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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품 합평 자료 (1학기-8차시 2025. 4. 26 토)
1. 불빛/남경수3
1. 매일 밤 불빛을 본다. 강 건너편에 수많은 아파트 불빛, 혈류처럼 흘러가는 자동차의 불빛, 그리고 저 멀리 공단에서도 불빛이 깜빡거린다. 흰 불빛, 노란 불빛, 파란 불빛, 초록 불빛. 빨간 불빛들.
2. 도시의 불빛은 살아있다는 삶의 신호 같다.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것이기도 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느낌을 준다. 간혹 새벽에 깨어서 창밖을 보면 불빛이 없는 도시는 생기를 잃고 잠든 것처럼 느껴진다.
3.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어린 시절 집 앞마당 평상에 앉아 바라보던 자동차의 불빛이다.
4. 차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언덕배기에 위에 있는 집이라서 건너편에 새로 난 도로가 빤히 보였다. 남향이었던 우리 동네에는 집들이 많았지만, 북향이었던 길 건너편에는 집이 거의 없고 논밭뿐이어서 밤이 되면 캄캄했다,
5. 드문드문 차가 지나갈 때면 헤드라이트 불빛이 부채꼴 모양처럼 퍼져서 어둠을 헤쳐 나가는 모습이 신기했다, 어디인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 같았다. 불빛이 아스라이 멀어져 가면 다시 또 깜깜한 밤이 되었다. 고요한 어둠속에서 살아 움직이던 그 불빛은 너무나도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있다.
6. 문화답사를 다닐 때도 돌아오는 길에서 불빛을 만났다. 먼 곳을 여행하다 돌아오는 저녁 길엔 마을마다 저녁을 짓는 뿌연 연기와 함께 불빛이 피어올랐다. 버스 창가에서 바라보던 그 불빛은 따스하고 정겨웠다. 어두운 밤에 불이 켜진 집은 돌아갈 고향처럼 느껴져서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7. 아들이 초등학생일 때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서울에 있는 박물관 투어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인사동에 갔다가 괜찮은 그림 전시회가 있어 그림을 보러 갔었다. 그 많은 그림 중에서도 어떤 그림 한 점이 마음에 들어와 꽂혔다.
8. 그 그림은 캄캄한 골목길에 가로등이 커져 있고 걸어가는 두 남녀의 그림자가 있는 그림이었는데 보는 순간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졌다. 어릴 적 살았던 우리 동네 같은 익숙한 골목길과 가로등 불빛이 너무 따뜻했다. 잊고 있었던 무엇인가를 건드린 느낌. 그것은 사랑이었다.
9. 언젠가 금오도에 갔을 때도 펜션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불빛을 보았다. 그것은 맞은편 섬에 점처럼 커져 있었는데 이곳이 육지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불빛은 너만 외로운 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두운 섬에서 솟아나는 불빛을 보는 게 왜 그리 따뜻할까?
10. 여름 바닷가에 갔을 때 저녁을 먹고 의자에 앉아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등대 불빛이 깜빡 깜빡거렸다. 자세히 보니 하나는 가까운 곳에 있고 하나는 멀리 있는 등대였다. 여기서 깜빡하면 조금 있다가 저기서 깜빡거렸다. 외로운 바다 위에서도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아,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대화를 하는구나! 외롭고 쓸쓸한 밤바다에서 서로를 보듬어 안아주는 불빛이었다.
11. 붉은 기운 너머로 낮이 차츰 이별을 고하고 푸른 저녁이 찾아올 때 켜지는 불빛이 있다. 그 시간대가 되면 가로등에 하나 둘 씩 불이 커지기 시작한다. 아직 밤은 멀고 산의 선이 선명해질 때, 별들이 고개를 내밀 때, 집집이 불이 켜질 때, 하늘은 점점 파랗게 짙어 오고 푸른 저녁이 이별을 고하며 사라지기까지. 현실 세계에서 동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마법 같은 불빛이다. 가슴속에서 그리움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12. 불빛은 따뜻하다. 불빛은 외로움을 덜어준다. 움직이는 불빛은 활기를 주며 숨어 있던 에너지를 끄집어내어 준다. 그리고 다시 꿈꿀 수 있게 한다. 밤하늘에 별을 볼 수 없으면 어떠한가? 불빛이 있는 밤이 있기에 외롭지 않다.
2. 보스포루스해협의 여정 (1) / 손철화 3
1. 얼마 전, 튀르키예 여행을 다녀왔다. 이름난 관광지가 많았지만 가장 관심을 끈 곳은 보스포루스 해협이었다. 그 위치와 역할은 물론 역사가 대단해서였다. 지금도 실존적 가치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 매력 중의 매력이다. 이틀 동안 양안兩岸과 유람선에서 이 해협을 만나 보았다.
2. 튀르키예는 동서양에 걸쳐있다. 아나톨리아반도와 발칸반도의 동남쪽 일부가 그 국토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두 반도 사이의 좁은 바다로서 동서양의 경계이자 이 나라의 내해다. 여기는 지정학적 요충지라 복잡한 역사와 숱한 이해 당사국들을 품고 있다. 하루 이틀쯤 둘러보는 일정이나 가이드의 설명만으로는 그 실체에 접근하기 어렵다. 알아듣고 놀라고 감동하기 위해서는 바다에 가라앉은 역사를 미리 건져 올려야 한다.
3. 출발 전에 이곳에 관한 책과 인터넷정보를 훑었다. 편도 열두 시간 비행기를 타는 수고를 헛되이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작용하였다. 튀르키예는 우리와 끈끈한 관계요, 이 해협에는 우리의 국력이 닿아있는 곳이라 그럴 만한 가치도 있었다.
4. 물은 흔히 경계를 이룬다. 낙동강 하류는 고향 김해와 양산을 나누고 밀양과의 경계를 짓기도 한다. 6세기 중엽까지 김해는 가야 땅이었고 양산‧밀양은 신라의 영토였으니 낙동강은 국경이었다. 강은 현세와 내세를 구분 짓는 개념으로도 쓰인다. 물은 그만큼 뚜렷한 경계가 될 수 있다. 강도 이럴진대 바다는 더욱 국경이 될 소지가 크다.
5. 보스포루스 해협은 국경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지리적으로 그 북쪽은 흑해이고 남쪽은 마르마라해라서 흑해에서 에게해나 지중해로 나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여기를 틀어막으면 흑해 연안의 국가들, 러시아를 비롯하여 불가리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 5개국은 사실상 내륙국이 되므로 이들은 이 해협을 공해公海로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또 옛날부터 해협 서쪽에는 유럽계 그리스인들이 살았고 동쪽에는 아시아계 튀르키예인들이 살았기에 두 민족은 이 물길을 경계로 하여 따로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6. 그러함에도 해협이 튀르키예의 내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이 잘되면 배 아파하는 냉혹한 국제사회의 파워게임에서 용하게도 해협 전부를 손에 넣었다는 것, 그것도 제1의 도시 이스탄불의 중간에 있다는 사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한강이 서울을 남북으로 나누듯 해협은 이스탄불을 동서로 나눈다. 길이 31km에 폭은 좁은 곳이 700m 남짓하다니 한강보다 짧고 좁다. 그러나 수심은 110m나 된다. 지진의 작품이라는데 신기할 따름이다.
7. 이 나라 조상은 본래 유목민으로서 영어로는 투르크, 한자로는 돌궐突厥로 불린다. 흉노족의 한 갈래로 보는 견해도 있다. 6세기 몽골과 중앙아시아를 호령했던 유연柔然의 지배를 받다가 지도자 부연카간이 유연을 쓰러트리고 돌궐제국을 세웠다. 이때 이웃한 고구려와 티격태격했으나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고구려를 도와주었고 또 당나라를 견제하고자 고구려와 형제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와 튀르키예는 형제의 나라’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8. 돌궐은 7세기 중반, 일부는 당나라에 복속되고 일부는 실크로드를 따라 서진하면서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11세기 중엽 지도자 셀주크가 셀주크트루크를 세워 고토古土를 어느 정도 회복했으나 유럽의 십자군에게 시달리다가 몽골에 멸망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서아시아 일대에 흩어져 살다가 1299년 오스만제국을 세워서 다시 역사의 무대로 나왔다. 이 제국은 대로마제국을 무너트리고 700년 넘게 번성했다.
9. 오스만제국은 서유럽을 제외한 지중해 연안, 흑해 연안, 중동지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이었으나 1차대전 때 동맹국에 가담하는 바람에 패전국이 되어 멸망하고 여러 나라로 분할되었다. 이때 독립한 그리스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이스탄불을 과거 자신들의 영토라 하여 강한 수복 의지를 드러냈으나 튀르키예인들은 건국의 아버지 케말파샤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그리스와 전쟁을 벌였다. 이 무렵 1차대전의 승전국 대표 영국이 개입해서 케말파샤에게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에게해에 있는 모든 섬과 이스탄불을 포함한 동트라키아지역(발칸반도의 동남쪽 끝부분)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이에 케말파샤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리하여 동트라키아는 튀르키예의 영토가 되었고 에게해의 섬들은 모두 그리스가 차지하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이 튀르키예의 내해가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0. 튀르키예는 이 해협을 차지함으로써 지역의 패권국이 되었다. 지나는 선박들로부터 거두는 통행료 수입도 짭짤하거니와 해협을 지렛대로 하여 러시아를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에도 자연히 입김이 세어졌고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그 주가는 더욱 높아졌다. 지도자의 판단이 국가의 백년대계에 끼치는 영향이 어떤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11. “튀르키예 국민은 케말파샤를 위대한 국부로서 거의 신격화합니다. 그에 대한 이 나라 국민의 존경심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향한 우리의 두 존경심을 합친 것 이상입니다.”
정곡을 찌른 가이드의 표현에 고개를 끄덕였다.
12. 보스포루스 해협 덕분에 이스탄불은 고대로부터 발전하였다. 본래 ‘비잔티움’으로 불렸는데 일찍이 그리스의 식민도시였다가 한 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1세기경에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어 330년에는 드디어 로마의 수도가 되었다.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고 서로마가 멸망하자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름을 바꾸고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삼았다.
13. 이 도시는 초원길 실크로드의 종착지라서 동서양의 문물이 넘쳤고 섞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물길을 따라 남북의 문화도 융합하였다.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지금도 그리스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튀르키예가 속해있는 아나톨리아반도를 ‘소아시아’라 한 것도 그리스인이요, ‘보스포루스’라는 해협의 이름도 그들이 지은 것이다. 보스포루스는 ‘소가 건너간 강’이라는 뜻인데 이는 그리스신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4. 오스만제국은 이 도시를 ‘코스탄티니에’로 부르면서 동로마에 이어 수도로 두면서 선진 로마의 문명에 자신들의 전통과 재주를 섞었다. 로마와 오스만은 인종, 문화, 종교에서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임에도 오스만이 순순히 로마의 문명을 답습하였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로마의 문명이 출중했던 점도 원인이지만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겸손과 실리적 자세가 더 큰 이유였으리라. 자신들의 말발굽 아래 놓인 문명은 무조건 파괴하고 약탈했던 몽골의 행태와는 사뭇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고려를 침입한 제국이 몽골이 아니고 오스만이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예로, 조선이 쇄국을 하다가 망한 사실을 볼 때 ‘다른 문명에 대한 지도자의 이념은 나라의 명命을 좌우한다.’고 말할 수 있다.
15. 정작 로마의 문명을 파괴한 세력은 십자군이었다. 십자군의 목표는 이슬람 치하의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었는데도 제4차 십자군은 재물에 눈이 멀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입하였다. 이들은 3일 동안 이 도시를 처참하고 무자비하게 유린하고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는 로마가톨릭교회에 의한 동방정교회의 파괴와 약탈이었으며 이로써 기독교의 대분열이 초래되었고 동로마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다. ‘단일 사건으로는 역사상 최대의 문명적 재앙’이라고 까지 말하는 역사가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스탄불 박물관에는 일부가 날아갔거나 깨진 조각품이 많았다.
16. 1922년 오스만제국이 멸망하고 튀르키예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이 도시는 이스탄불로 개명되었다. 공화국은 수도를 앙카라로 정했으나 이스탄불은 그 후에도 점점 커져서 보스포루스 해협의 동쪽까지 영역을 넓혔다. 인구 1,600만의 세계 5위의 도시다. (1부 끝)
3. 연두색 예찬 / 정진혜 1
1. 매년 4월이 되면 온 천지가 연두색으로 가득하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그런 연두색을 창조하는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게 하는 이 계절을 나는 좋아한다. 이 시기에는 도로 양옆 가로수도 연한 연두색으로 하늘거리고, 시내 곳곳의 크고 작은 공원도 연두색 빛깔로 가득하고, 근처 산들도 모두 연두색으로 내 마음을 설레게 하고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2. 비 내리는 날에 우산을 쓰고 공원에 가면 연한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과 목마름에 빗방울을 받아 싱그러움이 한껏 오른 연두색 잎사귀를 보면 예쁘고 그 부드럽고 연함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연두의 잎사귀를 보러 가까이는 공원이나 솔마루길을, 좀 더 멀리는 문수산, 영남알프스의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 그리고 운문산, 고헌산, 천황산, 재약산을 올라간다. 올라가며 내려가며 어떠한 인공으로 만들어 내지 못하는 자연의 색을 만끽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지친 육신의 피로도 풀어주고 마음도 편안해짐을 느낀다.
3. 계절의 여왕인 5월이 되면 연두색 잎사귀들이 조금씩 초록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나는 자못 그 연두색이 아쉬워 5월엔 강원도 설악산을 찾곤 한다. 울산은 4월에 연두색이 한창이지만 설악산에는 5월에 그 연두색이 절정이다. 오색약수터에서 대청봉으로 다시 중청과 소청대피소를 거쳐 봉정암을 들러 물을 보충하고 다시 백담사계곡으로 하산을 한다. 봉정암에서 백담사까지 내려오는 길이 10km인데 그 하산길은 처음부터 백담사까지 물소리가 들리고 내설악의 아름다운 풍경에다 연한 연두색 잎사귀들이 겨우내 움추렸던 기지개를 봄바람과 어울려 화답하는 모습은 과히 장관이다. 올해도 설악산 연두를 만나러 가는 계획을 세워 본다.
4. 4월의 어느 날 선암호수공원에 연두색 경관을 찾아 나섰다. 운동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연한 연두색 자연도 실컷 보고 일석이조인 셈이다. 집에서 신선산을 넘어가면 선암호수공원이다. 아니면 차를 타고 돌아서 공원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가야 하는데, 연두색을 더 많이 보려고 신선산을 넘어서 수변공원 가보기로 했다. 한참 힘든 오르막을 올라가는데 군데군데 연두색 새순들이 올라와서 바람에 하늘거리고 그 옆에는 붉은색 철쭉도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울창한 소나무 아래에는 햇빛도 차단한 채 부드럽고 연한 이름도 모르는 연두빛 앞사귀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싱그럽다. 예뻤다.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나무계단을 올라 신선산 정상 정각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보았다. 푸르고 높은 하늘과 연두색 천지가 어우러지고 가슴이 펑 뚫리는 느낌이다. 공기도 맑고 상쾌하다. 일주일이 즐거울 것 같다.
신선산을 넘어 수변공원으로 내려갔다. 호수를 주변으로 공원을 조성하여 주위에 나무, 꽃들로 시민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선암호수 한 바퀴를 도는데 두시간 정도 소요된다. 산책길에 1번에서 30번까지 번호를 달아 산책하는데 도움을 주며, 산책길 내내 호수(물)를 둘레길 삼아 걸을 수 있어 마음이 편안하고 여름에는 시원해서 울산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나는 8번에서 시작하는데 개나리가 노란색을 꽃으로 나에게 ‘어서오셔요’ 하고 반기는 것 같다.
그 길을 따라 왼쪽에는 호수 오른쪽에는 산이다. 물 위에 비친 나무들의 군상과 산의 자태를 보며 황홀하여 핸드폰 카메라를 눌러 본다. 데칼코마니를 연상된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하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그 풍경이 얼마나 예쁘고 선명하고 아름다운지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호수 속에 비친 연두색 나무와 산이 반으로 접어놓은 도화지 같아 보인다.
5. 매일 그리고 매월 바뀌는 자연이 주는 신비로움과 4계절의 변화에 감사하고, 고맙다는 마음을 든다. 문득 겨울이 시샘에 봄이 올 듯 올 듯 하더니 어느새 훅하고 봄이 와 버린 느낌이다. 이제 여름이 오려나 보다. 군데군데 피어있는 수선화와 금낭화, 제비꽃들도 그리고 내가 모르는 이름 모르는 꽃들도 모두 수변공원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하고 있다. 한 바퀴 둘러 나를 반겨준 개나리와 간단한 눈맞춤으로 인사하고 다시 신선산을 뒤로 하고 되돌아온다. 오늘도 건강하게 자연과 벗하여 일상을 즐길 수 있어 기쁘다.
6. 매년 4월이 오면 연두색 향연이 기대되는 진짜 이유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그 연두색을 좋아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과 더불어 나도 매년 성숙하였으면 좋겠다.
4. 새벽 첫 기차를 타며./신준영2
1. 2025년 1월 1일부터 부산의 부전역과 강원도의 강릉역을 오가는 동해선이 개통되었다. 그 철길의 기착지 중에 현재 근무하고 있는 발전소와 인접한 흥부역이 있다. 흥부역과 발전소는 왕복 2차선 길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어 마치 발전소 직원을 위한 역인 것 같은 느낌이다.
2. 매주 운전을 하며 울산과 울진을 오갔던 나에게 동해선은 여간 편한게 아니다. 가족들도 먼 길 운전하는 동안 걱정을 하지 않아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동해선을 이용하여 매주 금요일 저녁 기차로 울산에 와서 월요일 새벽 첫 기차를 타고 울진으로 돌아간다.
3. 개통 첫 한달은 표를 구하지 못하다 2월부터 겨우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매주 월요일 새벽에는 태화강 역에서 첫 기차를 기다리게 되었다. 첫 기차를 기다리는 플랫폼에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젊은 친구들도 간간히 보였지만, 어르신들의 수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그들의 옷차림과 표정을 보면 대부분 여행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출퇴근용 백팩을 매고 일터를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며 느껴지는 여행자의 들뜬 마음이 마냥 부러웠다.
4. 새벽 어둠을 가르며 기차가 역 안으로 들어왔다. 새기차라서 그런지 객차 내부는 넓고 깨끗했다. 차문이 열리며 기차에 오르는 사람들을 따라 차분한 느낌의 새벽 공기가 들어와 객차 안을 가득 채운 듯 내부는 조용했다. 배정된 자리에 앉아 도착 시간 즈음으로 알람을 맞춘 후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2시간여 자고 일어나면 회사 앞 흥부역에 도착했다. 너무나 편했다.
5. 고요한 새벽기차의 기대는 3주째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한창 자는 도중에 바로 앞사람들의 대화소리에 눈을 떴다. 조용한 내부를 의식한 소근소근 대화가 아닌 한낮의 일상 대화톤이었다. 몇 번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소용없었다. 짜증은 났지만, ‘여행의 들뜬 기분에 그렇겠지, 나도 저럴 수 있어.’ 하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 소리를 키웠다. 그럼에도 그들의 대화소리는 귓속을 꽉 채우는 음악을 비집고 들어왔다. 직접 말을 할까? 아니면 승무원에게 부탁을 할까 고민을 잠깐 하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응. 나야. 출근 잘하고 있어? 기차 안이 시끄러워서 잠을 못자겠네.”
나도 그들이 들을 수 있게 그들의 톤과 비슷하게 말을 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으나, 막상 조용해지니 한편으로 그들의 설렘을 깬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6. 기차에서 만난 회사 동료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자기도 전화 통화를 크게 하는 사람에게 한마디 했다며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건데 공공예절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를 하며 오지랖과 미안함 사이에서 불편한 마음을 달랬다.
7. 그 일이 있은 다음 주 첫 기차도 여전히 관광객들이 많았다. 역시나였다. 이번에는 내 자리와 몇 칸 떨어진 곳이었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은 어르신들의 대화는 자식들 자랑과 집안 사정, 현재 각자의 병명과 치료 방법으로 이어졌다. 이어폰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도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는 승무원에게 신고를 하려고 앱을 깔고 신고버튼을 터치하려다 ‘바로 뒷자리 사람도 가만히 있는데, 몇 줄 뒤에 있는 내가 그것도 못 참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음악 볼륨을 더 높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바로 뒤에 앉아있다 같이 내린 중년의 부부가 ‘그 사람들 술까지 마시고, 떠들어서 힘들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8. 참 원망스러웠다. 공공장소에서의 소란이 새벽의 단잠을 깨워서가 아니라 세대에 대한 혐오가 생기게 만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곧 그들의 나이에 근접하는데, ‘나는 저렇게 늙지 안아야지’하고 다짐을 했다.
9. 어릴 적 나에겐 그 세대들은 지혜롭다고 생각했었다. 소위 가방끈이 길고 짧음을 이야기하는 지식의 유무가 아니라, 오랜 세월 갖은 역경을 온몸으로 부딪혀 이겨내며 켜켜이 쌓인 경험들이 삶에 대한 자세와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혀 젊은이들이 알 수 없는 것을 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사람들이 여려움에 쳐해 있을 때 넌지시 건네는 그들의 말 한마디는 당장 눈 앞의 문제가 아니라 몇 수를 더 바라보고 이야기한다고 믿었었다.
10. 어떤 작가가 옛날 어른들과 지금 어른들의 차이점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한 적이 있다. 옛날 어른들은 자식들과 의견 대립이 생기면 ‘그래, 내가 뭘 알겠니? 다 네가 알아서 해라.’ 였다면, 요즘 어른들은 같은 상황에서 ‘네가 뭘 알아!’ 라고 한다고 했다. 그 말에 백번 공감한다.
11.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그에 따라 생각도 그 속도로 바뀐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기본은 아직까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굳이 거창한 지혜까지 가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새벽 첫 기차의 소란 속에서 이어폰의 볼륨을 높이며 생각하며 다짐한다.
‘난 저렇게 나이 들지 않아야지.’
5. 방수 공사/ 문성미 2
1. 물은 건물의 가장 은밀한 틈을 찾아 스며든다. 한때 빈틈없이 견고했던 집이라 해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은밀한 침입을 완벽히 막아낼 수는 없다.
2. 여덟 식구가 와글와글 부대끼며 지내던 집에 남편과 나, 둘이서 지내면서 공간이 늘었다. 둘이서 다 채우지 못하는 큰 집은 세월의 무게 탓인지, 가족들의 온기가 그리웠는지 벽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3. 지난달, 며칠 내리 봄비가 내렸다. 베란다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싶어서 2층에 올라갔다가 서재 천정에 번진 얼룩을 발견했다. 축축하게 물기를 머금은 벽지가 부풀어 보였다. 남편이 바닥에 대야와 타월을 깔고 무겁게 쳐진 벽지를 찌르니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4. 비가 그친 후에도 다음날까지 물방울은 떨어졌다. 천정에 생긴 축축한 갈색 얼룩에 후줄근한 기분이 들어 부지런히 방수 관련 정보를 검색했다. 방수 방법이나 도료에 따라 시간과 비용이 천차만별이라서 몇몇 업체와 통화를 했지만, 결정이 쉽지 않았다.
5. 남편이 작은 처남에게 연락해 볼까, 물었다. 작은오빠는 B시에서 작은 방수공사 업체를 운영한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서로 편하게 통화하며 연락했지만, 아버지가 떠나고 난 다음부터 작은 오빠는 가족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6. 오빠는 남편이 물어보는 것마다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남편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혼자 옥상 방수공사를 한다고 하니, 염려한 오빠가 와서 도와주겠노라 했다. 다음 주말에 시작하자며 재료와 도구는 챙겨올 테니 옥상 바닥을 최대한 깨끗하게 쓸어놓으라고 했다.
7. 통화를 마치고 바쁘게 옥상으로 올라가는 남편을 따랐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바닥은 여기저기 금이 가 있고, 방수층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곳곳이 부풀어 올라와 있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옥상을 오르내렸다. 빨랫줄 가득 널린 빨래가 햇살과 바람에 펄럭이곤 했다. 아이의 볼처럼 반질하게 윤이 났던 옥상 바닥이 이렇게 퍼석거리며 흙먼지를 날리고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8. 토요일, 오빠가 왔다. 종일 걸린다며 앉아서 한가득 실린 짐들을 차례로, 옥상으로 올린 다음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옥상의 표면 상태를 철저히 점검해서 균열이나 손상된 부분을 꼼꼼하게 메우는 일이 준비 작업이었다. 바닥을 깨끗하게 쓸어놓아서 작업을 바로 시작할 수 있다는 칭찬에 그라인더로 갈아내고 청소기까지 돌리며 고생했던 남편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9. 둘이서 한나절을 쉬지 않고 일했으니 많이 뭔가 달라졌겠다고 생각하고 올라갔지만, 바닥은 달라 보이지 않았다. 무슨 공사를 했는지 물었더니 오빠가 웃으며 하도 작업에 대해 알려주었다.
10. 방수 하도는 표면에 침투해서 약해진 시멘트를 강화해 주고 중도와 표면의 접착을 강하게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발라도 시멘트 속으로 흡수돼 바른 티가 나지 않아서 바르고 말리기를 네 번이나 했다며 남편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시 보니 까칠했던 바닥이 제법 윤이 났다.
11.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오빠가 왜 가족 행사에는 오지 않을까? 우리 관계의 균열은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손상된 부분을 찾아 메우고 물이 새는 곳을 찾아 방수하는 일을 잘하는 오빠인데 마음의 균열과 다친 것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우리의 관계도 각자 사느라고 돌보지 못해서 공사 전 옥상처럼 여기저기 금이 가고 터진 상태인지도 모른다.
12. 볕이 좋아서 오후에 방수 중도를 바를 수 있었다. 도포 두께를 균일하게 유지하는 오빠의 손길에 옥상은 두껍고 탄력 있는 막을 두른 채 햇살을 반사시켰다.
13. 날씨가 도와준 덕분에 사흘 후에 상도를 도포하고 방수 작업을 마무리했다. 옥상에 서서 새롭게 단장된 표면을 바라본다. 겉으로는 깨끗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오빠가 메운 균열과 상처들이 숨어있다. 동생이 사는 집에 방수라는 보호막을 쳐주고 손을 흔들며 오빠가 떠났다.
14. 비가 내린 날, 옥상에 올라가 빗방울이 방수층 위로 구르는 모습을 바라보다 오빠에게 전화했다. 오빠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다. 오래된 집이 오빠의 손길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방수 공사를 보며 생각했던 오빠의 마음을 얘기했다. 조용히 내 말을 들어준 오빠는 형제가 함께 모이는 자리에 오는 것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했다.
15. 이제 우리 집은 방수라는 보호막을 두르고 한참 동안 잘 버틸 것이다. 가족이라는 집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균열이 생기기 마련이다. 각자의 마음에 금이 간 시간을 관심과 이해, 기다림으로 메울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