이 들과 계곡에 닿았구나.
남쪽 창가에 단정히 앉아 주역 읽는데 종소리 처음 울리고 닭이 깃들려 하네.’
고즈넉한 산사 정취를 담은 이 시는
청계산(淸溪山)이 한 때는 청룡산(靑龍山)이었음도 전하고 있다.
조선의 연산군이 도성 내 사찰을 없앨 당시
봉은사를 대신해 선종본찰의 역할을 꿋꿋하게 담당한 절이 청계사였고,
숭유억불 시대 선풍을 일으킨 경허 스님이 어머니 손에 이끌려 처음 걸음한 곳도 청계사다.
하여, 청계사는 이 땅에 선을 중흥시킨
경허, 만공, 보월, 금오, 월산 스님의 부도탑을 모시며
‘선 중흥조 5대선사’를 기리고 있다. 선종본찰의 맥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1985년 종상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성행 스님은
강원 교육 과정을 모두 마친 후 중앙승가대에 입학해 복지를 전공했다.
향후 10년 이내 ‘복지’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를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노인복지 관련 졸업 논문을 쓴 성행 스님은 중앙승가대 시회복지학과 1기로 졸업하며
불국사 최초 복지사로 기록됐다. 2002년 청계사 주지를 맡으면서도
지역복지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 부었다.
당시만 해도 의왕시는 복지 분야에 과감한 투자를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한 마디로 의왕 일대는 복지 불모지였다.
1990년 설립된 녹향원만 해도 허름한 2층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시설이었다.
그 녹향원을 청계동의 새 보금자리로 옮겨 의료시설까지 구비한
현대식 복지관으로 거듭나게 한 후
보건복지부 정식인가 시설로 지정받게 한 장본인이 성행 스님이다.
2011년 설립된 희망나래장애인복지관은 의왕시의 첫 장애인종합복지관인데
성행 스님이 수탁했다.
놀라운 건 개관 직후 1500여명의 장애인들이 이용회원으로 등록했다는 사실이다.
성행 스님을 향한 지역주민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서울 구치소 교정협의회장을 비롯해
분당·의왕 경찰서 경승실장, 서울교정청 불교협의회장까지 맡으며
재소자들에게도 법음과 희망을 전하고 있다.
이 많은 일들을 해 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도량 불사는 은사이신 종상 큰스님께서 주지로 계실 때 거의 마쳐놓으셨습니다.
저는 마무리 할 뿐입니다.” 종상 스님 덕에 포교에 진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청계사 봉사단이 원동력입니다. 의왕, 안양, 과천, 판교, 서울 등
각지에서 오신 불자님들 400여명으로 조직돼 있습니다.
사찰고문단, 총신도회장단, 지장회 관음회 등 24개 조직이
상호 협력하는 가운데 복지관, 재소자, 어린이·청소년 등 전 방위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일례로 봉사단은 매년 봄가을에 바자회를 엽니다.
그 때 모인 수익금으로
지역 군부대와 서울 구치소, 의왕, 안양, 성남 지역의 소외계층을 돕고 있습니다.
불자님들의 십시일반 정성으로 설립한 대궁장학회를 통해
공무원 자녀와 어린이·청소년을 돕고 있습니다.”
봉사단의 공으로 돌리지만 성행 스님의 원력이 없었다면
봉사단의 활동 또한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을 터다.
중앙승가대를 졸업한 성행 스님은 1995년 반야사 주지를 맡으며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군, 교사 등 경주지역 계층 포교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특히 어린이·청소년에 방점을 찍었는데 당시 처음 일으킨 불사가
선재어린이집과 룸비니어린이집 개원이었다.
1996년 청소년불자연합 파라미타 창립 당시 경주지부회장을 맡은 성행 스님은
순식간에 720명의 회원을 모집하기도 했다.
▲ 성행 스님의 은사 종상 스님의 원력으로 청계사는 새롭게 변모해가고 있다.
불국사에서 열렸던 ‘어린이 그림 그리기·글짓기 대회’를
‘어린이 짓기· 그리기’ 대회로 명칭을 바꿈과 동시에
상금과 부상, 선물의 격을 높일 것을 종무소에 건의하기도 했다.
불국사가 성행 스님의 요청을 받아들이자 첫 회에 3000 여명의 어린이가 참여했고,
두 번째 대회에는 4000여명의 발길이 이어졌다.
현재 이 대회에는 매년 1만여명의 어린이들이 운집하고 있다.
송광사가 ‘집체교육’ 중심의 수련회를 열 때
‘문화체험’ 중심의 수련회를 불국사에 처음 개최한 한 것도 성행 스님이다.
놀라운 건 어린이·청소년을 향한 열정은 청계사에 와서도 식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청계사 내에 어린이·청소년 정기 법회를 여는 것은 물론
‘청계사 컵스카우트’ 조직을 이끌고 있으며 부도 위기에 처한
파라미타 소속의 하동 청소년 수련원을 3년 만에 다시 일으켜 세웠다.
2013년 어린이·청소년 포교 위기를 극복하고자
포교원이 고심 끝에 설계한 ‘어린이·청소년 전법단’의 단장을 두 말 않고 맡아 새 활로를 모색했다.
지난해 까지만 해도 어린이 포교의 산실로 불리는 ‘동련’의 이사장을 맡았다.
숫자가 현실을 올곧이 대변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짚어봐야 한다.
개별 사찰 경우 어린이 법회에 참여하는 숫자는 평균 20명이다.
“어린이 포교는 1980년대 후반 즈음 궤도에 올랐다고 보면 거의 틀리지 않습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전국 600여개의 사찰에서 6만명 이상의 어린이가 법회에 참석했다는
보고 자료도 나온 바 있습니다. 그러나 2000년 접어들며 급감합니다.
‘동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경우
어린이 법회를 여는 사찰은 329개였고 어린이 수는 1만1927명이었습니다.”
10년도 안 돼 법회를 여는 사찰은 반 토막 났고 5만명이 줄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자녀출생 추이로 볼 때 1985년부터 1995년 10년 사이 평균적으로 격차는 크지 않았다.
따라서 1990년대 중반에 비해 5분의1로 떨어진 현황은 자녀 출생 감소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이 다양하지 않으니 어린이들이 흥미를 잃어갔고,
어린이집 등의 시설 투자 역시 머뭇거리다 보니 부모들의 관심도 낮아졌습니다.
전문 지도자라도 꾸준히 양성했다면
어느 정도 문제를 해소할 수 있었는데 그 마저도 우리는 외면했습니다.”
계층별 포교현황을 볼 때 어린이·청소년은 성인에 비해 미약하기 이를 데 없다.
사찰 경제 여건이 약화된데 따른 것일까?
“저는 사찰 경제력과 포교가 비례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반야사 주지 때의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경주중·고등학교 내 불교학생회 조직을 이끈 성행 스님은
태화종합고등학교에 토요일 특활반인 불교반이 편성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장학금 지급이 유효했는데 한 학기에 1인 10만원씩 10명에게 주었다.
1990년 중반의 중고등학생에게 10만원이라면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당시만 해도 기업에서 파업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노사가 지혜를 모은다는 의미로 강의도 자주 열렸던 때입니다.
경주에서 강의가 있었는데 한 번은 저를 강사로 초청했습니다.
아예 ‘계약(?)’을 맺었는데 1회 20만원에 10달 200만원으로 합의했습니다.
200만원이 손에 들어온 겁니다.
한 학기 100만원, 1년은 무리 없이 지급할 수 있어 학교 측에 불교반 편성을 요청한 겁니다.”
어린이·청소년 포교의 원동력은 원력이라는 뜻일 터다.
성행 스님의 원력은 20여년 동안 지속되고 있고, 열정은 20년 후에도 식지 않을게 분명하다.
“부처님 법설을 들려주는 일이 급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좌복 위에 앉히려는 노력 또한 서두를 일이 아닙니다.
도량에 와서 부처님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여건과
한 번 오면 다시 찾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기, 짓기, 수련회, 여행 등 방편은 무궁무진합니다.”
어린이·청소년 포교에 유독 남다른 열정을 쏟아 붓는 성행 스님만의 이유가 있을 법하다.
“어린이 가슴에도 불성이 내재돼 있습니다.
그들이 도량에서 마음껏 뛰놀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짓게 하는 건 깨달음의 씨앗이 움틀 수 있도록 물을 주고 빛을 쐬어 주는 겁니다.”
후두부를 얻어맞은 듯했다.
어린이를 미래의 불자로만 인식했던 고정관념이 단박에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미래의 불자’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속에 ‘사세’ 혹은 ‘불교세’라는 이웃종교와의 상대적 개념의
‘세력’도 내재돼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데 성행 스님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어린이 포교를 수미산 오르는 것에 비유한 이유가 확연히 잡힌다.
해발고도 6714m 높이로 티베트 땅 서쪽에 우뚝 솟은 설산.
‘눈의 보석’으로 불리는 카일라스(Kailas)다.
고도가 높은 만큼 숨 한 번 내쉬기도 어려워 산 오르는 자체가 두타행이다.
부처님 법 품은 사람들에게 이 산은 ‘수미산(須彌山)’으로 다가온다.
인도인들의 의식과 경전에 그려진
수미산은 8개의 바다와 8개의 산에 둘러싸여 있는 거대한 산이다.
높이는 16만 유순인데 8만 유순은 물 아래 잠겨 있고 8만 유순은 땅 위에 솟았다고 했다.
1유순은 왕이 하루 행군하는 거리다.
아라한, 사천왕, 제석천왕이 머문다는 그 산이 바로 수미산(須彌山)이다.
이 산을 오를 수 있는 유일한 루트는 팔정도(八正道)이며
선정의 힘이 충만해야만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어린이·청소년을 도반으로 여기고 있음이다.
서로 손 잡고 끊임없이 정진해 가자는 의지를 전하고 있음이다.
지금은 그림을 그리지만 훗날 좌복에 앉을 것이라는 믿음을
성행 스님 스스로 굳게 다지고 있는 것이다. ‘긴 기다림!’이다.
“청계사는 봄가을에 산사음악회를 엽니다.
도량에 차고 넘칠 정도로 인기 좋습니다.
점심 때 청계사를 찾는 모든 분들께 공양도 대접합니다.
불자가 아니시더라도 청계사를 지켜 봐 준 모든 분들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만의 바람이 있습니다. 산사음악회에서 선율 하나 듣는 순간,
청계사 공양간에 들어서서 수저 든 순간 부처님과 인연 맺은 겁니다.
그 1만명 중 100명이 이 생, 아니 다음 생에서라도, 불연이 닿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저의 은사와 청계사 사부대중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전법(傳法)이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떠나라’는
부처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걸어가는 성행 스님이다.
청계사 산문을 열고 공양 한 번 하시라!
내려오는 길에 ‘선 중흥조 5대선사’의 뜻을 기린 부도전에 서서 합장하면
성행 스님의 깊은 뜻을 좀 더 깊이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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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행 스님은
1985년 종상 스님 은사로 출가.
1994년 중앙승가대 졸업.
1995년 반야사 주지.
1997년 동국대대학원 졸업
동련 이사장 역임.
분당 경찰서 경승실장.
서울 구치소 교정협의회 회장.
희망나래 장애복지관 운영위원장.
하동청소년 수련원장.
2018년 1월 31일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