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산 사자빈신사터
선재동자가 천하 떠돌며 찾아나선
사자빈신 비구니 머문 곳이 이곳이런가
숲이 그리웠고 바다가 보고 싶었다. 때때로 불쑥 솟아나는 그런 생각들을 다스릴 재간이 없으니 생각이 일어나기가 무섭게 길 위로 나섰다. 홍천을 지나며 복잡한 길에서 벗어나 자동차가 흔치 않은 곳으로 들어섰다. 멀리 에둘러가는 것이긴 하지만 구태여 빨리 닿아야 할 까닭이 없으니 넌지시 투한삼매(透閒三昧)에 들고 싶었던 것이다.
들머리의 산골마을을 지나자 과연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그리웠던 그의 모습뿐이었다. 자동차를 세워 두고 제멋대로 어우러진 풀숲을 지나 큰나무에게 기댔다. 간혹 두터운 구름사이로 비친 햇살을 받은 야들야들한 나뭇잎이며 풀들의 매혹적인 자태에 흠씬 젖었다가 어론에서 상남, 다시 귀둔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은비령(隱秘嶺)을 넘었다. 양양으로 내려가는 길에 잊지 못해 찾아 든 미천골 선림원터, 그에게로 가는 길은 여전히 바람과 물소리의 협주가 아름다웠다. 바다를 곁으로 두고 들어선 산, 둔전리 진전사터 또한 숲의 향연이 벌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53명의 선지식을 찾아나섰다. 25번째로 만난 일광동산의 사자빈신 비구니…
나 또한 선재동자처럼 절터 석탑주위를 오른쪽으로 한량없이 돌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나는 부처님도 찾지 않았고 역사나 미술사의 고민도 하지 않았으며 그저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때로 절터에로의 나들이는 그렇듯 그 장소만을 빌릴 때도 있다. 밤새 설악산의 숲과 속초의 바다 향기를 한껏 머금은 채 돌아오는 길, 멀리 월악산 아래 사자빈신사터(獅子頻迅寺址)로 향했다. 나에게 그곳이 그랬다.
오래전부터 어느 맑은 가을날이면 잊지 않고 그곳을 찾아 바람소리를 듣거나, 절터 앞을 흘러 송계계곡으로 가는 계류의 너럭바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버릇처럼 반복되던 그것을 두고 투한삼매라 불렀고 그곳에 절터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이 조차 드물었으니 삼매에 들기는 더할 나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과 함께 나선 답사 길에도 마찬가지였다. 손바닥만한 단출한 절터, 설명이 끝나고 나면 답사객들은 채 10분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재촉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한 시간이나 머물라고 했으며 그때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마뜩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했다.
그들은 모두 보는 것에 익숙할 뿐 머무는 것에는 인색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아닌 남을 보는 것에 익숙할 뿐 자신을 보는 방법은 서툴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늘은 투한삼매에 젖어들기는 글렀다.
절터에 다다르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 덕에 더욱 한적하긴 했지만 계곡의 물은 시시각각 불어났으며 물 속으로 돌 구르는 소리조차 성난 듯이 그르렁거렸다.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의 곁을 떠나 보현보살을 만날 때까지 천하를 떠돌며 53명의 선지식을 찾은 까닭은 법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승낙국 묘봉(妙峯)에 머물던 덕운비구(德雲比丘)를 시작으로 25번째 만난 이가 수나국의 가능가(迦陵迦) 숲에 살고 있던 사자빈신비구니(師子頻申比丘尼)였다. 그가 머무는 일광(日光)동산은 온갖 성스러운 나무들과 꽃으로 장엄되어 있었으며 나무아래에는 갖가지 사자좌(獅子座)가 놓여 있었다.
모두 여섯의 사자좌가 놓인 그곳의 어떤 나무 아래는 비로자나 마니왕장(摩尼王莊) 사자좌, 또 다른 나무 아래는 시방(十方) 비로자나 마니왕장 사자좌가 있었으며 그 자리는 온갖 보배로운 것들로 한량없는 장엄을 갖추고 있었다. 사자빈신비구니는 그 사자좌마다 두루 앉아 있었으며 선재동자는 그의 주위를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선지식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었으며 그가 돌자 동산의 모든 나무들 또한 같이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생각이 이쯤 미치면 누군들 절터에 홀로 서 있는 탑을 돌지 않으리오. 비록 너덧 개의 지붕돌도 잃어버리고 기우뚱 기울긴 했지만 그 자태만큼은 아름답기 그지없지 않은가. 나 또한 선재동자처럼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뿐 그 자리에 그대로였지만 대신 빗줄기가 따라 돌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든 그것들이 한결같이 나와 함께 탑을 돌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나 돌았을까. 바람에 날린 빗줄기는 온몸을 흠씬 적셔 놓았고 순간, 우산도 놓칠 만큼 센 바람이 덮쳤다. 휘청거리는가 싶다가 아예 멈춰 섰다. 한량없이 백 천만번을 돌던 선재동자가 사자빈신비구니 앞에 합장하고 섰다. 그리곤 진실로 법을 구했다. 그러자 사자빈신비구니는 말한다.
나는 온갖 지혜를 성취하는 해탈을 얻었으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삼매왕(三昧王)을 얻어 삼매에 젖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또 말한다. “선남자여, 나는 모든 중생을 보아도 중생이란 분별을 내지 않았으니, 지혜의 눈으로 보는 연고니라. 모든 말을 들어도 말이란 분별을 내지 않으니 마음에 집착이 없는 연고니라. 모든 여래를 뵈어도 여래라는 분별을 내지 않으니 법의 몸을 통달한 연고니라. 모든 법륜을 머물러 가지면서도 법륜이란 분별을 내지 않으니 법의 성품을 깨달은 연고니라. 한 생각에 모든 법을 두루 알면서도 모든 법이란 분별을 내지 않으니 법이 환술과 같음을 아는 연고니라.”라고 말이다.
내가 이곳에 올 때 마다 투한삼매를 즐긴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누구의 눈에는 한낱 게을러 보이기까지 했을 그것이었을지언정 나에게는 절실한 몸짓이었다. 비록 투한이라고는 하지만 그 순간에라도 삼매에 들지 못하면 일상은 그 마저도 나를 돌아보는 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니 비록 녹록치 않은 일이긴 하지만 애를 썼던 것이다. 이렇듯 떠돌아다니는 것이 상행삼매(常行三昧)이려니 하지만 그것은 위안일 뿐 아니던가.
반행반좌(半行半坐)하거나 비행비좌(非行非坐)로는 아직 마음자리 들여다보는 일이 수월치 않다. 그나마 자리를 잡고 앉아야지만 그래도 그 언저리나마 가 닿을 수 있으니 그 순간만큼은 세상 그 어떤 것도 나의 집중된 주의(注意)를 흔들지 못했다. 그 순간이 1분이어도 좋았고 너덧 시간 이어도 상관없었다. 다만 주의의 강도가 중요한 것일 뿐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그것이 강화되지는 않았다.
온갖 탐욕에 젖어 허튼 짓을 일삼고 이기심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종래는 스스로를 탓하는 것조차 망각하고 말았던 내가 아니던가.
또한 내가 그렇게 된 것은 오로지 다른 사람들과 세상 탓으로 떠넘길 뿐 내 탓이 아니라고 오만을 떨던 내가 아니던가.
나에게 상처가 날 것이 두려워 남에게 먼저 상처를 주곤 짐짓 모른 체하기 일쑤였지만 그것이 곧 나의 상처로 되돌아오리라는 것을 미루어 헤아리지 못하던 아둔한 나였다.
그토록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만신창이가 되어 이곳을 찾아 길을 구하고 나를 강화시켰건만 그것이 헛된 구두삼매(口頭三昧)가 되고만 적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길 위에서 다시 깜깜한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부지기수, 놓쳐버린 길을 찾아 이곳으로 깃들면 절터는 나를 내치지 않고 거두어 주었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적요의 공간을 내 놓곤 한껏 머물다 가라고 했으니 그 아니 고마운 일인가.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삼매에 드는 것, 그것뿐이었다.
문득 고개 들어 절터를 바라본다. 이곳이 바로 사자빈신비구니가 머물던 가능가 숲의 일광동산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머리에 탑을 이고 있는 네 마리 사자가 가능가 숲에 있던 사자좌였으며 그 안에 앉아계신 비로자나불이 마치 비로자나마니왕장사자좌에 앉아 계신 사자빈신비구니로 여겨지는 것은 나의 착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착각을 바로잡을 생각이 없다. 그는 갈길 잃고 헤매던 시절 내가 잊고 있던 길을 일러 준 선지식이었으니 선재동자가 만난 사자빈신비구니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그에게서 길을 구했으며 삼매로 허튼 망념을 다스리고 분별심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우쳤으니 무릎 꿇고 엎드려 삼천 배를 올린들 그 감사함에 털끝만치라도 다가 설 수 있겠는가.
비는 잦아들었다. 구름은 속절없이 비껴가고 드문드문 먼 산에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속진으로 가득 찼던 한 세상이 비에 씻기고 맑디맑은 또 한 세상이 이어진 것이다. 세존이 사자빈신삼매에 들었을 때가 이와 같았을까.
〈화엄경〉 입법계품에 석가세존이 사자빈신삼매에 들자 모든 세간(世間)이 깨끗하게 장엄되었다고 했으며 서다림(逝多林) 위 하늘과 시방세계의 허공이 보배구름으로 장엄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절터를 떠나 잠시 걸었다. 송계계곡의 불어난 물이 마치 사자의 위엄을 갖춘 포효처럼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물보라에 몸이 젖은들 어떨까. 지긋한 눈길로 그 모양을 바라보다 이제 더 이상 상처를 안고 이곳을 찾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흘려보냈다. 그것은 내가 길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며 편협하지 않은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그윽하며 따뜻하게 바라 볼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일 테니 말이다.
월악산 사자빈신사터/
보물 94호 석탑 중대석에 새긴 명문엔
절터 이름과 탑의 역사와 규모 기록…
월악산 자락에 있는 사자빈사터의 주소는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이다. 그렇지만 월악산 국립공원 안에 있기에 충주로 가는 편이 수월하다. 영동고속도로 여주휴게소를 지나 중부내룩고속도로로 들어서서 괴산 나들목으로 나가면 이내 수안보이고 그곳에서 10분이면 월악산국립공원에 닿는다. 영동고속도로 이천 나들목으로 나가 장호원을 거쳐 충주-수안보를 지나는 3번 국도를 택해 월악산국립공원으로 들어서도 된다. 지난 호에 소개된 미륵대원터에 들렸다면 그곳에서 송계계곡을 따라 5km쯤 내려가 닷돈재를 넘으면 왼쪽으로 골미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로 접어들어 200m 남짓이면 오른쪽 위에 절터가 있다.
사자빈신사터는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또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절터에 남아 있는 탑으로 미루어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짐작 할 뿐이다. 보물 94호이기도 한 석탑은 4층의 지붕돌을 지니고 있어 특이하다.
나라 안에 그 어떤 탑이라도 짝수인 층을 지닌 것은 없기 때문이다. 대개 그런 탑을 만나면 지붕돌을 잃어버린 까닭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이 탑 또한 본디는 9층이었지만 지붕돌 다섯 개를 잃어버려 4층이 된 것이다. 지금도 날렵해 보이지만 그 층이 모두 있었더라면 그 앞에서 입을 벌리지 않고는 대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풍겼으리라 짐작된다.
기단석의 안상 안에 꽃을 새긴 것이며 1층에서 2층으로 가면서 몸돌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고려시대 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또 상층 기단은 사자 네 마리로 하여금 탑신을 받치게 만들었다. 그 안에는 머리에 두건을 쓴 비로자나불을 모셨으며 가까이 다가가서 비로자나불의 머리 위를 보면 갑석의 아랫면에 마치 닫집처럼 연꽃을 새겨 장엄했다. 또 갑석 윗면 가장자리로는 16장의 연꽃잎을 새겼다. 이렇듯 사자 네 마리가 탑신을 받치고 있는 탑은 나라 안에 몇 기 없어 눈길을 끄는데 지리산 화엄사의 각황전 뒤에 있는 국보 35호인 사사자석탑과, 홍천 괘석리에 있는 보물 50호인 사사자3층석탑도 눈여겨 볼만 하다.
그러나 사자빈사터의 탑이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탑 아래 중대석에 새겨진 명문 탓이다. 모두 79자이며 그것을 통해 절터의 이름과 1022년 고려 현종 13년에 탑이 세워진 것 그리고 그 층수와 경위를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제자 고려국 중주(中州) 월악산 사자빈신사의 동량은 삼가 받듭니다. 대대로 성왕께서 항상 만세를 누리시고, 천하가 태평해지고, 법륜이 항시 전해져서, 이 지역 저 지방에서 영원히 원적(怨敵)이 소멸된 이후 우연히 사바세계에 태어나서, 이미 화장미생(花藏迷生)을 알았으니, 곧 정각을 깨우칩니다. 삼가 공손히 9층 석탑 1좌를 조성하여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합니다. 태평(太平) 2년 4월 일에 삼가 기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