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유기는 식기로서 요긴했던 과거의 소용가치가 거의 퇴색해버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전처럼 애용했던 관습이 다시 되살아나지 않을 것이고, 이미 유기의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여러 가지 증좌가 분명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에는 결코 놋쇠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적어도 징, 꽹과리와 같은 타악기만큼은 다른 금속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피 속에서 북방민족의 카랑카랑한 리듬을 지워버릴 수 없는 한, 그래서 이 땅에서 농악의 울림이 사라지지 않는 한, 놋쇠를 다루는 솜씨 역시 멈춰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종석 문화재전문위원)
원래는 고향에 세우고 싶었다. 평안북도 정주, 거기서 30여 리 떨어진 납청(納淸)은 그야말로 산자수려(山紫秀麗)의 별천지였다.
납청(納淸)이란 이름은 이곳 사람들이 경치 좋은 곳에 세운 정자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청이 청을 불러 상청으로 한곳에 모여 하늘과 구름 사이에 한 점 속됨이 없으니 정자 밖의 모든 청마저 스스로 납래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납청은 산간이면서도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왕래하는 큰길에 접하는 교통의 요로이기도 했다. 이런 주변 여건 속에 납청 양대(良大, 방짜유기)가 태어났다. 질 좋은 숯을 구하기 쉬운 산간마을 여건에다 교통이 편리하니 산물을 내다팔기 쉬웠다.
정주 태생의 이봉주(83 ·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옹은 평생을 걸쳐 이룩한 업적을 모아 고향에 방짜유기촌을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아무리 애태워도 지금은 갈 수 없는 곳.
그는 오랫동안 납청 방짜유기의 명맥을 유지해오던 안양의 작업실을 정리하고, 2003년 문경으로 내려왔다. 문경의 수려한 산세와 지리적 여건들이 어쩌면 고향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가은에 부지를 마련하고 자신의 꿈을 조금씩 실현시켜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이 옹의 방짜유기촌이 들어선 곳은 하필이면 견훤유적지로 가는 길목이다. 가은 아차산에는 견훤이 태어났는 전설이 서린 금하굴이 있다. 자기가 태어난 곳 밖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던 견훤의 꿈과 이 옹의 꿈 사이에는 어떤 유감성이 있는 것일까.
이옹은 납청유기의 본고장 정주 출신이지만 본격적으로 유기장의 길로 들어선 것은 오히려 해방 후 월남하고 나서부터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유기행상을 하면서 자연스레 방짜유기를 접할 수 있었지만 유기공방의 문턱이 워낙 높아 그 기술을 미처 배우지는 못했다.
유기에는 제작방법에 따라 방짜, 반방짜, 주물의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방짜를 최상으로 쳤다. 방짜의 경우는 납청, 반방짜는 순천, 주물은 안성이 주요 산지였다.
방짜는 78%의 순수 구리와 22%의 순수 석(상납)을 정확히 합금하여 용해된 금속괴(바둑)를 불에 달구어 메질(망치질) 등의 단조를 거쳐 만들어진다.
옛날 양갓집 마나님들은 놋점(양대공장)에 직접 찾아와 놋성기를 주문하면서 웃돈을 얹혀주며 쇠를 잘 써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때 자존심 센 방짜장들은 ‘열두 대문 안의 처녀는 변할 수 있어도 놋쇠는 변할 수 없소’라며 웃돈을 거절하곤 한껏 콧대를 세웠다고 한다. 그것은 최상급의 유기를 만들어내는 방짜장의 자존심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방짜의 제조과정에서 합금 배합의 정확성을 내세우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납청장인의 기술과 기질을 이 옹에게 전해준 이는 동향 출신의 탁창여씨였다. 그는 38선을 넘나들며 납청의 장인들을 월남시켜 방짜유기의 명맥을 잇게 한 남한 유기의 대부 격으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1948년부터 탁씨 밑에서 유기 일을 배운 이옹은 타고난 힘과 탁월한 솜씨로 일취월장했다. 당시만 해도 유기는 대야, 양푼, 요강 등 혼수품에 꼭 낄 정도로 필수품이었으니 당연히 벌이도 좋았다.
유기공장의 제품 제조는 원대장(유기장 우두머리)의 책임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대상(大商)이나 점주라 하여도 그들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래서 원대장들이 파업을 하거나 결근을 하더라도 오히려 술대접을 하며 구슬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산림법이 강화되면서 가정의 연료가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자 연탄가스에 변색이 잘 되고 보관하기 어려운 유기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옹 역시 한때 막노동이나 호떡장사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어차피 평생의 업으로 삼은 유기장의 길을 버릴 수는 없었으니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연장만은 내다팔지 않았다.
그 보답은 엉뚱한 데서 왔다. 1970년대 유신정국으로 접어들면서 집회와 시위가 늘어났고, ‘데모꾼’들이 꽹과리를 많이 찾으면서 유기장은 다시 붐을 맞았다. 각급 학교의 농악대까지 가세하면서 한 달에 꽹과리만 1500개가 넘게 팔리기도 했다.
1983년 이옹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1994년에는 지름 161㎝, 무게 98㎏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징을 만들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고, 청와대 및 아셈회의장 등에 공식 납품하면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상도’나 ‘대장금’ 같은 인기드라마의 소품으로 이옹의 유기들이 단골로 사용되었다. 문경으로 옮겨온 후에는 12만 여㎡에 달하는 부지에 방짜공장을 짓고 일을 하면서 사택과 기숙사, 전시교육관, 수련장 등을 갖춘 본격적인 방짜유기촌을 형성해나갔다.
원래 이곳에 지으려 했던 방짜유기박물관은 대구시의 지원으로 대구시 동구 도학동에 지난해 5월 문을 열었다. 처음 일부에서는 방짜유기의 전통과는 무관한 대구에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지금은 생각보다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어 모두 긍정적으로 돌아섰다.
현재 이옹 밑에서는 조교 격인 아들 형근(50)씨를 비롯해 이수자 5명, 전수장학생 2명 등 9명이 방짜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특히 형근씨는 이옹이 1984년 눈에 놋쇠 파편이 튀는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한 이래 다른 뜻을 모두 접고 안양의 작업장을 오가며 가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예부터 방짜유기를 제작하는 일은 ‘칠혹야반의 예술’이라고 불린다. 달빛조차 없는 한밤중, 그것도 자정부터 시작하여 먼동이 틀 무렵에야 일손을 멈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야반작업에는 반드시 5인 이상이 한 팀이 되어 협동으로 작업해야 한다.
원대장(이옹은 팔십 노구를 이끌고 아직까지도 원대장 일을 맡는다)을 중심으로 3명의 메질꾼(센망치, 곁망치, 앞망치)이 둘러서고 화덕 옆에는 풀무잡이(안풍구)가 위치한다. 분업이 아니라 완전한 협업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꾀를 부리거나 딴전을 피우면 그날 일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 철저한 협동의 정신이 최상의 유기를 만들어낸 비결일지도 모른다.
이옹의 가슴 속에는 아직도 풀어내지 못한 원이 쌓여 있다. 그가 혈혈단신 월남할 때 어머니는 자식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부탁을 했다. “부디 위험한 짓 하지 말고, 어떤 일이 있어도 동생들만큼은 잘 건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 북에 남은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고, 아홉 동생 중 둘은 벌써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들었다.
납청의 수려한 자연은 어떤지 몰라도, 그 명성 높던 납청양대의 전통은 이미 맥이 끊긴 지 오래라고도 들었다. 그나마 그 맥을 잇고 있는 자신이 ‘어떡허든 고향에 가게지구’ 다시 되살리고 싶었던 꿈은 이제 생전에 이루기 힘든 일이 되어버린 듯도 하지만, 두고 온 고향에 대한 미련만은 끝내 어쩌지 못한다. 내 배운 것이라곤 유기 만드는 일밖에 없으니깐 고향에 있는 동생놈들, 조카놈들 데려다가 일이나 가르쳐 먹고살게끔 했으면 좋으련만….
방짜제품은 표면이 매끄러운 주물제품과는 달리 완제품 상태에 메자국이 은은하게 남아 있어 수공제품의 멋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 유기장의 손에는 메질 같은 삶의 흔적들이 가득한데,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한쪽 눈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 2008 03/18 뉴스메이커 766호 글 · 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
방짜유기(方字鍮器)
'방짜'란 일정한 비율의 구리와 주석의 합금을 일컫는 말이다. 즉 78%의 구리와 22%의 주석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한 좋은 질의 '놋쇠'를 말하며, '방짜유기'란 이 놋쇠로 두들겨 만든 놋제품을 총칭한다. 한자어로는 '양대납청성기(良大納淸成器)'라고 하며 일반적으로는 '방짜(方字)'라 부른다.
양대납청성기라는 이름은 평북 정주 지방의 '납청'이라는 곳이 놋대야, 놋양푼, 놋상 등 주로 큰 놋제품을 많이 만들던 놋그릇의 본산지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양대는 '방짜'라는 뜻의 이북말이다. 곧 납청에서 만든 방짜 그릇(成記)이라는 뜻이다.
납청은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 청정동(淸亭洞)을 일컫는 말로 정주읍과 박천읍 사이에 있는 약 4백여 호의 산간마을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방짜유기를 만들기 시작하여 대대로 물려온 유기점들이 모여있어서 대부분이 유기업에 종사하거나 이와 관련된 일로 생업을 삼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고장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처음에는 엽전을 쳐서 유기제품을 만들기 시작하다가 차차 주발, 대접 등의 식기를 방짜 기법으로 만들게 되었고, 그 후로 기술이 축적되고 생업으로 정착하게 되자 놋대야, 놋양푼, 놋요강, 놋상, 농아기 등 비교적 큰 기물까지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기가 차차 대중화하여 식기류의 수요가 급증하자 방짜기법으로 제조해서는 늘어나는 수요를 따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주물기법에 대한 기술이 개발되어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방짜 기법 대신, 손쉬운 주물기법으로 식기류 등의 소형 기물을 제작해 내게 되었다. 다만 주물로 만들기가 어려운 큰 기물은 여전히 방짜 기법으로 계속 만들었다. 이 납청 방짜는 그 지역뿐 아니라 평안도 일대는 물론 함경도를 위시한 전국과 멀리 만주지역에까지 널리 보급되어 그 명성을 떨쳤다.
또한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반상(班常)의 사회계급 체제가 와해되면서 경제적 특권을 누리던 양반 중심의 상류계층에서만 독점되던 상질의 놋성기가 차츰 서민층에도 생활필수품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요가 급증하면서 지방 곳곳에 유기를 만드는 공장들이 늘어나 유기 제품이 흔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제 말기에 이르러 물자, 특히 무기에 필요한 쇠붙이가 결핍되자 일본인들은 한국에 널리 깔려있던 유기를 마구 공출해 갔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유기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납청대장도 예외가 아니어 그곳에 있던 장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이때의 기능자가 평양, 사리원, 만주, 안동, 삭주, 서울 등에 각 한 명씩 정주하게 되었다. 8.15 광복으로 겨우 유기 산업이 회생되어 그 명맥을 잇게 되었으나 그나마도 새로 연탄의 사용으로 유기 산업은 완전히 사양화되고 말았다. 연탄 가스로 인해 유기가 시커멓게 변색되고 녹이 낀다 하여 그 사용을 기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설상가상으로 38선으로 인한 남북간의 왕래가 단절되면서부터는 자취를 감추어버릴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 중에도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봉주씨가 평북 정주에서 단신 월남하여 역시 정주 출신인 고 탁창여씨의 서울 양대 유기공장에서 유기를 제작해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방짜 유기 제작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놋그릇 만드는 일'이라는 말대로 방짜 유기는 한 두 사람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방짜 유기를 만들려면 일정한 인원이 조직적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
즉 방짜 유기를 만드는데는 일정한 인원이 구성되고 조직적인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 한 팀을 '한 점(店)'이라고 부른다. 이 점의 리더인 원대장을 점주(店主)라고 하며 한 점은 점주를 포함해서 11명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이 11명의 일사분란한 협동작업으로 일이 이루어진다.
점주는 숙련된 유기 제작기술이 있는 장인이 되며, 때로는 점주가 곧 자본주가 되기도 한다. 전주(錢主 : 자본주)가 따로 있을 때라도 구성원에 대한 임금 분배나 인사권은 전주에게 있는 게 아니라 점주에게 있다. 점주인 원대장의 권한이 그만큼 크고 중요하다.
원대장(점주)를 비롯한 각 구성원 역할은 다음과 같다.
원대장 -
점의 우두머리로서 모든 직업을 지휘 감독하며 절대적인 권한을 갖는다. 유기를 제작할 때 원대장은 화덕(풀무)을 전면으로 바라보고 왼편에 앉아 다른 대장들의 메질(망치질)을 총지휘하며, 냄질된 우개리를 협도로 다듬고 닥침질할 때 모양을 잡아 담금질하는 일을 한다. 그릇의 틀을 잡는 데 있어 원대장의 역할이 절대적이며 고도의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앞망치 - 원대장의 정면에 앉는다. 화덕에서 달구어진 바둑을 빠른 동작으로 모루 위에 올려놓는 역할을 하며, 담금질되어 비틀린 형태를 벼름질한다.
곁망치 - 앞망치의 왼편에 앉아 센망치와 함께 달구어진 바둑을 늘리는 일을 한다. 가질 작업을 할 때 옆에서 칼을 갈아주기도 한다.
센망치 - 센망치는 3명으로 되어 있다. 달구어진 바둑을 세게 쳐서 넓히는 일을 하므로 힘이 세어야 하며, 가질 작업을 할 때 센망치 2명은 가질틀을 교대로 밟아 가질대장이 힘이 덜 들도록 도와준다.
네핌대장 - 안풍구가 달구어놓은 바둑을 재빨리 받아 모루 위에 놓는 역할을 한다. 쇠의 열을 잘 간파하여야 하며 센망치와 손발이 잘 맞아야 한다.
겟대장 - 쇠를 녹이고 불순물을 제거하여 합금하는 일을 전담하며 제작과정에서 생기는 구멍을 땜하기도 한다. 겟대장의 합금능력에 따라 유기의 질이 좌우되므로 숙련된 기술이 있어야 한다.
밖풍구 - 바깥 풍구란 말이며, 겟대장에 딸린 풀무꾼을 말한다.
안풍구 - 원대장에 딸린 풀무꾼으로 항상 원대장보다 한 시간쯤 먼저 나와서 화덕에 불을 피워놓고 겟대장이 만들어놓은 바둑을 잘 달구어내는 역할을 한다.
가질대장 - 앞망치의 일이 끝난 기물의 표면을 깎아 다듬어 완성하는 일을 맡는다. 가질틀을 돌려 깎는 데는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센망치꾼 두 명이 교대로 밟아주고, 곁망치는 옆에서 칼을 갈아주며 가질일을 돕는다.
김천지방에서는 앞망치를 앞미, 곁망치를 곁미, 센망치를 센미라고 부른다. 함양지방에서는 앞망치꾼을 앞메꾼, 곁망치를 점메꾼, 센망치를 셈메꾼, 풀무꾼을 불메군이라 부른다.
방짜유기의 제작과정
용해 과정, 단조 과정, 가질 과정, 마무리 과정의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용해 작업 - 바둑에 쇳물 붓기 - 우김질 - 담금질 - 벼름질 - 가질작업으로 공정을 살펴볼 수 있다.
(1) 합금하기 - 순동 16냥(1근: 지금의 600g))에 주석 4냥 5돈(약 168.7g)의 비율로 합금하는데, 우선 쇠를 담은 도가니를 화덕에 넣고 풀무질로 열을 올리게 된다. 풀무질을 시작해서 40여 분이 지나면 쇳물이 녹기 시작해서 30분 정도 더 끓이면 적당한 열도(熱度)가 된다. 붉은 빛에서 흰빛으로 변할 때가 가장 적당한 온도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겟대장의 오랜 경험에 의해 식별되며 따라서 이 부분은 숙련된 기술을 요한다.
(2) 바둑만들기 - 물판에 쇠기름을 바르고 그 위에 고운 쌀겨를 뿌려 쇳물을 부을 때 생기는 기포를 막는다. 물판에 쇳물을 부은 후 위에 뜬 불순물을 고물개로 거두어 낸다. 물판에 부어 만들어진 형태는 둥글넙적한 바둑알 모양 같다고 하여 '바둑'이라 부른다.
(3) 네핌질 - 안풍구는 원대장보다 작업 1시간 전에 미리 나와 겟대장이 만들어놓은 바둑을 불에 달구어 놓는다. 새벽 1시경에 원대장이 나오면 네핌 작업이 시작되는데, 네핌질이란 바둑을 늘여 넓히는 작업을 말한다.
(4) 우김질 - 네핌질이 끝나 넓혀진 바둑을 안풍구가 3개씩 달궈(식지않게 하기 위해) 내보내면 원대장이 재빨리 받아 모루 위에 놓는다. 이때 원대장 정면에 선 앞망치 그리고 좌우편에 선 곁망치와 센망치가 원대장의 장단에 맞춰 메를 내리쳐서 바둑을 늘인다. 곧바로 안풍구가 미리 달구어진 바둑을 내보내면 먼저 쳐서 늘여진 바둑 위에 겹쳐지게 되는데 이 일을 앞망치가 담당한다. 대장은 큰 집게로 바둑을 함께 잡아 불에 달구어 모루 위에 놓으면 망치꾼들이 쳐서 늘이게 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여 늘어난 바둑의 같은 기형이 12개 정도 겹쳐지게 되는데, 이렇게 하는 작업을 '우김질'이라 하며 함양지방에서는 '도듬질'이라 한다.
(5) 냄질 - 우김질된 바둑은 U자형의 그릇 모양으로 겹쳐지게 되는데, 이것을 하나씩 떼어내는 작업을 냄질이라 한다. 떨어진 하나를 '우개리', '우개리질'한다고 말한다. 함양지방에서는 '이가리질'이라고 한다.
(6) 탁침질 - 냄질이 끝난 우개리를 불에 달구어 형태를 바로잡는 작업을 '닥침질'이라 한다. 함양지방에서는 '싸개질'이라 한다. 닥침질은 6명이 닥침망치를 이용하여 원대장이 다듬어준 우개리를 같은 동작으로 서로 잡아 닥치며 바닥을 문지르는 데서 나온 말이다. 이 과정에서 원하는 대상의 모양이 초보적으로 이루어지며, 징, 꽹과리 등은 대부분 이와 같은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7) 제질 - 닥침질이 끝난 기형을 계속 불에 달구어가면서 성형하는 과정이다. 이때 제질돌가 각종 제질망치들이 사용되어 기형을 만들게 된다.
(8) 담금질 - 제질이 끝나 원하는 모양과 형태가 만들어지면 불에 달구어 재빨리 찬물에 담그게 되는데 이 작업을 담금질이라 한다. 담금질은 달군 쇠의 강약의 질을 잡고 경도를 높여주기 위한 작업이다. 담금질하기 전에는 눈만 흘겨도 깨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과정이 어렵다고 한다.
(9) 벼름질 - 담금질된 기물은 찬물에 넣는 순간 형태가 일그러지게 되는데 원래 형태대로 잘 잡아주는 작업을 벼름질이라 한다. 앞망치가 식은 상태에서 주먹망치, 황새망치, 바닥망치, 주머니망치 등을 사용하여 잘 펴주며 징이나 꽹과리 등의 농악기를 만드는 데는 이 벼름질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이사으이 일에서 일단 원대장, 네핌대장, 안풍구, 밖풍구의 일은 끝난다.
(10) 가질 - 주물 유기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질하는 일을 말한다. 공구나 사용방법도 동일하나 방짜 유기에 있어서는 큰 기형을 가질할 때 두사람의 센망치가 교대로 틀을 발로 돌려주고 곁망치가 옆에서 계속 칼을 갈아 줌으로써 작업능률을 올린다. 벼름질한 기물을 가질틀의 머릿목에 끼워 엄쇠로 고정시킨 후 질나무에 칼대를 대어 깎아 완성한다. 이때 기형에 따라 뒷면에 메자국(울퉁불퉁한 자국)을 남기기도 하고 동심원의 무늬를 넣기도 한다.
(11) 마무리 - 가질 작업이 끝난 후 쇠기름에 곱게 빻은 기왓가루를 혼합하여 걸레에 묻혀 가질틀에 대고 돌리면 소박하고 은은한 유기의 광을 얻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이 광내는 작업으로 마무리짓는 게 보통이다.
이런 기법으로 만들어진 방짜 유기는 휘거나 잘 깨지지 않으며 비교적 변색되지 않을 뿐 아니라 쓸수록 윤기가 나는 장점이 있다. 특히 성형할 때 두드린 메자국은 수공예품으로서의 은근한 멋과 품위를 풍겨 그 격이 한층 더하다. 이러한 독특한 전통 기법이 유기장 무형문화재 이봉주 씨에 의해 재현되어 왔던 것이다.
방짜 기법
- 전통적인 유기 제작방법으로 질이 좋은 놋쇠이다.
동과 주석(錫)을 정확한 비율(78 : 22)로 합금하여 두드려서 만드는 놋제품
정확히 합금된 놋쇠를 불에 달구어 메질(망치질)을 되풀이해서 얇게 늘여가며 형태를 잡아가는 기법. 즉 놋쇠를 열간가공(熱間加工)하여 단조기법으로 성형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 방짜 유기는 휘거나 잘 깨지지 않으며 비교적 변색되지 않을 뿐 아니라 쓸수록 윤기가 나는 장점이 있다.
방짜 유기장인 이봉주 씨는,
"지금 우리는 모든 유기를 통틀어 놋그릇이라 부르고 있으나, 이는 해방 후에 놋그릇이 귀하고 주물유기가 흔했던 탓으로 방짜와 주물유기를 구별 없이 놋그릇이라고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놋은 놋으로 대우고, 퉁은 퉁으로 때운다'라는 속담도 있듯 유기(鍮記)라고 다 놋그릇이 아니다. 방짜기법으로 만든 놋쇠라야 상질(上質)의 놋성기이므로 이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방짜 기법 - 동(銅)과 주석(錫)의 합금 - 놋쇠 - 놋점(방짜 유기점) - 놋성기 - 맞춤반상기 - 상류층
주물 기법 - 황동, 잡금속을 섞은 합금쇠 - 퉁쇠 - 퉁점(주물 유기점) - 퉁성기 - 대량 공급 - 서민층
주물 기법
- 조선 중엽에 이르러 그 수요가 늘어나 일일이 손으로 두드려서 만들던 단조(鍛造) 방짜 기법 대신 손쉬운 주물(鑄物) 기법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방짜 유기의 합금비율과는 달리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이나 기타 잡금속을 섞어 녹인 금속을 주물틀에 부어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방법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주석이 생산되지 않을 뿐더러 가격이 비싸 맞춤반상기만 유철로 주조하여 상류층의 수요에 맞추었고, 서민층을 위한 대량공급품은 청철 및 주철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식기나 악기 이외의 유기들은 동과 아연의 합금(황동)이나 기타 잡금속을 녹여서 주조하였다.
경기도 안성 지방의 김근수 주물 유기장은, "해방 이전 장인들은 경험에 의해 유기성분을 상쇠, 중쇠, 하쇠로 나누고 상질의 쇠인 놋쇠는 유철(鍮鐵, 동 70-72%+주석 28-30%), 중간질은 청철(靑鐵, 동 80-85%+주석 15-10%)로 불렀다"라고 말한다. 이 방법은 같은 모양, 동일 규격의 제품을 다량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반방짜 기법(궁그름 옥성 기법)
- 전라남도 순천 지방에서 제작하는 오목한 형태의 식기를 만드는 기법이다. 궁그름이란 공구의 이름이며, 옥성기란 그릇의 윗부분이 옷은(오무라든) 모양의 그릇이라는 뜻이다.
먼저 주물 유기 기법으로 그릇을 U자 모양으로 만든 다음 여러차례 불에 달구어가면서 오목하게 패어진 곱돌 위에 놓고 궁그름대라는 공구로 옥은 부분을 방짜식으로 늘여가면서 만드는 방법이다. 주조기법과 방짜기법을 절충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그리 오래된 방법은 아니며 주로 작은 오목식기나 요강 등을 만들고 있는데, 이 기법은 현재 무형문화재 77호인 유기장 윤재덕 씨에 의해 명맥을 잇고 있다.
===
안성 유기 - 안성맞춤
조선 순조 때의 서유구가 지은 <임원십육지>에 "개성과 호남의 구례, 평안도의 정주 지방에서 유기를 생산하였으나 안성의 유기가 으뜸이다. 안성과 용인 및 장호원이 장터에는 안성에서 만든 유기가 많이 나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성은 본래 교통 요충지여서 수공업이 발달하여 유기뿐 아니라 창호지, 고서적, 담뱃대 등도 유명했으며 남사당패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또 호남과 영남을 통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영, 호남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로서 크게 번창한 고장이었다.
또한 "안성장 윗머리냐"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안성장은 활기가 있었다. 특히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안성의 유기가 유명해서 각 지방 명문 호족들의 주문이 쇄도했다. 안성유기가 이토록 명성이 높았던 것은 유기가 작고 아담할 뿐 아니라 견고하고 재질이 좋아 광채가 은은한 최상의 품질이라는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북 산간지방이나 영호남의 농촌에서는 보리밥을 주로 먹었기 때문에 밥그릇이 커야 했지만, 서울이나 지방의 명문 반가에서는 쌀밥이 주였기 때문에 밥그릇이 클 필요가 없었으므로 안성의 작고 아담한 아름다운 놋그릇이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 말기 안성에는 10여 군데의 유기 공장이 있었으며 서울이나 전국 각 지방의 부호들은 으레 안성의 맞춤 유기를 갖추었으므로 더욱 품질이 좋아졌고 공장도 번창했었다.
김태영이 쓴 <안성기략, 1924>에는,
"안성의 공예품으로 꼽을 것은 유기이다. 그 유래가 구원(久遠)하야 상당한 발달을 치(致)하고 생산품도 거액에 달할 뿐 아니라 품질도 정교 견고하야 고래로 국내 도처에서 환영을 전(傳)하얏더니, 외래품의 도자기로 인하야 대타격을 수(受)하야 생산액이 축소되얏으나 상금(尙今)도 상당히 제조되며..."라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의 활발했던 안성 유기의 생산이 1900년대 많이 쇠퇴한 데다 일제 말기의 유기 공출로 된서리를 맞은 격이 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다시 회생되어 반상기를 중심으로 유기제작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생활방식이 서구화되면서 생활환경, 생활양식의 변화로 일상생활 용품으로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유기 제품은 은은하고 품위가 있는 반면 자주 닦아야 하는 등 사용이 불편한 점도 있었으나 문화수준의 향상과 전통미의 인식이 높아감에 따라 다시 찾는 손길이 많아지고 있다.
오늘날 안성의 유기 산업은 '안성맞춤'이라는 말만 남기고 겨우 김근수씨가 주물 유기의 명맥만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 <유기> 홍정실, 대원사 참조.
[펌]☞http://blog.daum.net/gijuzzang/2905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