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한 첩첩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시냇물이 흘러내리고 물레방앗간이 놓였다. 그 왼쪽 위편 숲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민 오두막을 향하는 물동이를 인 여인의 뒷모습이 마치 흐르듯 흐릿하고 고요하게 놓여있었다.
액자틀에 입혀져 오로지 감상의 대상으로, 작품으로 존재하던 그림. 이런 그림들은 내 어린 시절엔 귀했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시절 일상에 들어와 있었던 액자에 담긴 유일한 그림은 이 산골짜기 풍경화였다.
신작로를 따라 양 옆으로 길게 집들이 들어선 우리 동네는 집집마다 점방이 있었다.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점방은 비어 있었기에 안방과 작은방으로 들어가는 지나치게 넓은 현관이 되어 버렸다. 그 점방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안방 미닫이 문 위벽에 이 그림이 걸려있었다. 어디서 온 그림인지 부모님께 여쭤본적은 없지만... 아마도 당시 우리 동네에서 가장 부유했지만 불미스런 불명예를 안고 급히 떠나야했던 이 집의 전 주인들이 걸어둔 그림이 아닐까 싶다. 인쇄기술이랄 것도 없던 시절 이 그림은 원본이었을 것이다.
집을 들락거렸던 횟수만큼 보았을테니 대체 얼마나 자주 이 그림을 보았던 걸까?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가슴이 스산했다. 분명 아름다운 풍경화라고 그렸을테지만 내겐 너무 외롭고 쓸쓸해보였다. 긴 수평선과 하늘과 바다가 경험한 풍경의 전부였던 내게 숲 그림은 풍성한 감각적 환영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림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립되고 박제된 세상 속, 홀로 산을 향해 걸어들어가는 여인이 가엾었다. 저 그림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바깥 세상으로 연결되는 길은 어디로 나 있는 것일까? 나는 그림을 올려다보며 필사적으로 그 길을 찾아보려했다.
그 골짜기에 유기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악몽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림과의 첫 만남이다.
비슷한 시절, 크리스마스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일년에 단 한번 교회에 갔다. 성암교회라고 유치원을 운영하는 곳이었다. 언니는 첫째의 특권으로 예쁜 베레모에 망토 원복을 입고 성암유치원에 다녔지만 나는 둘째로, 더구나 딸이라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추운 겨울, 마루바닥은 차가웠고 어두운 실내 찬바닥에 빼곡하게 사람들이 들어찼다. 산타분장을 한 젊은 어른들이 앞에 앉아서 활짝 웃으며 사탕을 나눠줬다. 어린 내 눈에 전혀 늙지 않는 이들의 노인복장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빨간 산타옷과 눈부시게 흰 수염 뒷편 컴컴한 어둠 건너에 그림 한점이 걸려있었다. 삐적 마르고 노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벌거벗은 남자가 나무형틀에 고개를 갸웃하고 매달려 있는 그림이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있는데 높은 곳에 걸려 있는 그 그림이 이 교회에서 경배하는 어떤 높은 존재인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그림 때문에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노란 머리에 파란 눈동자, 가시 면류관을 쓴 고통받는 이국의 남성은 생경하고 기괴했다. 그 중 겹쳐진 발에 박힌 못은 떠올리기만해도 끔찍했다. 그 끔찍한 고통의 매력에 이끌리는 종교가 기독교의 본질일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어린 내 생활세계와 겉도는 그 그림은 악몽으로 재현되었다.
꿈을 꾸었다. 노랑 파마머리에 파란 눈을 하고 홀쭉한 볼에 긴 얼굴, 합죽한 입을 지닌 이국의 여자가 우리 동네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당시 간절히 원했던 던 아이템, 나일론 꽃무늬 속치마 원피스를 입고 골목 이곳저곳을 누비다 우리 뒷마당에 구석에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다. 미친*이었다. 심란했다. 심지어 히스테릭하게 깔깔 웃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꿈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러다 초등 고학년 시절 우리 집에 새로운 그림이 걸렸다. 예쁜 여자아이를 바라보는 가운데 앉은 남자아이를 질투심에 흘겨보는 못난 여자아이. 아이 셋이 한 벤치에 앉아있는 그림이었다. 진품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께서 어디선가 구해오셨고 그 그림이 안방에 걸린 날 부터 밥상에 둘러앉는 시간이면 나는 눈물을 뺐다. 그 그림 속 질투심에 눈을 흘기는 여자 아이가 나를 똑 닮았다는 아버지의 놀림이 시작되면 엄마에 언니에 동생들까지 맞장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건 심란한 규정이었다. 나는 주인공이 되지 못한단 말인가??? 억울하고 서럽고...어떤 예언같이 다가와서 나는 극구 저항하다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러니 그림이라는 대상이 달가운 존재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난생 처음 그림책 전집을 만났다.
당시 책장수들이 전집상자를 짊어지고 "책 사시오~~~" 외치며 책을 팔러 다녔다. 우리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가 하루는 책장수를 전방 마루에 들이고 그림동화책을 쭉 늘어놓고 읽기 시작했다. 나도 아버지 옆에서 한권 펼쳐들었다. '미운 오리새끼'였다. 아마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그림책인 듯 싶은데 그림은 사실주의풍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에 이국적인 인물들이 다채로운 색조로 그려져 있었다. 이야기의 정서를 잘 표현해낸 그림들이 마음에 파문을 던졌다. 과연 책을 팔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는 책장수 아저씨의 존재를 잊고 독서삼매경에 빠진 부녀는 지금까지 접하지 못한 이미지와 이야기의 향연에 매료됐고 책은 우리집에 안착했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을까? 지금도 거의 모든 그림들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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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기의 그림이라...
아동기, 그림 한 점과의 만남은 강렬한 경험이 된다. 안타깝게도 내 아동기에 벌어진 그림과의 대면은 그림동화책과 만나기 이전까지는 심란했다.
부모의 손을 잡고 추상미술, 현대미술을 관람하러 다닐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피카소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아동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그의 전시회를 보고 나서 나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데이비드 호크니의 노르망디 드로잉들을 보았다면, 그의 색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다양한 보는 방식을 접했다면...
요즘 수채화공부를 시작하면서 내가 그리는 방식을 돌아보게 되는데.. 사실주의, 자연주의적 방식이 아닌 좀 더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향해 개방되지 못하는 답답증을 느끼곤 한다.물론 수업을 따라가면서 표현을 위한 기초를 배우는 과정에서는 불가피한 수련이다. 성실히 임하고 있지만 내가 보는 방식은, 내 스타일은 어쩌면 구제불능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불안해진다. 환경과 교육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고보면 내 그림 공부는 척박한 땅에 농사짓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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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알아보는 시도라고 가볍게 생각하기로 하자. 그림 한 점도 보지 못했던 아주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서, 그럴 수 있다면... 다시 보자... 격려한다. 데이비드 호크니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