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면(福壽面)
전라북도와 경계를 나누는 서쪽 대둔산 아래 동북쪽으로 여러 냇물이 흘러서 버드내로 합치고 그 합쳐지는 유역에 진산분지를 조성하고는 북쪽으로 그 방향을 바꾸어 복수면으로 들어서는 버드내는 줄곧 뱀처럼 꾸불꾸불 본격적으로 북행을 시작하교 그 흐름에 따라 다시 작은 냇물을 합류하면서 복수분지를 조성하는 좌우로 산악지대와 함께 복수면은 마치 선돌과 같은 모양으로 금산군의 서북쪽에 자리하게 된다. 복수면의 면적은 56.59㎢이다.
복수분지가 처음 조선되는 남쪽 곡남리는 버드내의 본류에 진산면 묵산리에서 발원한 냇물과 동쪽 복수면 용진리 정장리에서 발원한 냇물과 합류하는 지점이 되어 넓은 들이 조성되고 그 풍경이 주변의 산악지대와 함께 수려하여 옥계라고 부르기도 하나 사실상 옛날에는 큰 비가 올 대마다 범람이 잦았던 지역이다.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복수면 구례리 운곡마을 부근에는 삼한시대에 이미 취락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보이는 유적지가 발견됨에 따라 마한 때, 그러니까 청동기시대로 접어들기 이전 신석기시대부터 인류는 정착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또한 곡남리 부근에서도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간혹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인류의 정착은 수렵시대부터 정착한 곳으로 금산군에서도 상당히 빠른 지역으로 추정해보는 것이다.
백제 때는 농경시대로 접어든 촌락조성이 이미 조립화된 시대로 복수면은 진동현에 속한 지역이었다. 고려 때에도 그리 속해오다가 고려말기 공양왕 2년(1390)에 전라도 고산현감이 겸해서 다스리는 지역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 이태조의 태를 태조 2년(1393)에 만인산에 안봉하고 지진주사(知珍州事)의 고을로 승격함에 따라 옥계부에 속했다가 태종 12년(1412)부터는 진산군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현존하는 유적으로 천비산의 미륵사가 있고, 성터로 곡남리에 곡남농성과 구례리 구례농성이 있었을 뿐 비교적 인적이 드문 지역이 많았다. 길로는 금산으로 통하는 길과 추부로 통하는 길이 대로였으며, 또한 북쪽으로는 진잠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기부터 잦은 정변 및 사화로 피난 및 정착지를 찾아 여러 명문들이 분산될 대에 서서히 정착하기 시작하여 복수면의 본격적인 촌락구성은 곡남리를 제하고는 그 이후에 생성하게 된다. 수난으로는 고려말기와 조선시대 초기에 내륙지방으로 깊숙이 파고든 왜구의 침입으로 여러차례 곤욕을 겪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진산군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북면이라 하고 송현(松峴), 수심대(水心臺), 연흥(連興), 수영(壽永), 효동(孝洞), 학평(鶴坪), 중두문(中杜門), 상목소(上木巢), 하목소(下木巢), 도장(道長), 가왕(可旺), 개티(介峙), 분동(粉洞), 백암(白岩), 운곡(雲谷), 상리(上里), 창동(倉洞), 사동(寺洞), 선무(仙舞), 적귀(積貴), 장대(場垈), 신대(新垈), 발옥(發玉), 맹티(孟峙), 문암(文岩), 만산(晩山), 지량(芝良), 구만(九萬), 대정(大井)의 29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일남면의 지동(池洞), 용동(龍洞), 정보(正洑), 자라전(自羅田), 신촌(新村), 용진(龍津), 다복(多福), 월곡(月谷), 두만(斗滿), 곡남(谷南)의 10개 동리와 동면의 상마전리(上馬田里) 일부를 병합하여 일남면의 면소재지 다복리와 북면의 소재지인 수영리의 이름을 따서 복수면이라 하고 금산군에 편입되어 10개 리를 관할하다가 1972년에 용지리(龍池里)를 추부면에 편입시키고 현재는 9개 리를 관할하는 면이다.
한일합방 후 일본제국시대에는 독립투사와 연관된 가문들이 많이 자리한 지역으로 애국의 열기가 높았으며 3.1운동 때에는 진산장터에서 있었던 대한독립만세 집회에 많이 참가하여 그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 많으며 8.15광복 전에는 애국지사들의 은닉처였던 지역이다. 6.25동란 때에는 9.28수복 후 패주하는 공산군과 지방 공산당분자들이 게릴라전을 목적으로 대둔산에 그 근거지를 두고 암약하던 중 1950년 11월 4일 새벽 3시에는 비가 내리는 틈을 타고 무장공비 40명과 비무장공비 50여명, 도합 90여명이 복수경찰지서를 습격하여 민화식 순경이 교전 끝에 전사하고 복수경찰지서가 전소하는 수난을 겪었으며, 1951년 6월 15일에는 복수면 목소리와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경계의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민가를 괴롭히던 30여명을 포착하고 교전 끝에 사살 6명, 생포 1명의 전과를 올리며 패주시키고 1951년 8월 10일에는 수영리에 공비가 출몰하였으므로 3명을 사살하고 도주시켰으며 그 전에도 목소리 가랑이 뒷산에서 준동중인 대전시당 빨치산 30여명을 포착하고 교전 끝에 사살 5명, 생포 5명의 전과를 올리는 등 복수면에서도 수복 후 공비로 인한 피해가 많았으나 경찰과 소방대 및 향토방위대의 끈질긴 향토방위로 안전을 찾게 되었다. 대둔산과 인접한 거리에 있으므로 공비에 의한 피해가 많았다.
동쪽으로는 추부면과, 남쪽으로는 금성면, 진산면과, 그리고 서쪽으로는 진산면과 대전광역시 서구와, 북쪽으로는 대전광역시 중구와 경계를 이룬 지역에 복수면은 위치한다.
타원 모양의 복수면 지역을 형성하는 산세흐름을 크게 두 줄기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월봉산→금성산→만인산→표대봉→천비산→안산을 이루는 동북쪽 맥세가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대산→대둔산→오대산→깃대봉→매봉산→안평산→조중봉산→명막산으로 이어지는 서북쪽 산세가 그것이다. 그리고 유등천을 중심으로 양안에 형성된 복수면의 물줄기를 보면 모두 유등천의 지류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곡남리(월봉산계. 금성산계. 인대산계의 물이 합수)와 구례리(유등천과 대둔산. 오대산계의 물이 합수)는 유등천을 형성하는 주요한 지역으로서, 이곳에 이르러서야 유등천은 그 모습을 갖추게 되고 계속해서 대전광역시를 관통하여 갑천을 거쳐 신탄진의 금강으로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