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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걸어야지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 물건 파는 사람처럼 언제든지 흔히 부딪히는 직업이 있고, 사진작가같이 기념이 될 만할 때에 만나서 기억나는 직업도 있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부동산 중개인을 몇 번 만나야 했다. 새로운 직장 가까이로 옮긴다든지, 처음 내 집을 산다든지 하는 좋은 목적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부동산 중개인을 찾았던 것 같다. 직업에 대해 이런 글을 읽었었다. 사람들은 남의 일이 쉬워 보인다고 한다. 간호사는 의사의 일이 쉬워 보이고, 조교는 교수의 일이 쉬워 보인다. 아랫 사람은 윗 사람의 일이 쉽고 편해 보인다... 이 글을 읽으면서 웃었던 이유는 의사인 나에게는 간호사의 일이 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심리에서였을까. 부동산 중개인의 일이 그렇게 편해 보일 수가 없었다. 계약서 몇 장 쓱쓱 써 주는 댓가로 큰 금액이 오고 가고... 재산증식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조금 부럽기도 했다. 지금 떠오르는 말기 환자가 부동산 중개인이었다.
처음 만날 때의 인상이 한 사람을 규정지을 때가 있다. 40대의 J는 처음에 방사선종양학과 환자로서 나를 만났다. 당시 방사선 치료를 위해 단기 입원이 필요하여 내게 의뢰되던 경우가 간혹 있었다. 대개는 경과가 양호한 암 환자들이었고, 내가 치료를 주관하는 것은 아니라서 거의 얼굴 보고 인사만 하는 식이었다. J는 자궁경부암 환자였고, 대부분의 자궁경부암 환자들이 그렇듯이 잘 치료되고 있으려니 했었다. J는 아침 회진 때, 감은 머리를 말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환자 같지 않으시네요?”하고 내가 인사를 하면, J는 눈웃음을 띄면서 “그럼요, 금방 가야지요”하고 대답했었다. 입원한 환자들은 대개 누워있고, 머리 감는 것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큰 일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서서 웃고 있는 J는, 별로 입원 환자처럼 보이지가 않았었다. 몇 개월이 지나고 J를 잊을 무렵, 방사선종양학과에서 연락을 받았다. J의 암이 더 이상 방사선 조사에도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이제 내가 주치의로 필요한 말기 환자가 된 것이다. 나의 환자들은 거의 전부가 말기가 되기 이전에 나를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직업적으로 편한 점이 있었다. 종양내과의사로서 호스피스를 겸한 경우에, 자신이 암의 치유를 담당하다가 치료가 실패한 것을 선언하고 말기 돌봄으로 전환하는 시점이 어렵다고 들었다. 그런 점에서 호스피스를 하는 방사선종양학과의사도 마찬가지이다. 상대적으로 가정의학과는 주로 가벼운 질환을 다루기 때문에, 내가 치료하던 환자가 치유의 가망이 없어져서 호스피스를 해야 하는 심적 부담은 면제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J를 내가 직접 치료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려니 마음이 묘해졌다.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까 생각하면서 J의 병상으로 발을 옮겼다. J의 의무기록을 검토해 보니 워낙이 자궁경부암의 발견이 늦었고, 다량의 방사선을 쬐었으나 치료에 별 진전이 없었다. 암 치료에는 여러 합병증이 따를 수 있다. 종양세포를 죽일 만큼의 치료는 독성이 강해서, 정상 세포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은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항암 치료(약물치료)의 부작용보다는 덜하지만, 그것도 조사량에 따라 사람에 따라 매우 심한 경우도 있다. 예상대로 방사선에 예민한 장 상피세포의 탈락이 일어나서, J는 반복되는 설사와 복통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가 탈수 때문에 더 거무스레하고 탄력을 잃어 보였다. 그래도 J는 큰 눈에 웃음을 띄면서 인사를 했다.
상황을 더 좋지 않게 만든 것은 척수전이였다. 암 덩어리가 하지를 지배하는 척수(등골)신경을 누르면서 하지 마비가 뒤따랐다. 척수전이는 호스피스 완화의료에서 몇 안되는 응급상황중의 하나이다. 시기적절한 치료에 따라 이후의 삶의 질이 크게 달라지는 상황이 호스피스의 응급상황이다. 비록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마음대로 하반신을 쓸 수 있는 상태와 그렇지 못한 상태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 마비가 나타난 지 이틀 이내로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회복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치료 시기를 놓치면 환자가 다시 걷기가 힘들다. J는 시기가 꽤 지나서 방사선 치료도 고려할 수 없었다. 이제는 강력한 염증억제제인 스테로이드 주사밖에 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혈액 검사 결과를 종합하여 예후지수(완화의료에서 여명을 판단하는 숫자로 이 지수가 크면 오래 살기 어렵다)를 산출해보니 대략 2주 남은 것으로 나타났다. 2주... 한 사람의 삶을 정리하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다. 고락을 같이 하던 주위 사람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기에도 모자르는 시간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1주면 생의 충분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무언가 크게 깨닫고 실행하면서 자신의 삶을 바꾸는 데는 1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임종을 앞둔 사람이 자신의 주위를 정리하고 마지막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개월은 필요한 것 같았다.
J는 누워서만 지내는 상태에서도 머리를 자주 감고 싶어했다. 가족들은 바빠서 J 혼자 지낼 때가 많았다. J는 붙임성있는 웃음을 지으면서 “여기 병원에 도와주시는 분들 있죠?”하였다. 자원봉사자를 연결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자원봉사자가 온 후에는 아침에 J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는 모습을 곧잘 보게 되었다. “참 부지런하시네요“하고 말을 건네면 ”네, 이제 일어나 걸어야죠“하고 J는 밝게 대답하였다. 자신의 상황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녀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J에게 걸을 수 없다는 사실과 삶이 끝나가고 있음을 직시시켜주어야 할 지 고민이 이닐 수 없었다. 환자들은 체력이 저하되고, 식욕이 없어지거나 숨이 차는 등 신체 내부의 정직한 신호들을 느끼면서 무언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체득한다. J처럼 세상 물정에 밝고 사람들을 많이 대하는 직업을 가졌던 사람이 자신이 처한 정황을 짐작 못했을 리 없었다. J의 단순명료한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었을까. J의 곁을 가장 많이 지키던 맏딸에게 J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물어보았다. ”엄만, 바쁘고.. 힘들게 살아오셨어요. 그렇지만 원체 성격이 밝으세요. 잘 웃으셨고, 앞으로는 더 나아지겠지 하는 말을 늘 하셨어요.“ 어떤 역경에서도 낙천적이고 희망을 찾으려는 유전자를 타고 난 모양이었다. J의 나이에 비해서는 성장한 자녀들의 모습이 조금 위안이 되었다. 특히 맏딸은 J의 큰 눈과 사물을 강렬히 응시하는 듯한 눈빛까지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맏딸은 직장을 다니면서 저녁이나 주말에는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피곤할 텐데도 책을 늘 읽고 있었다. ”바쁘시죠? 쉴 시간이 없겠네요?“하고 내가 인사를 하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면서 ”괜찮아요“하고 친근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J가 건강하고 젊었을 때는 이러한 모습이었으리라는 짐작을 하면서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나의 역할은 생각보다 J의 삶이 짧고, 얼마 남지 않았다는 데 대해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것이었다. 의식이 깨끗하게 깨어있을 때 만나고 싶은 친지들에게 연락하라고 하고, 가족들도 J에게 못다 한 이야기가 없도록 대화를 많이 나눌 것을 권유하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J를 위해 창가로 침상을 옮겨주고,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도록 하였다. 다행히 병실이 병원의 가장 높은 층이라 탁 트인 전망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심해질 통증을 억제하기 위해 모르핀과 스테로이드를 주의깊게 늘려나갔다. 두 가지 주사약은 진통효과도 강력했고, 약을 맞는 환자들의 기분도 편하게 해주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어 다행이었다. 보통 환자들에게 거의 쓸 일이 없는 모르핀과 같은 마약은 숙달된 간호사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당시 병동 간호사들은 호스피스 입원환자들을 수없이 보는데 능숙해져서, 다량의 모르핀 주사도 침착하고 신속하게 수행해주었다. 나와 간호사, 자원봉사자는 J의 고통없는 임종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 한 팀으로 손발이 잘 맞았다.
J는 큰 고통없이 의식이 흐려지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하루 중 대부분을 침상에 고요히 누워 자는 모습이었다. 내가 예측했던 수명도 며칠 남지 않았다. 딸과 여자형제들은 일손을 놓고 J 곁에서 임종을 지키기 위해 모였다. J의 여자형제들도 J와 비슷비슷한 외모여서, 모여 있으니까 더욱 정다와보였다. 누가 보아도 한 가족임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첫 눈이 내리는 즈음이었다. J의 가족들은 소복소복 눈이 쌓여 동화 속 마을처럼 변해버린 창밖 풍경을 깊이 잠든 J에게 이야기해주었다. J는 눈을 뜨는 일도 거의 없었지만, 알아들었다는 듯이 때때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그런데 J의 살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의 예측보다 매우 강했던 것 같았다. 오늘 내일하는 상태로 J는 일 주일 가까이 지냈다. 나이가 젊을수록 암이 빨리 자라서 급격히 수명이 짧아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J는 그런 면에서 예외였다. 마지막을 지키려던 가족들은 흩어졌다 모였다 하면서 다소 초조해하고, 갑갑해했다. 나는 가족들에게 ‘J가 왜 이렇게 숨을 거두지 못하는 것 같으냐’고 물었다. 가족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J가 걱정을 많이 했었다면서 아마 그 걱정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J에게 ‘구체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지금 살고 있고, 앞으로는 어떠어떠하게 잘 살 것이니 염려말라‘는 이야기를 해주도록 당부했다. “언니, 우리 잘 살 테니 먼저 가 있어“하는 동생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도 변화없는 상태가 며칠 더 지속되었다. 꺼져가는 촛불이 스러지기 전에 환하게 타오르듯이, 큰 변화가 오기 전에 반짝 환자들이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 J가 며칠 안에 임종할 것은 분명했지만, 혹시 의식을 되찾고 유언을 남길까 싶어서 아침 회진 때 나는 J를 흔들어 깨우곤 했다.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아침 J가 눈을 떴다. 가는 목소리로 무언가 중얼거리는 듯 했다. 나는 몹시 반가와서 고개를 기울여 J의 입가에 귀를 가져갔다. ”다시 걸어야지...“ 그것이 J의 마지막 말이었다. 가족들과 나는 뭐라고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은 자신이 살던 모습대로 죽어간다고 한다. J의 삶에 대한 애착과 희망은 죽음 앞에서도 위협받지 않은 강렬한 것이었다. 호스피스의 목적 중 하나는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이다.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J... J는 자궁경부암 치료도 늦게 시작했듯이 호스피스 돌봄도 임종 3주전에야 받게 되었다. 이것은 J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오히려 대부분의 말기 암 환자들이 생의 마지막 한 달 이내에 호스피스를 처음 접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호스피스의 정의처럼 여생이 6개월 정도 남았을 때, 호스피스 돌봄을 받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기가 늦어지면, 신체적 정신적으로 기력이 저하되면서 생을 정리하고 죽음을 수용하는 여유를 갖기가 어렵다. 사람마다 특성이 달라서, 별다른 죽음에 대한 지식 없이도 담담하게 마지막을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 개월동안 호스피스를 받았지만 삶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호스피스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사람 중심의 의료이기 때문에 환자가 원하는 바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최대한 환자가 편안함을 느끼면 된다고 생각한다. J의 다시 걷고자 했던 바램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나는 J 앞에서 그 소망을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이후로, 나는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하게 여겼던 걷는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바램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첫댓글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글은 제가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하루하루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좋은 선물이란 생각을 하면서..
호스피스는 할때마다 다시 새롭게 그 길을 걸어 간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하루 하루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는말기 환자들을 누군가는 이 길을 거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호스피스활동이 저에게 주어진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말씀처럼 이러한 삶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좋은 선물이라는 생각으로. _()_
죽음의 순간까지 삶의 애착과 희망을 이야기 했던 J씨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가슴 뭉클하게 다가옵니다. 내가 죽음을 맞이했을때는 어떠할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좀더 아름답게, 좀더 준비된 죽음을 맞이하는 성숙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은글 감명깊게 읽고 갑니다. ^^*
서교수님 저는 솔직히 해깔립니다. 과연 죽을 때 "다시 걸어야지"란 말은 희망이 될 수도 있지만 집착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가족들의 경제적인 여건도 고려해서 이미 말기면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통증완화치료만 받으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어쩌면 모두를 위해 편안한 것이 아닌지요?
수상스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주위 분들을 위해 그리고 좀 더 자신의 고통스런 삶을 편안하게 맞이하기 위해 안락사를 하는 것이 어떤지요?
안락사는 안 될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을 무의미하게 연장시키거나 중단시킬 권리가 없습니다. 사실 J의 경우에는 '집착'이 맞지요.. 그런 사람도 있을 만큼 삶의 애착을 끊기란 쉽지 않습니다. 미리 준비하자는 뜻으로 쓴 글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따라 가는 것인데 이러한 것을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세상에 온것은 전생의 업으로 인해 온것이고 가는것 또한 전생에 업이 다해지면 가는것입니다. 전생에 업을 다하지 못하고 안락사를 한다든지 스스로 자살을 하는 것은
또다른 크나큰 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업을 다하지 못하고 인위적으로 가게 되면 언젠가는 그 나머지 업에 대한 과보를 다음생에 가서 반드시 받아야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인연법이고 인과법입니다.
그 누구도 그 사람에 대한 고통이나 업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은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임을 알게 해 주는 것이고 또한 이러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나의 업이 소멸되고 있는 것이라는것을 깨닫게 해 줌으로써 편안하게 임종을 맞을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가 하는 호스피스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오늘 오전에도 호스피스 회원이신 관음행보살님 모친이 암 말기 환자이신데 위독하시다고 해서 기도 하고 왔습니다. 이 보살님께도 이와같은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지금 많이 힘들고 고통스럽지요. 그러나 이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업이 소멸해가는 것이고 이 업이 소멸되어져야 비로소 이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게 해 줌으로써 보다 편안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이러한 생각을 한번쯤은 가지고 깊게 생각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머무나 고통스럽다든지 삶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 많으면 이러한 생각을 내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할 수 있도록해야되요.
불교적 관점에서 생과 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환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씩 다를것으로 보입니다. 필터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한때 많이 거론되었던 안락사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을 말씀하신듯 합니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스님의 말씀이 공감되고,환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필터님 생각도 공감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