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 상업학교가 어느 정도 기초가 잡힘에 또 다시 공업학교를 설립코자 하는 욕망에 불탔었습니다. 전술한 陶器工場을 설계한 것도 그 일부 공작으로 하려는 의도로 부지를 넓게 잡고 내심으로 착착 준비하며 당국에 대하여 인가를 요청한 바 있었으나, 당시 全鮮에 조선인만을 수학하는 甲種 공업학교가 없었던 만큼 日人들이 조선인 공업교육에 관심이 없음을 간취할 수 있었고, 또 그네들의 구실이 「全鮮에 전례 없는 일을 우리 道에서 어쩔 수 없으니 농촌지대에 무슨 공업학교가 필요 있느냐」는 등 말하며 廻避만 하였습니다. 갖은 수단, 갖은 방법으로 지방 유지들도 많이 노력하였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희망이 좌절되자 그러면 女子商業을 설립하겠다고 하여 僅僅히 설치 허가를 얻어 역시 前記 방식으로 校金 3백평을 煉瓦製로 완성시켰습니다.
문 그 소요 경비는 얼마나 들었는가?
답 기지 만평에 5만円, 건물이 25,000圓 들었습니다.
문 前記 兩個 학교의 경영비의 출자 如何.
답 남자상업학교는 설립 당시 1,200석 추수의 토지를 제공하여 그 토지 수입으로 경영하다가, 후에 부족하므로 단기 4270년[1937]에 또 다시 450석 추수의 토지를 제공하여 경영케 하였고, 女子商業學校에는 700석 추수의 토지를 제공하여 경영케 하였습니다.
문 관선 도회의원이 된 것은 언제인가?
답 단기 4272년[1939](敵政 소화 12년)이며, 해방 때까지 계속하였습니다.
문 도회의원이 된 경위 如何.
답 지사 김동훈[金東勳]이가 오라기에 道에 갔더니 금번에 관선의원으로 결정하였으니 승낙하라 하기에 “不學無識하고 日語를 못하니 자격이 없다”고 고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不數日에 辭令을 보냈습니다. 즉시 그 辭令을 가지고 반납하러 간 즉 김동훈 지사 말이 “君의 經綸之才를 道會에 제공하여 달라는 것이지 지식과 언론을 요구함이 아니니 사양치 말아라” 하며 도로 주기에 너무 강경히 거절하면 혹 後患이 있을까 두려워 그대로 말았습니다.
문 本官이 본 바엔 피의자가 명예욕으로 자진 운동한 것으로 보는데 如何.
답 천만의 말씀입니다. 원래 성격이 그런 방면에는 夢想도 않습니다.
문 9년간 도회의원으로 있으면서 한 번도 사표를 표명한 일은 없지 않은가?
답 아니올시다. 김동훈 지사가 간 후 유만겸[兪萬兼] 지사가 오자 즉시 사표를 내었습니다. 그랬더니 兪 지사 말이 “나는 당신을 믿고 많은 협력 있기를 바랐는데, 意外에 사표를 냄은 나에게 협력 못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道內 유지가 협력 못한다면 나는 退官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도 강경히 應端하므로 부득이 또 수락하였습니다.
문 재직기간 중 몇 번이나 출석하였으며, 무슨 발언을 하였는가?
답 바쁜 관계로 다 출석치 못하고 출석하여 보았던들 로봇트에 불과하니 무슨 滋味가 있겠습니까. 전후 합쳐서 5, 6회 출석하였고, 발언은 아무것도 못하였습니다.
문 발언은 안했더라도 可否 결의권 행사는 하였겠지?
답 전원 기립할 때는 의미도 모르고 기립하였고, 擧手 가결할 때는 擧手치 않았습니다.
문 단기 4273년[1940] 3월에 春窮에 빠진 郡內 극빈자에게 구휼한 일이 있다는데 사실인가?
답 그 전년이 空前의 大旱害로 이재민이 路頭에 방황하며 기아로 부황이 심함을 목도하고 차마 볼 수 없어 보리쌀 400叺을 淸州邑, 文義, 南一, 四州, 江西 등 5개 읍면 극빈자에게 매호당 小斗 2斗式 분급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답 당시 각도에 관립 사범학교가 있었으나 유독 本道 외 2, 3도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유감으로 여겨 本道 내 유지들의 규합으로 사범학교 유치운동이 열렸는데 회장이 민영은[閔泳殷]이오, 부회장이 본인이었는데 민씨는 中風病으로 외출을 못하고 있었으므로 본인이 사실상 회장, 부회장을 겸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때 總督府 당국으로부터 부지 5만円과 부속 소학교 건물 600평을 부담하면 인가한다는 內意이었으므로 기성회에서는 도내에서 283,000円을 거두었습니다. 그 돈으로 부지 5만평을 사고 제방공사와 부지 整地를 하니 불과 10만円밖에 안 남았었습니다. 이것으로 670평 校舍를 지으라니 턱도 안됩니다. 청부업자에게 계산시켜 보니 약 30만円 됩디다. 그러니 모자라는 20만円 문제로 甲論乙駁으로 대혼란을 이루다가 필경 도청 各 部課에서 慰勞 출장여비 약 4만円을 삭감하여 依用하여도 반액에도 부족하므로 임원 7인을 선정하여 공사를 並營 감독케 되었는데, 제1차에 본인이 선발되어 착착 진행 중 外 6인 임원은 공사에 대한 기술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안나오고 끝까지 본인이 全 책임을 지고 짓게 되었는데 예정보다 훨씬 늦어 만 2년 6개월만에야 겨우 완성하였습니다. 그간 一分의 보조는커녕 공사비로 96,000円밖에 못 찾았습니다. 결국 합쳐보면 약 20만円 기부한 셈이 됩니다.
문 단기 4276년[1943]에 淸州郡 江西面事務所를 건축하는데 상당한 희생을 당했다는데 사실인가?
답 그해 봄에 불의의 화재로 강서면사무소가 전소하였을 때 그 후 內費로 각 읍면 보조가 3,200円, 화재보험 수입이 4,800円 합 8,000圓인데, 건물이 목조로 하여도 19,000여 円 든다고 1,600호 면민에게서 매호당 현금 5円, 부역 5인式 醵出하여도 부족이라고 그 면에 다소 토지가 있는 관계로 物志 기부를 받으러 면장과 협의회 5인이 왔습니다. 그 사정을 듣고 면민의 곤경이 相□되므로 즉석에서 “면사무소 건축을 煉瓦製로 하고 경비는 8,000円만 받을 테니 면민 부담만은 면제하라” 하였더니 모두 쾌히 승낙하였습니다. 그 후 시각이 바쁘게 즉시 착공하여 例의 式으로 煉瓦를 현지에서 만들고, 재목과 蓋瓦는 청주에서 마련하여 불과 數月에 준공한 바 면장실이 부족하므로 다시 6평 여를 補設하여 결국 57평의 煉瓦製 건물을 완성하고 대금은 6,400円만 받고 말았습니다. 그 면에서는 경비가 裕餘하므로 내부설비도 전부 완비하였습니다. 그 面에서 본인을 위하여 石碑를 세웠다는데 아직 본 일은 없습니다.
답 원래 본인의 교육사업이 積置한 재산의 일부를 할양하여 함이 아니고 實弟 영근[永根]이가 함남 원산에 있어 동해안 생산 어물의 總都賣商을 경영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던 관계로 상당한 수입이 있었으나 본인의 實弟 영근은 극히 質素儉約하여 一足의 고무신이라도 열 번 지어 신는 위인입니다. 그러면서도 수입의 餘金은 반드시 형인 본인에게 보내어 교육사업에 쓰게 합니다. 그 사정을 안 원산 유지들이 찾아와서 “돈은 함경도에서 모아, 쓰기는 충북에서만 하니 유감이라” “ 함경도에서도 교육사업을 일으켜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아우 영근이가 와서 “저의 別途 저축한 것이 토지가 課稅 가격으로 20여만 円, 현금이 30만円 있으니 원산에 中學을 설치하자”는 의견입니다. 그 별도 적립을 알지 못하였던 본인은 깜짝 놀라 즉시 그 사업 추진을 승낙하고 일부 유지에게 意思를 전하였더니 함경도에서는 대찬성을 하였으나 총독부 당국에서 “全鮮 13 항구에 鮮人 中學을 설치한 전례가 없으니 실업학교를 건설하라”는 권고였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初志는 그것이 아니었으므로 거절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원산에 독일인이 경영하던 “ 樓氏女子高等學校”가 있었는데 본국에서의 송금 두절로 부득이 폐쇄케 되었으므로 그와 회의 종합 경영하여 남녀중학을 설치키로 운동하였던바 역시 奏效치 못하고 있던 차, 마침 元山農業學校가 공립으로 승격하면서 경비가 부족하니 前記 60만円을 농업학교에 기부하여 달라고 함경 내 摠都長이던 송문헌[宋文憲]씨가 來訪하여 요청하였었으나 그 亦 완강히 거절하고 있다가 해방이 되자 즉시 인가를 얻어 「 원산대성중학교」라는 명칭으로 출발하였었는데, 지금은 「 元山人民大成中學校」라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문 해방 후 사회사업을 한 것이 있으면 일괄해서 말하라.
답 해방 翌年에 淸州商科大學을 설립하였는데, 大成學園이란 재단법인을 조직하여 男商, 女商, 商大에 다시 2,200석 추수의 토지와 현금 150만円을 投擲하였으며, 同年에 戰災 동포 구제용 주택 549호를 별반 보조 없이 道의 배급물자만으로 건축하였으며, 其 翌年인 단기 4280년[1947]부터 2년간에 후생 주택 18호를 前記 방식으로 건축하였으며, 女商 부족 校舍 200평을 煉瓦로 自擔하여 현재 건축 중이며, 商大 부족 校舍 300평을 亦 煉瓦로 自擔 건축 중이올시다.
문 해방 후에 어느 기관에서 表彰 당한 일은 없는가?
답 단기 4281년[1948] 4월에 교육공로자 표창장과 金牌를 軍政廳 문교부장으로부터 받은 일이 있습니다. 右 본인에게 讀聞시킨바 相違가 無하다 하고 서명 날인함. 공술자 김원근 단기 4282년[1949] 5월 18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정헌승[鄭憲丞] 입회인 서기 김영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