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생 김종철, ‘여두목’ 윤여정
1964년에서 1969년까지는 그렇게 흘렀다. 쎄시봉 6년. 조영남이 먼저 매스컴을 타고 이어서 줄줄이 방송에 진출했다. 소위 통기타 1세대들. 모두들 소리의 결이 좋았다. 통기타의 통나무 숨결에 자기 소리를 싣자니 그 소리가 순박할 수밖에 없었다. 객석에서 무대 쪽으로 향하던 젊은이들의 순박한 마음의 바이브레이션도 그들 노래에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쎄시봉 단골 학생 중에는 당시 서울대를 다니던 언론인 김종철군, 홍대생 이두식군(전 미술협회장), 가수가 아니면서 여두목 역할을 한 윤여정양도 있었다.
쎄시봉 식구들이 자주 가던 장소들이 있다. 주말마다 무리지어 몰려가 라면이며 잼을 바닥내가며 드러눕고 뒹굴던 김성수 신부의 인천 성공회 사제관, 회현동 최영희(연대종교음악과, 짧은 기간 영화배우와 가수로 활동하다 미국 이주)의 집, 며칠씩 그냥 가서 거저 먹고 자고 해도 늘 친절했던 청평 안전유원지의 최사장 일가.
한번은 겨울에 여럿이 조영남의 고향 삽교에 간 일이 있었다.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윤여정, 최영희와 서울대 음대 학생이던 전혜숙과 이숙영. 조영남이 어린 시절 살았다는 집에서 본 학창 시절의 앨범 사진, 트럼펫을 불면 동네 소들이 모두 화답을 했다는 나지막한 앞산 언덕, 삽교국민학교의 자그마한 교정. 일행은 온 김에 수덕사를 들러 뒷산 마애불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내려올 때 있었던 일이다. 계단이 좁아 한사람씩 내려오고 있는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후미에서 내려가던 내가 소리를 질렀다. “가까운 사람하고 손을 잡고 내려가자!” 좁은 계단의 왼쪽은 낭떠러지였다. 내가 최영희와 손을 잡자 앞에 가던 조영남과 윤여정도 손을 잡았다. 송창식은 이미 평지에 내려가 있었다. 세 발짝을 움직였을까. “어머!” 소리와 함께 윤여정이 비명을 지르며 위태롭게 조영남에게 매달렸다. 낭떠러지 쪽을 가던 윤여정 발 밑의 돌이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발이 네 개니까 살았지 혼자서 그 돌을 밟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평지에 도착한 다음 누군가가 벌받은 것이라고 놀렸다. 올라가기 전 모두들 불당에 들어가 예불을 드렸다. 주지 스님도 특별히 나오셔서 젊은이들 앞날에 좋은 일 있으라고 기원해주셨는데 유독 윤여정만 들어오지 않고 옆문 밖에 서서 법당 안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불당의 마루바닥이 몹시 차가워 스님이 독경하는 동안 모두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덜덜 떨고 있어야 했다. 윤여정은 그것이 싫었던 것 같았다.
“PD야, MC야, 청소부야?”
쎄시봉 시절 청평의 한 수영장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골수 멤버들. 왼쪽부터 윤여정, 조영남, 윤형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서울대 음대 여학생
나는 쎄시봉 활동과 더불어 1964년 여름 TBC TV 선발요원으로 입사했다. 1970년 10월 사직서를 제출할 때까지 많은 프로그램을 맡았다.
‘굳 이브닝쇼’는 명사 초대 토크 프로그램이었고 담당 PD는 임창수씨와 나 두 사람이었다. 주말은 쉬는 주5일 평일 프로였는데 임창수씨가 자기는 연출할테니까 당신은 MC를 하라고 지시해왔다. 그는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연장자였다. 시간은 20분, 앞뒤에 가수의 노래가 붙으니 시그널 시간, 광고시간 제하면 손님과 얘기할 시간은 10분 정도였다. 첫 손님은 이방자 여사였고 미8군 부사령관, 김현옥 서울시장, 외국사절들이 출연했다. 살롱 스타일의 토크 프로그램이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겁도 없이 진행했던 것 같다. 드라마를 연출하던 허규씨의 말에 의하면 MC가 대학생의 말투로 손님을 대한다는 것이었다.
‘힛 게임쇼’는 연예인들과 명사들의 개인 경쟁게임과 직장대항전을 합친 프로그램이었다. 직장응원단이 출연했고 사회는 김동건, 응원단장은 송해·박시명 두 사람이 맡았다. 송해씨는 판정에 불복하면서 심심찮게 김동건 사회자를 박치기로 들이받아 다운시켰다. 그럴 때마다 폭소가 터졌다. 응원단장은 서로 끊임없이 다투다가도 사회자가 “차렷!” 하고 호령만 하면 반드시 그 앞에서 말단졸병이 되어야 했다. 극단의 무질서와 극단의 군기가 공존하는 방식이었다.
어느 해이던가 연말 특집에서 MC가 금년의 국내 톱뉴스로 무엇을 꼽겠는가하고 묻자 정광모씨가 지체없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한비(한국비료) 사건’이죠”. 스튜디오 안의 모든 사람이 다 웃었다. 다음날, 화장실에서 김규 상무와 마주쳤다. 그는 대뜸 “왜 그런 질문을 시켜?” 하고 말했다. 삼성 본부에서 질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루는 게임중에 물통이 넘어져 스튜디오 바닥이 물바다가 됐다. 빨리 누군가 물을 닦아야 했다. 밤 시간의 생방송이라 세트 담당자가 없었다. 자루 달린 물걸레를 구석에서 가져와 내가 바닥을 닦아냈다. 그것이 그대로 방송이 되었고, 어린 조카가 제 아빠에게 “삼촌이 높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방송국 청소부야?”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림에 노래 싣고’. 피세영이 여자 아나운서와 함께 DJ를 맡고 만화가 신동우씨와 나는 이젤에 스케치북을 올려놓고 음악이 나가는 동안 즉흥그림과 즉흥낙서를 했다. 1년 정도를 계속했는데 언제나 글보다 그림이 좋았다.
‘쇼 파노라마’. 야외녹화가 많았다. 어느 날 정릉 근처 한 수영장에서 녹화를 하는데 MC가 펑크를 냈다. 내가 대타로 들어갔다. 그 날 밤 ‘굳 이브닝쇼’, 심야에 ‘그림에 노래 싣고’까지 하루에 세 번 카메라 앞에 서게 됐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때는 방송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플로어 매니저(진행감독), 연출, 대본, 구성, 출연자 섭외, MC, 때로는 부족한 영어로 통역도 했다.
‘골든벨쇼’. 신곡을 낸 가수들을 무대 뒤에 세워놓고 레코드를 틀었다. 심사위원들이 한 줄로 앉아 의견을 말하고 앞에 놓인 종을 쳤다. 다섯 번이 울리면 만점이었다. 아마추어 심사위원까지 포함해 네 사람이었으니 만점을 받으려면 종이 스무 번 울려야 했는데 전원 만점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훈희의 데뷔곡 ‘안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