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 남한지를 읽고
경기도 광주시 문화 관광 해설사
홍민자
광주문화원에서 올해의 사업으로 금석문대관, 중정남한지, 지명유래집, 광주와 실학 등의 여러 가지 책을 發刊한다고 하여 한권씩 얻을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금석문대관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 해봐도 얻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중정 남한지를 얻고 너무나 소중한 나머지 두 팔로 꼭 끌어안고 부지런히 집으로 와서 책을 펼쳤다. 급한 마음에 대강 들춰 보면서 이 책이 나오기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은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홍경모가 쓴 중정 남한지는 1846년 현종14년 봄에 시작하여 2년여 동안 광주의 政治, 경제군벌, 세제, 심지어는 刑罰제도까지 자세하게 紀錄한 광주의 읍지로 광주지라 하지 않고 남한지라한 것은 읍치가 산성에 있었기 때문인 것이었다.
홍경모는 조선후기의 학자로 정조 때는 동몽교관으로 효경을 강의하고 오언시를 잘 지었으며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있으면서 예조, 호조, 병조를 거치면서 돈녕부판사에 오른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난 문신이다.
'志라는 것은 한 時代의 전장과 경제를 기록하는 것이지만 한 시대의 지경과 군, 읍의 영유와 예속을 밝히는데 지나지 못하였다가 낭울괄지지로부터 구양민의 여지광기에 이르러 볼만하였다고 했다. 동국의 지지는 삼국사로부터 시작하였는데 군과 읍의 이름을 기록하고도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는 폐단이 많았다。
광주는 百濟의시조 온조가 하남위례성(위례는 사방을 둘러싼다는 뜻)에 都邑을 정한 이후. 남한산, 한산주, 한주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다가 비로소 高麗 태조왕건23년(서기940)부터 광주라 하였다.
인조가 산성을 개축하고 읍치를 성내로 옮기면서 1630년에는 23개면으로 군세가 넓었다.
한강을 끼고 남, 북한산성으로 나뉘어 성곽을 쌓고 한강은 오대산 우통수에서 시작하여 달천에서 합류하여 원주 서쪽에 이르러 안창수와 합류 광주 동북에 이르러 도미진, 삼전도를 거쳐 경성 남쪽에야 이르러 한강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남한산성이 있는 광주는 영남과 호남을 제압하면서 서울을 엄호하고 큰 아들과 같은 가까움과 진양의 견고함을 겸하였으니 보장이 되는 곳이다.
광주의 땅은 都城 근처여서 옛날 백제 유풍을 따르고 땅은 메마르고 풍속은 인색했다.
산성에서 거주하는 사람은 관가에서 주는 식량을 바라기 때문에 농사짓지 않고 놀고먹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남한산 또는 일장산이 朝鮮中葉에 청량산으로 이름이 바뀌어 청인이 침범해 올 조짐이라 여겼고 청태종이 망월봉에서 성안을 들여다 본 것도 이상한일이 아니었다.
23개의 면이 21개가 되고, 23개의 강과 나루 또한 내가 사는 지금의 실촌읍은 옛날에는 도척면이었고 전답은 207결이고 언주면이 최고로 크고 중대면이 다음이고 광주의 땅은 총5,858결,88부1속 이었다.
官衙, 倉庫, 寺刹, 마을들이 별처럼 벌려 있고 바둑판처럼 나뉘어 있고 7개의 단묘, 鄕校와 2개의 서원도 있었다.
성내 군포 앞에서 각 사찰에 이르기까지 숯을 묻어뒀고 구운소금, 돈, 양식, 장, 곡식 등의 보유한 것을 자세히 기록되어있고 丙子胡亂 당시 곡식 2만8천여 가마가 있어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 온 것도 우연은 아니고 청군이 얼마나 많았던지 광진, 삼전도, 현능 세 길이 대설이 내렸어도 흰 색깔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영조27년 이기진에 의해 무망루를 40일 만에 낙성하고 루에 올라보니 치욕의 유적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누우면 창을 베고 앉으면 쓸개를 매달아 맛보아 고통을 겪고 잠시라도 잊을까 두려워 분발하여 동으로는 한봉 서로는 오랑캐의 비석을 바라보았다.
한달에도 몇 번씩 무망루가 있는 수어장대에 오르면서 이런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것을 새삼 느끼며 내 고장 문화유적을 지키리라 다짐해본다.
그리고 한 가지 재미난 이야기는 지금 수리중인 경안천교가 처음 놓을 때 다리 아래 연못 속에 독룡이 있어 선승 한사람이 묘회암에서 와 싸워 독룡은 죽고 무지개 모양의 아름다운 다리를 놓았다고 했는데 지금은 없어 그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아쉬움을 느낀다.
이 중요한 책을 읽고 이렇게 짧게 쓴다는 것은 조금 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튼 지금의 광주는 많은 인구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그때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광주는 예로부터 광해군 때는 경도보장지였고 인조 때는 피난처이면서 대한민국 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날로 發展하는 광주의 모습을 보며 올해에는 서로 양보하는 마음과 和合하는 한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첫댓글 남한산성의 생생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책이네요...그런데 왜 그때 군포에서 사찰에 이르기까지 숯을 묻어두었을까요...비상시 연료를 미리 준비했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