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구함과 도를 성취함
장오자가 대답했다. “(당신이 질문한 문제는 너무나 커서) 그 말은 황제(黃帝)가 들어도 알지 못한 척 할 것인데, 하물며 공자가 어찌 이것을 알 리가 있겠는가! 또 당신은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오. 달걀을 보고 새벽을 알리기를 요구하며, 사냥용 탄알을 보고 올빼미 구이를 찾는 격이오. (그러니 당신 선생님이 맹랑한 말을 한다고 당신을 꾸짖은 게 설마 틀렸겠는가!) 당신이 지금 대중없이 물은 바에야 나도 당신에게 우선 적당히 말해보겠으니 당신도 적당히 그렇게 들어보는 게 어떻겠소?”
長梧子曰:是黃帝之所聽熒也,而丘也何足以知之!且汝亦大早計,見卵而求時夜,見彈而求鴞炙。予嘗爲汝妄言之,汝以妄聽之。奚?
장오자가 말합니다. 아우! 당신이 물은 이 질문은 문제는 너무 크오. 당신은 너무 크게 뻥치고 있소. 당신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우리의 저 조상인 황제는 도를 얻은 사람이지만 ‘지소청형야(之所聽熒也)’, 당신이 그에게 물어보면 알아듣지 못한 척 할 것이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한 척 하여서 당신에게 대답하지 않을지 모르오. ‘이구야하족이지지(而丘也何足以知之)’, 그는 말합니다. 당신의 선생인 공자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보기에는 장자가 공자가 모른다고 꾸짖고 있지만 실제는 공자가 모른다고 함으로써 이해하지 못한다고 표시한 것인데, 그게 정말로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장오자는 말합니다. 당신 선생님이 당신을 맹랑하다고 꾸짖었는데 공자가 옳게 말한 거요. 왜 옳을까요? 그는 말합니다. ‘차여역대조계(且汝亦大早計)’, 아우! 당신은 너무 성미가 급하오. 너무 일러요. 허풍을 너무 일찍 떨었소!
주의하십시오. 우리 일반적으로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불법을 배웁니다! ‘달걀을 보고 새벽을 알리기를 요구하며[見卵而求時夜]’, 달걀을 보면 곧 생각합니다. 야아! 달걀을 옆에 놓아두었다! 내일 아침에는 자명종 시계 켜 놓을 필요 없겠다. 수탉이 울면 내가 일어날 것이다. 당신은 달걀을 보자마자 수탉을 생각한 것이오. 그렇게 쉽겠습니까! ‘사냥용 탄알을 보고 올빼미 구이를 찾는 격이오[見彈而求鴞炙]’, 당신은 사냥용 탄알을 보고서 생각하기를, 내가 꿩 한 마리 잡았으니 내일 점심은 사냥한 짐승을 구워서 당신에게 와서 드시라고 청하겠다고 생각한 것이오. 사실 당신에게는 탄알이 손안에 있는 것에 불과하며 당신은 아직 산에 가지도 않았소. 또 사냥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문제이오. 장오자는 말합니다. 당신 선생님이 당신을 맹랑하다고 꾸짖은 게 설마 틀렸겠소?
이 단락은 천고이래의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오늘날 수도하고 있는 사람들도 거의 다들 이렇습니다. 3일 동안 정좌하여 신통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맥이 통하기를 바라고 그렇지 않으면 명심견성(明心見性)하여 도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4주 동안 정좌했는데도 도를 깨닫지 못하면 저에게 와서 말합니다. 선생님 제가 여기서 4주 동안 정좌했는데 뭐가 조금도 없습니다! 제가 말합니다. 이 건물 층에는 원래 뭐가 없었어요! 누가 당신더러 와서 앉아있으라고 했어요? 사람마다 달걀을 보자마자 수탉을 생각합니다. 사냥 탄알을 보자마자 사냥한 짐승 고기가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장오자는 구작자에게 말합니다. 아우가 선생님한테 꾸지람을 당한 게 당연한 일이오.
‘당신이 지금 대중없이 물은 바에야 나도 당신에게 우선 적당히 말해보겠으니 당신도 적당히 그렇게 들어보는 게 어떻겠소[予嘗爲汝妄言之, 汝以妄聽之, 奚]?’, 장오자는 한편으론 꾸짖으면서 또 말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지금 이미 엉망으로 내게 물은 바에야 미안하지만 나도 엉망으로 당신에게 대답하겠소. 어떻소? 그래서 우리 중국문화에 훗날 다음과 같은 성어가 한마디 있게 되었습니다. ‘고망언지고청지(姑妄言之姑聽之)’, 우선 말하는 대로 적당히 들어두라는 이 전고는 장자의 바로 이 편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청년들은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예전에 글공부 할 때는 근거를 아주 중시했습니다. 선생님이 전고(典故)가 어디에 나오는 지를 물었는데 대답을 못할 경우 손바닥이 부르터야했습니다. 요재지이(聊齋志異) 서두에 다음과 같은 명시가 한 수 있지 않던가요? 청나라 때에 왕어양(王漁洋)이 요재지이 작자인 포송령(蒲松齡)에게 써준 것입니다.
작자가 적당히 말하는 대로 독자들은 적당히 들어두오
가랑비 내릴 때 다들 모여 쉬는 정자에서
아마 작자는 인간세상 시비 이야기 짓기 싫어서
가을날 무덤 속 귀신이 읊는 시를 듣기 좋아했으리라
姑妄言之姑聽之 豆棚瓜架雨如絲
料應厭作人間語 愛聽秋墳鬼唱時
첫 구절인 ‘고망언지고청지(姑妄言之姑聽之)’인데 다들 ‘고청지(姑聽之)’란 말을 쓸 줄 압니다. 넷째 구절인 ‘가을날 무덤 속 귀신이 읊는 시를 듣기 좋아했으리라’는 바로 사람들을 꾸짖는 말입니다. 그 의미는 세상에는 사람이 없고 모두 귀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생각해 보니 그대는 인간 세상을 싫어하고 사회의 말들을 그대는 다 듣기 귀찮기 때문에 요재지이를 썼으되 모두 귀신이야기만 썼다고 했습니다. 포송령은 요재지이를 써서 왕어양에게 가지고 가 보여줬습니다. 왕어양은 십만 냥의 대가(代價)를 내놓고 그의 원고를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이름으로 내지 말고 나 왕어양이 지었다고 쓰라 요구했습니다. 포송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왕어양은 이 책이 틀림없이 세상에 널리 전해질 거작(巨作)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서문을 썼습니다. 왕어양도 뒷날 포송령을 모방하여 한 부를 썼지만 처음부터 한결같이 요재지이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명시는 오히려 전해져 왔습니다.
“성인(聖人)은 해와 달을 이웃으로 하고 우주를 옆에 끼고서 노닌다오. 또한 정신과 물질이 하나로 융합되어, 그 적멸의 경지인 활혼(滑湣) 속에 놓아두고, 만유가 평등하고 본체와 현상이 서로 완전히 평등하오. 일반 사람들은 일생동안 노역(勞役)하며 힘들게 살아가지만, 성인은 최고의 지혜 속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우둔하게 보이며, 시간과 공간 관념을 초월하였기에 만세를 살더라도 한 찰나에 불과하며 정신과 물질이 하나로 융합된 순수함을 이루었소. 만물도 다 그러해서 마음과 물질이 하나로 융합되었을 때에는 서로를 머금어 간직하고 있으면서 분별이 없는 상온(相蘊)의 경지라오.”
旁日月,挾宇宙, 爲其脗合,置其滑湣,以隷相尊。衆人役役,聖人愚芚,參萬歲而一成純。萬物盡然,而以是相蘊。
이 단락은 대단히 번거로운데, 바로 도를 성취한 경계, 도를 얻은 경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진정으로 도를 얻은 사람, 이른바 초인(超人)의 경계는 ‘방일월(旁日月)’, ‘방(旁)’은 바로 해와 달에 이웃으로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해와 달, 두 개를 구슬 삼아서 가지고 노는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협우주(挾宇宙)’, 그는 때로는 온 우주를 마치 여름날 수건으로 땀을 닦는 것처럼 몸 곁에 낀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번거롭습니다. ‘위기문합(爲其脗合), 치기활혼(置其滑湣), 이례상존(以隷相尊)’, 문자적으로 말하면 성가신 문제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장자는 위에서 ‘활의(滑疑)’라는 명칭을 하나 제시했습니다. 지난번에 ‘활의지요(滑疑之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며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내심의 스스로 그러한 광명 경지/역주)’를 한번 언급했습니다. 그랬지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활의’란 말을 사용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활의’를 쓰지 않았습니다. 앞 글자는 같은데 뒤 글자만 한번 바꿨습니다. 지난번에 활의(滑疑)에 대해서 우리는 주해하기를 공(空)도 아니요 유(有)도 아니다[非空非有]라 했습니다. 이른바 능엄경에 나오는 ‘탈점내복, 요발명성(脫黏內伏, 耀發明性)’을 인용하여 설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럼 그는 이번에는 어떨까요? 그가 제시한 ‘활혼(滑湣)’은 ‘활의(滑疑)’와 같은 것인데 그 정도가 한층 더 깊을 뿐입니다. 이 ‘혼(湣)’ 자는 혼합한다는 ‘혼(混)’ 자로서 혼혼연(混混然)하다는 것입니다. 그 우주가 혼혼(湣湣)하여, 심원하고 어둡고[幽昏之昏] 텅텅 비어 있음[空空洞洞]이 ‘활의’보다 한층 더 깊습니다. 우리가 불가의 것을 차용하여 굳이 비유한다면 불학의 적멸(寂滅)이라는 경지와 같습니다. ‘위기문합(爲其脗合)’, 도를 닦아 그 경지에 도달하면 심물일원(心物一元), 마음과 물질 그 두 가지가 서로 뒤섞여 합해져[參合], 문합(脗合), 융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치기활혼(置其滑湣)’, 이미 적멸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이례상존(以隷相尊)’, 우리가 간단하게 해석하면 바로 완전한 평등입니다. 즉,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성상평등(性相平等: 본체와 현상이 평등하다/역주)이라는 관념으로서 그 경지에 도달한 것입니다.
만약 중국문화 자신의 문자만 가지고 이 세 마디 말을 해석한다면 적어도 수천 자 혹은 만 자 정도를 써야하는데, 분명하게 해석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달려있습니다. 불학을 차용하여 해석하면 어떨까요?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위기문합(爲其脗合)’이란 심물일원(心物一元)에 도달한 것이요, ‘치기활혼(置其滑湣)’이란 이미 적멸의 경계를 증득한 것입니다. ‘이례상존(以隷相尊)’이란 만법(萬法)이 평등하고 본체와 현상이 평등한 것입니다. 이 득도(得道)의 경계는 인간세상을 떠나서 따로 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세상 속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득도의 경계라는 것입니다. ‘중인역역(衆人役役)’, 사회 일반인들이 일생동안 살면서 날마다 수고롭게 바쁜 것을 형용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모두 자기의 욕망과 신체를 위하여 노예가 되어 노역을 하는 것, 이게 바로 일반사람들인데 불가에서는 범부라고 부릅니다. ‘성인우둔(聖人愚芚)’, 득도한 사람은 어리석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최고의 지혜로서 보광(葆光)의 경지입니다. 즉, 장자가 앞서 말했던 천부(天府) 속에 있는 것이며 자기가 보광(葆光)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우둔하게 보입니다.
이때에 이르면 ‘참만세이일성순(參萬歲而一成純)’, 그는 시간관념을 초월했습니다. 장수(長壽)니 장수 아니니 할 것이 없습니다. 일만 년도 바로 한 찰나사이입니다. 그가 일만 년을 살더라도 한 찰나에 불과합니다. 수명의 길이가 만(萬)과 일(一)에 이르렀습니다. 공간의 크고 작음과 시간의 길고 짧음이 모두 합일(合一)했습니다. ‘합일’은 둘이 아니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성순(成純)’, 완전히 하나의 순수하게 맑아서 점 같은 티끌 하나도 끊어진 상태[純淸絶點]입니다. 바로 위에서 말한 ‘문합(脗合)’에 해당합니다. ‘만물진연(萬物盡然), 이이시상온(而以是相蘊)’, 심물일원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신이 일체로서 마음과 물질이 하나로 합일하였습니다. ‘온(蘊)’이란 함장(含藏), 함축(含蓄)의 의미입니다. 도는 어디 있을까요? 마음과 물질 속에 있습니다. 심신에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이시상온(而以是相蘊)’, ‘상온(相蘊)’ 이 두 글자를 해석하는데 또 불학을 차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간단명료한 것은 무분별(無分別)입니다. ‘상온’이란 조금도 분별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