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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53) 2023. 12. 27
아마사를 죽인 요압
사무엘하 20:4-13
<세바의 반역>
다윗을 맞이하기 위해 마중을 나온 지파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북쪽의 10지파 사람들은 유다 지파 사람들이 자신들과 충분한 협의를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유다 지파 사람들이 왕과 왕의 집을 도둑질하여 요단강을 건너도록 했다고 불평합니다(41절).
이에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은 왕과 가장 가까운 친족이기 때문에 다윗을 모실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자신들의 혈연관계를 앞세운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왕에 대한 권한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왕에 대해 열 몫을 가졌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열 지파가 모여 있는 이스라엘의 영향력이 더 강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43).
그러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더욱 강경하게 맞섰습니다.
결국, 이 논쟁으로 분노를 느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바를 중심으로 다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성경은 그를 불량배라고 말하는데, 그의 말과 행실이 과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윗 왕을 평범한 사람 ‘이새의 아들’로 격하하여 부르면서 다윗을 모독합니다. 그리고 연설을 통해 우리가 다윗과 나눌 분깃도 그에게서 받을 유산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제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에게 각자의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선동합니다.
이런 세바의 선동에 불만에 가득 차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에게서 돌아서서 세바의 반란에 동참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유다 지파만 다윗을 따랐고, 결국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아마사에게 진압을 명하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돌아온 다윗은 서둘러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급히 군대를 조직합니다.
4~5절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 지라.”
다윗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책임자로 ‘아마사’를 세웁니다. 그는 본래 압살롬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삼하17:25). 말하자면 쿠데타를 일으킨 반역군의 수장이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이 죽은 후에 다윗은 아마사를 지목하여 요압을 대신하는 지휘관으로 세웠습니다(삼하19:13).
다윗은 그에게 다윗의 군대장관으로서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는 첫 번째 공식적인 임무를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사’가 이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상비군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끌던 군대는 압살롬이 죽으면서 다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마사에게 유다 사람 중에서 지원자를 모으라고 명령합니다. 즉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라는 것입니다. 기존에 요압과 아비새가 이끌던 군대를 이끌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왕이 정해준 3일의 기한이 너무 짧았습니다. 그래서 기일이 지나도록 아마사는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둘째, 아마사는 능력이 검증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니 다윗이 생각한 만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은 그가 이전에 압살롬의 군대 장관으로서(17:25) 많은 군대를 가지고도 적은 수의 다윗의 군대와 싸워 참패를 당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18:6~8).
셋째, 유다 지파 사람들이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압살롬의 군대장관을 하던 사람이 이제는 다윗의 군대장관이 되었다고 하면 누가 그 말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유다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다윗의 인사가 그리 잘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아마사가 탁월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요압을 견제하기 위해 군대장관으로 세운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아마사는 이 일을 통해 군대장관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요압 대신 아비새>
아마사가 기일을 지키지 못하자 다윗은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6~7절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쫓아가라 그가 견고한 성읍에 들어가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7 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다윗은 아비새를 불러 군대를 이끌고 세바를 추적하라고 명령합니다. 출정이 더 늦어지면 세바가 든든한 성읍들을 점령하게 되고, 그러면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빠른 시간 내에 제압해야 한다는 이런 계획은 아히도벨의 계획을 기억나게 합니다(후새의 모략이 승리).
그런데 다윗이 요압이 아니라 그의 동생 아비새를 불러 진압을 맡깁니다.
어떻게 해서든 요압의 힘을 빼려는 다윗의 속내가 읽힙니다. 다윗은 자신의 명령에 불복하고 압살롬을 죽이는 등 제멋대로 행동하는 요압의 힘을 빼려고 노력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분명히 아비새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실질적으로 군대를 이끄는 사람은 요압임을 알 수 있습니다(“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러니까 다윗의 정규군은 이미 요압의 세력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친위 용병부대인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도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함께 출발했습니다.
<아마사를 죽인 요압>
아비새가 이끄는 군대가 출발해서 기브온 근처에 있는 큰 바위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아마사를 만나게 됩니다.
8~10a절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그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칼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맸는데 그가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아마사는 다윗이 정한 기간보다는 늦었지만, 나름 군대를 모집하여 아비새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서 미리 북쪽 기브온으로 가서 기다렸던 것입니다(‘기브온 큰 바위 곁’). 어찌 되었든 그렇게라도 만났으면 세바를 추격하는 일에 합세하면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살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요압은 일부로 허리에 찬 칼을 떨어뜨립니다. 그것은 아마사의 경계심을 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아마사에게 다가가 “내 형은 평안하냐”(여기서 ‘형’은 형제를 표현) 하며 오른손으로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 합니다. 오른손으로 수염을 잡은 것은 입을 맞추기 위해 수염을 옆으로 밀어내기 위함입니다. 오른손을 사용한 것은 그가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란 예측을 하게끔 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본 아마사는 안심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왼손으로 숨겨둔 칼을 꺼내 아마사의 배를 찔러 죽입니다. 아마도 오랜 전투 경험상 왼손으로도 무기를 능히 다룰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 같습니다. 단번에 죽인 것으로 보아 그는 살인 기술자입니다.
이런 요압의 행동은 그가 아마사를 우발적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일 기회를 엿보다 계획적으로 죽인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평화를 말하며 인사하는 척하다가 죽인 것은 아브넬을 죽일 때와 유사합니다. 요압의 전형적인 비열한 수법입니다(3:27~30 헤브론의 왕이었던 다윗은 피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 왕국을 이루기를 열망했습니다. 마침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사이가 틀어진 아브넬이 다윗에게 와 통일의 언약을 맺고 돌아갑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요압은 급히 사람을 보내 아브넬을 다시 돌아오게 한 뒤 인사를 하는 척하며 그를 찔러 죽입니다.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데 대한 복수심에서 이런 일을 벌였습니다. 이 일은 북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악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평화적으로 통일 왕국을 이루기를 열망했던 다윗의 계획은 허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요압이 아마사를 왼손으로 죽인 장면은 사사기 3장에서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 18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모압 왕 에글론을 칼로 찔러 죽인 장면과 유사합니다. 에훗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다”하며, 긴장을 풀게 한 뒤 단 둘만 남은 자리에서 가까이 다가가 왼손으로 칼을 빼어 에글론의 배를 찔러 죽였습니다.
요압은 자신과 적으로 싸웠던 아마사 때문에 군대장관에서 밀려난 것에 원한을 품고 아마사를 죽인 것이고, 이것은 다윗에 대한 항의의 행동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입장에서만 모든 일을 해석합니다. 요압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에 대한 서운함이 깊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일조차 다윗 왕을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조카로서, 명실공히 자타가 공인하는 다윗의 오른팔이었습니다. 다윗의 군대 장관으로서(삼하8:16) 다윗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윗은 자신을 멀리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반역자 압살롬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우는 것을 보고 그는 서운함을 넘어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는 일을 ‘자신’이 아니라 동생 ‘아비새’에게 맡긴 것에도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일로 인해서 요압의 자존심은 큰 상처를 입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되찾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군대장관으로 임명받은 아마사를 아예 죽일 결심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권력을 탐하는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압의 이러한 행위를 보면서 그의 무도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에 대한 항의의 행동을 넘어서는 무도한 일입니다.
아마사가 누구입니까? 사실은 가까운 친족입니다(이종사촌).
삼하17:25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그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아마사의 어머니 ‘아비갈’과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는 자매지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아마사와 요압은 이종사촌이었습니다. 둘 다 다윗의 조카입니다.
다윗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참담하겠습니까? 지금 유다 지파와 그 나머지 지파들 사이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형제요 가까운 친척이었던 다윗 정권의 실세들 사이에 이렇게 칼부림 사건이 벌어지고 있으니 정말 첩첩산중(疊疊山中)입니다.
이렇게 요압은 점점 더 다윗이 통제하기 어려운 인물이 되어가고 있으며 다윗의 리더십에 치명적인 흠집을 내고 있습니다. 세바가 외부의 반란자라면, 요압은 내부의 은밀한 반란자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요압의 방자하고 난폭한 행동은 다윗의 분노를 더욱 사게 되고, 후일 요압을 제거하라는 다윗의 유언(왕상2:5,6)을 받은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한 요압을 마침내 죽이고 맙니다(왕상2:28-35).
<병사의 선동>
요압은 아마사를 죽인 후, 자신이 주도하여 세바를 쫓으러 출발합니다.
10b~11절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을새/ 11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본문에서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라고 표현한 것은 이제 부대의 주도권이 요압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군대장관의 위치를 회복합니다. 이후 군대장관처럼 행동합니다. 반란을 진압한 후 다윗에게 보고한 이도 요압이고(22절), 이후 다윗이 조직을 재정비하였을 때 다시 군대장관의 위치에 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는 것을 보고 유다의 군사들은 당황하였습니다.
이때 요압의 부하 하나가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11절) 하며 요압을 따르는 것이 곧 다윗을 위하는 일이라고 외칩니다.
이 말을 쉽게 풀어쓰면 이런 말입니다. “요압을 지지하는 사람과 다윗 쪽에 선 사람은 요압 장군을 따르시오!”(새번역)
그럼에도 병사들이 길 가운데 있는 아마사의 시체를 보고 놀라며 주저하자 이 청년이 아마사의 시체를 밭으로 치우고 옷을 덮어 숨깁니다.
12~13절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13 아마사를 큰길에서 옮겨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아가니라.”
그제야 요압을 따라 세바 추격에 나섰습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죄악은 방치하지 말고 신속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세바의 반란을 초기에 진압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죄의 문제와 연결시켜 보면, 우리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죄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죄는 마치 우리가 경험하는 육체의 질병과 같습니다. 즉 육체적 질병의 경우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하면 완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치하면 작은 병도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될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악도 작은 것이라고 해서 방치하면 누룩처럼 삽시간에 번져 결국 큰 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방치하지 말고 신속하게 대처해서 회개하고, 죄는 뿌리째 뽑아내야 할 것입니다(히12:15).
둘째, 사탄의 속임수에 당하지 않으려면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사의 비참한 죽음은 그가 방심하였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요압을 당연히 경계하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칼이 땅에 떨어진 것만 보고 안심했습니다.
그의 속임수에 당하였습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무서운 얼굴로 다가오겠습니까? 아닙니다. 양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실제는 늑대입니다. 다만 가면을 썼을 뿐입니다.
고후11:14(사도 바울 –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권면)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그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지나친 권력욕으로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건강하지 못한 다윗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반목(反目)입니다.
다윗이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운 것도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인사였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휘둘린 인사였습니다.
또한, 요압의 행동 역시 정당하지 못했습니다. 말은 다윗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아마사의 죽음 역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다윗 편에 서지 않고 압살롬 편에 서서 다윗을 대적한 하나님의 벌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 왕국에서 다윗의 반대자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칼 역할을 하였지만, 그러나 요압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권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단지 다윗의 이스라엘 공동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사랑과 서로에 대한 이해가 가득 차 있어야 할 많은 교회 공동체에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반목들이 존재합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교회의 분열 소식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고 각자가 원하는 형태로 교회를 바로잡겠다고 외치지만 정작 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냉소적입니다. 이것은 슬픈 우리들의 자아상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시하는 공동체입니다. 성장만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과는 다른 공동체입니다. 과정을 무시하며 결과를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주님께서 주신 질서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요압과 같은 사람들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내가 요압 같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작은 죄라도 방치하지 말고, 내 마음에 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신속히 대처하여 뽑아내시기를 바랍니다.
방심하지 말고 늘 깨어 기도함으로, 영적으로 깨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신앙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요압과 같은 자가 되지 않도록 늘 겸손한 마음으로, 스스로 낮아져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지켜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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