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중련 2012. 봄호
천기누설의 창조적 진화
손영희
시인들은 말트기의 방식으로 사물과 형상 속에 숨겨진 진실을 격정과 상상력으로 표현해낸다. “철학자들의 글에서보다 오히려 시인들의 글에서 심오한 사상을 만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이유는 시인들이 격정과 상상력의 지배하에 글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데카르트는 말했다. 철학자들은 이성을 통해 세상을 재단하지만 시인들은 상상력을 통해서 세상의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사물이나 인간, 또는 우주 속에 은폐된 것들을 발견하여 독백이라는 형식을 통해 새롭게 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유한한 인간 삶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기도 한다. 시인을 천기누설자라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천기누설은 시인의 상상력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상상력을 동원해 새롭게 구성된 창작품이 상징이나 이미지로 존재할 때 미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으며 그 미적가치야 말로 시인에게 요구되는 천기누설의 또 다른 의무이기도 하다.
자신의 형상을 닮은 신의 세계를, 아니 신의 형상을 한 인간의 본질을 순진무구하게 풀어놓고 있는 세 시인의 시세계를 탐색해보는 일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1.
박시교 시인이 지금까지 보여준 일련의 작품들은 ‘삶은 쓸쓸하고 덧없다’는 인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들녘에 옷깃 여밀 바람 솔기 풀어놓고’ ‘조금은 거드름 피우며 느릿느릿 가리’(「나의 아나키스트여」)라며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 시적지향은 ‘그 무게 견딜 수 없는 고통 참 아름다워라’에서 볼 수 있듯이 생의 고단함과 고통조차도 또 다른 생의 한 단면임을 자각하는데서 기인한다. 허무와 외로움으로 점철된 생일지라도 수긍하며 감싸 안고 가겠다는 시인의 발언은 삶의 고통조차 생의 아름다움으로 인식하는 관조적 태도일 것이다.
손님이 찾아오셨다
내실까지 들어섰다
십오 년 만의 재방문
그런데도 초행이란다
최대한 예를 갖추고
공손하게
꿇다, 암(癌)!
-박시교, <손님> 전문
「손님」의 풍경은 쓸쓸하고 처연하다 그러나 또한 뭉클하다. 손님처럼 찾아온 병을 공손하게 최대한 예를 갖추고 맞이하겠다는 슬픈 수긍이 공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차례 찾아온 병을 이기고 다시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는데 초행인 것처럼 가장하며 암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도망치거나 맞서지 않고 예를 다해 손님으로 모시겠다는 것이다. 초월적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죽음의 공포까지 끌어안고 가겠다는 선언은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삶을 성찰하며 깨달음을 얻은 자 만이 가질 수 있는 수용과 겸손의 자세일 것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삶의 처연한 상처까지도 아름답다’(<빈손을 위하여>,『네 사람의 노래』)고한 전언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늙고 병드는 일은 인간의 삶에서 필연적인 것임을 자각하고,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고통조차 끌어안고 가겠다는 정신적 위의威儀를 삼장의 형식적 미감을 잘 살려내어 절제된 언어로 직조해놓고 있다.
싸매고 싸매어도 시린 가슴 어쩌지 못해
눈 맞고 선 솔숲 찬 길 설산에 들었습니다
여태껏 출타 중인 걸 알면서도 왔습니다
오래 전 홀로 이 길 절며 왔을 당신 모습
힘겨운 그 걸음걸음 아프게 떠올리며
이곳이 바로 당신의 적소라 여깁니다
스스로 가둔 것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매듭지어 묶어두고 살면서
어쩌면 이 길마저도 지우려 했겠지요
그러나 얼마나 또 다행한 일입니까
부재중인 이 길을 오늘 내가 가고 있음이
보세요, 내 걸음 뒤로 내려덮히는 저 함박눈
- 박시교, <설산(雪山)에 들다> 전문
누군가와 대화하듯, 편지를 쓰듯 정형시의 운율에 맞춰 써내려간 이 시조는 구어체여서 자연스럽게 읽히며 독자들은 시인의 감성에 저절로 공감하게 된다. 시인의 삶에 대한 관조적 태도가 이 시조에도 짙게 깔려있다. 이미 암이라는 적과의 동침을 수락한 시인이 그 병을 끌어안고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가, 시인이 궁극적으로 가 닿고자 한 피안은 고행을 떠난 어떤 이가 ‘힘겨운 걸음걸음 아프게’ 걸어간 길이며 시인이 ‘마음까지 매듭지어 묶어두고’ 결코 가고 싶지 않았던 길이다. 생이 그렇지 않은가, 주먹을 불끈 쥐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나 운명은 전혀 예기치 않은 길로 나를 인도할 뿐이다. 그런 삶을 내려놓고 ‘당신의 적소’인 설산에 드는 일이야말로 시인이 전 생을 통해 성찰해온 내면적 완성으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내 걸음 뒤로 내려덮이는 저 함박눈’이 함의하는 죄 씻음과 거듭남과 죽음으로서 새로 태어나는 건강한 생명성을 최고의 선善 으로 올려놓고 있지 않은가.
신작 <빈자일등>이나 앞서 언급한 <손님>에서 보듯 삶의 이면은 외롭고 쓸쓸하며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다. 그런 이면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관조적 태도는 함박눈이 함의하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지향하고 미적지향이 내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시인의 겸손한 자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절제된 언어로 가독성을 높여주고 있는 박시교 시인은 궁극적으로 쓸쓸한 인간의 본질을 자연의 사물을 통해 재단하고 수긍하며 미적으로 승화된 여러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
서숙희 시인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곰곰이 들여다보는 시인이다. 인간의 몸이야말로 시인에겐 철학적인 사유의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 몸에 깊숙이 꽂은’ 화살이 ‘운명의 입속을 향해/자신을 쏘는 것’(「중심에 닿는다는 것은」)임을 자각하고 그 아득한 중심을 향하여 이 땅의 존재자로서의 행보를 되새겨 본다. 자신과의 말트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부를 향한 말트기야 말로 존재의 비밀 찾기이며 삶의 진리를 더듬어 가는 것이리라.
길게 누운 도시의 밤이 깊게 파헤쳐졌다
삽 하나로 뒤집을 수 없는 세상과 맞서서
땀 젖은 몸으로 쓰는 한밤의 노동사勞動史
저 생존의 문장에는 직유도 은유도 없다
어둠의 먹을 퍽퍽 찍어내는 강건체
핏발 선 에네르기만 일촉즉발로 솟구칠 뿐
- 서숙희, <현장, 야간공사>전문
사내들이 온몸으로 생존을 이어갔던 시대가 있었다. 거친 들판을 뛰어다니며 사냥을 하고, 짐승의 피로 물든 어깨에 먹이를 짊어지고 자랑스럽게 가족 곁으로 돌아오던 사내들, <손이 작은 그 여자>에서 상처받고 눈물 흘리는 가녀린 한 여자의 서정성에 잣대를 들이대던 시인이 이번엔 노동의 신선함과 생존의 위기에 맞선 한 남자의 강건한 노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작품 속 노동자는 ‘길게 누운 도시의 밤’ 에 ‘삽 하나로 뒤집을 수 없는 세상과 맞서서’ ‘땀 젖은 몸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 노동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 못 할 만큼 ‘핏발선 에네르기’를 분출하며 생존의 매 순간이 위태로운 현실임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도시의 사냥터에서 온 몸으로 생존에 맞서는 한 사내에게 바치는 헌사이며, 복잡한 도시의 이면에 존재하는 불합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재단한 작품이기도 하다. 스스로 감정노출을 자제하고 적확한 언어로 세계와의 말트기를 시도하고 있는 이런 시적태도는 그동안 시인이 ‘삶의 고양된 한 순간을 이미지로 불러오는데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감각’1)을 지니고 시작에 온 힘을 기울여 왔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신작 <폭설>, <중년>, <삼월의 첨성대>도 세상과의 말트기로서 대립보다는 화해를, 밀어내기보다 끌어안음을, 고립보다 서로에게 스며듬의 기본정서를 깔고 있다. <폭설>에서는 폭설이 ‘희디흰 말씀의 회초리’로 전이되어 갑론을박과 이전투구로 더렵혀진 세상을 깨끗하게 씻어주고 있음을, <중년>에서는 중년의 나이는 파도가 한번 밀려왔다 밀려가는 찰나적인 순간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보여주며, <삼월의 첨성대>에서는 ‘별앙꼬 달큰하게 품어/반짝반짝 봄소식’이라는 참신한 비유를 통해 자아와 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 스며들고 있음을 자연스레 표현해 주고 있다.
3.
박희정 시인은 도시적 자본주의에 투시경을 들이댄다. ‘규칙적인 속도로 돌고 도는 전광판’은 자본의 논리에 어쩔 수 없이 중독되어가는 도시인의 생활패턴을 의미하지만 가속도가 붙은 현재적 삶은 ‘막무가내로 밟아대던 저린 발’로 인해 브레이크가 걸린다. ‘눈 부릅뜨고 다가오는 점멸등’ 때문에 위태로운 순간마다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사는 일은 필연적으로 길 위에 서는 일이고 길 위에서 직진을 해야 할지 유턴을 해야 할지 매순간마다 선택을 강요당한다. 시인은 생의 지속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열렬한 견인의 자세2)로 과감히 반전을 시도하면서 그늘진 도시의 불모성에 시선을 돌린다.
‘담배 끊어라’ 끊으라는 성화에 못 견디다 담배 스무 개 가지런히 놓고서는 일시에 분지르고 끊었다! 소리치는 男子
‘주전부리 끊어라’ 끊으라는 득달같은 잔소리에 한 봉지 과자 톡,톡, 분질러 놓고서는 과감히 단식투쟁! 선언하는 오동통한 저 女子
끊으면 간단히 끝날, 정말 쉬운 일일까?
- 박희정, <쉬운 일>전문
자본이 추구하는 것은 순종적 자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본의 논리에 눈멀고 귀멀어 몸과 정신을 빼앗긴다. 정신적 가치는 물질적 가치에 빠르게 차압당한다. 다이어트가 최고의 가치로 등극하고 운동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절대적 진리가 된다. 그런 자본의 논리에 순종하는 것이 현시대의 미덕이며 절대가치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쪽에서는 온갖 맛있는 음식으로 유혹하고 한편에선 다이어트가 인간 삶의 질을 높인다고 설파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입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내어놓은 상품의 맛을 쉽게 잊지 못한다. 담배 맛에 길들여놓는 것도, 끊어라 끊어라 잔소리 하는 것도 자본이고 혀끝의 단맛에 취하게 하는 것도 자본이다. 그런 시장논리에서 빠져나오는 일이 정말 <쉬운 일>일까?
위 시조는 미의 절대가치는 내면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몸’이라는 논리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화’와 ‘잔소리’의 주체가 되고 ‘성화’와 ‘잔소리’의 대상이 된다. ‘성화’와 ‘잔소리’를 권하는 사회가 작금의 행태임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담배 한 개비가 유일한 삶의 위안이 되는 한 남자와 간식거리에 중독된 한 여자의 이런 아이러니는 이 시대의 자본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은행 안의 넘쳐나는 돈다발과 현금입출기앞에서 잔액 제로인 사내가 겪는 부익부 빈익빈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며(<하루만 빌려주세요>), 풍요 속의 허기(<밥 혹은 사랑>)역시 그런 맥락으로 읽힌다. 시조 <쉬운 일>은 현시대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역설적으로 묘사하여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갖게 하고 슬며시 미소 짓게 한다. 또한 이 작품은 도시적 감수성으로 늘 열정을 갖고 시작에 전념하는 시인의 시적지향이 어디에 있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4.
시조 내부에 존재한 형식미감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세 시인의 내면 세계를 신작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깊이 있게 작품을 분석할 수 있는 충분한 시안을 갖추지 못해 세 분께 누가 될까 염려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말트기는 시인의 개별적인 능력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선보인다. 생의 복병을 만나 남다른 체험을 함으로써 생의 미감을 획득하고,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다양한 이미지로 구현해 내는가 하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불합리한 현실을 진단해보기도 한다. 감성과 상상력이 빚어낸 천기누설의 창조적 진화를 믿는 시인들의 초상이다. 비가시적인 세계와의 이러한 말트기가 우리 삶에 따뜻한 빛으로 환원 되기를 바래본다.
1) 손진은, 『손이 작은 그여자』 pp99
2) 이헤원, 『길은 다시 반전이다』, p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