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종교를 가진 며느리가 목격한 시아버지의 극락왕생
제 이름은 이가용(李家榕, Jarrod Li)이며, 대만 핑둥 출신으로 올해 57세입니다. 대만대학교를 졸업한 뒤, 1989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석사 과정을 마쳤고, 이후에는 현지에서 가정을 이루고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미국인입니다.
현재는 상하이에서 독일계 지사의 관리를 맡고 있으며, 보통 7월과 12월에는 미국으로 휴가를 다녀오고, 대만에는 음력 설 무렵에야 비로소 귀국해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내곤 합니다.
“불안”에서 “안심”으로
저는 늘 인터넷을 통해 법문을 전해주시는 정본(淨本) 스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비록 제가 불법을 처음 접한 것은 1999년 미국에서였고, 그때 이미 염불법문도 알게 되었지만, 그동안 줄곧 염불하고 채식을 실천해 오면서도 마음 한켠은 늘 편치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접해온 가르침들이 대부분 일반적인 통도(通途)의 교리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반드시 망상이 없이 일심불란하게 염불해야 한다.” “망상 속에서 염불하면, 목이 터져라 불러도 아무 소용이 없다.” “모든 생각이 염불이어야 왕생할 수 있다.” 이런 식의 기준을 들을 때마다, ‘나는 도저히 그런 경지에는 이를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이번 생에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늘 불안했기에, 평소에는 능엄주, 대비주, 그리고 여러 진언들을 함께 외우며 그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애써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스님께서 하신 법문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 하나하나가 모두, 염불은 “이행도(易行道)”이며,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해 구제받는 길이라는 것, 그리고 아미타불의 대원(大願)에 의해 가지(加持)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서야, 이전에 배웠던 교리들과 지금의 가르침을 다시 대조해 보며,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염불만 하면 곧바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 구제받을 수 있으며, 그 구제는 우리 같은 범부의 수행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불할 때마다 외우는 한 구절, 한 구절의 부처님 명호가 결코 헛되지 않고, 염불이란 이렇게 쉽고도 간단한 길이라는 것을 그제야 마음 깊이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스님의 소개로 정종 스님의 법문도 듣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선도 대사께서 설하신 “근기와 법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을 비롯한 정토종의 다양한 교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저로 하여금 염불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게 해 주었고, 이제는 망상이 있느냐 없느냐를 더 이상 따지지 않으며,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염불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다른 경전이나 진언은 내려놓고, 매일 전일하게 “나무아미타불”만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평소에는 혜정 상인의 염불 음성을 틀어놓고 그 소리에 맞춰 함께 염불하며, 그 외의 시간에도 일이 있든 없든 입을 움직여 염불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도 대사의 법맥을 전해 주시는 스님의 정토종 가르침을 만나게 된 것은, 지금 돌이켜보아도 참으로 큰 행운이며, 제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아버지의 별세, 빈소를 지키며 염불하다
이 자리를 빌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의 감응 사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2017년에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와 아내, 자녀들은 오랜 시간 해외에 거주해 왔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노년에 치매 증상이 점점 심해지셨을 때, 보다 안전하고 안정적인 돌봄 환경을 마련해 드리기 위해 아버지를 핑둥에 있는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매일 동생이 찾아가 돌보며 아버지를 챙겼습니다. 여동생은 타이베이에 시집가 살고 있었기에, 평소 집안의 모든 일은 남동생이 맡아 처리해 왔습니다. 저와 여동생은 현지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 곁을 지키며 함께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그래서 남동생의 결정과 판단을 존중하며 따르기로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월요일 새벽 3~4시경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당시 저는 상하이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비행기를 타고 핑둥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다음 날인 화요일에 미국에서 출발해 대만으로 건너왔습니다.
남동생과 여동생은 아는 연우님들이 없었기에, 당시에는 조념단을 부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별도로 조념을 진행하지 못했고, 임종 시에 선지식의 임종 법문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직후, 동생은 장례 의전 업체에 연락하여, 그들이 말하는 “불교식 의전”에 따라 아버지의 장례 절차를 맡겼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병원에서 임종하셨는데, 저희 자녀들은 아버지의 고통을 최대한 줄여 드리고자 사전에 “연명치료 포기 동의서”에 서명해 두었기에, 큰 고통 없이 생을 마치실 수 있었습니다. 임종 후, 동생은 의전 업체의 안내에 따라 아버지를 곧바로 냉장 관에 모셨고, 시신은 핑둥 시 장례식장에서 대여한 빈소에 안치되었습니다.
대만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빈소에 도착하기까지, 저는 줄곧 염불을 이어갔습니다. 남동생은 장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게 움직였고, 여동생과 제부는 옆에서 금은지를 접으며 도왔습니다. 아내는 그다음 날 도착했는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저와 함께 염불했습니다. 아내는 미국인으로, 중국어는 거의 알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천주교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제가 염불을 가르쳐 주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불법에 대해 아는 것은 없지만 오직 염불만은 할 줄 압니다. 당시 저는 남동생과 여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곤하면 금은지 접는 거 그만하고, 시간 나면 같이 염불해. 몇 번 하든 괜찮아. 우리가 지치면 그때 너희가 좀 이어서 해줘.”
그렇게 해서 저와 아내, 그리고 남동생과 여동생은 아침에 함께 염불하고, 점심에는 집에 돌아가 식사한 뒤 다시 빈소에 와서 오후부터 해 질 무렵까지 염불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아버지가 부처님의 접인을 받는 모습을 “보다”
빈소를 지키는 동안, 저와 아내는 매일같이 아버지를 위해 염불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제5일째 되는 날, 염불 중에 갑자기 아내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아버지 쪽을 향해 계속 합장하며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저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아버지 쪽을 바라보는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내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고,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 염불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 아내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방금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왜 그렇게 감정이 북받쳤던 거야?”
그러자 아내는 오히려 제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방금 뭔가 본 게 있어요?”
제가 “아니,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라고 대답하자,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잠깐 염불을 하고 있었을 때였어요. 갑자기 아버지 쪽 벽 위에서부터 커다란 금색 부처님 한 분이 내려오시는 게 보였어요. 그래서 저는 계속 절을 하면서 염불했어요. 그때 자꾸 당신을 돌아봤던 건, 혹시 당신도 그 모습을 봤는지 묻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아내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 하늘에서 내려오신 아미타 부처님은 온몸이 금빛이셨어요. 잠시 뒤에는 아버님도 나타나셔서, 그 부처님 앞에 서 계셨어요. 아버님은 온몸이 금빛 광명 속에 감싸여 있었고, 그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젊어 보였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님은 아미타 부처님과 함께 위로 올라가셨고, 그 모습을 본 저는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울고 말았어요.”
아내는 미국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천주교 가정에서 자랐으며, 불교에 대해서는 물론, 왕생의 상황에 대해서도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아내가 상상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있는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원래 저는 극락에 왕생하려면, 임종 시 시신에서 어떤 서상이 나타나거나, 기이한 향기가 퍼지거나, 혹은 연꽃이 보이는 등 특별한 징조가 있어야 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정본 스님의 법문을 통해 알게 된 것은, 극락왕생은 임종 시 그런 서상이 나타났는가가 아니라, 염불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실제로도 빈소를 지키는 동안, 저와 아내, 그리고 동생들이 함께 아버지를 위해 계속 염불했습니다. 그렇기에 시신에서 서상이 보이지 않았더라도, 염불을 한 사실만으로도 여전히 구제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으며, 더 나아가 임종 순간에 곧바로 왕생하지 못했더라도, 사후 중음신(中陰身)의 상태에서 가족이 염불하면 그 공덕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감응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스님의 이러한 법문은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왕생하시기 전, 이미 7~8년 가까이 병석에 누워 계셨고, 말년에는 치매까지 앓으셔서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적에는 불법을 접하지 못하셨고, 말년에는 치매로 인해 누군가를 알아보는 것도 어려웠기에, 그저 제가 전화할 때마다 몇 번 “나무아미타불”을 따라 부르게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상황에서도, 저희 자녀들이 염불한 공덕으로 인해 아미타부처님께서 친히 접인해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나무아미타불”의 크신 자비와 중생을 구제하시는 힘은 시간과 공간의 어떤 장벽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절실히 느낍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하며, 염불법문은 말 그대로 “이행도(易行道)”임을 다시금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가용(李家榕)
2021년 5월 10일
첫댓글 시신에서 서상이 보이지 않았더라도,
염불을 한 사실만으로도 여전히
구제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으며,
더 나아가 임종 순간에 곧바로
왕생하지 못했더라도, 사후
중음신(中陰身)의 상태에서 가족이
염불하면 그 공덕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감응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급사한 민우아빠 영가에게
염불해 주었는데 왕생했음을
민우가 극락유람를 통해 확인
했음에도 종종 잊어버리고 있네요
중생들의 유일한 구제법문을
전해주셔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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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일향전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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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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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사 법회에서 아주
신심나게 들었던 염불감응
다시 올려주셔서 감사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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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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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우리는 복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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