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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인 배경 소개-러일 전쟁 상황 -1904-5) (회령 공동체 이야기) 함경도 북쪽의 교우촌(회령)은 찾아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브레(Bret, 白類斯) 신부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지역의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러일 전쟁 와중에) 전염병(으로 많은 이들이 죽어 갔지만), (그 죽엄중에)특히 유아 사망이 꽤 많은 신자들을 앗아 갔지만 생존자들은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며 성사 받기를 원합니다. 그 중 두 사람은 700키로미터나 되는 도보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 원산에 오느라고 러시아와 일본군의 전선을 용감하게 넘어왔습니다.” (연보 1, p21)-1905년 |
천주교 신앙생활의 특징은
성사생활입니다.
위의 이야기는 두만강을 배경으로 불란서 선교사가 러일 전쟁 중 열심한 신자들의 실화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고백성사 때문에 전선을 뚫고 1천7백50리를 쉬지 않고 달려가는 회령공동체 형제님,
참으로 당신은 멋쟁이 이십니다.(전쟁의 희생자 14만명)
다음은 시대적 배경을 50년 뒤로 하는 한국전쟁(625),
장소도 압록강 근처 옥사덕으로 잡아봅니다.
고백성사에 이어서
성체성사와 관련된 밀과 포도주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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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을 안고 뫼밭에 선
누런 밀 이삭이 불어오는
산들바람으로 가벼웁게 나부낀다
사제의 거룩한 손이 그대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시켜 놓으리라
밀이삭이여
그대는 여름 햇볕에 마음껏 무르익어라
가날픈 넝쿨에 매달리어
흔들리는 포도송이
비바람 찾아오고
서산 너머 해님이 잠들 때까지
그리스도의 성혈이 되는
이 신비를 그대는 아는가
태양의 작열 속에서
그대는 단맛 가득히 무르익어라.
영혼아, 그대는 설워마라
님의 따듯한 손길이
풍파의 암흑속으로 너를 데려왔으니
그 섭리의 뜻을 인식하여 쓰라린 고통 속에서
영혼아 깨끗이 무루익어라
(겔루트 수녀 - 분도수녀원 총장)
(분도회 수사님들은 포로생활을 준비하면서 덕원에서 미사용 포도주와 밀을 준비했다. 조금씩 사용했지만 바닥이 나고 있었다. 옥사덕 수용소에 수감된 어느 날 옥수수 한 자루를 간수로부터 받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안에 밀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밀떡이 되고 종자용 씨앗이 된 것이다. 포도주는 옥사덕 수용소 근처에 널려 있는 머루를 대용으로 했다. 생환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미사 봉헌과 시간전례가 가능하였기에 수용소 생활의 온갖 고통과 궁핍을 이겨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성체성사는 영혼을 살려내는 힘이 분명히 있습니다.)
다시 1900년대로 돌아 갑시다. 한반도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의 회오리속에서 불같은 문화 부흥, 즉 신식교육의 돌풍을 맞이합니다. 민대주교는 시대의 강력한 요구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려고 애를 씁니다. 유럽으로 달려가 불란서, 로마, 그리고 독일을 차례로 방문하고 학교 설립을 서둘렀습니다.
Ⅱ성모 영보 - 민대주교 독일 방문
“은총을 가득히 받은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 하지 마라. 마리아(베넥딕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제 극동의 포교지를 얻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이름을 한국이라 하여라)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일이...”
“성령이 너에게 내려 오시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것이 없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뤄지기 바랍니다.”
뮈델주교는 1908년에 고국인 불란서를 방문합니다. 이는 조선의 가톨릭 교원(敎員)을 양성할 사범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수도자들을 초빙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실패였다. 뮈델 주교는 로마로 향하였다. 로마에서 전교성성장(傳敎聖省長) 고디 추기경으로부터 1884년 설립된 성 오딜리아베네딕도전교수도원을 소개 받는다. 뮈델 주교는 즉시 이 수도원장 놀벨도 원벨디 원장에게 서간을 보내어, 이 젊은 수도회로 하여금 자기 교구(조선)에 와서 가톨릭 교원(敎員)을 양성할 사범학교 설립과 운영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성 오딜리아베네딕도전교수도원은 이미 인수한 아프리카 전교 구역의 선교사 파견도 벅차고 힘이드므로 뮈델주교의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뮈델주교는 독일 오딜리엔 수도원을 직접 방문하여 조선 선교 상태와 교원 양성의 필요성을 역설하기에 이른다. 결과는 성공이다. 수도원은 뮈델주교의 요청에 혼쾌히 응한 것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어떻게 그런일이...” “성령이 너에게 내려 오시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것이 없다” “......지금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뤄지기 바랍니다.” |
Ⅲ.예수 성탄 - 성오딜리아베네딕도전교수도원 한국진출 결정
(성...탄...시...기)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만상이 잠들 때...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제부터는 대림시기가 지나가고 성탄시기가 다가 온 것이다.....,
1909년 마침내 도민고(P.Domnikus Enshoff) 신부와 보니파시오(P.Bonifacius Sauer) 신부로 구성된 선발팀이 독일에서 조선으로 출발하게 된다. 마침내 선발팀은 도착 후 한 달만에 적당한 위치를 잡아 대지매입을 시작하면서 도밍고 신부를 독일 모원에 돌려보내어 경과보고와 아울러 적극적인 후원회 활동에 나섰다. 보니파시오 신부는 혼자 남아 부지 교섭을 끝까지 하며 이 새로운 땅에 분도수도원 건축을 시작하였다. 이곳의 이름은 혜화동이었다 |
Ⅳ. 유아기 - 백동시대
²⁸시므온(사부 베네딕도)은 그 아기(조선 반도)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²⁹“주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이 종(베네딕도)은 편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³⁰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³¹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³²그 구원은 이방인(조선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루가22장28절-32절)
백동 베네딕도회는 계속해서 경사가 났다. 11월1일 모원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이 당도한 것이다. 신부2인, 수사4명을 충원 받은 것이다. 마침내 1909년 12월5일에는 로마로부터 수도원(Prior)으로 정식 인가가 났다. 극동의 최초 분도 수도원이었다. 첫 번째 사업은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첫 번째 희생자가 나타났다. 11월에 왔다가 1월에 티프스로 죽은 말딩 수사이다. 허지만 수도원의 학교사업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1910년 숭공학교(崇工學校) 개교(실습위주)를 하였다., 첫 번째 개설과목 - 목공(지도교수-일데폰스 수사), 지원생 27명 교양과목 - 갈리스도 신부가 담당하였고, 그 외 증설과목은 철공부, 제차부였다. 이 숭공학교는 당시 상류층 사회로부터 인기가 많아다. 학생들의 실습 작품들은 실지 사용할 수 있는 생활용품들이었기에 수도원에서 직접 사용하거나 주문 생산 판매도 가능했다. 생산품목 중에는 여러 가지 의룡(衣龍) 궤짝들이 많은데 그 중에는 자개와 금속으로 장식한 제품들이 인기가 높았다. 그 외 대성당 강론대, 제대, 가구등이었다. 숭공학교 제차부에서는 자동차의 상부 제작과 자동차 수리로도 유명하였다. 70명까지 수용유지 되는 번영도 있었다. 만일 오늘날까지 지속 되었다면 벤츠 생산도....., 1911년에는 성 오딜리엔 모원의 대원장 놀벨도.웨벨(Der Abt Norbert Weber) 아빠스가 백동 베네딕도 수도원을 방문하는 경사를 맞게 된다. 시작한 사업의 성과들을 확인하고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함이었다. 1912년 8월, 수도원 성당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이미 개교한 숭공학교와 사범학교는 기존의 건물들을 개축한 임시 가건물들이었으나 증축하니 수용인원이 훨씬 증가하였다.(사범학교30명, 숭공학교60명) (...수도원이 아기예수님처럼 점진적인 성장을 하는 모습들입니다) 1913년 5월, 로마로부터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백동의 베네딕도 수도원이 대수도원으로 승격되는 소식이었다. 한편으로 놀벨도 대원장은 성오딜리엔 전교 수도회의 총대원장으로, 보니파시오 신부는 본 서울 백동 베네딕도 수도원의 제1대 대원장으로 승임된다는 소식이었다. 마침 보니파시오 신부는 독일에 머물고 있는 시기이므로 즉시 승임식이 거행되었다. 백동의 베네딕도 수도원은 대지 4만평에 성당, 숭공학교와 농장, 사범학교, 그리고 신부11명, 수사9명의 대수도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세계대전(1914 - 1918)이 일어났다. 이에 독일수사 4분은 병역 의무를 이행케 되어 전쟁에 출전하였다가, 얼마 후 일본군에게 강금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뿐만아니라 본 수도원과 독일 조국간의 연락이 때때로 두절되자 당장 금전 곤란을 격어야만 했다. 특히 전쟁 발발 1년간 지극한 경제 곤란을 당하여 사범학교는 벌써 폐쇄되고 말았다. 1914년 11월에는 숭공학교도 폐교의 운명에 직면하였으나, 총독의 특별한 주선으로 더 유지하게 되었다. 전쟁 기간중에 수도원은 더욱 고립되어 생활비마져 어려움을 당하였다. 이때 독일의 모원도 전쟁으로 큰 난관을 만났으니, 많은 수의 수사들과 신학생들이 전쟁으로 희생당한 일들이다. 뿐만아니라 동부 아프리카에 있던 모든 분도회원 선교사들이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종전 후에는 또 다시 전임 전교지에 복귀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동부 아프리카 선교가 불가능하자 남부 아프리카로 방향 전환을 시도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못하였다. 이때 마침 조선은 1911년, 경성과 대구로 교구가 분리된다. 그런데 경성은 조선 북부와 간도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그후 조선천주교회는 교구 분활이 또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1920년 8월2일, 베네딕도 수도원은 함경남북도, 그리고 간도와 의란을 경성교구로부터 인수 받아 독립교구로 성장하게 된다. |
Ⅴ 공생활
공생활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이었다. 복음의 특징은 공생활 시작에 있어서 많은 시간들은 일반 대중을 위한 시간이었다면 그리스도 수난은 제자들에 대한 특별 배려로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이들을 위한 은총의 시간이라고 한다(곽승룡 신부님의 말씀) 이런 복음의 흐름은 베네딕도 100년사에 그대로 적용 시켜볼 만하다.
베네딕도회의 일반 대중을 위한 포교 시작은 교구 인수 시기(1920년)와 같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즉 수도원과 교구활동이다. 오늘의 이야기 주제는 봉헌회원이 바라 본 베네딕도회 수도원 100년사입니다. 수도원에 있어서 가장 강렬한 베네딕도 영성의 모습은 수사님 모집 공고문에 잘 나타나 있다. 교구활동에서는 교구장 성성 축하식 전문에서 베네딕도 영성이 잘 표현되어지고 있다. 교구 일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업은 신학교 이다. 마침 교장 신부님의 은경축 기록을 통하여 신학교를 깊이 관찰할 수 있었다. 사실 수도원과 교구사업등을 통한 베네딕도회 활동등은 명확히 구분되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제시한 수사 모집공고와 주교 성성 축사문을 중심으로 베네딕도회의 특별한 영성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것이다.
먼저 베네딕도회의 수도원을 살펴보자. 1926년 8월2일, 덕원에 수도원 기초공사를 시작하여 1927년 11월17일 이주식을 기념하여 대례미사를 봉헌하였다. 이 시기에 특별하게 기억될 만한 사건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수도원 성당(1929-1931)이었다.
덕원수도원의 모든 건축은 1926년부터 1934년까지 단 기간에 완성되었다. 기적이었다. 덕원에서의 새 원장은 금구 슈미트이었으나, 1930년 독일 모원의 보좌 아빠스로 영전됨에 따라 후임으로 루치오 로트 신부가 되었다.
이제부터 수도원은 안정된 환경속에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신부들은 수도원 관리와 전교 사업에 종사하거나, 또는 신학교 교수, 또는 교우들을 돌아보고, 혹은 조선말을 배우거나 습득하였다. 수사들은 철공, 목공, 제화, 제본, 농장, 화원, 치료소등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 당시 특별히 주목받고 있었던 (수도원 아래에 설립된) 치료소는 의사인 요셉수사가 주관하고 있었으며 그 인기는 대단하였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규모는 작지만 의료 사업도 교육사업에 비교될 만큼 특별하였습니다. 사실은 요셉 그라하마 수사가 1928년 의사 자격증을 취득함에 따라 헌신적인 의료봉사가 가능해 젔으며, 육체적인 치료는 물론하고 수 많은 임종대세를 통해 영혼도 돌보았다.
수도원 가족의 증가와 새 본당 신설로 수사들의 일이 많아졌다. 건축사업 뿐만 아니라 농사, 축산, 과수, 양봉, 화원, 온실등의 일도 많아졌다. 안타까운 일은 수도원의 발전을 시기한 외부인에 의한 두 번(1936년 1월과 5월)의 실화화재 사건이었다.
수도원의 인쇄소와 제본시설은 전례서, 교리서, 호교서, 미사경본, 및 새로운 전례서 번역 출판을 가능하게 하여 교회안에 전례운동의 보급과 한글 보존 및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장소가 비좁아 잠시 중단되었던 방인수사 양성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어 1928년 조선인 수사가7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허원자5. 수련자1, 청원자1)
수도 생활을 지망하는 조선 청소년들에게 여(與)함
덕원 성 베네딕도회에 누가 들어 갈 수 있으며, 어떤 모양으로 또 무슨 목적으로 들어갈 수 있나? 1. 15세부터 20세까지 보통학교를 마친 청소년들이 좋은 집안에서 나고, 순명(順命) 잘하고, 효순(孝順)하고, 열심한 자이면 지원할 수 있다. 2. 조선 어느 교구에서든지 지원할 수 있다. 그러나 지원 당초에 두 가지 목적 중에 하나를 택하여야 한다. 즉 수사신부가 되기를 원하든지, 그대로 수사 되기를 원하든지 할 것이다. 수사 신부가 되기를 지원하는 자는 총명하며, 성품이 더욱 착하여야 한다. 수사 되기를 원하는 자도 순명, 정결, 신빈(神貧) 이세가지 고귀한 허원을 발하게 되는 고로, 주 대전에 매우 거룩한 지위를 얻는다고 단언한다. 3. 수사신부는 이 베네딕도회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 성 오딜리아 베네딕도회의 목적이 본래 전교 목적인 고로, 전교하는 데는 우리 수사 신부님들이 세속 신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수사 신부인 만큼 규율에 따라, 자신을 수덕(修德)하는데 더욱 편리한 특은을 받는 그것이다. 4. 수도원에 성소(聖召)가 있으면 아무도 막지 못하는 법이다. 차서(次序)를 따라서 부모의 승낙과 본당 신부의 증명이 필요하다. 수사신부 되기를 지원하는자에게는 철저한 공부만을 시킨다. 과목은 사회에서 알아주는 중학 졸업, 철학, 신학 전문이다. 수사만 되기를 지원하는자는 기술을 배운다. 수사만 되기를 지원하는 이는 성품만이 열심하고 순박하면 장래 성공을 의심하여 입원키를 주저(躊躇)하지 말지니, 가령 어떤 부득이한 일로 퇴원한다 하더라도 한 가지 기술을 배우고 있을 것인 즉, 영육간에 해될 것이 없다. 주께서 여러 세기 동안 무수한 청년들을 불러, 완전한 길로 인도 하시던 그 말씀을 의심없이 우리 조선 청소년들에게 하신다. “와서 나를 따르라.” |
(아래 부분은 필자가 봉헌자의 입장에서 임의적으로 해석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비판력 있게 검토하기 바란다.)
모집 공고문에서 가장 강렬하게 멧세지를 전달하는 것은 “와서 나를 따르라”라는 문구이다. 이 말은 천 년 이상 많은 젊은이들이 베네딕도회를 찾았으며, 베네딕도회는 그들을 틀림없이 완덕의 길로 인도하였으니, 걱정하지 말고 오너라....라는 간결하고 명확한 멧세지였던 것이다.
모집공고 1항의 순명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의미하고, 효순은 하느님의 대리자인 스승을 의심없이 따르며 섬기라는 지상 명령을 의미한다. 다시한번 강조하면 순명은 성경(聖經)처럼, 효순은 성전(聖傳)처럼 여기라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공고 2항에서 총명의 요구는 당연하다. 당시 학업의 현실을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이므로 일어는 상식의 수준이었다. 스승이 독일인이기에 독어도 썩 잘하여야 했다. 교회의 공식적인 문서가 라틴어였고 전례문과 성무일도가 라틴어인고로 이것도 필수과목이 분명하다. 더 깊이 들어가면 희랍어, 희브리어도 어지간이 해야하고 중국 대륙을 수시로 횡단하니 중국어도 상식적으로 알아들어야 했다. 여기에다 영어나 불어까지 합하면....??? 또한 한글은 가장 기초적 언어였다. 만일 한글의 기초가 없으면 어떤 언어도 불가능하다. 베네딕도회는 언어의 이러한 근본 바탕을 알기 때문에 베네딕도회에 있어서 한글 보호 보존과 발전은 필수였다. 그런고로 신부 지망생은 총명함이 당연했다. 스승님들도 언어 때문에 무척 고생하셨다. 원생들은 15세 지망생부터 출발하여 13년 내지15년 학업을 마치면 수사신부가 되는 것이다. 최고 학년의 평균 나이는 28세부터 35세가 넘어 간다. 최저학년은 겨우 15세..., 허지만 이들은 35세의 형님들과 함께 아빠스의 인장에 새겨진 “십자가와 규구로”라는 목표를 향하여 학업에 전진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아빠스 인장의 의미는 전교 사업의 십자가와 수도원의 규구(법도와 본보기)를 의미한다.
아무튼 베네딕도 수련생들의 하루 일과의 시작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새벽 기상과 함께 소리치는 이 외침 즉 “Benediacamus Domino! Deo gratias((주를 찬미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으로 시작된다. 이 외침은 모든 성소자들의 1000년 이상 오랜된 전통으로써 지금도 그 맥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라고 1920년대 연대기 기록자가 증언하고 있다. 하루 일과의 시작은 하느님 찬미와 감사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봉헌회원들도 따라서 해 볼만한 좋은 습관과 전통이다.
허원의 내용중 신빈(神貧)은 세속의 재물과 동시에 영적인 재물에 대한 가난, 즉 단순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석사, 박사 학위보다는 하느님앞에 겸손을 언약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더구나 수도원내에서 받은 직책까지 포기하라는 베네딕도 회원의 묘비명의 특색, 즉 생(生)과 함께 졸(卒)만 기록하는 전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공고3항은 전교수도원임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수덕(修德)의 편리함이란 수도원의 규구를 구체적으로 지적함을 의미한다. 규구란 법도와 본보기로서 법도는 베네딕도 성인이 지적한 성경과 성전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닭음이요, 본보기란 베네딕도 성인이 이미 모범을 보여주신 완전한 성사생활의 실천을 뜻한다.
마지막4항은 수사와 수사신부를 구분하고 있다. 이 일은 삶의 지혜에 있어서 문무(文武)와 비교될 수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랜트에 대한 응답으로 여겨진다. 인간이 받은 것 중에 누구의 것이 더 우월한가라는 공상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내가 받은 선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실용적인 해답으로 여겨진다. 베네딕도회에 있어서 수사 신부님들의 포교 정신과 수사님들의 순교자적인 협조는 포교지에 있어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베네딕도회에 있어서 수사님들의 전문적인 기술은 일차적으로 수도원의 자립을 위하여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포교지에 있어서는 자선사업을 통하여 그것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실제적으로 수도원, 성당, 공소등의 신축, 증축, 개축등은 수사님들에 의해서 대부분 이뤄지고 있었으며, 그 외 원예, 축산, 인쇄, 제본, 제화, 철공들과 특히 의료기술등은 수도원의 자립뿐만아니라 지역의 문화를 개선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더욱이 베네딕도회는 교육 사업을 중요시 하는바 교육을 통한 일반인들과의 기술 소통은 원활한 포교활동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었다.
다음은 교구 관계를 살펴 봅시다. 1921년 5월1일, 보니파시오 대원장은 경성교구 부주교인 데브레드 주교와 마찬가지로 뮈델주교의 주례로 주교성품을 받았다. 주교 성성식에는 대구, 대판, 장기, 봉천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원산 신자들과 숭공학교 생도들도 참석하였다. 먼저 성성식 축사 원고를 소개하고자 한다.
신주교 성성식 축사(예수성심회)
원산본당 신자들의 환영사 (사우어 아빠스 주교의 성성식) - 공경하올 신주교 각하께 하례하나이다. 천주의 은혜로 각하를 저희들에게 주셨나니 13년 전에 사명을 받으시고 우리 반도에 내림 하실 제, 부모와 형제를 이별하시고 고국을 떠나 오심은 오직 우리 불쌍한 영혼을 구하여 주시기 위함이로소이다. 적막한 우리 강산에 비로서 새로운 광채가 발하니, 이는 곧 베네딕도 수도원이 창립됨이로소이다. 각하의 열성이 지극하사 수도원을 건설하신 외에 또 학교를 설립하사 무식한 우리 청년에게 많은 지식을 주셨나이다. 규계와 도덕이 날로 나아가심으로 전지하신 주께서 조선 북부 및 우리 동포가 거류하는 지방에 주의 사업의 큰 임무를 맡기사 오늘날 성대한 축성식을 받게 하시니 각하께 영광이며, 성교회의 복락이요, 저희들의 기쁨이로소이다. 베네딕도 성인의 규구(規矩-법도와 본보기)를 따라 주의 일을 하시는 각하는 조선 성 베네딕도회의 수선 대원장이시오, 수선 주교시로소이다. 처음 발섭(跋涉)하시는 길은 험준할지나 주께서 항상 한가지로 하시리니, 각하의 인장에 “십자가와 규구로”라고 기록하신 말씀과 같이 전교사업의 십자가와 수도원의 규구로 행하시면 날로 융창하실 줄 믿사오니, 바라옵건대 모든 경영 하시는 바 거룩한 사업이 뜻대로 이루어지옵고, 반도 강산 곳곳에 수도원이 설립되기를 비옵나이다. |
보니파시오 주교는 우선 경성교구 신부들의 본당부터 인수를 서둘렀다. 먼저 원산과 내평본당을 인수했다. 다음은 북간도 용정(갈리스도 P.Kallistus Hiemer와 크느트 P.Kanut d'vernas) 성당과 팔도구(가니시오 P. kanisius Kugelgen) 성당이였다.
1921년 보니파시오 주교는 승품 후 즉시 북간도 사목방문길에 나섰다. 교우 7백명에게 견진 성사를 주었다. 북간도 길은 멀고도 험하였다. 철도로, 도보로, 말을 타고, 마차로 가야만 했고 광활한 교구안에 교우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1922년 3월19일, 연길과 의란이 북만주교구에서 원산교구로 넘어 왔다. 북간도 포교지는 참으로 광활하였다. 연길지방은 총인구 6십만에 3개본당, 교우수 7천명이었다. 의란지방은 총인구수 37만5천명에 교우수 1천4백명에 본당은 하나도 없었다. 원산 본당은 로마로부터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사실 원산 성당은 주교좌 성당으로서는 너무도 작고 협소했다. 본당 신자 겨우 170명에 불과했다. 본당 확장이 시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니파시오 주교는 1924년 주교좌 성당보다는 학교 신축(900 수용 시설)을 제일 먼저 서둘렀다. 1928년 당시 본당 5개소, 교우 총수가 9천명에서 본당 16개소, 교우1만 6천으로 늘어났다.
전교지역 역시 너무 광활하여 교구 분활을 로마에 청한바 있었다. 1928년 6월9일 교황청 교서로 교구 분활이 확정되었다. 원산교구를 으뜸 교구로 하여 연길교구가 분활 되어 데오돌 신부(P.Theodor Breher)를 취임케 하고, 의란은 임시 자유교구로 하되, 보니파시오 주교의 권하에 소속되도록 하였다. 의란 지역은 북방에 위치할 뿐만아니라 지역이 광대하다. 그곳은 이미 1925년 마인라드(P.Meinrad Schweinberger) 신부와 빌립버(P.philpp lenz)신부가 부진(富鎭)과 가무사(佳無斯)에 본당을 설립하였다. 성베네딕도회는 이 지역을 선교사 부족으로 프란치스코 카프친 수도회에 양여하였다.
원산교구는 본당도 5개 본당에서 12개 본당으로 증가하였다. 함흥, 영흥, 고원, 웅기, 나진, 흥남, 북청, 나남등이다.
신자수는 500여명에서 10년후 4,354명으로 10배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 학교도 30여개로 증가하였다. 베네딕도 회원은 학교사업을 포교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교구로서도 연길과 의란이 원산교구에서 떨어져 나감에 따라 함경도에 집중 시킬 수 있는 해이기 때문이다.
1940년 함흥교구가 탄생하였다. 장차 조선인에게 교구를 위임하기 위한 준비였다. 이로서 함흥은 함흥교구(8개본당-함흥, 회령, 청진, 영흥, 웅기, 흥남, 북청, 나남) 주교좌가 되고 덕원은 면속구(4개본당-원산, 덕원, 고산, 고원)가 되었다.
다음은 신학교 관계를 살펴 봅시다.
경성 백동 시절, 1921년 11월3일 15명을 시작으로 신학교 문을 열었다. 1927년 수도원 이전과 함께 신학교도 덕원으로 오게 되었다. 학생수는 45명인데 그중 24명은 연길교구 신학생들이다. 금년(1927년) 여름에 두 명이 5품을 받았으니, 불원한 장래에 신부로 활동할 것이다.
신학교는 교구의 필수 사업이고, 교구를 맡은 선교 단체를 위해서는 당연히 긴급 사업이다. 왜냐하면 방인사제를 양성하여 그 교구에게 교회를 넘기는 것이 로마의 정신인 동시에 선교단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에서 원산교구 고유의 신학교가 서울 수도원 구내에서 시작되었다. 교장은 부주교인 로머신부(원장 겸임), 초대사감은 디페르나스 신부(부원장 겸임), 후임에 세바스티안 슈넬 신부이었다. 학교 건물은 실업학교가 폐교됨에 따라 그 건물을 사용되었고, 학업과목은 주로 라틴어와 교리였다. 학생은 33명, 대부분은 원산, 내평, 간도 지역에서 왔다.
은경 축사*
몇 번이고 꽃이 피고 달이 뜨는 그 사이에 경애하올 교장 신부님(로머 신부님)이 거룩한 제단 아래에 부복하여 가난, 동정, 순명의 종신 허원을 발하시던 영광의 그날은 25년이라는 그 옛날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허원하시던 그때에 육체적 죽음을 보(報-알리다) 하던 처량한 종소리도 교장 신부님의 청춘과 아울러 영원히 오지 못할 과거의 저 나라로 사라졌습니다. 우리 인류가 이구동성으로 부르짓는 이 고해(苦海-쌉쌉한 바다)는 어찌 안락과 행복을 누리게 하였으리이까? 물론 기나긴 그 사이에는 경애하올 신부님의 마음을 찌르는 듯한 고통도 있었고, 마음에 부서지는 비애도 있겠습니다. 더욱이 산용(山容-산의 모양)이 생소한 이억의 고통,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부자유롭고, 풍속과 언어와 혈족과 사상이 전전상이(前前相異)한 우리 동포 사이에 쌓여, 글자그대로 천신만고(千辛萬苦)를 당하시었습니다. 이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십여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삼구(三仇)를 거슬러 악전 고투하신 그 곤란은 우리가 이루 추량(推量)치 못하겠습니다. 더욱이 철모르는 우리들은 모르고 알고 신부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였는지? 신부님보다 우리가 더 명백히 깨닫는 동시에 후회함을 마지 아니합니다. 신부님은 주야로 우리 50명의 걱정을 다 하여 주시고, 약자를 붙을고, 엎어진 자를 일으키고, 기진한자의 용기를 돕고, 근심하는자를 위로하시고, 방황하는자를 인도하시며, 우리가 따듯하게 침대에 묻히어 평안히 꿈을 꿀 때, 신부님은 춘하추동 사시절을 무론하고 침대로 돌아다니시며, 잘 때까지라도 우리의 걱정을 하여 주시는 등 애정 많은 모성의 책임을 다하셨고, 신성한 교육자의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청년을 철저히 이해하시는 화형(花型-아름다운 꽃의 원조)의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우리는 9개월간 신부님께 근심을 끼치다가 그리운 부모친척을 맞아 희희락락하는 그 반면에 경애하올 신부님은 두통나고 싫증나는 타이프랄(경제적 도움요청 편지를 쓰기 위해)에 손을 놀리지 아니치 못하였습니다. 이 25의 숫자야말로 천신만고의 결정체요, 사후 영복의 영광입니다. 신부님의 현실에 나타난 공은만 하여도 다 축하하지 못하겠거늘 현실에 나타나지아니한 공은까지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우리가 즐거워하고 축하하여야 할는지 생각조차 우리들 머리에는 떠돌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광적으로 승리를 기뻐하는 개선군과 같이 천만의 입을 빌려 오늘의 축가를 노래하고, 억만의 수족으로 오늘의 기쁨을 용약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뻐 용약하여도 영광의 오늘을 만족히 축하하기 전에 불가능한 것은 명확히 현실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어린 생각에는 교장 신부님의 고상한 훈계와 교육을 받아, 그대로 아니 적극적으로 암흑한 실사회에 나아가 광명과 진리를 부르짖어 동포의 구령을 도모하고, 천주의 영광을 현양하는 동시에 신부님의 존함(尊啣)을 세상에 떨치는 이것이 신부님의 태산같은 은혜의 보답인가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실행하기로 신부님 앞에서 결심합니다. 이 변변치 못한 말씀으로써 오늘 축하를 표합니다. 천주강생 1931년 11월 8일 신(학)생대표 오 알벨도.(신우, 창간호, 1933.3.17) |
신학생들이 가장 많았던 때는 50여명이었다. 대부분 원산교구 아니면 연길교구 학생들이었다. 평양교구 학생들이 오면서 학생수가 더욱 늘어났다.
1935년 5월14일, 정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아 성대히 개교식을 열게 되었다. 당시 신학교는 13학년으로 구성되었다. (중등과5년, 고등과2년-소신학교), (철학과2년, 신학과4년-대신학교) 1943년,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들이 무인가로 정부로부터 강제폐교 조치가 내려 졌을 때, 덕원 신학교로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1936년 처음으로 2명의 사제(金忠務, 韓允勝-연길교구)를 탄생 시켰고, 2년후 3명의 사제(林和吉, 金寶容, 최마지아-원산교구)를 배출 시켰다.
1937년 독일인 신학생 7명이 덕원신학교에 편입하였다. 현지 사정을 더 잘 습득하려는 배려였다.
1938년 신학교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4개월만에 복구 및 증축한다.(외부인 방화 사건)
Ⅵ. 예수 수난 - 북한의 공산화
수난복음이 스승과 제자들과의 특별한 관계를 그려 낸 것처럼, 베네딕도회 역시 수난시기는 수사님들에게 집중할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로 공산주의자들은 신주교에게 한마디 한다. “달갑지 않은 서양 노인네가 어서 죽었으면.....,” 그의 죄명은 반동과 스파이로 5년 형을 받았다. 사방육척도 못되는 감방이 불결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보기에도 흉한 남색 누비옷(죄수복)을 걸치고, 일년내내 세수도 못한채 난방도 없이 엄동설한을 고스란히 넘겨야만 했다. 일반죄수가 먹는 소량의 음식으로 연명하였다. 지병인 천식은 더 악화되었고 영양실조까지 겹쳐 1950년 2월7일 새벽 운명하셨다.
신주교 담당의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전하고 있다.
“설사가 심하고 가끔 의식을 잃는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서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나는 어린아이와 같이 무죄하니, 내 집(수도원)으로 가게 해다오”
“이러한 사정을 정치보위부장에게 전해 다오” .....,
성베네딕도회 김영근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40여 년간
이 나라 백성의 복음 전파와
개화를 위해 젊음과 사랑과 힘을 모두 바치신 그분에게
해방과 더불어
국가 최고 훈장을 달아드리지 못할 망정,
반동 스파이로 몰아서 옥에 가두고 굶어 돌아가시게 하다니....,
우리 겨레가 무슨 낯으로 천국에서 주교님을 뵈올 수 있을까....”
여기 생환선교사(게루트루트-베네딕도수녀회 총장)의 글로 순교자보고를 합니다.
<이별>
길 위에 옮겨지는 자그마한 걸음
노예생활도 교활한 거짓말도
마침내 마침내 사라젔으니
이제는 자유스러운 해방의 몸
길 위에 옮겨지는 무거운 걸음
내 심장 짓눌려 피를 흘리니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만이
그 아품을 짐작하리라
길 위에 옮겨지는 괴로운 걸음
상처를 깊이 새겨주리니
주님 사랑이 부르시어 함께 맺었던
사람들을 두고 떠나야만 하노라
길 위에 옮겨지는 마지막 걸음
눈물이 앞을 가리네
우리네 소명의 나라 한국이여
언제 다시 부르려느냐
(질문과 순례자 대화는 필자가 독자의 편의 제공을 위하여 자료들을 모아 요약해 놓은 것이다. 참고 바란다)
질문 : <자그마한 걸음>이란 국경을 넘는 모습을 두고 하는 말씀이입니까?
순례자 : 시인의 마음이지요. 우리는 1954년 1월 8일 신의주를 통과하여 중국 단동으로, 그리고 소련 모스크바를 거처 드디어 1월 22일 오후 2시에 동독의 붉은 차단기를 넘어 귀향하였음을 보고 드립니다.
질문 : <무거운 걸음>은 이방인의 나그네 설음을 의미합니까?
순례자 : 4년 반의 긴 여행, 청천강 옥사덕에서의 포로생활, 그것은 한네스(악질)와 함께 한 旅路였지만, 우리는 많은 은총의 시간 속에 있었으며, 그러기에 이전보다 더 주님 가까이 있었습니다.
질문 : <괴로운 걸음>은 돌아오지 못한 형제들이었군요?
순례자 : 옥사덕 언덕의 17개의 십자가, 그리고 보니파시우스 아빠스 주교와 루페르트 신부가 기억됩니다. 총67명 체포되었으며 그중 7명 실종되었습니다.(67-7-19=41)
옥사덕의 순교자는 열 일곱분 이었습니다.
1. 페트루스 게르너 수사(설사, 쇠약 7월 2일)
✠...최초의 희생자, 늘 구석 자리를 잡고 깊은 침묵속에 기도하시던 수사님, 옆 사람 마저 그의 죽엄을 알지 못했다. 동료들이 그에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일행이 수용소 마을을 이동할 때, 어린아이처럼 등에 업어 주는 일 밖에 없었다.
2. 마루쿠스 메쯔거 수사(설사, 탈수 8월2일)
✠...몸을 가눌 수조차 없도록 온몸이 뚱뚱 부어오른 수사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탈수 증상으로 물병을 품고 사셨던 수사님, 끝내 한모금의 물을 찾아 헤메다 죽엄을 맞이 하셨다.
3. 오이겐 오스터마이어 수사(고령 64세, 장질환 49년 9월 14일)
✠...병약한 그는 수용소의 간수도 간섭하지 않았다. 수사님은 모두를 위해 금체취를 시도하였다.그러나 장질환으로 갑자기 죽엄을 맞이한다.
4. 바실리우스 하우저 수사(수종증, 50년 2월 14일)
✠...다리가 붓고 모든일에 의욕이 떨어지더니, 갑자기 복수가 차 오르기 시작하였다. 부실한 음식 때문이란다. 수사님은 입맛을 다시더니 입버릇처럼 지꺼린다. 병든 닭이라도 한 마리 먹었으면...,
5. 파스칼 팡아우어 수사(수종증, 50년 4월 16일)
✠...반복되는 설사, 그것은 수사님을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하게 만들더니, 마침내 하느님품으로 모셔갔다. 정원사이셨던 수사님은 냉수 마찰로 몸을 단련 시켜왔던 건장한 분이셨는데....,
6. 애바 쉬츠 수녀(심장병, 장질환, 탈수 8월 10일)
✠...심장과 위장은 남다르게 약했다. 더군다나 전혀 맞지 않은 콩밥이 원인이 된 지속적인 설사는 수녀님의 체력마져 완전히 소진하게 만들어 옥사덕 수용소를 올라 오던중 기절하여 소등에 업혀 간신히 와야했다. 그 후 얼마를 더 버티지 못하고 하느님품으로 가셨다.
7. 가누트 아베르나스 신부(심장, 신장, 혹한 추위에 방치 11월6일)
✠...오래된 심장과 신장병은 신부님을 괴롭혔다. 옥사덕 언덕길은 그에게 너무도 벅찼던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애바쉬츠 수녀처럼 신부님도 소등에 간신히 올라 일행과 동참할 수 있었다. 허지만 허지만 북한군은 한때 압록강을 넘어 단동으로 가야만 했다. 전쟁의 피난길속에 병약한 신부님은 마침내 하느님품으로 가야만 했다.
8. 그레고리오 조르거 신부(설사, 명상가, 굶주림과 추위로 동사 11월5일)
✠...신부님은 이미 하느님 품으로 가셨던 선배들처럼 지속적인 설사로 인한 쇠약해진 몸이었다. 거기에다 과로와 기아, 그리고 혹독한 추위였다. 신부님은 복잡한 참호속에서 운명하셨다.
9.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설사, 예술가, 약초 채집가, 50년 12월 12일)
마침내 겔루트 수녀님은 그들을 고발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여기서 피의자(被疑者)는 북한 공산당이요, 피해자(被害者)는 베네딕도회원들입니다. 그런데 고발 내용을 확대하면 지금도 유효(有效)한 것이 아닐까. 지금의 피해자는 북한에 남아 있는 신자들과 그의 자손들, 즉 북한의 교회(敎會)와 선량한 주민들일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고발장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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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희를 고발한다. 수용소의 모든이가
너희들은 불법적으로 우리의 소유물을 빼앗았다.
법의 보호자라 자칭하는 너희들이
너희들은 증오로 가득차 우리의 권리를 완전히 박탈했고
파렴치한 노예처럼 굴욕적으로 우리를 속박했다.
너희들은 우리에게 독재의 권력을 보여주었고
우리를 깊은 불행으로 끌고갔다.
우리는 너희를 고발한다.
우리는 너희를 고발한다. 수용소의 우리 남자들이
너희들은 힘에 넘치게 우리들에게 일을 시켰고
악의에 찬 노예보다 우리를 더 나쁘게 다루었다.
너희들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의 기운을 빼앗아 갔고
이제는 골수를 빨아드렸다.
너희들은 우리들로 인해 살이 찌고
우리에게서 우리의 고통의 결실을 빼앗었다.
우리는 너희를 고발한다.
우리는 너희를 고발한다. 우리 여자들, 약한 사람들이
너희들은 남자도 할 수 없는 일을 우리에게 시켰다.
피가 나는 손으로, 익숙치 못한 손으로
너희들은 우리의 실수를 음흉하게 비웃고
우리의 호소에 대해서는 조롱만 했다.
어머니가 너희를 기르지 않았느냐?
너희들에게 경외심을 가르친 여자가 없었느냐?
우리는 너희들을 고발한다.
우리는 너희들을 고발한다. 머리카락이 흰 노인들이
우리는 보살핌을 바랐다. 그렇게 우리는 지쳐 있었다.
60이 지나고 70이 넘어서
너희들은 우리를 쉬게 하지 않았고, 연민(憐愍)도 몰랐다.
너희들은 매일 불쌍한 사람들을 일터로 몰아댔다.
떨리는 손으로, 흔들거리는 무릎으로
우리는 저항하지 못하는 가축처럼 일을 해여 했다.
우리는 너희를 고발한다.
우리는 너희를 고발한다. 병들고 쇠약해진 사람들이
너희들은 우리를 수용소에서 들판으로 몰아냈고
우리는 들판을 눈물로 적셨다.
너희들은 한번도 우리의 호소를 믿지 않았고
우리의 괴로움에 고통만을 더해주었다.
너희들은 초라한 식사라도 우리에게 거의 베풀지 않았고
이 땅에는 환자들을 위한 공간이 없었다.
우리는 너희를 고발한다.
우리는 너희를 고발한다.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들이
너희들은 우리의 생명을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다.
너희들은 경멸적으로 우리가 비참하게 파멸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비루먹은 개처럼 우리를 죽게 했다.
너희들은 우리에게 비인간적인 짓을 했다.
우리 말없는 사자들, 우리가 너희를 고발한다.
우리는 너희를 고발한다.
10. 졸라누스 헤르만 수사(심장 약체질, 과로, 12월 13일)
11. 에우제비우스 로마이어 수사(거인체구, 화농성피부농종 급성 장카르타르, 9월1일)
12. 안셀모 로모 신부(수종, 설사, 병약, 동상, 11월9일)
13. 일테폰스 플뢰찡어 수사(대장장이, 뇌일혈, 52년 3월 20일)
14. 코트리프 아우어 수사(폐렴, 병약, 4월 6일)
15. 쿠니베르트 오트 신부(심장, 각혈 6월 14일)
16. 아르눌프 슐라이어 신부(신장, 심장, 화농성 종창 6월 28일)
17. 프록뚜오사 게르스마이어 수녀(간호사, 뇌일혈 52년 9월 15일)
(위의 내용은 - 북한에서의 시련-에 소개 된 내용이다.)
❉첨부 - 여기 이별이란 시는 저희(베네딕도수녀회) 총장님이신 겔트루드 수녀님의 시이군요. 독일 로이터통신 취재기사 글에 꼬리말 다셨지요? 그 수녀님 맞습니다. '암흑과 폭풍 속의 너 영혼아!'라는 시집의 맨끝에 실려있군요. 독일 순례에서 만나게 된 인연이 별님의 여정에 축복이 되길 빌면서...쟌다르크 수녀입니다. 03.07.29 11:58 - 성소자들의 나눔터 카페에서-
❉첨부 - 뮌스터슈바르차크 수도원을 우리 모두 함께 돌아봅시다. 입구에는 수도원의 역사를 알리는 안내 표지판이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초대교회에 선교사를 파견한 기록이 보입니다. 그 선교사는 한국전쟁중 북한군에 의해 옥사덕에서 순교하셨답니다. 그의 가족은 순교자의 높은 뜻을 기억하기 위해 정성스러운 선물을 준비하였답니다. 통일이 되면, 순교자가 애써 선교 사업을 펼첬던 그곳에 순교자를 대신하여 사목할 사제에게 드릴 미사 도구, 즉 성합과 성작 두벌이랍니다. 그의 가족은 아직도 슈바이클 베르그 수도원 근처에 살고 계십니다.
Ⅶ부활 - 왜관 시대
(부활은 믿는 이들을 위한 시대라고 한다. 독일에 송환된 수사님들의 한국으로의 귀환을 부활로 보고자 한다. 물론 귀환은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시작이라고 볼수 있다.)
뮌스터슈바르차크 수도원은 서기816년, 마인(Main)으로 흐르는 슈바르차크강 어귀에 메긴가우트(Megingaut) 백작이 설립하였습니다. 지금도 독일에 유학을 나온 한국계 수사님들이 이곳의 수도원에 기거하고 계십니다. 약 이십년 전 한국의 어느 수사님이 공부를 다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 몇 일전, 교통사고로 이곳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안타까운 묘지명이 한동안 발길을 묶어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선교 사업을 하시다 노년에 고향인 독일로 귀국 하신 수사님들의 묘지명도 많이 보입니다.
한국과의 인연을 가장 강렬하게 들러내는 표지는 수도원 뒷편에 한가로이 서 있는 야외 성모 경당입니다. 이 경당은 독일계 선교 수사님들의 생환 보고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입니다. 그 분들의 귀향보고는 아래와 같습니다.
총원 67명
失踪 7명
殉敎 19명
生還者 41명
한국 전쟁은 미국을 비롯한 외국 선교사들을 순교로 몰아갔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독일계 수사님중 일부는 이렇게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모든 뉴스거리는 선교사 귀향보고에 집중 되었습니다. 기적같은 生還者 축하식은 기쁨의 극치였지만, 순교와 실종 소식은 엄청난 슬픔을 갖어다 주었습니다.
약 오십년전, 독일 선교사 귀향보고는 분도 수도회만의 일은 결코 아닙니다. 아직 정답을 얻지 못한 우리의 숙제입니다. 언덕위의 경당에 외롭게 서 계신 성모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덕원 면속구, 함흥교구과 연길교구의 재건)
1. 원산 및 함흥 교구장에 디모데오 사제 피임(再建院長)
2. 이동호 아빠스
1. 원산 및 함흥 교구장에 디모데오 사제 피임(再建院長)
교황청에서는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1949년 5월9일 투옥되어 1950년 2월7일 옥사하신 덕원 성 베네딕도 대수도원 면속구(원산 및 함흥교구) 초대교구장 고 보니파시오 신주교의 후임으로 지난 1월말(1952년) 스위스의 오틸리엔 본부로부터 한국에 도착, 현재 임지로의 입북을 대기중에 있는 새 원장 디모데오(Timotheus Bitterli) 사제를 원산 및 함흥 교구장으로 임명한다는 통지가 동경의 교황 공사로부터 지난 5월 29일 도착하였다.
새 교구장 디모데오 신부는 1905년 스위스에서 출신으로 서품후 1932년 한국에 파견하였다. 원산교구 덕원 신학교에서 8년간 교편을 잡았으며, 1940년부터 지방전교로 전임되어 수도원 본당의 주임신부주로 임명되었으나, 해방이후 1947년 국적이 스위스인 관계로 귀국 조치되어 모국에서 휴양할 수 있었다. 그 후 1949년부터 미국 뉴톤의 베네딕도회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시다가 성베네딕도회 본부로부터 덕원수도원 재건의 중임을 받고 원장의 자격으로 지난 1952년 1월25일 한국에 도착했다. 2월16일, 대구의 임시수도원에 부임하였고, 이번에 다시 교구장직을 겸임하게 된 것이다. 취임식은 7월 초순경 왜관에서 거행될 예정이다.(천주교회보, 제109호, 1952.6.5<1>)
“교구도 없는데 교황께서 나를 교구장으로 임명하신 뜻은 우리가 북한으로 돌아가는 날 전교할 성직자를 양성하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 <디모델리 비데를리>李 몬시뇰 취임사중에서...,
8년후 동양 제1의 대수도원의 모습으로 성장하여 갔다. 출판부 활동을 시작할 단계까지 이르렀다. 비데를리의 사업 경영 원칙 -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야 건너 간다..., 융통성이 없어라고 불만을 토로하지만....., (가톨릭시보, 제256호, 1960.11.27<1>)
왜관 대수도원, 축성 축하식/원장에 노규채 신부, 부원장은 주골비니안 신부/이 몬시뇰은 함흥교구 관리자로 유임(-교황청 임명이기 때문에 유임 지속되고 있다. 가톨릭시보, 제423호, 1964.5.17)
2. 이동호 아빠스
성청은 성베네딕도 대수도원 이동호 아빠스를 1981년 5월22일자로 함흥교구 및 덕원 면속구장 서리로 임명, 6월19일 주한 교황대사관을 통해 이를 통지하였다. 이로써 이 디모테오 몬시뇰은 연길교구장 서리직만 맡게 되었다. 베네딕도회는 1945년 소련군의 진주로 1946년 연길수도원이 몰수되고 또 이어 1949년 덕원수도원 폐쇄되는 아품을 겪어왔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난길에 나선 수도원은 12월 부산에서 10여명의 수사들로 공동생활에 들어갔고, 52년 왜관에 수도원을 건립, 56년부터 왜관 감목대리구 사목을 위촉 받아 포교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북한에 두고 온 양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면서, 옛 사목지로의 복귀의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한편, 함흥교구. 덕원면속구장 서리에 이동호 아빠스는 중공의 문호 개방 정책에 따라 베네딕도회 성직자의 연길교구 파견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등 적극적인 북한 사목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아직도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높아 아무런 소득이 없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전제, 이 순간에도 공산당의 폭정으로 신음하고 있는 침묵의 교회를 위해 계속 기도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최근 소식으로 그동안 함흥교구가 주교회의(최창화 몬시뇰)에서 관리되어 왔으나, 관리실 소멸등 무척 어려움을 겪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민족의 한” 풀어준 쾌거/김수환 추기경.이동호 아빠스, 이상가족 찾기 계속 추진 요청
***1983.7.17/- 함흥.덕원 교구장이며 왜관 성베네딕도회 대원장인 이동호 아빠스는 북한의 신자들이 온갖 어려움과 역경속에서도 결코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말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는 그 날까지 굳세게 살아갈 것을 호소했다. 1983년 KBS TV의 ‘이산가족찾기’를 계기로 북한 교구장으로서의 심정을 토로한 이동호 아빠스는 “북한 신자들을 위해 남한의 신자들이 지대한 관심과 기도를 바치며 아품에 동참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거듭 그들의 용기와 인내를 촉구하였다.(가톨릭 신문, 제1364호, 1983.7.17<1>)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 촉구/북한 선교 담당 이동호 아빠스, 1985년 6월 23일 기도의 날 맞아/북한선교위원회 창립/기도와 성금으로 후원 다짐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 담당 이동호 아빠스는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최우선의 도움이며 최대의 도움”이라고 전제, “북한 동포를 위해 진실하고도 간절하게 애정 가득한 마음으로 꾸준히 기도해 달라”....., “우리가 모르는척 무관심 한다면, 북한 동포들은 어디에 의지하고 호소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 “민족적 양심으로 진실한 애정을 가지고 북한 동포를 도와야 한다.”고 강조 했다.
“...... 김수환 추기경은 ..., 우리의 통일과 북한 동포를 위한 것이라면 어떠한 위험이 있더라도 몇 번이고 평양에 가고 싶고, 생명까지도 바치고 싶다”라고 1986년 5월 23일 기독교 방송과의 대담에서 밝히였다.
몇년 후 평양교구는 이럴 것이다.
현재 6도, 120개 시군, 94개 구, 491개동, 1967개리,
103개 공업단지, 총인구 13,899,015명이다
예비신자 20% 잡아보면 2,782,500명이다,
본당은 예비신자 5,000명을 기준으로 하면 561개 본당이다.
공소는 준 본당으로 리에 하나씩으로 하면 2084 이다.
(리는 남한의 면과 같다)
평양교구는 도 또는 직활시에 하나씩 즉 6개 교구로 분활되어도 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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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교구는 이렇다.
현재 4도, 63개 시군, 68개 구, 288개동, 1290개리
131개 공업단지, 총인구 7,906,769명이다.
예비신자 20% 잡아보면 1,378,500명이다.
본당 5000명 기준으로 하면 본당 272 이다.
공소는 준 본당으로 리에 하나씩으로 하면 1499 이다.
(리는 남한의 면과 같다)
함흥교구도 도 또는 직활시에 하나씩 즉 4교구가 분활되어도 작지 않다 교구 또는 본당 설립에는 인력과 재력이 많이 든다. 북한선교는 평양교구와 함흥교구등 2개 교구의 일이 결코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미래 10개 교구 설립에 관한 한국 교회의 숙원 사업이야기다. 성직자는 물론하고 평신도들이 온 힘을 다해 풀어 갈 숙원 사업이다.
Ⅷ. 성령강림 - 미리내 세상
미리내 세상, 그것은 별들의 것이다. 성오딜리엔베네딕도전교수도원의 미래의 모습을 지금 당장 그려내고 싶지 않다. 그것은 하느님 몫이기 때문이다. 덕원수도원은 분명 마음의 고향이다. 그곳으로 달려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를 과거 그 시점에 묶여 지는 것도 원치 않는다. 여기 싯기 한 구절에 해답을 구해 보고자 한다.
질문 ???
우리는 참으로
세상에서 버림을 받아
완전히 잊혀진 존재들인가
쓸모가 없어서 내다버린
쓰레기란 말인가
햇볕에 조금씩 녹아내리는 눈처럼
그렇게 우리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는가
우리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우리의 이 고통들 무의미할 뿐인가
한국에서 선교 삶 70주년 맞는 벨트뷔나 수녀님
1937. 6. 21 수련자로 원산에 도착, 옥사덕의 마지막 생존자
질문에 대한 대답 !!!
그대는 보았는가
겨우내 여기저기 산기슭마다
까마귀나 노루의 발자국만 보이며
뒤덮여 반짝이던 쓸모없는 눈들을
그래도 이른 봄볕에
진기하게 새 생명 시작되니
세상에서 아득한 이 골짜구니
어느덧 남몰래 눈은 녹아
쿨쿨거리며 돌 틈새마다
작은 샘 솟어나고
언덕 넘어 비탈 아래로
예서제서 실개천 급히 흐르고
시내 도랑 넘치게 흙탕물
요란스레 거품일고 모여들어
절벽 위로 콸콸 미친 듯
골짜구니 아래로 흘러내리어
흐름은 파도 넘실거리며
이제 큰 강 되어
커다란 힘으로 불어나는 것을
이토록 큰 힘 이룬 것
작은 샘 하나하나 모인 것 아닙니까
추방된 삶의 벙어리 된 우리 고통들
그것은 세상 가득히 은총의 씨앗을 뿌리리니
하느님을 위한 일이 있는 곳마다
어디서나 우리는 함께 있지 않습니까?
옥사덕 연대기 작가의 생각은 이러했다. 눈이 첩첩이 쌓인 깊은 산골자기에서 우리 동료들은 하느님의 버림을 받은 탕아처럼 하나 둘씩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어떻게 이를 변호할 것인가. 아무도 우리편이 없는데...., 노루나 토끼, 그리고 숲속의 짐승들만이 유일한 증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훗날 우리들의 삶의 증인이 절대로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이런 삶은 저 눈 속에 파묻혀 부질없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마침내 연필을 놓아버린다.
그후 연대기 작가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버린다. 옥사덕 언덕에 십자가는 열일곱까지 늘어 갔다. 바로 그 해의 깊은 침묵의 겨울은 가고 때가되니 약동하는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연대기 작가는 늘 습관대로 대지를 흥미있게 바라본다. 나뭇가지에 눈들이 조금씩 녹아 작은 물방울을 만들고 있었다. 한방울 두방울 떨어진 물방울등은 제법 흥건히 땅을 적시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작가는 우울증에서 탈출하여 힘차게 펜을 검어 쥐고 또다시 글을 써 내려간다. 그의 생각은 이러했다. 지금은 깊은 산중의 겨울처럼 눈과 얼음으로 가득하지만, 주님의 십자가와 동참하는 우리들의 희생은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닮아 눈과 어름속의 대지를 녹여 한방울의 물이 되리라. 이러한 시도는 아주 힘없고 작아 보이지만, 하나 둘씩 모이면 작은 냇가를 만들고 마침내 큰 강을 만드리라. 그리하면 그 강물은 온 세상 생명의 원천이 되어 모든 골자기, 모든 들판에 만물들이 잎이 나고 꽃피고 열매 맺으리라. 깊은 산 골자기 우리들의 희생은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니리라.
베네딕도 성인의 모범을 따라 묵묵히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나의 작은 몸짓, 그것은 옥사덕의 그 희생에 조금은 보태리라. 이것이 봉헌자의 삶의 올바른 방향이 아닐까? 겹겹이 나를 에워싼 눈과 얼음에도 기죽지 않는 봉헌자들, 그들은 충실한 봉헌자의 삶으로 세상에 뜨거운 불을 지르리라. 그들은 마침내 눈과 얼음을 처 부수고 영원한 승리의 강물을 만들어 내어 새 생명으로 넘처나는 봄을 기어코 만들어 내리라...! 미리내 세상은 바로 이런것이 아닐까?
북한에도 봄은 와야하지 않는가?
부활은
............,
그것만이 동토(凍土)의 나라, 북한을
깊은 동면속에서 깨여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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