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양양 상운초등학교
- <가을동화>의 슬픈 사랑은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
이학주(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 원장)
2000년 가을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가을동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준서와 은서의 슬픈 사랑이야기였다. 부모가 바뀌어 남매로 함께 살다가 친부모를 만나 헤어졌다. 세월이 흘러 우연히 만난 남매의 사랑, 그러나 운명은 둘을 갈라놓았다. 풍요롭지만 쓸쓸한 가을의 이미지를 동화처럼 그려낸 드라마였다.
<가을동화>의 주인공 준서와 은서의 방이 있던 곳이 양양의 상운초등학교이다. 드라마가 끝나고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그곳엔 <국화꽃향기>를 쓴 김 작가와 도예가 정 작가가 도자기체험교실과 찻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학교의 추억과 드라마와 소설과 도예와 차[茶]가 만나 환상의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세월은 학교의 추억만을 남긴 채 모든 걸 가져갔다.
어느 덧 학생들이 뛰놀며 꿈을 키웠던 교정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교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폐교안내문과 출입금지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붕괴 위험이 있으니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녹슨 교문과 출입금지 안내문은 그 옛날 활기찬 학교의 모습을 모두 앗아갔다. 필자가 교문을 들어서자, 텅 빈 교정에는 숨이 막힐 듯 후텁지근한 더운 바람이 지나갔다.
그래도 학교의 역사를 말하듯 커다란 가지를 자랑하는 수양버들이 교문에 드리웠고, 넓은 운동장 뒤로 학교건물이 반갑게 나그네를 맞아 주었다. 하얀 토끼가 뛰는 구조물 밑에는 ‘도자기 체험’이라는 글씨가 선명했고, 이승복상, 독서상이 낡은 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이 학교터를 기증한 김상섭 씨와 박운병 씨의 공로비도 있었다. 어디 그 뿐이랴 하늘색 낡은 유리창에는 과학실, 교장실처럼 방을 나타내는 글자도 지워지지 않았다. 학교 주변은 곳곳이 정든 교정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자물쇠로 잠긴 학교 안은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세월을 탓하며 텅 빈 마음을 달래다가 상운초등학교 3회 졸업생 설자 씨를 만났다. 74세의 설자 씨는 이 마을에서 나서 여태껏 이 마을에서 살고 있다. 양양 사투리를 진하게 얹어가며 참 시원하게 말씀을 했다. 당시 설자 씨가 다니던 반 학생은 65명이었다. 입학할 때는 학교건물이 없어서 현재 학교터 뒤쪽에 천막을 치고 공부를 했다. 그 때가 6.25한국전쟁이 막 끝난 후였다. 부모들이 동생 보라하고 집안일 하라고 해서 학교에 간 날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학교에 가면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비석치기를 하던 때가 생각난단다. 그런데 면담 도중 갑자기 교가를 불렀다.
“설악의 영봉으로 우를 세우고/ 동해바다 푸른 물결 활무대 삼아/ 배우고 힘을 닦는 상운의 건아/ 함께 모여 자라나는 우리들의 생활 터”
아들딸 모두 상운초교를 나왔지만 자식들은 모르는 교가를 여태 기억하였다. 학교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했으면 70년이 지난 지금 교가를 유창하게 부를 수 있을까?
설자 씨의 학교기억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수학여행을 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학여행 장소는 설악산이었다. 양양 손양면에서 쳐다보면 눈에 곧바로 들어오는 설악산이 수학여행장소였다. 군인트럭을 타고 속초 입구에 있는 물치까지 갔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걸어서 설악산으로 갔고, 설악산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발톱에 멍이 시퍼렇게 들었다. 수학여행 간다고 새까만 치마에다가 무명으로 만든 저고리를 입었다. 그리고 전화선 철사[삐삐선이라고도 한다.]를 엮어 만든 가방을 들었다. 가방의 철사 끝이 치마에 긁혀서 새로 입은 치마에 보푸라기가 났다. 그날 밤은 설악산 신흥사 앞에 있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리고 다시 걸어서 양양 손양면으로 돌아왔다. 수학여행이야기를 하는 내내 설자 씨는 수줍은 초등학생의 얼굴처럼 고와 보였다.
바다와 가까운 곳에 학교가 있는 터라 소풍은 바닷가 솔밭으로 자주 갔다. 어떨 때는 산골짜기로 가기도 했다. 거리가 꽤 멀어 1,2학년들은 고학년 언니 오빠들과 짝을 하여 손을 잡고 걸었다. 소풍에서는 보물찾기를 하고, 부모님과 음식을 나누어 먹던 기억이 가장 오래 남는단다.
설자 씨의 학교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학교를 짓고 운동장을 다지고 고르는 일은 학생들의 몫이었다. 운동장이 고르지 못해 비가 오면 물이 가운데 고였다. 아이들은 가마니를 가운데 하고 작대기를 양쪽으로 걸어 들것을 만들어 흙을 퍼 날랐다. 가방을 가진 학생은 거의 없고 모두 책보를 둘둘 말아서 허리에 차고 다녔다. 가끔 광목천에 수를 놓아 가방을 만들고 다니기도 했다. 학교를 다니다가 집안 사정 때문에 그만두는 학생들이 많았다. 중학교 진학은 한 학년에 한두 명 갈 정도였다. 6.25한국전쟁 후에 미국에서 들어온 우유가루를 나누어 주는데, 타 먹을 줄 몰라서 밥솥에 찌면 딱딱해서 먹을 수 없었다. 그것도 많이 먹으면 설사를 했단다.
상운초등학교는 1952년 6월 1일 상운분교장으로 개교를 했고, 1953년 12월 31일 상운국민학교로 승격을 했다. 폐교는 1999년 9월 1일에 했다. 졸업횟수는 44회로 1,337명의 졸업생이 있었다. 설자 씨는 학교의 개교에서 폐교까지 모두 보았다. 섭섭한 마음이 면담 내내 묻어 나왔고, 초등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신이 난 모습이었다. 마을사람들의 희망이며 구심점이었던 학교는 그렇게 <가을동화>의 기억처럼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