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다시 주시는 기회
본문 : 이사야 48장 1- 16절
앞장인 47장에서 ‘자기는 절대로 과부가 되지 않을 것과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 장담을 했던 바벨론을 향하여 하루 만에 초개와 같이 불타 없어질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8장 말씀입니다. 『바벨론에 시선을 돌렸던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고, 1절에 “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말씀하시면서 저들을 잘못을 하나씩 지적하는 것을 봅니다. “너희는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다”고, 또 “너는 완고하며, 목이 쇠의 힘줄이요, 이마는 놋이라” 하며 책망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벨론을 심판하셨던 것처럼 저들 또한 심판하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 놀라운 말씀을 전하는 것을 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며, 이제 새롭게 살 것을 결단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1. ‘오늘 우리는도 스라엘 백성들과 같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함께 1절을 읽겠습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 좀 어렵지요? 그래서 쉬운 성경에선 어떻게 기록하였는지 보겠습니다. “야곱의 자손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유다 자손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기도 하고, 이스라엘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지만, 실제 너희는 정직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도다.” 자. 무슨 말에요? 더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너희여. 양심이 있으면 생각해 보라. 너희는 믿음이 좋다고 하지만, 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하지만, 실제 너희의 모습은 어떠냐? 믿음도 없고, 신앙생활도 엉망이지 않느냐?” 이런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2절에 “저들이 스스로 거룩한 성의 백성이라 부르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거룩한 성의 백성이라 부르는 것’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약을 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옛적부터 장차 일어날 일들을 선지자들로 통해 미리 알려주었고,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심으로 예언의 말씀이 이뤄지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자 여러분! 지금껏 이사야서에서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었나요?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잘못이 이런 것이다. 그 댓가로 이러한 벌을 받을 것이다. 자 보아라. 애굽이 그랬고, 앗수르가 그러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도 속히 돌이키라”는 말씀을 그동안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에요? 4절입니다.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이 말은 ‘저들의 고집이 쎄다는 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치 쇠의 힘줄과 같이 목이 뻣뻣하고, 얼굴은 철판과 같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었다는 것도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8절 말씀입니다.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릴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자 하나님께서 또 무엇을 아셨다고 말씀합니까?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깨닫지도 못했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들이 배반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을 바벨론과 같이 심판하셨어야지요. 앞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하시며 징계를 하셨어야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1절에 “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 말은 쉬운 말로 말씀을 드렸는데, 생각이 나시나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너희여. 양심이 있으면 생각해 보라.” 다시 말해서, 저들은 도저히 구제 받을 수도 없는 자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기에, 또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때요? 입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받아 들이지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얼마나 완고한지, 쇠의 힘줄과 같고-,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너희는 어떠한지? 돌아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여 이 시간에 ‘나의 신앙은 어떠한가?’ 돌아보길 원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지?’ ‘정말 진실된 신앙생활, 공의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 ‘혹여 하나님 말씀을 들었는데도 여전히 목이 뻣뻣하고 완고하지 않는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주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우리의 신앙을 돌이켜 보고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2.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껏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실함이 없고, 정직한 삶을 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실 정도로 완고하고, 목이 뻣뻣하며 부끄러움조차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아니했고, 수없이 하나님을 배신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들을 향해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자 보세요. 저들이 당할 결과는 마지막에 나오는 ‘멸절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징계가 아니라 아주 망하여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요? ‘노하기를 더디하신다’는 것입니다. 분명 노하여 저들을 멸절시키셔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늦추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참고”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분명 저들의 행한 악행으로 인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선 참고 또 참으셨다는 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불에서 택하였노라.” 이 말은 ‘분명 저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해 연단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은처럼 아주 가혹하게 연단하지 아니하시고, 잠시 풀무불에 연단하는 것을 택하셨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참고 참았는데,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에 마침내 징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그럼 화가 나서 매를 들어 사정없이 때렸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선 그나마도 가장 약한 것으로, 그것도 조심조심하면서 저들을 때리셨다는 말입니다. 이것마저 안 한다면, 저들이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고난의 풀무불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오늘 우리도 저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분명 우리는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도, 하나님께선 그동안 노하기를 더디하셨습니다. 참고 또 참으셨던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때가 되었을 때, 은처럼 큰 것으로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가장 약한 것으로, 그나마도 조심조심하면서 우리를 고난의 풀무불로 다루시려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을 하신다면, 우리들 중 살아 남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보시고도 못 본 척 눈 감아주시고, 때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내가 낳은 자식도 말을 안 들으면 패주고 싶은데, 우리 하나님은 참고 또 참으시다가 가장 약한 것으로, 그것도 마음이 아프셔서 우리를 살살 다루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9절에 “내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이름을 세우셨기에 특별한 존재로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여 오늘도 죄악 가운데 사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참고 참으시며 고난의 풀무불에 우리를 연단하여 돌이키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알아야 할 줄 믿습니다.
3.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말씀이 나오고, 또 14절에선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16절에선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공통적인 단어가 있는데, ‘들으라’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으라’고 3번씩이나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한 것은 들었음에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들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쉐마’라고 하는데, ‘순종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순종했었어야 하는데, 저들이 순종하지 않았던 말입니다. 문제는 순종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18절을 읽어 볼까요?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자 여기서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나오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어야 하는데, 저들이 순종하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만약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였다라면, 평강이 강처럼 넘쳤는 축복을 받았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순종만 했더라면, 자손이 모래와 같이 창대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이 하나님 앞에서 끊어지는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신명기 8장 1절에 나오는 말씀과 같습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자. 분명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백성과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게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번성하길 원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땅을 차지하고 복된 삶을 살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으라” 하시면서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왜요? 여러분을 힘들게 하시려고 일까요? 아닙니까? 여러분이 복을 받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이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여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신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은 여전히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저들은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말씀하시는데도, 자신들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돌이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들에게 ‘너희의 모습이 어떠한지 돌아볼 것’을 말씀하셨고,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순종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 말씀은 지금껏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깨닫지 못하는 저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인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수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깨닫지도 못하였고,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다시 주시는 기회로 알고, 오늘 주신 말씀대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