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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축복사역(25) / “예수 이름이 축복입니다!”
+ 본 문 : 사도행전 4장 5절 - 12절 (신약성경 192쪽)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아멘!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의 가정과 생업, 사랑하는 모든 자녀 손들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옆의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기도한 대로 됩니다.” “축복한 대로 됩니다.”
특별한 인사를 하나 더 나누겠습니다. / ‘저랑 친해지십시오. 나중에 제 덕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
그 사랑 말할 수 없어서 /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 사람들 그 이름 /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 내 마음속에 숨겨진 기쁨 예수 오 그 이름 /
나는 말할 수 없네. /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
이 찬송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송명희 시인의 “그 이름” - 즉 “예수의 이름” 이란 시입니다.
설교가 버나드는 말하기를 “예수의 이름 속에 있는 그 비밀을 깨달은 자의 입속에는 꿀송이처럼 달콤함이 있다.
예수의 이름을 듣는 귀에는 행복한 멜로디가 울린다. 예수의 이름을 품은 마음엔 샘솟는 기쁨이 있다.”
그래서 오늘은 사도행전 4장의 말씀을 통해 “예수 이름이 축복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신약성경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치심,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복음서 마지막엔 언제나 지상명령인 “복음을 전하라!” 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그 끝을 맺고 있습니다.
4복음서 다음 성경이 사도행전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 제자 행전이라 하지 아니하고, 보냄을 받은 사람인 사도행전이라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는 내용이 아니라, 제자들이 세상으로 흩어져 목숨 걸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제자 행전이 아니라, 사도행전이라 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부흥하던 사도행전 교회가 만난, 도전과 고난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복음이 고난을 당할 때 초대교회는 좌절하거나 낙심하기는커녕, 때 묻지 않은 깨끗한 복음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위협 앞에서도, 더욱 당당히 맞섰던 용감한 복음 전도자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회의 위기와 핍박은 어느 때나, 어디서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 교회 안에서도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리고, 교회 밖에서는 비판의 소리가 더 높아만 갑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교회는 더욱 더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때 묻지 않는 말씀을 증거 해야 합니다. 예배의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찬양의 감격이 살아나야 합니다.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의 능력이 살아나야 합니다. 영혼을 건져내는 복음전도의 열기가 살아나야 합니다.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요?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이후, 어느 때 어디에서 힘들지 않은 인생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그 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 붙들고 살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이야 말로 우리가 예수 이름 하나 꽉 붙들고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은 4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2장에서 성령님이 강림하시고, 3장부터 본격적으로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전도하고 능력을 행합니다.
이어 3장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 동편 “아름다운 문”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못 걷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이 사람은 누군가 메어다 거기 앉혀 놓으면, 구걸로 연명하던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침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기도시간에 성전에 들어가다가, 구걸하던 그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함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그를 향해 외치며 선포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리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사도 베드로에게 신통한 능력이 있는 줄 알고,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주목합니다. 베드로는 그런 그들에게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마치 우리의 권능으로 이 일을,
한 것처럼 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느냐? 이 일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일” 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이를 기회로 삼아 인기를 끌려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하나님께 가야 될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 일은 너희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다.
그는 다시 살아나셨고, 그는 지금도 살아 계신다고. 바로 그 예수님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살렸다.” 고,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처럼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이적과 기사들 가운데 기도와 연결된 사건들,
그리고 복음전도와 연결된 사건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죽었던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
옥문이 열려진 사건, 또 다른 곳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 사건, 276명이 파선 위기에서 구원받은 사건 등등,
그들의 공통점 하나가 있습니다. 한결 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복음으로 연결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공했을 때에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에도, 그 모든 어려운 일들을 당당히 이겨내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해야 합니다.
이 전도의 불이 꺼진 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입니다. 이 전도의 사명을 잃어버린 심령도 죽은 영혼입니다.
“불이 타므로 존재하듯이, 교회는 복음전도의 불이 타므로 존재한다.” 는 에밀 부르너의 말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행전 3장에서 있었던 걷지 못한 사람을 고친 일로 시비가 벌어집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이튿날까지 잡아 가두고, 너희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심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듣던 비난을 사도들도 똑같이 듣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제자요. 사도입니다.
40년 동안이나 걷지 못하던 앉은뱅이를 고쳤다면 칭찬을 하고 답례를 할 일이지, 왜 이토록 말이 많은 겁니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고침을 받아 기뻐 뛰고 찬양하고 있다면, 내 자식 내 가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마땅히 함께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시비하고 핍박했을까요? 그 이유가 참 허무맹랑합니다.
자기들이 죽인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신 사건이기 때문에 무조건 싫다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케리그마”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신들의 종교와 종파에 커다란 위협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한 죄인이라고 모함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을 바로 종교지도자들이 주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누워 죽은 채로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실에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났다고 계속 외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엄청난 기적을 행합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명 때문에 존재합니다.
이 일이 제사장 무리, 그리고 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개인들에겐 종파 생존에 위협이 되었던 겁니다.
제사장들은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믿는 유대교는 거지에게 동전 한 푼 던져주는 종교로,
전락된 것입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영혼을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주는 살아 있는 생명의 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사도들이 증거 하는 교회로 그 권위가 옮겨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진실은 사도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교회만이, 사도들만이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역사 무대의 중심에 서는 위대한 터닝 포인트를 가져온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종교지도자들이 싫어하고 핍박한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부흥을 싫어하는 마귀의 짓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그 이름이 훼방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잘 하는 사람을 마귀는 정말 싫어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다고 선포합니다.
그 일로 베드로와 요한이 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귀는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싫어하는 게 당연하지요.
그렇습니다. 지금도 마귀와 마귀 편에 선 사람들은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복음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말씀을 싫어합니다. 능력 있는 기도를 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교회가 함께 힘써 기도할 때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면 싫어합니다. 그것은 곧 천국건설이요. 지옥의 몰락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부흥은 마귀세력의 쇠퇴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마귀에게 이쁘게 보일 생각은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던지, 제사장 가문이 떼거지로 모여 사도들을 심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대답을 합니다.
오늘 본문 9절과 10절 말씀이 그 대답입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는지 알고 싶으냐?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아멘입니까? 아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이 장애인이 온전하게 고침 받은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다시 살아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아 너희 앞에 똑똑히 서 있느니라. 이것을 “알라.” 고 선포합니다.
너희들이 하찮게 여겼던 나사렛 출신 예수는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그 예수는 무덤 속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시고, 능력을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이요. 그 능력의 이름으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이 사람을 고쳤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선포합니다. 영생을 얻었다고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명하면, 왜 귀신이 두려워 떨며 도망갈까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고, 선포하면, 왜 모든 병이 고쳐질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놀라운 복음의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이심이라.” 아멘!
그렇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으면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의 온갖 복된 약속이 다 보장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우리의 모든 죄 짐을 해결해 주고, 지옥 형벌을 면하게 하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분도 바꾸어 줍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마귀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 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즉시 시행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바로 그 이름은 기도응답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 이름은 모든 일을 이루시는 능력이요. 예수 그 이름은 살아있는 영원한 생명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 이름은 교회의 머리가 되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이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예수 이름 외에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이름을 여럿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 하나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의 문선명의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신천지의 이만희의 이름으로도 구원 못 받습니다.
J M S 의 정명석의 이름으로도 구원 못 받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안상홍의 이름으로도 구원을 못 받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만도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성경을 왜곡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불교의 석가모니나, 유교의 공자나, 이슬람의 알라나 마호메트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메트의 이름으로도 구원받는다고,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그래서 절간에도 가고, 중도 초청해서 설교도 듣고, 인본주의자들은 그것이 융통성이 있다고 좋다는데, 아닙니다.
구원의 이름을 여럿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 하나만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난 10월 9일, 우리나라 나이로 70살인 전설적 록그룹 비틀즈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가,
4천억의 갑부인 18세 연하 낸시 쉬벨과 세 번째 결혼식을 '올드 매럴러번 타운홀' 에서 가졌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내용보다도 그렇게 세 번째 결혼을 한 비틀즈 멤버 폴 메카트니에게 “비틀즈가 왜 해산되고,
그 명성을 잃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우리 비틀즈가 가는 곳마다 5만 6만 명이 모여,
비틀즈 비틀즈를 외쳤습니다. 그 함성소리에 우리 노래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노래가 들리지 않는 가수는 죽습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엉뚱한 것 외치면 안 됩니다. 엉뚱한 것 주장하면 안 됩니다.
엉뚱한 함성들, 교회의 본질이 아닌 것들 - 곧 재정, 복지, 친교, 회의, 직분자 선거, 이런저런 사역들이,
하나님의 이름, 예수 이름, 성령의 이름보다 더 커서, 예수 이름이 들리지 않으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 예수 이름, 성령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그 이름을 찬양하는 소리보다,
엉뚱한 함성들, 교회의 본질이 아닌 것들 - 곧 재정, 복지, 친교, 회의, 직분자 선거에 관심을 더 크게 두고,
그런 일에 목소리를 높이고, 자기주장, 불평불만의 소리에 열을 올리면, 그 사람은 이미 성도가 아닙니다.
예수 이름을 증거 하여, 불신 영혼들로 구원 얻게 하는 복음 전도가 없는 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입니다.
예수 이름을 증거 하여, 불신 영혼들로 구원 얻게 하는 복음 전도가 없는 성도도, 이미 죽은 성도입니다.
이렇게 죽은 교회와 성도들의 소리는 자기주장만 늘어놓습니다. 말이 많습니다. 앉은 자리마다 불평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성도가 내야 할 소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성도는 말이 없습니다. 긍정적입니다.
이런 성도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 성령의 이름이 불려지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 이름을 찬양하고, 그 이름을 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예수 이름 외에 다른 길로는 구원받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이름에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능력이 있고, 오직 예수 그 이름에 천국 문을 여는 열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아멘! - 신구약 성경에 많은 말씀이 있지만,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성경 말씀 중 하나입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읽으면 내 마음에 불이 붙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자랑스럽고,
목사가 된 것이 너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나에게, 여러분에게 능력의 말씀이 됩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알게 된, 오늘 본문의 제사장 무리들도,
사도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도무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이에 대해 계속되는 19절과 20절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 핍박이 있다고 복음전도를 멈추면 심장이 멈춘 사람처럼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세상이 타락했다고 사람의 취향에 맞춘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갈 1:8-10)
세상 살기가 바쁘고 힘들다고, 예수 복음전도를 버리고 세상에만 빠져 살아가면, 살기가 더 힘들어 집니다.
살기만 힘들어집니까? 신앙이 점점 식어져가게 되고, 마침내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고 삶은 죽어갈 것입니다.
초대교회 용감한 전도자들은 집에서 사회에서 쫓겨나도, 오직 예수의 복음만을 붙들고 쫓겨났습니다.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고, 물질을 빼앗기고, 직장을 잃어도 오직 예수, 예수의 복음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매를 맞고 죽임을 당해도, 사자들이 그들을 찢고, 타오르는 불이 그들의 몸을 태워도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들이 하찮게 여겼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죽어 무덤 가운데 계신 분이 아니라,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다. 지금도 살아 계신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역사를 운행하다가 천군천사들과 함께 이 세상을 심판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의 이름이요. 치유의 이름이요. 구원의 이름이다. 온 우주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이름은,
오직 한 이름, 예수 이름밖에 없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주님이 물으십니다. “너의 심장 속에 예수 복음이 살아 있느냐?”
지금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세상 권세 있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살 용기가 없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돈이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멋있게 사는 법을 잃었습니다.
지식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지키는 꾀는 많지만, 버리는 결단은 전혀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한결같이 “예수 날 위해 죽으셨는데, 나 예수 위해 죽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더냐?”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버렸습니다. 그래서 순교를 영광으로 알고 순교했습니다.
코카콜라 사장이었던 도널드 R. 키오는 “전 세계인의 피 속에 코카콜라가 흐를 때까지” 를 외쳤습니다.
중국의 모택동은 “공산주의자는 꿈을 꾸어도 세계 공산화의 꿈을 꾸어야 한다.” 고 역설했습니다.
스타벅스 창시자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 한 잔을 팔 수 있다면 나는 지구 끝이라도 간다.” 고 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망할 것을 위해서, 가짜를 팔기위해서, 시시한 것들을 팔기 위해서 저들은 목숨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생의 복음, 천국의 생명수, 구원의 이름 예수를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너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우리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나를 죽일 수 있지만, 나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난다.”
이렇게 외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능히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어둠이 동터오는 아침 햇살을 막을 수 없듯이, 우리들의 예수 부활 신앙을 막을 수 없습니다. 믿습니까?겨울이 봄이 오는 소식을 막을 수 없듯이, 우리가 가진 예수 이름의 능력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믿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진 예수 부활신앙과 예수 이름의 능력을 사탄이 결코 막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 고난을 당하는 시대,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우리는 순수한 복음, 복음의 순수를 붙들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이름! 오직 예수 그 이름의 능력을 붙들고, 그 권세를 믿고, 그 권세의 터전 위에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을 실망시켜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삶이 아프면 아플수록 오직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고치십니다.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유일한 치료와 회복의 이름이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이 약해져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는 예수의 이름을 붙드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삶의 환경이 흔들리십니까? 삶의 환경이 흔들려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흔들리지 마십시오.
예수님만이 천하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믿으십시오.
그래요. 예수님의 능력의 이름 붙들고 힘을 얻으시고, 예수님의 이름 붙들고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시고,
가장 복 된 이름 예수, 복의 근원이신 예수님과 함께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