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중 출신이 3명 있다. 감독 김응룡(6회), 1루수겸 우익수 김정수(18회), 포수 심재원(19회)
김응룡(개성중 6회)
개성중 시절의 김응룡
현재의 김응룡
김응용(金應龍) 감독은 1941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됐지만 실제로는 1940년생이다.
용의 해에 태어나 ‘용에게 응답한다’는 뜻으로 ‘응용(應龍)’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한국전쟁 때 부친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 왔다.
개성중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해 부산상고와 실업팀 한일은행 등에서 뛰었다. 국가대표팀 4번타자로
활약하고 국가대표팀 감독을 지낸 뒤 해태 타이거즈 감독, 삼성 라이온즈 감독, 한화 이글스 감독을
역임했다. 2016년 11월부터 현재까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감독 최다승(1554승)과 프로야구 최다 우승인 10회 우승(해태에서 9회, 삼성에서1회)기록을 세웠고
야구인 최초로 프로야구단 사장(2005~2010년 삼성 라이온즈)도 역임하였다..
김정수(개성중 18회)
개성중 시절의 김정수(3학년4반 64번)
롯데2군 감독시절의 김정수
우리 히어로즈 타격코치 시절의 김정수
"고" 김정수 동기는 1953년 4월 2일생으로 부산남부민초교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부산개성중,
부산고, 한양대, 롯데 아마(76~77, 80~81년), 성무(77~80년), 프로 롯데(82~83년),삼미(84~85년),
청보(86년)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개성중시절 1년 선배인 노길상(성남고 투수시절인 1970년 24회 황금사자기 야구대회 준결승에서 경북고를
상대로 고교야구 최초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이기고 결승에 올라 대구상고에게 4-2로 이기고 우승함),
조두복(부산고,고려대 감독),동기인 김주백,후배인 심재원등과 함께 전국중학야구대회에서 2번이나 우승했다.
'70년대 아마야구를 대표하는 왼손 강타자로 개성중(18회),부산고등학교(25회)를 졸업 후 한양대에
진학해 1974년 추계대학야구연맹전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개성중,부산고 시절에는 투수로 활약했다.
1976년에는 실업팀 롯데에 입단해 팀내 간판타자로 활약했고 1977년에는 니카라과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하며 체육훈장인 백마장을 받았다.
1982년 프로 원년 롯데자이언츠의 3번에 배치돼 4번 김용희, 5번 김용철과 이른 바 ‘KKK’타선을 이뤘다.
이 타선은 해태의 김성한, 김봉연, 김준환의 ‘KKK타선’과 라이벌로 인식되며 많은 야구팬의 관심을 끌었다.
79경기 타율 2할7푼4리 11홈런 49타점으로 팀내 득점, 최다안타, 홈런, 타점 1위를 기록하며 롯데 원년
클린업트리오를 이끌었으며. 프로 통산 23홈런 114타점 타율 0.234을 기록했다.
'82년 후반기 개장한 잠실야구장에서 MBC청룡을 상대로 잠실야구장 개장 1호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86년 은퇴후 롯데에서 코치와 2군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우리 히어로즈 타격코치로 활약하기도 했다.
2014년1월13일 향년 62세로 심근경색으로 부산 자택에서 별세했다.
심재원(개성중 19회)
MBC청룡 시절의 심재원
"고" 심재원 학력 (사진은 롯데자이안츠 시절의 심재원)
1977년 11월 25일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의 레알 호텔.
아침에 일어난 심재원은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슈퍼월드컵 세계 야구대회에 출전한 심재원(당시 한국화장품)은 전날 열린 결승리그 4차전에서
푸에르토리코에 4-2로 역전승을 거둘 때 한 몫을 단단히 해 기분이 최상이었는데 잠을 자고 나니
온몸에 열이 나는 등 탈이 붙은 것이다.
8번타자 심재원이 푸에르토리코전에서 포수로 앉아 유종겸, 최동원 등을 리드하며 5회초에는
동점 발판 보내기번트를, 연장 12회초에는 멋진 히트앤드런을 성공시켜 결승점을 따내는 수훈을
세워 대표팀은 최소한 3위를 확보했다.
무덥고 끈끈한 날씨 때문에 호텔 창문을 열고 잔 게 아마도 탈이 난 원인인 듯 싶은데 이날 결승리그
최종전 상대는 1차리그에서 우리를 1-0으로 이긴 일본이었다. 꼭 출장하고 싶은데 온몸이 쑤시고
배탈이 났으니 큰일났다.
초ㆍ중ㆍ고(부산남부민-개성중-부산고) 1년 선배로 고등학교까지는 배터리를 이루었던 김정수
(아마 롯데)가 해열제를 챙겨주었지만 경기장에는 따라갈 수 없었다.
이 대회에서 1루수와 우익수로 출전하며 3번타자였던 김정수는 “선수들 중에 심재원과 김일권이
장거리 여행과 시차 적응을 못하고 본래 입이 짧아 제대로 먹지를 못하는 바람에 고생했다.
생라면을 씹어 먹으며 근근이 버텨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둘 다 경기에서 중요한 순간에는 큰 몫을 해냈다”고 회상했다.
속절없이 호텔 방에 누워 있던 심재원은 마침 선수단을 도와주던 교민 의사가 찾아 와 링거주사를
놓아주는 통에 힘이 나자 의사 선생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뒤늦게나마 소모사구장으로 달려갔다.
잘해 주던 주전포수가 드러눕는 바람에 걱정이 태산 같았던 김응룡(한일은행) 감독은 경기 시작
5분전에 도착한 심재원을 보자 “어! 괜찮아. 옷 입고 빨리 앉아”라며 힘을 냈고 박상규 단장은 핼쑥한
심재원을 부둥켜 안고 “좋아 좋아 우리 이길 수 있어”라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한국은 이 경기에서 좌완 이선희(육군)가 완투하면서 배대웅(기업은행)의 적시타로 선제점을 뽑고 1-1
동점에서 6회에 김봉연(연세대)이 솔로홈런을 날렸다. 9회에는 김정수가 적시타를 요긴하게 때려내
결국 3-2로 이겼다.
1963년과 1971년 서울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한 적이 있었으나 외국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 일본을 꺾기는 처음이었다.
이튿날 미국과의 우승 결정전에서 심재원은 몸이 나아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선발 김시진(한양대)
에 이어 3회부터 나온 최동원(연세대)을 잘 리드하다가 5회말 역전 3점홈런을 맞았을 때는 아찔했으나
6회초에 김봉연이 동점 솔로홈런을 날려주고 이해창(육군)이 2타점 적시타를 때리자 다시 기운이 났다.
5회에 구원한 유남호(롯데)와 호흡을 맞춰 끝내 5-4, 한 점 차로 승리해 한국야구가 최초로 세계 정상에
오르는 데 기여했다.
심재원은 이후 19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시 어우홍감독 체제하에서 선동렬, 최동원 등의 투수들을
잘 리드하였으며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2:0으로 리드 당하던 8회에 심재원의 안타,김정수(신일고,MBC청룡)
의2루타 ,조성옥의 희생번트,김재박의 개구리번트,이해창의 안타, 한대화의 쓰리런 홈런으로 2:5로 역전하여
일본을 꺽고 세계선수권 첫 제패의 꿈을 이루었고 이 대회 직후 프로 롯데에 입단해 84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공헌하고 85년부터 MBC 청룡,LG 트윈스에서 38세이던 91년까지 역대 최고령 포수로 활약했다.
별명이 ‘심통’이었던 심재원은 역대 프로야구 500경기 이상 출장한 포수 중 도루 저지율이 4할2푼4리
(180개 저지, 245개 허용)로 1위에 올라 있고 투수 리드를 가장 잘한 포수로 꼽힌다.
LG에서 코치로 일하던 1994년 폐암 때문에 41세의 젊은 나이로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개성중18회 동기였던 김정수도 2014.1.13 심근경색으로 부산 자택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