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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명시 감상⑩고계(高啓, 1336∼1374) | ||||
난세를 살았던 서른아홉 살의 내면세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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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 읽은 책이 오랫동안 역사관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나는 김동인(金東仁, 1900~1951)의 《운현궁의 봄》을 중학교 때 읽고, 오랫동안 대원군의 풍운아다운 면모만을 사랑했다. 또 유학을 마치고 갓 돌아와 시간강사를 하던 때 이병주(李炳注, 1921~1992)의 《포은 정몽주》(서당, 1989)를 읽고, 정몽주를 절의의 전형으로서보다는 고뇌의 인물로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 두 소설을 우리나라 역사소설 가운데 걸작이라고 손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포은 정몽주》에는 정몽주의 시뿐만 아니라, 원나라 시인 원호문(元好問)의 시와 함께 명나라 초 고계(高啓)의 시가 상당수 등장한다. 당시 그 책을 읽으면서 이병주의 해박함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봄날 뜰가의 몇 그루 매화나무에 꽃이 피면 석 잔 술을 마시고서 매화나무를 몇 바퀴 돌며 꽃을 감상하고 냄새를 맡으면 맑은 향내가 코를 찌른다. 인하여 고계적(高季迪)의 고계적은 곧 고계(高啓)를 가리킨다. 계적은 고계의 자(字)이다. ‘지합(只合)~’은 ‘다만 ~하여야 마땅하다’라는 뜻이다. 눈 가득 내린 산 속에 누운 고상한 선비란 후한 시대 원안(袁安)의 옛이야기를 끌어와 자신의 청고한 삶을 가만히 말한 것이다. 원안은 한 길 높이로 폭설이 내린 날 밖에 나가서 양식을 구하지도 않고 차라리 굶어 죽겠다면서 혼자 집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매화는 예로부터 월하의 미인에 비유해 왔는데, 여기서는 특히 세간과 동떨어져 고적한 생활을 하는 은자를 찾아오는 미인에 비유했다. 또한 이 시는, 매화의 모습과 향은 성긴 그림자와 남은 향기로 묘사해오던 전통을 이어, 대나무와 매화 가지가 어우러지고 이끼와 남은 향기가 어울린 고적한 광경을 연출해내었다. “자거하낭무호영(自去何郎無好詠)”은 ‘하랑이 떠난 뒤로는 매화를 잘 읊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랑은 남조 양(梁)나라의 하손(何遜)을 말한다. 하손이 건안왕(建安王)의 수조관(水曹官)으로 양주(楊州)에 있을 때 관청 뜰에 있는 매화 한 그루 아래서 매일 시를 읊곤 하였다. 그 후 낙양에 돌아갔다가 그 매화가 그리워서 다시 양주로 발령해 주길 청하여 양주에 당도하니 매화가 한창 피었기에 매화나무 아래서 종일토록 서성거렸다. 두보(杜甫)의 시 〈화배적등촉주동정송객봉조매상억견기(和裴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寄)〉에 “동각의 관매가 시흥을 움직이니, 도리어 하손이 양주에 있을 때 같구나[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楊州].”라고 하였다. 그런데 고계의 이 시는 일본의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너무도 좋아한 시이기도 하였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는 〈매화에 대한 감정[梅花に對する感情]〉이란 글에서 고계의 이 시를 인용했다. 아쿠다가와의 이 글은 부제가 〈이 저널리즘의 한 편을 근엄한 니시가와 에이지로 군에게 헌정한다[このジャアナリズムの一篇を謹嚴なる西川英次郞君にず]〉이다. 그는 이 글에서“우리는 예술인이기 때문에 만상을 여실하게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적어도 만인의 안광을 빌리지 않고 우리의 안광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선언하고, “하지만 독자의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은 반드시 용이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일례로서 매화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는 문제를 거론하였다. 매화는 내가 경멸하는 문인취미를 강요하는 것이요, 졸렬한 시마(詩魔)를 현혹시키는 것이다. 나는 고독한 여행자가 심산과 대택을 두려워하듯이 이 매화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라. 여행자가 답파의 쾌락을 상상하는 것도 또한 심산과 대택이란 사실을. 나는 매화를 볼 때마다, 아미산의 흰 눈을 바라보는 서하객(徐霞客, 서홍조)처럼, 남극의 별을 우러러보는 샤츠크루톤(シャツクルトン)처럼, 울발(鬱勃)하는 웅심을 금할 수가 없다. ‘재를 버리고/ 흰 매화 원망하는/ 울타리여라(灰捨てて白梅うるむ垣根かな).’ 이렇게 이에 대해 노자와 본초(野澤凡兆)가 우리를 위하여 일찌감치 나루를 가르쳐 준 바 있다. 우리는 강을 건너려고 서두르려고 한다. 어찌 소년의 객기만 그러하겠는가? 나는 독자적인 안광을 가지고 용이하게 매화를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더욱 독자적인 안광을 가지고 매화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다소 패러독스를 가지고 논다면, 매화에게 너무도 냉담하기 때문에 매화에 지독하게 열중하는 것이다. 고청구(高靑邱, 고계)의 시에 이러하다. (중략) 참으로 매화는 신선의 아름다운 따님이든가 부자 은둔자의 울타리와 유사하다. (후자는 나가이 가후永井荷風 씨의 비유인데, 반드시 전자와 모순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문학에 이르지 못하면 저 미인에 대한 감개를 생각하라. 그래도 또 너의 감개를 가지고도 그저 황홀해하는 것으로 그친다만, 아아, 너도 속될 따름이니, 제도(濟度)할 수 없는 건시(乾屎, 똥)일 뿐이다. 고계(高啓, 1336∼1374)는 중국 원나라 말에서 명나라 초에 걸쳐 활동했던 시인이다. 장쑤성(江蘇省) 쑤저우시(蘇州市)인 장주(長洲) 사람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자는 계적(季迪), 호는 청구·청구자(靑邱子)이다. 일생 쑤저우(蘇州)에서 지내되, 저장[浙江] 지방으로 서너 차례 여행을 하였고, 명나라에 대항한 장사성(張士誠, 1321~1368) 정권 아래에도 있었다. 장사성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온 적이 있던 지방 호족이다. 장사성은 원나라 말에 쑤저우를 거점으로 강동(江東)에 세력을 펼치고 주원장(朱元璋), 진우량(陳友諒)과 패권을 다투었으나, 1367년에 주원장에게 멸망당했다. 고계는 원나라 말의 난세에 쑤저우 교외 오송강(吳松江/吳淞江) 가의 청구(靑丘/靑邱)에 은거하며 스스로 청구자(靑丘子)라고 불렀다. 명나라 초인 1369년에 고계는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가 되어 《원사(元史)》를 편찬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 편찬이 끝나자 명나라 공신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1370년에 고계는 호부우시랑(戶部右侍郞)에 발탁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청구로 돌아가서 야인으로 지냈다. 그런데 그가 지은 시 〈궁녀도(宮女圖)〉와 〈화견(?犬)〉이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일을 은근히 비판한 시라고 오해를 받았다. 본래 쑤저우는 장사성의 본거지였으므로 명나라 태조는 그곳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계는 벼슬을 버리고 본향 쑤저우로 돌아갔으니, 스스로 의심 살 만한 행동을 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위관(魏觀)이 쑤저우 태수(蘇州太守)가 되어 부치(府治)를 수리할 때 상량문(上樑文)을 지었다는 이유로 위관 등이 역적의 죄를 죽임을 당할 때 그도 사죄(死罪)에 걸렸다. 이때 고계와 함께 오중사걸(吳中四傑)이라 일컬어진 양기(楊基), 장우(張羽), 서비(徐賁) 등이 모두 허리를 잘리는 형벌인 요참(腰斬) 형에 처해졌다. 그때 39세에 불과했다. 고계는 여러 편의 시집과 사집(詞集) 《구현집(펾舷集)》을 남겼다. 이것들은 《청구시집(靑邱詩集)》으로 묶여 전한다. 짧은 생애에 2,000수 이상의 시에, 강남 지방의 자유로운 심경을 담아내었다. 〈청구자가(靑邱子歌)〉는 분방한 환상을 엮으며 시인의 사명을 노래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조선의 정조대왕은 재위 16년(1792) 여름에 규장각 각신들로 하여금 한(漢)·위(魏)·육조(六朝)·당(唐)·송(宋)·원(元)·명(明)의 시들을 선별하여 《시관(詩觀)》을 엮으라고 명했다. 이때 고계의 시도 전부 수록되었다. 《시관》을 엮을 때 문신들은 별도로 시인소전(詩人小傳)을 분담해서 지었다. 이때 이덕무는 당·송·명 3대의 시인들에 관한 소전을 짓도록 위촉받았다. 그것이 《청장관전서》 제24권 편서잡고(編書雜稿) 4에 ‘시관소전(詩觀小傳)’이란 이름으로 실려 있다. 이덕무는 고계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의 시는 침울(沈鬱)한 데서 발단(發端)하여 취지는 유원(幽遠)한 데로 들어가서 고악부(古樂府)·《문선(文選)》·《옥대신영(玉臺新詠)》·《금루자(金縷子)》의 여러 문체로부터 아래로 이백(李白)·두보(杜甫)·왕유(王維)·맹호(孟浩)·고적(高適)·잠삼(岑參)·유우석(劉禹錫)·백거이 (白居易)·위응물(韋應物)·유종원(柳宗元)·한유(韓愈)·장적(張籍)에 이르러서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범성대(范成大)·육유(陸游)·우집(虞集)·게해사(揭奚斯)에 미치기까지 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것을 일러 대가라 하겠는데, 명나라 초엽의 시인들이 제일로 추대한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부명집(缶鳴集)》 18권이 있다. 《부명집》은 고계의 시집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에는 《청구시집》 속에 편입되어 있다.
이병주의 《포은 정몽주》에서는 정몽주가 고려 말에 하평촉사(賀平蜀使)로서 명나라에 들어갔을 때, 유기(劉基)의 막객인 이형(李亨)이란 사람을 통해 당시 37세 되던 고계의 시집 《누강음고(婁江吟藁)》를 얻어 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몽주는 그 시집을 손에 들자마자 심취해 버렸는데, “난세를 사는 시인의 정감이 칙칙하게 가슴을 치는” 때문이었다고 했다. 소설에서는 정몽주가 특히 고계의 〈장창병(長槍兵) 이른다고 듣고 월성(越城)을 나와 밤에 암산에 투하다〉라는 시와 〈봉구전장(奉口戰場)을 지나며〉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또 정몽주는 고계의 〈청구자가(靑邱子歌)〉 가운데, “불긍절요위오두미(不肯折腰爲五斗米) 불긍도설하칠십성(不肯掉舌下七十城)”이란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런 경지가 부럽기조차 했다.”라고 했다. 또한 소설에서 정몽주는 배로 귀로에 올랐다가 표류하여 다시 중국의 명주에 표착하게 되어 중국의 강남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정몽주는 고계가 28세, 원나라 정권일 때 지었다는 〈조선아(朝鮮兒)〉를 좋아하여 홀로 그 시를 길게 읊었으며, 초련이라는 기생을 사랑하여 그녀를 앞에 두고 위에 보았던 고계의 시 〈매화〉도 읊었다. 그 후 우왕 13년(정묘)에는 둔촌 이집(李集)을 찾아가, 고계의 시 〈내 수심은 어디로부터 오는가[我愁從何來]〉를 읊어 세태의 추이를 염려하는 자신의 심회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병주가 인용한 시 가운데 〈청구자가〉는 바로 고계의 대표작이다. 이 시에는 서문이 붙어 있고, 다음에 시가 시작된다. 강가에 청구가 있기에, 내가 이사를 하여 그 남쪽에 집을 두고는 스스로 청구자라고 호를 하였다. 한가하게 거처하여 아무 일이 없으므로 진종일 고음하여 한가롭게 청구자의 노래를 만들어 나의 속내를 말하여 시음(詩淫, 시에 병든 자)이라는 조롱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江上有靑邱, 予徒家其南, 因自號靑邱子. 閑居無事, 終日苦吟, 閑作靑邱子歌, 言其意, 以解詩淫嘲.] 靑邱子 청구자여 시인이 이 세상에서 교활한 짓을 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말은, 후한 때 채경(蔡經)이란 사람이 신선 왕원(王遠)과 선녀 마고(麻姑)가 만나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끌어다 쓴 것이다. 《신선전》에는 왕원의 이름이 왕방평(王方平)으로 나온다. 한나라 환제(桓帝) 때 선녀 마고와 신선 왕방평을 만났을 때, 채경은 마고의 손톱이 새 발톱 같음을 보고는, 저 손톱으로 가려운 등을 긁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왕방평이 그 마음을 간파하고는 채찍으로 때렸다고 한다. 그런데 《태평광기(太平廣記)》에 《박이지(博異志)》라는 책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 속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채경은 오(吳) 땅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사는 곳에 왕원과 마고가 왔다. 마고는 그 집의 여자들과 만나려고 했으나, 그 가운데 이제 막 아이를 낳은 여자가 있었다. 마고는 더러운 것을 씻어주려고 쌀을 조금 가져오라고 하여 쌀을 뿌려 주었는데, 땅에 떨어진 쌀은 모두 영생불사약을 만드는 재료인 단사(丹砂)로 변했다. 왕원은 웃으면서, “그대는 젊었지만 나는 이제 늙었기에 그런 마술은 하고 싶지 않구려.”라고 했다고 한다. 고계는 시 짓는 일을, 쌀을 단사로 만드는 신비스런 영능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것은 천상의 존재가 하는 일을 흉내 내는 것이기에 천상의 존재로부터 노여움을 사게 되리라고 한 것이다. 고계의 〈청구자가〉가 조선 후기의 시인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인조 때 명문장가 장유(張維)가 한때 자신의 호를 구염자(폻髥子, 마르고 수염 더부룩한 자)라 하고 지은 자찬(自贊)에서 〈청구자가〉를 의식한 듯한 표현이 눈에 띈다. 장유는 〈구염자자찬〉의 첫머리에 “자부심 넘치면서 바짝 마른 그 모습, 병든 학 축 늘어져도 곡식 쪼아 먹진 않는 듯하고, 잿빛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 겨울철 소나무 홀로 서서 온갖 풍상 겪은 듯하네(昻然而폻者, 如病鶴低垂不啄稻粱, 蒼然而髥者, 如寒松獨立飽更風霜)”라고 했다. 단, 장유는 구염자가 세속과 결별하고 고음(苦吟)하여 천상의 조화를 훔쳐 자신의 마술로 삼는다는 발상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계의 〈청구자가〉는 일본의 메이지(明治) 시대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모리 오가이(森鷗外, 1862~1922)는 〈청구자가〉를 의역한 시 〈청구자(靑邱子)〉를 발표하여 근대 여명기의 젊은 지식인들이 지녔던 지사적인 정신과 예술혼을 고동시켰다. 모리 오가이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881년 도쿄 의대를 졸업한 후 군의관이 되고, 1884년에 의학 연수차 독일에 건너가 의학 외에 문학·미학·철학 등을 연구한 뒤 1888년에 귀국해서 군의 총감, 육군성 의무국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1916년에 퇴임한 후 박물관, 도서관, 미술관 등의 관장을 지냈다. 종래 일본은 한시를 읽을 때 훈독을 중시했으나, 모리 오가이의 〈청구자〉는 시적 음률을 고려하여 훈독의 틀을 부수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 지식인들은 모리 오가이의 〈청구자〉를 암송하면서 고계의 고독한 영혼을 사랑했다.
내가 보기에 《포은 정몽주》는 지식인의 고뇌를 가장 깊이 다룬 역사소설이라고 생각된다. 이병주는 정몽주라는 역사적 인물의 고뇌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수학 시절에 깊이 영향받은 고계의 시를 소설 《포은 정몽주》에서 거듭 인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병주는 《포은 정몽주》에 고계의 시들을 인용하면서, 1960년대 간행된 이와나미 서점(岩波書店)판 《중국시인선집》을 참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전집은 교토대학의 요시카와 고지로(吉川幸次郞)와 오가와 다마키(小川環樹)가 편집한 것으로 교토대학 출신 중국문학 연구자들이 중국의 시인들을 선별하여 각 시인들의 시를 권별로 선역(選譯)한 것이다. 고계의 시는 중국시가 연구의 대가 이리야 센스케(入谷仙介)가 1962년에 주해하여 간행했다. 이병주의 《포은 정몽주》에서 인용한 고계의 시가 본래 어떤 형식이고, 소설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인용되었는지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장창병 이른다고 듣고 월성을 나와 밤에 감산에 투하다[聞長槍兵至出]越城夜投龕山]〉: 장편 오언고시 가운데 4구만 인용했다. 이병주는 감산을 ‘암산’이라 하였다. 《포은 정몽주》에 인용된 시들은 모두 이와나미본에 수록되어 있다. 고계의 시풍은 염정(艶情)과 신운(神韻)의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리야 센스케는 메이지 이래 일본 지식인들이 선호한 고계의 지사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병주의 독법과 일치한다. 또 〈청구자가〉까지 네 수는 모두 이와나미본 선집의 앞부분에 실려 있고, 〈매화〉 1수는 원래의 9수 가운데 유일하게 그 선집에 선별 수록되어 있다. 이병주가 인용한 고계의 시 가운데 〈조선아가〉는 원나라에 노예가 된 고려의 젊은이를 노래한 것이다. 이 시에는 서문이 붙어 있어서, 아마도 고계가 장사성의 휘하에 있었을 때 중서성의 속관인 검교(檢校) 벼슬에 있는 주(周) 아무개의 연회에서 고려아(高麗兒) 두 사람이 춤추는 것을 보고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고려아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분명치 않으나 대개 여성 무희였을 듯하다. 고계는 “그들의 나라가 동방의 번(藩)으로서 우리나라에 신속(臣屬)해 있었던 때”를 그리워하고, “중국에 수년 이래 전란이 평정되지 않아 공물을 바치는 외국 사신들이 발걸음이 끊어진” 것을 애석해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포은 정몽주》에서 정몽주는 10여 년 전, 홍건적이 개경을 겁략하는 등 고려가 혼란의 도가니였던 때를 회상하면서 이 시를 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리야 센스케는 이 시가 원나라 지정 24, 5년경의 작품이라고 했으나, 《포은 정몽주》에서 이병주는 이 시를 ‘지정 23년쯤의 것’으로 고계의 28세 때 작품이라고 했다. 장사성이 주 아무개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왔을 때 정몽주가 상중에 있어 그를 만나보지 못한 것으로 설정하기 위해 연도를 조금 앞으로 올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병주의 번역과 시의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아, 조선의 소녀여! 이 얘기를 듣고는 나는 생각했다. 그녀들의 나라가 동방의 번(藩)으로서 우리나라에 신속(臣屬)해 있었던 때를. 그 나라의 여성이 황후(기황후)가 되어 꿩이 그려진 옷을 입고 계셨다. 그런 까닭에 궁중의 전속가무단에 이 조선의 노래가 전하여져 그 나라 출신의 황후에게 조석으로 위안을 드렸으리라. 그런데 중국엔 수년 이래 전란이 평정되지 않아 공물을 바치는 외국 사신들의 발걸음이 끊어지고, 황태자는 영무(태원)에 계신다고 하는데 승상은 허창으로 도읍을 옮길 작정이라고 들린다. 금수강변의 몇 그루 수양버들이여! 의구한 춘풍에 지금도 변함없이 한들거리고 있는지 말단의 신하인 나는 이것저것 생각하며 태평한 날을 그리워하는 나머지 술통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통안에 든 술보다 많을 지경이다. 朝鮮兒(조선아) 髮綠初剪齊雙眉(발록초전제쌍미) 조선 후기의 한치윤은 《해동역사》 제51권 〈예문지(藝文志)〉에 이 시를 전부 실어둔 바 있다. 한치윤은 우리나라와 관련된 중국의 시를 망라하기 위해 이 시를 채록한 것이다. 하지만 이병주는 정몽주의 우민(憂悶)을 드러내기 위해 이 시를 인용하고 절묘하게 번역하였다. 한편 《포은 정몽주》에서 정몽주가 둔촌 이집을 만나 들려준 고계의 〈내 수심은 어디로부터 오는가[我愁從何來]〉는 다음과 같다. 역시 이병주의 번역을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정말 애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슬픔은 어디서 온 것일까. 가을이 오니 홀연 그것을 발견한 느낌이다. 가난한 선비의 탄식이란 것도 아니고 방랑자의 슬픔은 더더욱 아니다. 처음 나는 이 슬픔을 만초(蔓草)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저녁 이슬을 맞고도 시들질 않는다. 기왕의 나는 서쪽 골짜기의 개울가에 살면서 산수의 기이함을 즐기고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동원으로 돌아와 시들어가는 초목을 슬퍼한다. 나의 외로운 오막살이를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일까. 슬픔만이 따라올 뿐이다. 세상 사람들에겐 즐거운 일들이 많은 모양으로 잔치를 하며 지칠 줄 모르는데 나만이 슬픔을 안고 배회하고 있으니 장차 나는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我愁從何來(아수종하래) 秋至忽見之(추지홀견지) 《포은 정몽주》에서 이병주는 이 시를 통해 ‘천재의 고독’에 대해 사색했다. 소설 일부를 옮기면 이러하다. 소요하는 동안 화제는 고계를 싸고돌았다. “이백이 없었더라면 어찌 천지간의 인간의 슬픔을 그처럼 활연하게 알게 했겠소. 두자미(두보)가 없었더라면 범백(凡白, 대중)의 일상에 깔린 인생의 슬픔을 그처럼 명료하게 그려보였을 것이겠소. 백거이가 없었더라면 어찌 인생의 행로난(行路難)이 부재산(不在山) 부재수(不在水)란 사실을 알았겠소, 정히 인생의 살기 어려움은 지재인생거래간(只在人生去來間)이 아니요. 그런 만큼 나는 달가의 깊은 수심을 아오이다. 염리세속(厭離世俗)할 수 없는 달가의 마음이 오직 백성들에게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요.” 이병주가 고계의 시를 사랑하고 고계의 시 가운데 일부를 《포은 정몽주》에 인용한 것은 일본 유학의 경험에 뿌리가 있고 일본 한시연구의 성과를 참고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계의 시는 《포은 정몽주》 속에 적절히 재해석되고 소설 속의 인물 정몽주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인용과 재해석은 오로지 이병주의 독창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청나라 때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면서 이루어진 제요집인 《사고제요(四庫提要)》에서는 고계의 시를 평가하여, “한위(漢魏) 육조(六朝) 및 당송(唐宋) 등 모든 시대 고인들의 장점을 겸비했다.”라고 했다. 고계는 시에는 옛사람의 시어나 시풍을 모범으로 삼는 의고주의(擬古主義)의 태도가 드러난다. 그만큼 자기의 독특한 시풍을 만들어 내지 못한 면이 있다. 이미 ‘위대한 거인’들이 앞에 많아서‘거인의 어깨’를 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고계는 ‘거인의 어깨’를 잘 빌려 멀리까지 바라다보았다. 그렇기에 시풍이 웅건하고 여러 장점을 겸비했다. 절구나 율시 같은 근체시는 물론 가행(歌行)과 악부(樂府) 등의 양식에도 탁월했다. 농가의 생활을 묘사한 악부시도 아주 많다. 그 가운데 〈전가행(田家行)〉이나 〈양잠사(養蠶詞)〉는 농민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가혹한 부역과 과중한 세금을 비판하였다. 〈등금릉우화대망대강(登金陵雨花臺望大江)〉이나 〈송이사군진해창(送李使軍鎭海昌)〉 등은 기세가 호탕하다. 그러나 고계의 시는 사실주의적인 것보다는 현실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그 속의 애환을 낭만적이거나가 몽환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더 뛰어나다. 시 〈간예화(看刈禾)〉 즉 ‘벼 베기를 구경하며’는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이다. 農工亦云勞 농사일이 역시 힘들다고 말하지만 이 시는 홀로 힘들게 이삭을 줍는 가난한 여인을 등장시켜 풍년에도 하층민은 여전히 고달프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그러나 시 전체의 시선은 해부적이지 않다. 계층의 분화라든지 빈농의 생활조건을 중앙에 보고하려는 의식도 없다. 시인은 농촌의 가을걷이 풍경을 멀리서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며, 다음 시 〈농가의 봄밤[田家夜春]〉은 더욱 농촌의 일상적인 삶을 잔잔하게 노래하였다. 新婦?糧獨睡遲 신부가 방아 찧느라 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산 속에서 봄날 새벽 새 소리를 듣고[山中春曉聽鳥聲]〉는 산속 거처의 고고한 분위기를 기막히게 전달하였다. 子規啼罷百舌鳴 소쩍새 울음 그치자 까치가 울어 고계의 오언절구 〈호 아무개 은둔자를 방문하러 가는 길[訪胡隱君]〉은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풍경을 그려내고 우정의 따스함을 노래하여 널리 회자되어 왔다. 渡水復渡水 물 건너고 다시 물을 건너 이 시는 남송의 주필(周弼)이 《삼체시(三體詩)》를 엮어서 ‘경(景)과 정(情)의 교직(交織) 방법’을 가장 잘 이뤄낸 시로 격찬한 중당(中唐) 때 옹도(雍陶)의 〈성서로 친구의 별장을 방문하다[城西訪友人別墅]〉와 유사하면서, 그 의경(意境)을 살짝 바꾼 듯하다. 옹도의 시에 대해서는 나의 《한시의 세계》(문학동네, 2003)에서 소개한 바 있다. 잠깐 그 시를 다시 보면 이러하다. 澧水橋西小路斜 예수 다리 서쪽에 비스듬한 작은 길
연꽃 가득한 길을 금보요(머리 뒤 장식) 꽂고 가니 화요도 무삼사(武三思) 댁에서 부끄러워 숨고 기러기 지는 가을 하늘은 초나라 하늘처럼 푸르니 이 시에서는 그림 속의 사녀를 여러 미인들과 비교하여 훨씬 미색이 출중하여 과거의 미인들도 모두 무색하게 되고 말리라고 하였다. 우선, 아교는 진아교(陳阿嬌)로, 한나라 무제의 고종 누이였다. 한문제는 어릴 적에 진아교와 놀면서 매우 친애하였다. 고모가 “아교를 배필로 삼으면 어떻겠는가.” 하니, 무제가 “정말 아교와 배필이 된다면 금옥(金屋)에 감추어 두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아교는 후일에 진황후(陳皇后)가 되었다. 화요는 화월(花月)의 요귀(妖鬼)이다. 육훈(陸勳)의 《집이지(集異志)》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측천무후의 조카 무삼사(武三思)가 첩을 두었는데 얼굴이 절색이어서 사대부들이 모두 그를 방문하여 구경하였다. 어느 날 적양공(狄梁公)도 그를 찾아갔는데, 그 첩이 어디로인지 숨어버렸다. 무삼사가 사방으로 수색해 보니, 그 첩은 벽 틈에 숨어 있었다. 그 첩은 “나는 화월의 요귀인데, 하늘이 나를 보내어 당신을 모시고 이야기도 하고 웃으면서 지내도록 했습니다만, 양공은 일세의 정대(正大)한 사람이므로 제가 만나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항아는 후예(后톢)의 처이다. 후예가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불사약을 구해 얻었는데, 그가 미처 복용하기도 전에 항아가 몰래 훔쳐 먹고는 달로 도망쳐서 월선(月仙)이 되었다는 전설이 《회남자》 등에 실려 있다. 그런데 고계가 그린 〈사녀도〉는 미인의 외모를 그리기보다는 복식과 웃음, 향내 등등을 묘사하고, 다른 미인과의 비교를 통해 그 미인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어떤 형상이었을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춘향전》 등 우리 고전문학의 미녀 묘사는 이러한 수사법을 이은 것이 아닐까.
앞서 고계의 일생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고계가 1370년에 호부우시랑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청구로 돌아갔으며, 시 〈궁녀도(宮女圖)〉와 〈화견(?犬)〉이 명나라 태조를 비판했다고 오해되었다고 했다. 〈궁녀도(宮女圖)〉와 〈화견(?犬)〉은 궁중의 일을 비유한 시다. 명나라 태조는 여색을 밝혀, 궁중 여인이 9천여 명에 화장품 비용으로 40만 금을 허비했다고 전한다. 그렇다고 고계가 그 두 시에서 명나라 태조를 비난한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제사녀도시〉를 통해 보았듯이, 고계는 본래 염정(艶情)을 추구한 면이 있었다. 〈궁녀도〉와 〈화견〉도 그러한 취향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시 〈궁녀도〉는 칠언절구이다. 시 〈화견〉도 칠언절구이다. 獨兒初長尾茸茸 독아가 갓 자라서 꼬리가 부숭부숭한데
고계의 〈궁녀도〉와 〈화견〉은 그림을 보고 쓴 제화(題畵)의 시들이다. 이 시들은 궁중 여성의 생활을 염풍(艶風)으로 그려냈다. 그런데 간사한 자들은 이 시에 나오는 작은 개는 바로 태조(주원장)를 비꼰 것이라고 모함했다. 명나라 태조가 즉위한 지 5년 되는 1372년(홍무 5) 10월에 예부주사(禮部主事)였던 위관(魏觀)이 소주부(蘇州府)의 지부(知府)로 왔다. 고계는 《원사》를 편찬하는 편수의 직으로 남경에 있을 때 그와 친하게 지낸 일이 있었다. 위관은 옛 성을 재건하고자 하여, 부청(府廳)의 상량식에 맞춰 고계에게 상량문을 지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소주(蘇州)는 원나라 말기에 주원장에게 대항했던 장사성(張士誠)의 근거지였으므로, 그 땅에 관청을 지은 위관은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고계는 이 관청에 상량문을 지었다는 이유로 요참(腰斬)을 당했는데, 상량문은 전하지 않고 당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칠언율시 〈군치상량(郡治上梁)〉이 전한다. 고계는 쑤저우성(蘇州省) 바깥 한산사(寒山寺) 가까이의 풍교(楓橋)에서 배를 타고 북향하여 남경으로 향할 때 절명시를 남겼다. 이것이 널리 세간에 전한다. 楓橋北望草斑斑 풍교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풀이 무성하고
필자는 졸저 《한시의 서정과 시인의 마음》(서정시학, 2011)의 첫 편에서 ‘시인의 슬픔’이란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 그리고 시인은 지독하게 슬픈 존재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는 고계의 〈내 수심은 어디로부터 오는가[我愁從何來]〉를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시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 깊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 이병주의 《포은 정몽주》를 되읽으면서, 이병주가 고계의 그 시를, 소설 속의 등장인물인 이집의 입을 통해 알려주는 풀이에 새삼 느끼는 바가 많았다. “슬픔을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가르치기 위해 천재는 있는 것 같소이다.” 시인은 바로 슬픔을 가르치는 천재이다. 심경호 |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955년 충북 음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일본 교토(京都)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저서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한국한시의 이해》 《김시습평전》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등과 역서로 《불교와 유교》 《일본서기의 비밀》 등이 있음. 성산학술상과 일본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선생 기념 제1회 동양문자문화상 수상. 한국학술진흥재단 선정 제1회 인문사회과학 분야 우수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