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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단번의 구원과 믿음의 행위
히브리서 6장 1-6절 / 1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영단번의 구원으로 말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는 것을 통해서 단 한번 자신의 몸을 희생제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심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대속주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며 죽임을 당하시는 것에서 흘리신 피가 어떤 것인지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진 유월절 잔치의 만찬에서 알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새언약을 나타내는 표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흘려서 맺는 새 언약의 표입니다(눅 22:20). 이는 많은 사람을 죄 사함 얻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는 피입니다(마 26:28). 그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는 것에서 단 한 번 자신의 몸을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시는 것에서 흘리신 피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는 효력을 영원히 발휘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든 죄에서 구원을 받는 은혜를 입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에 그들의 주와 함께 들어감에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일어납니다(참조. 행 11:14-18).
그러니 말입니다. 영단번의 구원 효력이 발생하는 시점은‘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은혜로 주어진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더해지지 않았습니다. 한 설문 조사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 참으로 적지 않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며 신행(信行), 곧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는 상황에 있는 형편입니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받은 구원은 결코 잃어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만일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으로 안다면, 이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데 따른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능력을 영원히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성도의 타락을 이야기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근거 구절로 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런지요.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도는 이제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 곧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머물러 있으며 더 나아가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이것에 매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더 깊은 진리를 배우는 자리로 나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여섯 가지인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는 구약시대에 있어온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들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이신 실체를 보여 온 그림자의 역할을 해온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기초로 놓인 것이기에 이것보다 더 나은 완전한 것이 왔으므로 이 기초를 다시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는 이 기초 위에 있을 필요가 있었으나 이것들이 가리켜 온 온전한 것인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그 온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1) 죽은 행실의 회개 : 죽은 행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이것이 이야기되고 있는 전후 문맥에 대제사장직을 거론하며 그보다 더 크신 그리스도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보아서는 이 세상의 성소에서 일하는 레위적 대제사장직과 연관된 외적인 규례로서 이해됩니다. 히브리서 9장 8-10절에서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 번 모든 백성의 죄는 물론 자신의 허물과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뿌렸습니다. 그러나 옛 제도 아래서는 아무리 예물과 희생제물을 드려도 그것을 바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정결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옛 제도 아래에서 먹고 마시는 음식과 몸을 씻는데 정해 놓은 규칙들은 일정한 의식의 약속에 지나지 않으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새롭고 더 나은 길을 가지고 오실 때까지 그 규칙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이렇게 옛 제도 아래에서는 이런저런 행실을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이제는 이런 죽은 행실을 붙들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께서 나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 대한 신앙 :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휴즈),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태도인‘하나님을 앙모하는 생활’(바클레이),‘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신 분이시라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전가시키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브라운) 등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이는‘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신 분이심’(마 1:21)을 믿는 것에서 말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서 머물지 말고 다 온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권면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은 단지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한다는 필요성만 가지고 이를 떠드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을 지적하며 그러한 말에는 더 이상 귀 기울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로 나아가야 할 것을 권면해줍니다. (3) 세례들과 성령의 은사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 : 세례들은 원문에는‘세례 혹은 씻는 것들에 대한 가르침’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례는 죄 사함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의 연합에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교회의 일원임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의식의 중요성에만 매달리고 유대인의 전통적인 결례 의식을 따를 것을 말하는 주장이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확신이 없이 흔들리고 있는 자들에게 그러한 초보적인 단계에서 속히 벗어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인 안수는 죄악을 전가시키는 표시로서 짐승의 머리 위에 희생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손을 얹으며, 아버지가 자식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을 빌었으며, 특별한 직분 수여를 표시하는 것으로 직분 받는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하나님의 은혜를 기원했던 관습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병 고침을 위하여 성령님을 임재케 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가 하면, 죽은 자의 부활 신앙을 가졌으나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이어야 하며, 영원한 심판을 알고 있으나 이 또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 영생으로 들어갈 자와 영벌에 처할 자가 갈라지는 것임을 아는 것에서여야 합니다. 그러한 것에서 옛 제도 아래에서의 세례들에 관한 교훈을 비롯한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 의미가 새로운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기에 구약시대의 옛 제도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던 것에 머물지 말고 보다 더 완전한 진리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아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서지 않음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모욕하거나 뭇사람들 앞에서 욕되게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에 있는 것이 될 것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죄 아래에 있는 것이니 그에게서는 회개에 이르도록 회복시켜 새사람이 되는 것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에서의‘타락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였으나 신앙생활을 잘하지 못하고 타락한 삶을 살므로 믿는 도중에 구원을 잃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로 영접하지 않고 옛 제도 아래에서 지켜온 교훈을 따라 행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신앙이 타락할 수 있다는 것도,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이죠. 구약 시대에서 옛 제도인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 이것의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그동안 그 모두에서 가리켜왔던 그리스도의 진리를 아는 데로 나아가며 그 가르침을 받아 진리에 흔들리지 말고 견고히 주께 믿음을 뿌리 내릴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행, 곧 믿음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구원 받은 자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원 시점 이후에 관한 일입니다. 이 믿음의 행위는 이것이 행해지기 이전의 일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일어나는 일인 구원 받음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이는 말이죠. 예수님을 믿는 자가 언제나 힘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도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봉사에 열심을 가지며 선한 일을 도모하는 등 참으로 선행에 믿음을 쏟을지라도 그 모든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되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행하는 의로운 행위에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입어야 할 죄인일 뿐입니다(롬 3:20).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율법 아래 있던 유대인에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이라며,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니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으므로 육체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갈 2:16; 6:13).
그러니 말입니다. 믿음의 행위로 구원 얻을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되며, 이러한 말을 하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며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신행, 곧 믿음의 행위는 우리들에게서 어떤 것인지요. 우리들이 가져나가는 믿음의 행위가 우리의 구원을 잃지 않게 지키며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을 온전히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그리고 또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우리의 믿음의 행위가 무슨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이 모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가 가져나가야 할 믿음의 행위를 가볍게 여기고 중요하지 않게 생각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가져나가야 할 신앙에 함께 하는 행위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가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요. 이는 마치 생명이 잉태하여 태어난 때부터 정상적으로 자라 장성한 자가 되는 것에는 알고 배우면서 행하여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비롯하여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을 알고 배워야 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진리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며 그에 따라서 알고 있는 바대로 힘써 사는 행위가 동반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 우리에게 알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며 알아야 할 신앙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교회 모임을 갖고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는 경이로움을 알고 그 중요함에 따라 힘써 가져나갈려고 하며, 하나님께 구하여야 할 기도에 있게 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인 전도에 우리에게 주어진 목숨을 다할 마음과 용기를 가지며, 성도를 자신의 몸과 같이 여겨 섬기는 교제와 봉사를 하게 됩니다. 이것들 중에서 우리가 생각 없이 살아도 되고 행하지 않아도 될 것이 있는지요. 그래도 될 것은 단 하나라도 없습니다. 예배 모임의 경우만 해도 사도 시대 당시 아직 교회가 세워져가는 시기에 있어 성전이 공존하던 때에도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행 2:46). 그런가 하면 히브리서를 쓴 사도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자고 하였습니다(히 10:25). 사도들이 성도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고 하면, 그 전념은 가르침을 받는 우리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부단히 두드리며 일깨워 정신이 들게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다음에 해 주시고 있는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8)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히 6:11)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라.(벧전 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