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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문 쓰는 요령
1. 독서감상문에 대하여
(1) 독서 감상문은 이런 글
독서 감상문은 책을 읽고 느낌을 쓴 글입니다. 예컨대, 동화나 소설을 읽고 난 후 주인공의 성품을 헤아려 보거나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져 보고 거기에 나의 생각이나 느낌을 적은 것이 독서 감상문이지요.
책 속의 인물들이 벌이는 사건과 나의 생활을 비교해 보고 ‘나 같으면 이렇게 하겠다’라는 의견을 솔직히 적어야 바른 독서 감상문이 됩니다.
결국 독서 감상문은 읽은 책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리고 읽기 전과 읽은 후에 ‘나는 어떠한 영향을 받아 어떻게 변했는가?’를 쓰는 글입니다.
(2) 독서 감상문은 왜 쓰나?
우리는 책을 통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 가운데 생각하는 힘이 늘고 훌륭한 정신과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책을 읽은 후 얻은 그런 것들이 우리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지 못하게 됩니다. 책을 읽은 후 당장은 눈앞에 보이는 듯이 그 내용과 감동이 생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용이나 감동이 희미해집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 읽은 책의 내용을 잊지 않고
㉡ 받은 감동을 오래 간직하려고
독서 감상문을 씁니다.
이런 독서 생활을 비판력과 통찰력을 키워줍니다.
(3) 독서 감상문 제목 붙이기
제목은 책 제목을 그대로 써도 되지만, 인물의 이름이나 책의 내용, 글의 주제를 생각해 재미있게 붙여도 좋습니다.
• 책 제목으로 : <피노키오>를 읽고
• 인물 이름으로 : 내친구 래시 - <돌아온 래시>를 읽고-
• 중심 내용으로 : 신비한 물고기들의 세계 <물곡들의 비밀>을 읽고-
• 주제로 : 행복의 거울-<사랑의 일기>를 읽고-
(4) 독서 감상문의 짜임
독서 감상문도 문학 작품의 하나이므로 책을 읽은 느낌이나 마음의 움직임을 하나의 주제에 맞추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써야 합니다. 그러려면 독서 감상문을 쓸 때에도 어떤 짜임이 필요합니다.
독서 감상문의 일반적인 짜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 처음
책을 읽게 된 동기나 책을 처음 대했을 때의 느낌
책의 내용과 나의 생활 경험을 비교한 것
느낌을 크기 받은 대목
책의 지은이나 주인공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방법
일기는 ‘나는’이라는 말을 쓰면 좋지 않으나 독서 감상문에서 ‘나는, 내가’라는 말을 사용해 느낌을 강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 가운데
자기 생각과 견주어 봄
주인공의 행동과 나의 행동을 비교
주인공의 행동을 비판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서 씀
독서 감상문은 뭐니뭐니 해도 감동과 감상이 중요한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가운데 부분은 아주 재미있거나 뭉클했던 부분을 주로 해서 써야 하지요.
• 끝맺음
느낌이나 감동을 정리
깨달은 점, 결심 등을 씀
끝부분은 느낌이나 결심 등으로 산뜻하게 맺어야 합니다. 욕심 부려 길레 늘여 쓰면 글이 지루해지기 때문이죠.
2. 독서감상문 쓰는 요령
(1) 감동받은 대목을 되돌아 보기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준 책은 좋은 책입니다. 좋은 책은 또한 재미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거침없이 대번에 내려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권의 책 또는 한 편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금세 다른 책으로 옮기지 말고, 방금 읽은 이야기 가운데 어느 대목이 재미있었고, 어느 대목이 감명 깊었는가를 조용히 되돌아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생각난 것을 노트에 적습니다. 이 적는 작업을 하는 동안에, 방금 읽은 이야기의 재미있는 점이 좀 더 선명하게 머리에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단순히 재미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말, 심정을 통해서 그 인물의 사고방식이나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되고, 전에 읽었을 때 이상으로 그 인물에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독서 감상문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2) 감동을 정리해서 쓸 것
아무리 깊이 감동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감상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정리된 문장으로 바꾸려면, 독자의 머릿속에 두서없이 쌓인 수많은 감동을 정리하기 않으면 안 됩니다.
즉, 필요한 것만을 뽑아 내어 몇 개의 감동을 하나로 합치거나 순서 지어, 보다 강한 감동으로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또 그와 같은 감동이 어디에 생겨났는지, 감동의 원천을 밝혀내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때, 감동의 요점이나 요약을 카드에 적어서 순서대로 놓아두면, 무엇을 어떻게 써 나가는 것이 좋을까 하는 윤곽이 점점 분명해질 것입니다.
(3) 첫머리를 잘 선택해서 씁니다.
문장의 첫머리를 어떻게 써 나가야 할까 하는 것은, 그 감상문을 쓰는 방법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독서 감상문의 서두를 써 나가는 방법으로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 감동을 받은 그 대목부터 쓴다.
■ 작품 속에 펼쳐지는 정경부터 쓴다.
■ 그 작품을 읽은 동기부터 쓴다.
하나의 작품을 읽고 나서 받은 감동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등장 인물의 행동에 감동을 받는 사람도 있고, 작품에 그려진 아름다운 정경에 마음이 더 끌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감동한 대목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감동하리라고는 기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감동한 것을 남에게 전하려면, 자기의 감동을 똑똑히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서두를 선택해야 합니다.
(4) 독후감의 여러 형식
① 일반적인 형식 - 느낌 중심의 독서감상문
처음에는 어떤 책인가, 어떤 이야기인가를 대충 소개하고, 그 다음에는 어떤 동기로 읽게 되었는지를 서술합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가 가장 감동받은 내용을 씁니다. 그 다음 이야기의 줄거리에 따라서 느낀 것을 써 나아갑니다.
마지막으로 등장 인물의 말과 움직임, 사고 방식을 자기의 생각과 비교하면서 쓰고, 책을 읽고 나서 갖게 된 마음가짐과 다짐 등에 대해 씁니다.
② 문제를 들어서 써 나가는 방법
작품 전체 속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에 대해 자기가 생각한 것과 느낀 것을 써 나갑니다.
③ 편지투로 쓰는 방법
작품의 주인공이나 작자에게 친히 말하는 투로, 다정하게 쓴 감상문을 뜻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상대가 뚜렷해서 쓰기 쉽고, 또 깊은 내용에까지 몰입하여 쓸 수가 있습니다.
④ 시 형식을 빌어서 쓰는 방법
작품을 읽고 느낀 감상을 시처럼 행을 바꿔 가며 자유롭게 쓰는 것을 말합니다. 읽어서 느낀 감동을 구김없이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어 좋긴 하지만, 너무 장황하게 늘어 놓거나, 글이 감상에 치우치면 안 됩니다. 용솟음치는 감동을 조용히 누르면서 차분하게 써 나갈 때 좋은 글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⑤ 일기 형식으로 쓰는 방법
읽은 날짜별로 독후감을 써서 연결해 나가는 방법
⑥ 여행을 하면서 쓰는 방법
책의 내용과 관계 깊은 곳을 찾아가 돌아보며 책을 읽은 느낌과 비교하면서 쓴 독후감.
위인들의 유적지
작품의 배경이 된 곳
3. 좋은 독후감이란 어떤 것인가?
책을 덮고 나서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지도 않고 뚜렷이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헛수고만 한 것이 됩니다.
어느 책으로 인해 강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행동까지 변화되어 간다면 그것은 가장 훌륭한 독서 감상문의 소재가 됩니다. 아름답고 갸륵한 마음의 변화는 독후감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소재가 됩니다.
독후감을 잘 쓰려면 우선 남의 좋은 작품(독후감)을 많이 읽어 보고 방법을 터득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독후감은 다른 글짓기와 달라서 화려하고 억지로 꾸민 문장보다 진실 되고 솔직한 느낌이 감동적으로 살아 있는 문장이 더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줄거리에 치우친 글보다는 자기의 생각이 곁들여지는 글이 좋은 독후감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끝으로 끝맺음을 잘하고 토막글이 되지 않도록 하며 원고 쓰는 법. 띄어쓰기 등에 유의하여 쓰도록 해야겠습니다.
내 인생 최고의 놀이>
-'달님도 인터넷해요'를 읽고-
학성여고 1학년 최세진
창재선생님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자 하나 둘 애들이 자리에 앉았다. 교탁 앞에
선 창재선생님의 손에는 프린터며, 책이며 잔뜩 들려있었다. 그 중 유독이도 내 눈에 약간 진한 파란색에 노란 글자로 제목이 씌여진 책이 띄었다. 내가 그 책에서 눈을 못 떼는 사이 그것은 선생님의 손에 의해 높이 들어졌다. 저게 오늘 토론 한다던 그 책인가? 너무 유치해보여 안 읽었는데.
"자, 오늘의 놀이를 시작할테야. 이 책 보이지? '달님도 인터넷 해요' 라는 김미희 작가님의 책이야. 많은 동시가 수록되어 있지. 내용도 참 짧고 쉬워. 그리고 재밌어. 내가 다들 읽어오라고 했을텐데. 다들 읽어왔겠지?"
"선생님! 읽긴 읽었는데, 이거 고등학교 1학년 생이 읽기엔 조금 유치하지 않아요? 읽기엔 쉬웠는데 거부감이 있었어요. 우리가 어디 이런 걸 배워봤어야지요. 국어시간도 그렇고 보충때도 그렇고 늘상 하는게 옛날 고시와 현대시라 해도 해석하는 것만 봤는데, 이렇게 술술 쉽게 넘어가는 걸 읽으니 뭐, 30분이면 다 읽겠던데요? "
"흠, 너무 쉬워서 거부감이 있다, 이거란 건가? 하기야 자기가 생각하는 수준이란 게 있을테니까. 서연이 네 말도 틀리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의 매력 아니겠니? 바쁜 고등학교 생활에 치여서 언제 시를 찾아 읽겠니? 우리의 흥미를 끄는 건 그보단 소설이잖아. 그런 속에서 짧은 시간에 웃음을 남겨주는 동시도 나름 괜찮지 않아? 이게 과연 유치하고 쉬운 걸까?"
창재선생님의 목소리는 달콤하게 서연이를 제압했다. 서연이는 아니요 라며 배시시 웃었다. 자리에 앉은 서연이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남았다. 그 애는 다시 김미희 시인의 책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어느 부분에서 또다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사이 가람의 손이 들어졌다.
"선생님, 저는 말이죠, 이 김미희 시인이 아이들을 위주로 썼다고 생각되는데요? 표현도 보면 참 어린아이가 많이 쓰는 표현이예요. 이런 책이 우리 청소년들을 위해서도 빛을 발휘할 수 있는 건가요?"
"흠, 가람이는 안 그렇다 생각하는 거구나. 가람아, 어린이들을 위주로 썼다는 이야긴 ,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것이 동시라고 생각되는거니?"
"당연한거 아녜요? 당연 다 동시죠."
"한가지 말해줄까? 프랑스나 외국에는 동시라는 문학부분이 존재하지 않아."
"네?"
"동시란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거야.그것이 이 동아시아랑 다른 아시아 부문으로 나간거지. 즉, 어린이들을 위한 시는 없어. 모두가 사람을 위한 것일 뿐이지. 너 이 책 읽으면서 한번도 안 웃었니?"
"수도 없이 많이 웃었죠. 맨 앞에 시 참 웃겨 란 시에서 모놀이란 글자를 보고도 웃었고, 만우절이란 시에서의 소가 넘어갔대라는 마지막 구절도 참 웃겼어요. 게다가 엄마 일기도 보여주실래요? 란 시제목과 내용엔 정말 어릴 때 생각이 났어요. 매번 엄마는 내 일기를 보길 원했거든요. 물론 전 그걸 싫어했죠. 그래서 좁은 방안에서 막 달리고 그랬었는데. 지금도 동생과 전쟁하는 엄마를 보니 이 책과 너무 딱 맞아 떨어지는 거 있죠?"
"그게 너의 옛 기억을 상기시켜준 매개체과 된거야. 봐봐. 웃음은 만병통치약이라잖아? 그런 웃음을 주는 책이 너희를 위한게 아냐? 다들 웃어봐. 우히히 라고."
선생님이 먼저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건 흡사 경련을 일으키는 사람의 얼굴과 같았다. 억지 웃음이란 게 너무 티났다. 그것을 보고 선생님이 웃을 때까지 선생님과 똑같이 억지웃음을 했던 애들이 진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에 선생님도 웃었다.
"헤련아, 저 선생님 좋지 않아?"
가만히 있던 내게 내 짝 윤희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선생님을 계속 주시했다.
"봐봐라. 억지로 웃으라니까 웃지도 않으면서? 이 책이 주는 웃음은 모두를 위한 거야. 거기에는 청소년계층도 당연 속해지는거지! 또 너네 많이 컸잖아. 초등학생때 일 제대로 기억이나 하니? 매일 바쁜 일상에서 말야. 그런데 너희가 이 책을 읽고 가람이처럼 옛날에 있었던 일화를 생각해 내는 건 참 좋은 거 아냐? 내가 보기엔 어린애들이 이 책을 읽는 거 보다 너네가 읽는데 더 유익하겠다. 아니야? 후후. "
선생님의 입술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선생님은 무슨 기억을 저렇게 해내는 걸까.
"선생님은 무슨 기억이 나시는데요?"
채린이가 선생님에게 내 생각을 그대로 물었다. 어쩜 나랑 저렇게도 똑같은 생각을 할까.
"실은 선생님이 이 시인님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어. 이 분은 선생님이 중학생때 도서관 사서선생님이셨거든. 그런데 선생님도 고등학생이 되고, 김미희 시인님도 그 학교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셨지. 벌써 10여년 전 이야기야. 고등학교때 이 선생님이 첫 동시집을 펴냈어. 바로 이 책이었지. 오래되었지? 그리고 이 책은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어 독후감대회가 열렸어. 하지만 신책이고 하니 근처 도서관에서 얻기가 힘들었었어. 내가 연락을 했더니 선생님이 만나자고 하시더라고. 책을 주시겠다고. 얼마나 기뻤는지."
"우와. 작가님과 인연이 있다니!"
"한참 문학소녀였던 나는 그저 설레였을 뿐이었어. 그렇게 선생님과 만나서 이 책을 받았지. 이거 봐봐."
책 맨 앞장의 여백에 보니 잠자리가 하나 그려져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미래의 작가인 세진이에게 드려요 라고......선생님 이름이 적혀있었다.
"잠자리 귀여워요! 와아."
"선생님의 소감은 이래. 선생님은 이걸 야자시간에 읽었는데 야자 마치는 종이 치고도 손에서 놓질 못했다니까?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해. 삽화도 이뻤고, 글도 이뻤어. 무엇보다 ~하실래요? ~하시지요 등 중간정도의 존댓말이 있어서 글 자체가 정말 내 속의 계산을 구르듯이 나갔지. 전혀 제재가 없을 정도였어. 소설로도 써보고 그랬어. 이런 동시를."
"선생님, 동시를 소설로 써도 되는거예요?"
"뭐 어때? 나만의 글인데. 그저 내 글로 적어본거야. 멋있지 않아? 문학소녀를 꿈꾼다면 그정도야 당연하지!"
시간을 보니 5분쯤 남았다. 그 지겹던 시간이 이리도 빨리 지나가다니. 경청자의 입장이었지만 듣는 것 역시 내가 맑아지는데?
"자자, 이제 거의 끝이다. 나도 이 책을 읽고난 느낌을 발표했으니, 너희도 발표해볼래?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한명만 하자. 자, 누가 할래?"
머뭇거리던 내 손이 번쩍 들어올려졌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왜 그랬는지.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내 눈을 책을 들여다 봤었다. 수박 겉핥기 식의 책읽기였지만 그래도 내 눈에 그 맥락이 잡혔다.
"음, 네 이름이 혜련이 맞지? 그래. 이야기 해볼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전 이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너무 쉬웠기 때문이죠. 아까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수준보다 낮다면 거들떠도 안봐요. 제가 딱 그런 속물층 사람이였어요. 그러나 방금 50여분 동안 저는 이 책을 훑었습니다. 물론 선생님과 다른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요. 그런데 정말 가뿐하게 넘어가던데요? 그래서 따뜻해졌어요. 책을 하나 하나 읽다가 따뜻해졌어요. 눈물이 날 정도로 , 코가 매워서 고개를 흔들 정도로 이 책을 읽다가 따뜻해졌어요. 새 한마리가 나뭇가지를 따라 날아다니다가 결국 나무에 정착했다는 내용의 시에선 어쩌면 나무는 그 새의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도달해버려 눈물이 났어요. 또 아까 가람이가 말한 시, 엄마 일기도 보여주실래요? 란 시에서는 그 동그라미 안에 갇혀버린 아이의 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저서 슬펐어요. 참, 이렇게 웃음주는 책에도 그런 내용이 살짝살짝 껴있다는게 ......김미희 시인님은 아이들의 마음을 속속들이 표현해 내셨어요. 그리고 사이사이에 청소년이 감동을 먹을 수 있는 부분도 넣으셨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어른들의 마음까지 휘어잡는가봐요. 정말, 평생을 휘어잡는달까요. 선생님과 같이 그 분과 인연이 있는 건 아니지만 기뻐요. 그 분을 만난 듯 해서."
내 입술에서 마지막 말이 떨어지자마자 종이 울렸다. 선생님의 눈길은 종이 치고도 오랫동안 내게 머물렀다. 그러다 빙긋 웃고 고개를 끄덕이다 교실문을 나가셨다. 내 속은 들떴다. 그 웃음에 더욱 제자리를 잃고 말았다. 책 하나에 이렇게 감동하고 책 하나에 이렇게 웃고 책 하나에 이렇게 울고 책 하나에......이렇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내 마음을 되찾을 방법은 어디에 없을까?
***한국예술위원회가 주관한 우수문학 읽고 독후감쓰기 대회
장려상 수상작입니다.
독후감공모전 수상작 - 애벌레의 소망
‘집으로 가는 길’독후감 공모전 중등부 대상 수상작
논산 쌘뽈여자중학교 이현경
우리는 전쟁이라는 껍질을 벗고 자유의 나라로 가고 싶은 애벌레이다. 애벌레는 껍질을 뚫고 나가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힘을 다한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는 끔찍한 전쟁의 껍질을 벗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힘을 다해야 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전쟁이라는 잔인한 껍질이 수많은 생명을 희생 제물로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전쟁, 그것은 그만큼 무섭고 잔인한 존재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보았던 것보다 어쩌면 훨씬 더 잔인하고 무서운 실재인지 모른다. 전쟁이란 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에겐 실감나지 않는 일이지만, 전쟁이 싸고 있는 껍질이 무엇인지, 전쟁의 껍질 속에 갇혀있는 애벌레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한 소년병은 자신의 꿈과 순수함을 전쟁이라는 껍질 속에 묻고 자유를 잃어버렸다. 래퍼가 되고 싶은 순수한 소년 이스마엘은 전쟁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소년병이 되어버렸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물 한잔을 마시는 것처럼 쉬웠다고 했다. 12살의 한 소년이 전쟁이라는 껍질에 갇혀 마약에 중독되고, 총을 들고 사람들을 겨누어 죽이는 일로 마비되어 버렸다.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다. 어린 소년이 잔인한 동물로 변해가는 모습을 말이다. 뿐만 아니라 평화롭던 시에라리온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이 나를 소름끼치게 했다.
이스마엘은 친구들과 함께 미국의 랩 음악을 들으며 춤을 배우고 가사를 외우며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전쟁은 한 때 친구였던 아이들이 서로에게 총과 칼을 겨누며 싸우게 만들었다. 반군은 물론 정부군도 마찬가지였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나쳐 가야 하는 비정한 마음과 반군의 횡포에 보복하려는 정부군은 반군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머리를 베고, 마을을 불태웠으며 심지어 아들들에게 어머니를 강간하도록 강요했다. 뿐만 아니라 갓난아기들이 시끄럽게 운다고 반토막을 내고, 임신한 여자들의 배를 갈라 아기를 끄집어내어 죽이기도 했다.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마을을 황폐화시키면서 비정상적인 전쟁에 미쳐버리는 것일까?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악마의 얼굴이다. 차지하고 싶어 빼앗고, 복종시키기 위해 살인해야만 하는 흉측한 애벌레가 자라는 두껍고 딱딱한 껍질이다.
껍데기 속 애벌레는 욕심과 반감, 폭력, 미움, 살인, 비정함, 냉혹함, 마비된 양심을 먹으며 자란다. 애벌레는 전쟁이라는 환상에 갇혀서 자유를 잃었다. 그러나 애벌레가 살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따뜻한 마음과 관심, 사랑이다. 사랑만이 애벌레를 전쟁의 껍질 속에서 나와 자유를 누리게 한다. 전쟁의 껍질 속에서 마약과 살인에 중독된 이스마엘이 흉측한 애벌레의 껍질을 벗고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유니세프의 도움과 사랑, 특히 담당간호사인 에스더의 진심어린 배려와 따스한 손길 덕분이었다. 처음 이스마엘과 그의 친구들이 유니세프의 도움으로 전쟁터에서 구해졌을 때, 그들은 전쟁의 금단현상으로 계속 사람들을 죽이고 상처를 입혔다. 자신들을 참혹한 전쟁에서 빠져 나오게 해준 사람들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유니세프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상태를 이해해 주었고, 그 아이들을 전쟁터로 돌려보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특히 에스더는 이스마엘을 위해 많은 희생을 바쳤다. 처음 이스마엘이 병원에 와서 창문을 깨고, 병원에서 나가려고 반항을 할 때마다 이스마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어주고 이스마엘이 좋아하는 랩 음악을 구해다 들려주면서 이스마엘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평화로운 마음을 되찾아주었다.
이 세상에 유니세프와 에스더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 일인지 모른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에 전쟁이란 껍질 속에 갇혀 살던 소년병들이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평화로운 세상을 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죽음을 생명으로 살리는 희망이다. 이 세상에 유니세프와 에스더가 가지고 있던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가득할 수 있다면, 전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전쟁과 같은 모든 흉측한 애벌레가 계속 번져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자신의 허물을 벗고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평화로운 들판을 날았으면 좋겠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는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은 마음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마음을 꺼내어 세상 밖으로 날아가도록 풀어주어야 한다.
2007 원북 원부산 독후감 공보 대상(교육감상) 수상작-
주연이에게
- 나와 너무도 닮았지만 또 너무도 다른 너에게 -
남산고등학교 2학년 박슬기
언젠가 넌 가난하고 다리마저 불편한 장애인 소년이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에 합격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 집이 가난했다면 나도 동기부여가 되어서 그 소년처럼 될 수 있었을 거야"라며 냉소를 머금었었지.
그 땐 네가 시련과 역경을 기회로 보고 그것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에게 주어진 축복받은 환경과 네가 받을 수 있는 무한한 사랑에 감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어. 그 후부터는 다른 세계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얻어 무엇 할래 라는 핀잔도 듣기 싫었고, 이 부분에서는 너와 나의 생각차이가 골이 깊다는 걸 느끼고 그동안 이쪽 이야기는 피해왔었어.
그런데, 얼마 전에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라는 책을 보게 되었어.
이 책의 주인공은 우리와 닮은 점이 많아. 우리 셋 모두 한 번쯤 주변 환경 때문에 꿈을 실현하는 시간을 잠깐 지체시켜야만 했던 적이 있어.
주인공은 초등학교 때 유학을 꿈꾸다 집안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그 꿈을 청년이 되어서야 이뤘고, 나 역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다 집안 형편 때문에 잠깐 꿈의 실현 시기를 늦춰야만 했지. 너도 외국어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다 아버지를 설득하는데 실패해서 결국 원하지 않는 학교에 와야만 했고, 난 주인공의 짧지만 치열한 인생 이야기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주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주인공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은 무서운 개인기와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력이라고 생각해. 과학영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프린스턴대에 입학한 주인공은 천재도, 영재도 아니었어. 나는 주인공이 보통 머리로 천재 집단에서 우두머리를 차지하게 된 비결은 피나는 노력이라고 생각해. 주인공이 다들 한 번 듣고 이해했지만 자신만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붙잡고 밤새도록 울면서 외웠던 장면을 상상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아마 주인공이 이룬 꿈을 조각조각 내어보면 그가 흘린 눈물과 땀으로 변해 반짝거리지 않을까?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우린 지금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어.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우리의 노력이 주인공이 꿈을 이루기 위해 한 노력의 십 분의 일도 안된다는 거야. 우린 아직까지 단 한 방울의 땀도 눈물도 흘려본 적이 없잖아.
내가 이런 종류의 책을 싫어하는 너에게 굳이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주인공이 우리와 닮은 점이 많아서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잘 활용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배울 점이 많기 때문이야.
물론 네 말대로 가난이 동기부여가 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만약 주인공이 네 처지 또는 내 처지에 있다면 그는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 받은 환경에 감사하고 역시 주어지는 기회에 최선을 다했을 거야. 네가 불평하는 것도 내가 불평하는 것도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모두 핑계거리에 불과하다는 걸 난 깨달았어.
이제 더 이상의 핑계는 만들어 내지 말자. 우리 둘 모두 꿈을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끝없이 정진하는 사람이 되자. 그리고 꼭 꿈을 이뤄 책 속의 주인공처럼 한 번 활짝 웃어보자.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에세이 중국 고전》을 읽고
이나연 대원외국어고등학교
‘중국 고전’이라 하면 흔히들 딱딱하고 지겹고 어려운 책이라고들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에세이 중국 고전》. 이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 이 지겨운 걸 언제 다 읽나,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읽으면서 점점 나는 이 책에 빠져들었다. 선인들이 즐겨 쓰신 ‘독서삼매讀書三昧’가 혹시 이런 것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볼 정도로.
책에는 논어, 맹자, 묵가, 법가를 비롯해 다양한 중국고전이 실려 있다. 원본과 저자의 해석, 그리고 저자의 생각이 이 책을 구성하고 있다. 처음에는 저자의 생각이 적혀있다는 것이 그리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점점 마음을 주게 된 부분이 바로 이 저자의 생각이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 그 글이 담고 있는 완전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내 멋대로 엉뚱하게 해석할 때가 많다. 그렇게, 이 글은 또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혼란스러워 하는 독서초보자인 나에게 저자의 생각은 훌륭한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저자의 생각만을 좇아간 것은 아니었다. 때론 그의 견해에 의아해 하면서도 나와는 이렇게 다르게 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책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고전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문은 맹자였다. 나는 맹자에 대해, 비록 매우 똑똑하고 인의를 강조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해주는 제후는 아무도 없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맹자》를 읽으면서도 별다르게 특이하다고 느낀 점은 별로 없었다. 맹자의 정책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에는 제후들이 너무 어리석다, 라는 생각만 하였을 뿐. 그러나 글쓴이는 이에 대해 이렇게 적어놓고 있었다.
‘임금이 하는 말을 첫 마디부터 따지고 드는 맹자를 어느 임금이 좋아했을까. 따지지 말고 타일렀다면 어찌 되었을까? 조금은 따뜻한 말투로.’
이 부분을 읽고는 다시 책장을 앞으로 돌렸다. 그제서야 내가 놓쳤던 것이 눈에 뜨이기 시작했다. 맹자는 임금이 무엇을 묻자마자 임금의 잘못과 과오를 샅샅이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똑똑하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할지라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자기 혼자 꼿꼿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부드럽게 다가가야 한다. 결국 맹자의 빼어난 식견이 세상의 힘이 될 수 없었던 안타까움의 바탕에는 그의 잘못이 투영되어 있을 터. 아, 나도 평소 이런 잘못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나.
평소 나는 공자의 언행을 적어놓은 논어나 맹자같이 인의를 강조한 책은 너무나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 같아서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나 같은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이기에 그렇겠지만. 그러나 이런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에세이 중국 고전》이 알게 했다. 지금의 우리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고민하고 공부했는가, 여기 실려 있는 글들이 결국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가. 백성들이 잘 살고 나라가 편안하기 위해서는 지배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밑의 신하와 장수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고 이를 정리한 것이 바로 고전이지 않은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우리 인간은 왜 이렇게 수천 년 동안이나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그 실현 방안을 연구하고 실천에 옮기려고 애써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람들은 권력남용과 불신, 부패가 난무하는 곳에서 서로 반목 시기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가?『열자』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공자가 한 노인을 만난 이야기인데 그 노인은 자신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 아흔 살이 되도록 살았다는 것 이 세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삶이 즐겁다고 얘기한다. 공자는 그를 보고, “좋구나, 스스로 저리 너그러울 수 있으니.”라고 말한다. 나는 이 노인이 부럽다. 그러면서도 이 노인처럼 살 자신이 없음에 또 한번 머리가 숙여진다.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가 팽창한 사회에서, 저마다 어떻게 하면 더 이익을 낼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매고 있는 세상에서 이러한 소박한 행복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나도 여느 다른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처럼 명문대학입학만을 바라보며 공부하고 있다. 어쩌면 나도 내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온전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고, 더구나 서울로 ‘유학’까지 와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늘 불평, 불만, 짜증만 내고 있는 자신을 성찰하며 나는 많이 부끄럽다.
《논어》에 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벗이 먼 곳으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랴.”저자는 이 마지막 문장의 뜻을 잘 모르겠다고 써놓았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이 마음으로 읽힌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이 얼마나 힘든데,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데, 그런 마음을 잘 몰라준다며 부모님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나. 이 글을 읽으면서,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화부터 내는 나는, 가장 가깝고도 소중한 가족에게조차 딸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에세이 중국 고전》. 어떻게 보면 진부하고 딱딱한 소리 같이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말하면서 우리를 반성할 수 있게 하는 옥서가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수 천 년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첨단 과학 기술이 우리 세상을 하루하루 다르게 만들더라도 인간 세상의 소중한 가치는 시대의 변화에 무관하게 빛을 발할 것이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 사회의 구성 원리의 핵심은 변화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 가치를 담뿍 담고 있는, 그 주옥같은 말들로 나를 되돌아보게 한 《에세이 중국 고전》과의 아름다운 만남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을 것이다. <끝>
오늘을 위한 ‘지혜’의 보고를 만나다
― 지오프레이 파린더의 《아프리카 신화》를 읽고
정민호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1동
프랑스 언어와 문화를 전공하는지라 성년 이후 내 관심사는 유럽에 머물러 있었다. 아프리카에 눈을 돌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럽의 지배가 현재 아프리카의 정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기 위해 루츠 판 다이크의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를 봤던 것이 그 계기였다. 유럽의 타자로서의 아프리카를 찾았던 것이다.
그 책은 현재 아프리카의 정치뿐만 아니라 제목 그대로 아프리카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덕분에 난 미처 몰랐던 세계를 엿볼 수 있었고 이내 아프리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본 것이 마틴 버낼의 《블랙 아테나》였는데 이 책을 계기로 아프리카에 대해 공부해 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 유럽이 질투할 정도로 찬란한 문화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 시작으로 삼은 것이 아프리카에서 이십 년 동안 머물며 연구를 했다는 지오프레이 파린더의 《아프리카 신화》였다. 유럽을 보려면 근간인 그리스․로마 신화를 주목해야 하듯, 아프리카도 신화부터 알아야 한다고 느꼈기에 빛을 향해 찾아가는 곤충처럼 이 책에 찾아간 것이다.
《아프리카 신화》에 대한 첫인상은 ‘놀랍다’는 것이다.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다고 할까. 알기를 갈망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그곳을 《아프리카 신화》는 아프리카 대륙 곳곳을 넘나들며 체계적으로 설명해 줬다. 게다가 <창조자>, <신이 세상을 떠나다>, <최초의 조상들> 등의 구성 순서에서 알 수 있듯이 신화를 다루는 책답게 세상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인간이 등장하고, 인간이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되는 과정들을 순차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했기에 미지의 세계에서 길 잃을 염려가 없었다. 길가메시 신화를 보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따를 수 있는 믿을만한 안내자를 만났다는 생각에 탐험을 떠나는 마음은 한결 가벼워질 수 있었다.
안내자와 함께 본격적인 여행을 떠나자마자 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창조자’부터 예상치 못한 것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껏 신화 속의 창조자 하면 그리스*로마 신화에서의 형태를 떠올렸으며 다른 지역도 응당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프리카 신화》는 아프리카의 창조자가 ‘추상적인 관념’이며 ‘추상적인 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구체적’인 것만을 봐왔던 나로서는 ‘추상적’이라는 단어에 적잖이 놀랐던 것이다.
이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창조자들은 인간의 갈 길을 구체적인 행동양식으로 알려줬고, 나는 그것이 정답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추상적’이기에 이것이 정말 신화인가 하는 의심이 들어 얼마나 신뢰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고민과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시에라리온의 멘데 족의 신화, 즉 신이 인간의 요구에 질려 거처를 옮기게 되고, 그것으로 인간은 신이 온 사방에 퍼져있으며 위대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해석할수록 의미심장한 이것은 명백한 신화였다! 제우스나 아르테미스와 같은 단어들에 익숙했던 나는 ‘창조자’라는 단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고, 그 때문에 아프리카의 신화를 의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신은 꼭 구체적인 이름이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인과를 보여줘야 한다고 믿었던가. 이때부터 있는 그대로를 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에, 타자로서의 아프리카를 보겠다는 생각을 벗기로 했다.
그러자 비로소 아프리카 신화의 제 색깔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이 지은 이름으로 움직이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과 인간이 동등하게 등장하는 아프리카의 신화는 그들만의 특색으로 가득했다. 왜 이런 신화들이 알려지지 않았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놀라운 것들이었다.
그것의 첫 번째는 《아프리카 신화》의 ‘창조자’에서 지적했듯 신이 추상적인 대상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신은 모호하다. 인간의 형상을 지녔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모호함으로써 인간이 세상을 경배하도록 만들어 준다. 인간이 터무니없는 이기심 때문에 세상을 소유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애초부터 경계하도록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세상을 경배하기 때문에 ‘내’가 아닌 ‘다른 것’에게 해코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럽의 신화에서는 전쟁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영웅성을 얻기 위해 동물들을 죽이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신화는 달랐다. 아프리카 신화의 조상들은 동물들을 때릴지언정 죽이지는 않는다. 자신의 재산을 약탈하더라도 죽이지 않고 반성케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스핑크스와 전갈이 영웅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아프리카 신화의 특색은 그만큼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신화가 신화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인들은 그것을 생활화 했다. 처음 유럽인들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은 이방인들을 환영해 주었다. 신화 때문이다. 심지어 유럽의 모험가는 무장하지 않고도 대륙을 탐험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 또한 타자를 경배하는 신화의 영향이 크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유럽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다른가! 만약 유럽이 아프리카를 지배하지 않고 또한 그들의 사상을 강요하지 않았다면, 지금 아프리카는 정신적으로 얼마나 평화로울 수 있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새로 알게 된 아프리카의 신화를 보면서 쓸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삶을 이끌어주는 신화가 아니라, 이제는 기록으로만 남은 신화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을 가슴에 품기로 했다. 그것이 있어야만 ‘검은 대륙’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그곳에 더 큰 관심을 쏟고, 또한 그것으로부터 전쟁과 살육으로 얼룩진 오늘을 반성케 하는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건 정말 ‘빛’이라고 말하고 싶다. 신화로서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신화》는 안내자로서의 제 역할에 충실했다. 함부로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안내자 본연의 임무에 맞게 설명해 주는데 주력했다. 다른 신화들과 비교하게 해주고 신화에 따른 다양한 설을 알려줌으로써 그것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이끌어내도록 해줬다. 작가들의 일방적인 해석 때문에 달리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신화 책들과 비교해 본다면 이것은 확실히 돋보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책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책을 감상하는데 간과할 수 없는 것들도 보였다. 유적들을 설명해 주는 도판들에 대한 풍부한 설명은 낯선 것에 대한 이질감과 그것을 해석하는데 따르는 어려움을 덜어주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매끄러운 역자의 번역도 빼놓을 수 없다. 번역 때문에 원작의 가치가 훼손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지라 내심 걱정했는데 《아프리카 신화》에서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프리카 신화》는 미지의 세계를 알려줬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생각하게 해줬다. 지식을 넘어선 ‘지혜’를 준 것이다. 신화를 알려주는 책으로써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냈다고 말하고 싶다.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덕소고등학교 2학년 이슬비
내가 좋아하는 '파트리크 쥔스킨트'- 작가의 작품인 "깊이에의 강요"는 역시나 쥔스킨트만의 독특한 내면의 세계가 확실하게 드러나 있다. 어떻게 접근 하느냐에 따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쉬울 수도 있다. 씁쓸하기도 하면서 삶을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이 작가의 매력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특히나 이 책은 그 특징이 현저하게 도드라진게 나타난다.
한 젊은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잘 나가는 유명한 화가였다. 그러던 어는 날 전시회에서 자신의 작품을 본 평론가가 신문에 비평을 실었다.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작품이 첫눈에 호감을 일으키지만, 애석하게도 작품에 깊이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젊은 여인은 그 비평을 읽고,충격에 휩싸인다. 그 뒤 젊은 여인은 쏟아지는 말과 시선이 나돌고 여인도 끝내 자신의 작품에 깊이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하게 된다. 여인은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 때문에 절망하게 되고, 결국엔 우울증이 찾아와 삶이 점점 피폐해져 간다. 하루하루를 술과 마약으로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투신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타인의 말과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고 변화되어 가는 것을 알았다.
비평을 듣기 전까지 여인의 삶은 순조롭고 평온했다. 깊이가 없다는 말 하나에 여인의 삶은 시들어져 갔다. 상황을 어떻게 이기느냐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여인은 자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을 하게 되지만.............
여인에게 별다른 의도 없이 내뱉은, - 그 평론가는 여인을 북돋아 줄 생각이 였는데. 오히려 그것이 역효과를 내었다. 여인의 인생을 망쳐 놓았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타인의 말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이것은 '자아 정체성'의 형성과정 중 하나이기도 하고, 자신에 대한 타인의 역할 기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위를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것을 기대한다. 나 역시 그렇다.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를 하기도 한다.나는 그 기대에 미치기 위해 노력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 부담스러움에 나 자신이 초라해지거나, 부담감 때문에 긴장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 되었던 게 아마 나의 삶에 있어서 한 번쯤은 꼭 겪어야 하는 인생의 한 과정이어서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알기는 할까? 내가 이 말을 하게 됨으로서 이 사람이 상처 받을지 않으리라는 생각 정도는 해주고 말을 해주었으면 한다. 쥔스킨트는 이런 도덕적 문제를 예술적 깊이에 접목시켰다. 깊이에의 강요 외에도 이 책에는 3편의 단편소설이 더 실려 있다. 그 중 "문학적 건망증"이라는 작품이 있는데,이 작품 역시 예술과 관련 되어있다. 이 주인공은 책 읽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작 책을 읽고 나면 읽는 순간순간만을 느끼다보니, 무려 30년 책들의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이 무서운 건망증 때문에 주인공 자신이 점점 초라해진다. 결국엔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변화 시켜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나는 생각한다. 책은 하나의 예술과 같다고...........나도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을 하나같이 전부 다 기억할 수는 없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읽은 책 내용과 간단히 느낀 점을 쓰고 있다. 나는 나를 변화 시킨 셈이다. 만약 그대로 방치 했었다면, 나도 문학적 건망증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변화 시켜서 감상문을 적도록 만들었고,이 과정은 나를 변화 시킨 것이 되어 버렸다.
이 주인공은 나 자신을 변화 시키라는 말에 중점을 두고 있다. 나는 요즘 들어 내가 책을 읽음으로 서,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는 책을 읽으면, -아! 이런 내용이었구나! 했지만, 지금은 내가 독자의 입장도 되어보고 작가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한다.
표면적인 구성의 흐름만이 아닌, 내면적인 흐름과 그 부분의 감동을 느끼고 되새기려고 노력한다. 책을 한 권씩 읽을수록 마음속의 무언가가 하나씩 채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몸소 실천해 느끼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서 나는 책을 읽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책은 내 삶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책을 통해서 내 안에 나를 만나고, 마음 속 깊숙히 자리 잡고 있던, 의식이 나를 두드린다.
그 때의 느낌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책 속에 내가 느끼는 대로 나를 맡긴다. 그러면 어느새 나도 모를게 책속으로 '동조'되어 간다.
그래서 책을 보고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 같다. 내가 살아 있을 때 까지 내가 읽지 못한 수많은 책들을 경험하고 느끼고 싶다. 어느 땐~굉장히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 읽으면 한 페이지, 페이지 넘길 때 마다 아쉽다. 결국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되면 내가 또 이런 내용의 책을 만날 수는 있을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더 재밌고 감동 있는 책을 찾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계속해서 읽고, 또 읽는다. 책은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자 보물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어서 깨달음을 얻었으면 한다.'깊이에의 강요'는 나에게 새로운 변화와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혹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들을 다른 작가의 사상과 교훈을 접하면서 알게 됨으로서, 나는 오늘도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전국여성독후감대회 우수상 수상작
어린 왕자를 읽고
새벽에 맑은 공기가 그리워 밖에 나갔다. 매콤하고 눈이 매운 스모그가 가득하다. 인천의 공기는 유독 숨이 막힌다. 나라 밖의 하늘도 여전히 회색 빛이다. 어두운 소식들이 지면을 새까맣게 채우고 있다. 삶의 무게가 무거워 헉헉거리는 사람들의 호흡이 귓전에 느껴지는 것 같다. 전쟁의 소리들이 세계를 찍어누른다.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한다는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사람들은 꿈도 없이 세상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왜 이렇게 세상이 어지러워 진 걸까?
어디쯤에서 어떤 단추를 잘못 끼웠기에 이리 된 것일까?
무엇인가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던 눈이 큰 아이,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던 더벅머리 그 녀석은 아직도 그 꿈을 버리지 않았는지, 달려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느끼고 싶어 어린 왕자를 들었다.
어린 왕자가 들려주는 맑은 샘물을 마시고 나면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와 다르다. 순수한 동심의 세계, 어른도 어린이였던 적이 있지만 기억을 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세상을 살면서 필요한 것은 이미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했던가!
어린 왕자는 먼 별에서 사막으로 왔다. 사막은 고요하다. 별 들은 머리 위에서 유난히 빛난다. 사막은 작열하는 태양이 있는가 하면 냉혹한 밤이 내리기도 한다. 사막은 친구조차 없다. 사막에서는 벌거벗은 자신과의 정직한 만남이 있다. 텅 빈 모래언덕이 아름다운 이유를 어린 왕자가 들려준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아이들은 아름답다. 가벼운 웃음과 발랄하고 해맑은 미소, 그네들은 무엇이 될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되리라는 믿음이다. 어른들은 아무것도 심겨지지 않은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것들을 심어야 한다. 어른들이 이루지 못한 꿈들을 아이들에게 꾸어야 한다. 희망을 잃지 않는 한 우리의 아이들은 맑고 깊은 우물 속에서 이가 시리도록 깨끗한 샘물을 퍼 올릴 것이다. 어른들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사람의 소원은 행복해 지는 일이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치른다. 새벽에 나가 밤늦도록 일을 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다. 먹지 말아야 할 독약을 먹고 결국은 얼굴을 가리고 감옥으로 간다. 그들의 한결같은 이유인즉 행복해지기 위함이란다.
“지금 이렇게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인간의 껍질이다.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누군가와 비교 될 수도 없다.
요즘에는 웬일인지 가정이 무너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거기에는 두 사람만의 약속뿐만이 아니라 그네들의 자녀들이 있다. 왜 그렇게 쉽게 약속이 깨져야 하는지. 나름대로는 많은 날 생각했을 터이다. 아픔을 견디며 가정을 쪼갠다고 한다. 서투른 생각으론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위로를 삼고 싶다면, 범부의 아내로 월급을 쪼개가며 살아간다.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자가용도 환경오염을 핑계삼아 뒤늦게 사기로 했다. 모질게 살아온 시어머니의 인생이 있다. 그렇게 울음 울며 살아온 그 아들도 있다. 아들의 아내가 되어 또 아들, 딸을 두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이쁘다고 하던가! 무엇을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들과 스릴 넘치는 협상도 해보고, 공부 안 한다고 악을 쓰는 대한민국의 그렇고 그런 어머니들처럼 나 역시 그 행진을 한다. 하던 일이 뜻대로 안되어 속상해하며 어느 샌가 불혹의 나이를 바라본다. 별것도 아닌 것에 감동하고 별일도 아닌 것에 노여워 하면서 그래도 한 지붕아래 알콩달콩 사는 이유는 이래서 그렇단다.
“너희들은 아름다워. 그렇지만 단지 피어 있을 뿐이야. 그러니 너희들을 위해서 죽을 마음 따위는 생길 리가 없어. 그야 나의 장미꽃도, 그저 그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너희들과 똑같은 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한 송이의 꽃이 내게는 너희들 모두보다도 소중해. 내가 물을 길어다 주었거든. 유리덮개도 씌워 주고, 바람을 막아 주기 위해서 바람막이도 해 주었지. 애벌레 두세 마리는 나비가 되도록 죽이지 않고 놔두었지만 ...... 나는 그 꽃의 불평을 들어주었고, 자기 자랑도 들어 주었지. 때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 걱정이 되어서 왜 그러느냐고 묻기도 했어. 내 것이 된 꽃이니까 말이야.”
세상 사람들 보다 키가 좀 작아도 좋다. 다른 아이들 보다 공부가 월등하지 않아도 좋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 그들이 있음으로 소리지를 의미가 있어서 행복하지 않은가!
한번쯤은 어린 왕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보면 나의 주위가 그토록 소중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텐데. 소중한 데에 엄청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나의 땀과 수고와 눈물로 지켜왔기 때문이다.
“너의 장미꽃이 너에게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서 너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야.”
“내 장미꽃을 위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야.....”
인간은 언제나 외로운 존재인가 보다. 혼자 있어도 외롭고, 둘이 있어도 나름대로 지고 가야할 외로움의 무게가 다 있다. 지나간 과거는 아쉬움이 남고, 무지개빛 미래는 얼른 찾아오지 않는다. 단지 얼른 지나갔으면 하는 현재가 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인간에겐 허탈과 나날이 넓어지는 듯한 슬픔이 인간이 지고 가야할 십자가인 모양이다.
전철수가 소리친다.
“ 인간은 말이다, 결코 자기들이 사는 곳을 마음에 들어하는 일이 없단다.”
어린 왕자가 대답한다.
“아이들만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거예요. 헝겊 인형을 가지고 노는 데에 시간을 보내고, 그 인형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지요. 만약 그 인형을 빼앗긴다면, 아이들은 울어 버릴 거예요.....”
전철수가 대답한다.
“아이들은 행복하구나.”
현재는 언제나 살아 있다. 어제의 부끄러움을 만회하기 위해서, 내일의 아름다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오늘이 있다. 지나간 날들 때문에 가슴아파 하고 돌아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조바심하느라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다. 과거는 지나간 현재이고, 미래는 오지 않은 현재다. 오늘 나는 살아 있고, 오늘 나는 적어도 웃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오늘이 있기 때문에 내일이 존재 가능한 것이다. 점점 어른이 되어 갈수록 웃음이 적어진다. 아이들은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도 우습고, 비가 오는 소리도 우습다. 매미가 울어서 재미있고, 웃다 보니 웃는 모습이 다시 우습다. 이런 아이들을 보며 허파에 바람 들었냐고 호통만 칠 일이 아니라 같이 한 번 웃어보자. 눈물이 펑펑 쏟아지도록 웃어보자. 웃느라고 버린 시간 때문에 인생이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들 바쁘다. 아이들도 바쁘고, 아빠도 바쁘고 엄마도 바쁘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갈증을 없애 주는 굉장한 약을 파는 약장수가 있다.
사람들이 알약을 왜 사느냐고 어린 왕자가 물으니
“시간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지. 어떤 사람이 계산해 보니까, 일주일에 53분이나 절약이 되더란다.”
“그럼 절약한 그 53분의 시간을 어디에 쓰나요?”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어떤 조사에서 작은 일상적인 일에 쓰인 시간을 조사하다보니 웃지 못할 결과가 나왔다. 인간은 먹는 시간으로 6년을 쓴단다. 줄서서 기다리는 시간만도 자그만치 5년, 집 청소하는 시간으로 4년이 걸렸다. 잘못 놓아둔 물건을 찾느라 1년이 걸렸고, 정크메일을 열어보는 시간으로 8개월이 걸렸다. 적신호에 기다리는 시간으로 6월이나 사용했다. 기왕이면 허겁지겁 먹지말고 농사를 짓고 시름이 깊은 농부들의 마음을 한번쯤은 생각해보자. 아무 생각 없이 줄을 서다가 잊어버린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달려들 것이 아니라 노랗게 물들어 가는 은행잎이라도 바라보면 어떠할까. 작은 것들이 모여 결국에는 큰 것을 만든다. 작은 일상들을 사랑하는 그 사람이 미래에도 여전히 웃고 사랑하며 살 것이다. 사랑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신기루는 분명 아니기에 말이다.
어린 왕자가 대답했다.
“내게 만약 그 53분이라는 시간이 생긴다면, 나는 어딘가 샘이 있는 곳을 찾아 천천히 걸어갈 텐데.....”
바쁘기 때문에 걸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혹자는 이렇게 말할까? ‘전쟁이 당신 머리를 겨누고 있을지도 모르고, 난공불락이던 미국도 허둥대는 시절인데, 세상이 얼마나 치열한지 몰라서 그러는 거다’라고 점잖게 타이를 것이다..
말하고 싶다. 증오는 더 큰 증오를 낳고 전쟁은 파괴만이 있을 뿐이며, 세계화는 내가 세계를 품을 수 있을 때까진 멀고 먼 理想일 뿐이라고. 새벽부터 일어나, 시간을 아끼느라 달리고 달려 집으로 와서는 겨우 텔레비젼 앞에 얼굴을 묻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시간을 아껴 하고 싶은 일이 고작 텔레비젼 시청은 아닐텐데 말이다.
“아저씨, 밤이 되면 별을 바라봐. 나의 별은 너무 작아서 어디에 있는지 아저씨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어. 하지만 오히려 그게 나아. 아저씨는 많은 별들 중에 어느 한 별이 나의 별일 거라고 생각하며 바라볼 테니까 말야. 그러면 아저씨는 별들을 바라보는 게 좋아질 거야. 별들이 모두 아저씨의 친구가 되는 거지. 그리고 나, 아저씨에게 선물을 하나 주고 싶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밤이 있다. 어둠 속에서 앞이 안보이고 세상이 두렵고 무섭게 느껴질 때 어린 왕자가 살고 있는 별을 한 번 바라보자. 저렇게 많은 별들이 질서 있게 살고 죽는 우주, 내 자신도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한 것을 느낄 테니 말이다.
“아저씨가 밤에 하늘을 바라보면, 내가 그 많은 별 중의 한 별에서 웃고 있을 테니까, 아저씨에게는 모든 별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거야. 그러면 아저씨만이 웃는 별을 보는 거지.”
꿈이 안보이기에 더욱 꿈을 꾸어야 한다. 눈물나는 세상이기에 하늘에 웃는 별 하나쯤은 갖고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동안 바빠서 접었던 소식하나 어린 왕자에게 전하고 싶다.
어린 왕자에게
너를 처음 만났던 날은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그게 벌써 20년이나 지났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오랜만에 네게 소식을 전하려니 무엇부터 물어 보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양은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네가 타고 다녀도 될 만큼 컸겠네. 혹여 부리망 때문에 고생은 하지 않았니. 어쩌면 너의 양이 장미꽃을 다 먹어 버리는 불행한 일은 없었는지, 화산은 여전히 연기를 뿜고 있는지 모든 일이 궁금하단다.
널 여전히 기억하는 아줌마가
낙엽이 날린다. 예쁜 은행잎 하나 주어서 눈이 빠지게 기다렸을 어린 왕자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린 의자에 여전히 앉아 속 쓰리며 살았지만 잊지는 않았노라고, 아주 잊지는 않았노라고....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이 소설도 ‘엄마’라는 존재의 부재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려 첫 문장이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이다. 심장을 덜컹, 내려앉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엄마’를 잃어버렸다.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한 존재의 부재.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그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애타고 걱정스러워 발을 동동 굴렀던 나의 모습이 그려지며 정신없이 소설에 빠져들었다. 이 소설은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적당한
무게감에 놀라운 흡입력을 지녔다. 가벼운 소설들에 지치고, 무거운 소설에 싫증이 났었던 나는 소설을 한동안 읽지 않고 있었는데, 가뭄에 단비같은 소설에 너무나 반가웠다. 오랫동안 소설을 읽지 않아서 메말라 있던 내 감성이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촉촉해졌다.
내가 가장 몰입했던 인물은 특이하게 ‘너’라고 지칭되는 큰딸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엄마의 부재에 가장 당황한 인물이며, 여러 면에서 나와 닮아 있었다. 그녀는 도시로 나간 뒤에 오랫동안 가지 않았던 옛 집에 예고도 없이 찾아간다. 옛 기억에 취해 집에 들어간 그녀는, 집안이 엉망인 걸 보고 깜짝 놀란다. 그리고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기분이 이상해진다. 그녀는 엄마를 찾아 헤매다가 헛간에 쓰러져있는 엄마를 발견한다. 엄마는 꿈쩍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강하고 단단했던 존재는 그녀가 엄마를 잊어버린 사이에 이리도 약해져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녀는 어찌할 줄 모르고 쓰러진 엄마에게 자신의 무릎을 내어준다.
쓰러진 모습은 아니었지만, 나는 잠이 든 엄마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엄마의 노곤한 얼굴을 보고는 연민이 솟구쳤다. 우리엄마, 언제 이렇게 늙어버렸을까. 탱탱하던 엄마피부도, 찰랑거리던 머리카락도 온데간데없었다. 주름살과 여러 번의 염색으로 퍼석해진 머리카락을 보며 나는, 그렇게 크고 강해보였던 엄마가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우리를 키우느라 진이 다 빠져나간 엄마는 너무 지쳐보였다. 내가 엄마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그때, 그녀도 꼭 나의 그때와 같았을까.
엄마는 티나지 않게 그녀를 참 많이 사랑했다. 까막눈인 엄마는 작가인 그녀가 쓴 책을 읽고 싶어 했다. 그래서 두통이 심한데도 글을 배우러 다녔고, 소망원 사람에게 딸의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전해 듣고는 통곡한다. 이 장면에서 나도 따라 울고 말았다. 수화기를 붙잡고 엉엉 우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녀와 나는 확실히 닮은 구석이 많았다. 엄마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한다. 엄마에게 무심해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속으로 엄마를 걱정하고 사랑한다. 한없이 엄마에게 기대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표현하지 못한다. 엄마에 대한 태도부터, 생각까지 얼마나 끔찍하게 닮아있는지, 읽으면서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엄마를 찾아 끝까지 헤매고 다닌다. 아마 나여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엄마를 잊어버린 게, 잃어버린 게 너무너무 미안해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그녀는 엄마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엄마의 인생을 되짚어 보는데, 그녀를 따라가면서 묻혀져 있던 내 기억속의 엄마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녀가 ‘엄마의 인생’이 있었음을 깨닫는 계기는 엄마에게도 ‘오빠’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부터 라고 했다. 내가 ‘엄마의 인생’을 깨닫게 된 건 최근의 일이었다. 우리 가족 네 명이서 몇 년 만에 노래방에 갔다. 삑사리 걱정도 없고, 눈치 볼 것도 없이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오랜만에 엄마 아빠 동생의 노래도 감상하면서 2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모두가 거의 기진맥진 해 있을 때, 엄마가 노래를 불렀다. 나훈아의 ‘홍시’라는 곡이었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눈이 오면 눈맞을세라
비가 오면 비젖을세라
험한 세상 넘어질세라
사랑땜에 울먹일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도 않겠다던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회초리 치고 돌아앉아 우시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바람 불면 감기들세라
안먹어서 약해질세라
힘든 세상 뒤쳐질세라
사랑땜에 아파할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도는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찡하는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울 엄마가 보고파진다
엄마는 노래를 다 끝마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셨다. 몇 년 만에 보는 엄마의 눈물이었다. 그때 난 알았다. 내가 아는 엄마는, 나의 엄마는, 엄마의 아주 일부분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엄마에게도 나와 관련 없는 세계에서의 인생이 있었고, 엄마는 처음부터 나의 엄마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었으며, 엄마에게도 내가 엄마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의지하고 싶은, 그리운 엄마가 있었다.
엄마 인생을 내 인생의 조각으로 끼워 넣고 있었던 이기적인 나를 마주하게 됐다. 엄마는 이유 없이 언제나 희생했고, 그러면서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셨다. 철없는 나는 지금까지 엄마를 너무 많이 괴롭혀왔다. 시험기간에 내던 짜증도, 친구관계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풀었던 것도 엄마의 주름살을 늘게 만들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엄마가 내게 화를 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삶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엄마의 삶을 내 안의 틀에 가두고 엄마를 못살게 굴었다. 나는 참 못된 딸이었다.
그녀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고작 '개'를 두고 엄마와 싸운 뒤, 사건의 진상을 알고 나서이다. 엄마와 딸은 그렇다.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딸은 사실 엄마를 모른다. 단지 엄마가 자신의 엄마라는 사실밖에는.
그녀는 엄마를 찾아 구 개월을 헤매지만, 결국 엄마를 찾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탈리아로 갈 결심을 한다. 그녀는 엄마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보며 놀라울 만큼 차분해져 있었다. 그녀의 여동생은 이탈리아로 가려고 하는 언니한테 처음에는 버럭 화를 냈다. 그 화는 아마 언니에 대한 화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화였을 것이다. 아이들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엄마를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에 터져 나온 화였을 것이다. 언니인 큰 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맞서 화를 내지 않을 것이리라.
그녀의 동생은 편지에서 이런 말을 한다. 「언니.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우리들 에게 올까? 엄마를 이해하며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세월의 갈피 어딘가에 파묻혀버렸을 엄마의 꿈을 위로하며 엄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올까? 하루가 아니라 단 몇 시간만 이라도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엄마에게 말할 테야. 엄마가 한 모든 일들을, 그걸 해낼 수 있었던 엄마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엄마의 일생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언니, 언니는 엄마를 포기하지 말아줘, 엄마를 찾아줘.」
동생의 눈물 젖 은 편지에 나도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정말로 그녀가 엄마를 찾아주길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그녀는 엄마를 찾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에타 상을 찾았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티칸시국에서, 엄마가 부탁했던 장미묵주를 사들고. 죽은 아들을 끌어안은 성모마리아의 상을 보며 그녀는 말한다. 엄마를, 엄마를 부탁한다고... 그녀가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드렸다는 것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녀를 인정하게 만든 성모마리아를 생각했다. 죽은 아들을 끌어안은 여인. 나는 그에게서 엄마를 봤다. 자식들 걱정에 애가타고, 몸 돌보지 않고 자식들 챙기느라 자기 몸 상하는 지도 모르고,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줄 준비가 돼 있는 미련한 엄마를. 내가 어떤 인간이든 나를 사랑해주는, 나의 철없음도, 외로움도, 슬픔도 모두 감싸주고 보듬어 줄 수 있는 큰 품을 가진 그 사람을.
그녀는 엄마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은 꼭, 나한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너무 늦기 전에, 엄마에게 말해야겠다. 엄마를 존경한다고, 많이 사랑한다고.
엄마를 내게 주신 하늘에 감사하고 있다고....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독후감 쓸 때 참고해야겠네요...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