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
위대한 열지족 추장 소노리의 둘째 아들인 초가는 족정관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에게 전사들을 곧 준비해서 보내겠다는 전령을 보냈다. 그러나 초가가 1천의 전사들을 이끌고 천수교를 나설 무렵 미리 보낸 전령에게서 오수관이 적군에게 점거됐으며 아직 나이 어린 동생의 생사도 알 수 없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말을 탄 조정의 군사들이 곧 들이닥친다는 소식이었다.
“이럴 수가! 셋째와 다섯째가 당하다니….”
“초가, 적의 수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나가 싸웁시다.”
“아니야! 고작 저 정도만 올 리 없어. 어디엔가 숨어 있는 병력이 더 있을 거야! 초가, 섣불리 움직여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우하! 그러고도 네가 위대한 열지족의 전사라고 할 수 있나? 보이지도 않는 적이 뭐가 두려운가?”
“그만! 포시노도 우하도 그만 해라!”
“초가….”
신성한 전사의 용기를 상징하는 붉은 물감과 하늘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청색(靑色) 그리고 선열들의 지혜를 상징하는 흰색, 그리고 굳건한 의지를 상징하는 검은색의 물감을 각자의 선호에 따라 얼굴에 칠한 열지족 전사들이 추장의 아들인 초가에게 나가 싸울 것과 좀더 사태 추이를 살피자는 것을 서로 주장하며 그의 결정을 종용했다.
“초가, 누군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초가는 열지 전사의 보고에 고개를 들어 붉은 노을을 만들며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는 태양을 등지고 접근하는 검은 갑주의 조정 군사를 보았다. 그리고 잠시지만 그들이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초가는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열지족의 가장 용맹스런 용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하남천원군 참장 라혼이다!”
천수교를 보호하는 성벽에 거의 붙어 선 채 자신의 신분을 큰 소리로 외치며 밝히자 열지족의 전사들은 일제히 그를 노리며 활에 화살을 메겼다. 하지만 그도, 그를 수행하는 장수들도 자신들에게 겨눠지는 화살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나는 위대한 열지족의 추장 소노리의 아들 초가다!”
“그대가 이곳의 수장인가?”
“그렇다!”
라혼은 열지족 추장의 아들이라 말하는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붉고 희고 검은 물감을 얼굴에 칠한 그를 보자 한 가지 계획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의 군사가 말을 달리기 전에 항복할 것을 권한다!”
“거절한다! 나의 아버지와 선열들이 주신 내 몸의 피가 모두 허공에 뿌려지고 땅속에 스며들지언정 열지족 전사에게 항복이란 없다.”
열지족 추장의 아들이 열변을 토하는 그 시간 라혼은 천리전음(千里傳音)으로 후방의 모석과 백호영 전원에게 돌격 준비를 지시했다. 그리고….
―오차, 내가 표상치와 육삼을 하늘로 던질 것이다. 그들을 이 성문 너머로 안전하게 떨어뜨려라!
―존명!
―육삼, 표상치. 들었지 그럼 준비해라!
잔폭광마는 대장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음으로 명하자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혼은 등 뒤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백호영과 백호십일걸의 굳건한 의지를 감지하고 몇 가지 마법 주문을 캐스팅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항복할 의사가 조금도 없는 것인가?”
“하하하, 당신은 말로써 승리를 얻으려 하는군. 그것은 여자들도 하지 않는 짓이다. 이번에는 내가 묻지. 항복하라. 그럼 목숨은 살려주겠다.”
―와하하하하하하하….
다소 수세적이던 초가가 호탕하게 웃으며 공세적인 발언을 하자 성벽 위에 있던 열지족의 전사들이 ‘와아’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으로 기세가 오른 것을 확인한 초가는 마음에 들었던 상대를 일별하고 용맹스런 열지족의 전사들에게 명령했다.
“활을 쏴라!”
―핑피비비빕비핑….
강무세가에서 제공한 무기들 중 가장 초가의 마음에 들었던 대궁(大弓)에서 발사된 수백여 개의 화살이 일제히 조정의 네 장수들에게 날아갔다. 그러나….
“실드Shield! 점프Jump! 레버테이트Levitate!”
라혼은 전면을 향해 시커멓게 날아드는 화살들을 [실드Shield : 방패] 주문으로 막음과 동시에 [점프Jump]와 [레버테이트Levitate : 부양(浮揚)] 주문을 이용해 세 명의 부하들과 함께 하늘로 솟아올랐다. [실드Shield] 주문은 캐스터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서 여러 사람까지 실드를 적용시킬 수 있다. 전방에 종(縱)의 방패막이를 발생케 하는 방법으로는 통상의 공격에 대해서만 유효하다. 라혼은 그것으로 자신과 세 부하들이 타고 있던 말을 보호하고 하늘로 몸을 피하는 데 성공하자 아직까지 얼떨떨한 오차에게 소리쳤다.
“정신 차리고 표상치, 육삼과 함께 성문을 열어라!”
“조, 존명!”
라혼은 오차의 대답을 확인하고 떨어지는 물체의 속도를 깃털 속도만큼 줄이는, 한마디로 깃털의 무게로 몸을 가볍게 해 낙하시 충격을 줄여주는 [페더 폴Feather fall] 주문을 걸었다. 그리고 라혼은 자신은 그대로 떨어져 내리며 에텔 스페이스에 보관하고 있던 강시지존(彊屍至尊) 흑산자(黑山子)가 맡겨놓은 107구의 철강시를 성벽 위에 풀어놓았다.
“뭐!?”
설명은 길었지만 이 모든 것이 찰나의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열지족의 입장에선 화살을 쏘고 ‘어!’ 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할 수밖에 없었다. 성 밖에선 조정의 말을 탄 군사들이 쇄도하고, 하늘에선 검은 옷의 괴인들이 떨어져 내리자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초가, 놈들이 성문을 열려고 합니다.”
“막아라! 우리는 위대한 열지족이다!”
그러나 아무리 용맹스런 열지족의 전사들이었지만 도검(刀劍)이 통하지 않는 도검불침(刀劍不侵)의 철강시를 상대하기에는 역시 무리였다.
“우와! 이것들은 뭐야? 언제 매복을?”
“저건 강시지존의 철강시다.”
“뭐…?”
천길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을 경험한 잔폭광마는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옷의 인영들을 보고 놀라 외쳤다. 그러나 정신을 추스르기엔 주위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하려는 일을 눈치챈 열지족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캬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검은 표범이 울부짖더니 평소 사용하던 독문병기인 표홀도(飄忽刀) 대신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울부짖으며 열지족 전사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오차는 성문을 지키던 열지족 전사들에게 화살을 날려 제압하고 성문의 빗장을 제거했다. 그러나 성문은 활짝 열렸지만 백호영이 들이닥치려면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새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열지족도 정신을 차리고 대응을 시작했다.
“그래 한번 거나하게 놀아보자! 이 몸이 바로 앙신성의 재앙 잔폭광마님이시다! 맹호낙아조(猛虎落牙爪)!”
―쾅~!
잔폭광마는 처음부터 마적이었을 때 성명절기였던 맹호낙아조(猛虎落牙爪)을 시전했다. 지금은 백호영의 일원이 되어 백호영의 무공을 익혀가는 중이었다. 잔폭광마가 백호영의 일원이 되어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백호영의 실력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야 백호영들이 익히는 무상신공(無上神功)인 여의금강공(如意金剛功)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기존의 무공을 버리고 여의금강공을 연마를 시작한 지 겨우 한 달 보름 만에 예전의 공력을 회복함은 물론 답보 상태에 있던 그전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단기간에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가 대장, 아니 이미 마음으로 승복하여 주군이 된 백호나한의 배려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 다시 한 번 충성을 맹세했었다. 새로운 힘을 얻은 잔폭광마는 그 힘을 시험하고 싶었지만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함부로 날 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형제라고 생각하는 백호십일걸들에게 싸움을 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잔폭광마에게 이것은 그야말로 기회였다.
“크앙~!”
“우악!”
―키야아아~!
―크억~!
잔폭광마의 선방으로 시작된 드잡이질에 흑표범으로 변신한 표상치가 가세하자 열지족은 그들의 기세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오차가 후방에서 화살을 날리며 열지족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성벽 위에서는 강시지존이 자랑하는 철강시들의 난동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사이 어느새 성벽으로 말을 탄 8백 백호영이 성문을 지나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라혼은 모석에게 돌관(突關)을 명하고 철강시들을 풀어놓은 직후 [블링크Blink]로 열지족 추장의 아들 초가 곁으로 순간 이동했다.
“헉!”
“이얍!”
―퍽! 쿠웩!
―깡!
성문을 열려 하는 적들의 움직임에 막으라는 고함을 지르던 초가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갑주 차림 장수의 모습에 기겁했고, 초가를 보위하던 포시노는 반사적으로 그를 안듯이 덮쳤다. 그러나 라혼에게 그러한 열지족 전사의 움직임은 별 위협이 되지 않았다. 라혼은 오히려 그를 철산고(鐵山鼓)로 받아버리는 동시에 짤막한 박도(朴刀)를 휘둘러오는 열지족 전사를 그가 휘두른 도(刀)와 함께 둘로 갈라버렸다.
“우하!”
―컥~!
라혼은 몸이 둘로 쪼개지는 열지족 전사의 이름을 부르짖는 열지족 추장 아들의 목을 틀어쥐고는 사자후(獅子吼)를 터뜨렸다.
―크앙!
“추장의 아들을 잡았다!”
―주군이 반적의 수괴를 잡았다!
―와아! 이겼다!
전투에서 최고 지휘관을 잡는 것은 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힘을 숭상하고 약탈을 그 업(業)으로 하여 평생 싸움터에서 보내는 열지족 전사들에게 더욱 영향력이 컸다. 창칼이 통하지 않는 검은 옷의 괴인들도 그렇고, 열지족에게는 수십 년 전 조정의 토벌대로 온 강무세가에 의해 토벌될 때부터 악몽인 말을 탄 마군(馬軍)의 존재도 사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그런데다 자신들을 이끄는 추장의 아들이 어찌해볼 틈도 없이 잡히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일부는 항복을, 나머지는 천수교를 달려 하수라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모석, 이곳을 정리해라! 나머지 백호십일걸은 나와 함께 강을 건넌다!”
“존명!”
라혼은 열지족 추장의 아들을 옆구리에 끼고 경공신법을 펼쳐 천수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피이이이이~!
그리고 철강시를 부리는 휘파람을 길게 불어 강시들 또한 강을 건너게 했다.
“달성모, 이 녀석은 네가 맡아라!”
“예!”
라혼은 백호십일걸 중 하나인 달성모(獺珹毛)에게 기절한 추장의 아들을 던져주고는 초상비신법(草上飛身法)으로 도망치는 열지족 전사들의 머리를 발판 삼아 천수교 동안(東岸)에 떨어졌다. 이미 대부분의 병력이 서안에 있었던 듯 동안에서의 저항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열지족 전사들은 항복하지 않고 계속 저항의 의지를 굳히지 않고 있었다.
―확!
그때 ‘확!’ 하는 빛과 함께 열지족 전사들을 핍박하던 철강시들이 우수수 검은 먼지로 화했다.
“신성력(神聖力)?”
라혼은 언데드(Undead)인 강시(畺尸)가 신성력에 약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미 라혼 자신이 직접 한 구의 철강시를 신성력인 성기력(聖氣力)을 이용해 먼지로 만든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언데드인 강시는 [터닝Turning] 주문으로 퇴치가 가능한 것이다.
“무량수불(無量壽佛)! 아무리 세상이 어지러워졌다고는 하나 저런 마물(魔物)을 만들어 사용하다니….”
싸움이 한창인 전쟁터 한가운데 난입한 대머리에 가사를 입은 승려가 상당히 두툼해 보이는 선장(禪杖)을 들고 불호를 되뇌었다. 승려의 등장과 함께 무적의 철강시 수십 구가 한꺼번에 검은 먼지로 화하자 열지족과 백호영의 싸움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이런, 망할 땡중이….”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잔폭광마였다. 잔폭광마는 내공을 이용해 손도 안 대고 물건을 취하는 능공섭물(綾空攝物) 수법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열지족의 창을 들어올려 전장에 갑자기 끼어든 승려에게 힘껏 집어던졌다. 잔폭광마가 승려를 시험하려는 의도로 힘을 빼지 않고 공력(功力)을 주입하여 비교적 천천히 날아가는 창은 웬만한 고수라도 능히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여 힘으로 창을 막으려 한다면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승려는 힘차게 날아오는 창을 피하거나 막으려 하지 않고 명상에 잠긴 듯 눈을 반개하여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엄청난 경력(勁力)이 깃든 창머리가 단, 몇 치 앞까지 접근하자 승려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했다.
―퍽!
―크억!
―퍽!
잔폭광마가 던진 창은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동안의 한 가옥을 통째로 꿰뚫었고, 승려는 무방비 상태에 있는 잔폭광마의 복부에 일권(一拳)을 꽂아 넣었다. 불의의 일격을 허용한 잔폭광마는 칠공(七孔)으로 피 화살을 내뿜으며 허공을 날았다.
“육삼!”
“이런!”
“여래만천(如來滿天)!”
―콰과과과광!
백호십일걸의 투기(鬪氣)를 감지한 승려는 오색 광채(五色光彩)를 머금은 파괴적인 불력(佛力)을 사방에 내뿜었다. 그러나 크게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는지 곧 불력을 거두며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무공을 폐했을 뿐이니 그것 외에는 별 탈 없을 것이오.”
“그런!”
평생을 한 길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하는 자에게 더 이상 그 길을 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치고 승려의 말투는 너무 고요했다.
“흐음, 모든 경맥이 이종지기로 막혀있군.”
“크크억~! 주, 주군!”
“진정해라, 육삼! 그런데 너마저 이젠 주군인가? 대장이라고 불렀을 때가 더 좋았는데. 그건 그렇고, 언제부터 여의금강공을 수련했지?”
라혼은 잔폭광마 육삼의 경맥에 뭉쳐 있는 승려의 불력(佛力)을 흡성대법(吸性大法) 상(上)의 흡인결(吸引訣)을 이용해 하나하나 흩어나갔다. 그런데 잔폭광마의 몸에서 매우 익숙한 공력인 여의금강기(如意金剛氣)가 감지되었다. 여의금강공은 무공이 전폐된 상태에서 새로 익혀야 하는 무공이었다. 그러나 라혼은 육삼의 내공을 폐지시킨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것도 드워프들의 치료하는 흙의 공능인가?’
‘치료하는 흙’은 불새의 깃털이 있는 곳의 흙이었다. 모든 것을 정화(淨化)하는 불새의 불꽃 깃털은 치료하는 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태워버리는 힘도 있었다. 잔폭광마가 원래 익히고 있던 무공은 잡다한 마공(魔功)이었다. 그러니 ‘치료하는 흙’ 속에 묻혀 있을 때 자연스럽게 일어난 정화 작용으로 마공을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치료된 이후 당분간 불새의 공능으로 약간 이상함을 느꼈겠지만 공력의 수위 자체는 변함없는 상태에서 정화된 공력으로 여의금강공을 익히니 라혼이 백호영에게 여의금강공을 전수할 때 성기력을 주입시켜주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본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자신이 잔폭광마를 치료하는 모습을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승려에게 철강시를 부순 빚을 받아내야 했다.
“시, 시주는…?”
“강격(强擊)!”
“헉!”
―뻥~!
아라한 격투술 특유의 성기력을 이용한 기술인 강격(强擊)의 가죽공 터지는 소리가 울리고 승려는 다급성을 터뜨리며 그 자리에서 ‘푹!’ 꺼지듯 사라졌다. 그러나 상대는 다름 아닌 라혼이었다. 라혼은 승려가 사라짐과 동시에 그의 기운이 등 뒤에서 느껴지자 주저 없이 팔꿈치를 뒤로 휘둘렀고 승려는 코앞에 나타난 장수의 팔꿈치에 기겁하며 얼굴로 반탄강기(反彈剛氣)를 집중했다. 그러나 라혼이 펼친 여의금강공의 금강결 오의(奧義)는 바로 강기를 파해(破解)하는 공부(工夫)였다.
―뻑!
“!?”
“격공흡인(隔空吸引)!”
“…!”
코끝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고통에 잠시 주춤했던 승려는 사지가 결박당하는 느낌과 함께 장수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컥~!
―화르르르~!
“화둔(火遁)?”
라혼은 법술(法術)을 쓰는 것이 분명한 승려를 잡아 법술에 대하여 알아내려 했는데, 그가 불꽃과 함께 사라지자 일순 당황했다. 승려는 신선(神仙)들이 사용한다는 도술(道術)의 일종인 화수목금토(火水木金土)의 오둔술(五遁術) 중 화둔(火遁)을 사용하여 줄기줄기 뻗어나온 라혼의 공력(功力)을 태우고 곧바로 줄행랑을 친 것이다.
“도술을 하는 자를 만났는데,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수는 없지.”
라혼은 어느새 방진(防陣)을 구성하여 전의(戰意)를 꺾지 않는 열지족 전사들을 일별하고, 그간 쓰지 않았던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를 시전했다.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는 이곳의 말로 심검(心劍)의 경지에 이른 기술로, 말 그대로 영혼을 베는 영혼의 칼날이었다. 라혼은 하얀 기운으로 형상화한 영인(靈刃)을 꺼냄과 동시에 열지족의 일각을 횡소천군(橫掃千軍)의 일식으로 후려쳤다.
―콰광~!
그러자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천수교 동안 일부가 완전히 초토화되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것이 먼지로 화해버렸다. 열지족의 전사도, 드물게 돌과 진흙으로 만든 가옥도….
“표상치!”
“예!”
“이곳을 정리해라! 나는 그 승려에게 빚을 받아야겠다.”
“조, 존…명.”
표상치는 주군이 그 자리에서 푹 꺼지듯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말을 늘였다. 주군의 어마어마한 신위를 목격한 백호십일걸은 물론 열지족 전사들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특히 잔폭광마는 주군인 백호나한이 강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단 한 번의 손짓에 한 공간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라혼의 힘에 기가 질린 열지족 전사들은 전의를 상실했고, 갑작스런 폭발에 백호영들과 함께 달려온 모석은 멍한 표정의 형제들을 추스르기에 정신이 없었다.
“어찌 된 일인가? 주군은 왜 안 보이는 거야?”
“형님.”
“육삼! 다친 것이냐?”
모석은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으로 피를 흘린 덕에 피범벅이 되어 있는 잔폭광마에게 달려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나 잔폭광마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주군은 사람이 아닌가 보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런 일이 있소. 그보다 전에 백호대였을 때 말이오. 수하 한둘이 비명에 가자 수하를 습격한 일천무림인을 모조리 도륙했다는 말이 이제 실감이 나오.”
“….”
“겨우 이 못난 놈이 다쳤다고,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백 명을 날려버리니 말이오.”
모석을 따라온 백호영들은 멍하니 얼이 빠져 있는 열지족 전사들을 포박하면서 승리를 자축할 틈도 없었다. 주군인 라혼의 행방이 묘연했기 때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