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사이펀신인상(하반기)|정이원
울(鬱) 외 4편
가슴 아래 어디쯤
구렁이 한 마리 세 들어 산다
월세 한 푼 없이
오래전 비집고 들어찬 그놈
알면서 떨어뜨린 말 못다 뱉고 구겨진 표정
까놓지 못해 바랜 마음 시커멓게 반복한 이름들
그놈 뱃속에 끝없이 욱여넣는다
밀린 세 받을 날 까마득하고
그놈 똬리 어쩌다 풀리면
자주 철렁한다
숨구멍 땀구멍 온갖 틈으로
밤새 들락거리는 그놈
혓바닥
내가 게워낸 것들이
놈의 뱃속에 칭칭 부푼다
다시 똬리 틀 때까지
미끄덩한 진물 냄새 흠씬하다
그놈 방은 빠지지도 않는다
시간이 약인 건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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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알라멘
나에게 신이 있다면 그건
미워하지 않는 거예요
싫어하지 않고 사는 거예요
미워도 미워하지 않고
얼마든지 부둥켜안을 수 있다고
잘도 말하는 이 세상이
참, 참 그런 거예요
마치 보이지 않아
진짜로 볼 수 없는 신 같은 거예요
싫어한다고 미워한다고 내놓고 살아도
아무 설명이 필요 없는 세상이 온다면
오, 나무아미알라멘
사람들이 물으면 답하지요
나는
사회부적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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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기능
언젠가는 다 쪼개진다
이 커다란 지구마저도
저 넓은 우주에서는
시한부 모래 알갱이 아니던가
작은 암세포 하나도 끝까지 찾아내고
세상에 없던 물질도 프린터로 찍어 만지는 시대
온종일 시달리는 마음 같은 건
낱낱이 쪼갤 방법이 없다
마음 같은 건
초미세플라스틱이나 되어
혈관 깊숙이 숨어버리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장마가 오기 직전의 여름 하늘
쇠갑옷도 녹여버릴 듯한 뜨거운 햇살 아래
온몸을 내놓을 수밖에
혈관 벽에 엉겨 붙은 마음의 실체를
질겅질겅 씹어버리는 태양불
나는 한여름 장대비처럼 갈라지며
불덩이를 마주한다
한때 중요했던 것들을 난데없이 집어삼키는
무심한 태양 속으로
가볍게 나뒹굴며 쏟아져 내린다
스멀스멀 기어 나온 마음 쪼가리들이
끝끝내 만져진다
쪼개지고 타오르다 파스락
비로소 사그라든다
마지막 껍데기를 잃은
지구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여름의 기능이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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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메기가 있던 저녁
- 남쪽시편 1
급히 구해 들어간 어느 셋방 여든두 살 할매랑 나란히 살았다 기역 자로 꼬부라져 제일 작은 복대조차 헐렁거리는 깡마른 허리로 피둥피둥 베짱이 놀음 나보다 몇 곱절 바지런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 들어왔는가 샐쭉하더니 아픈 고양이 둘 데리고 이냥저냥 왔다는 말에 쏙만 디비지게 문디 뭐할라꼬 혀를 차다가 이 물건 저 물건 뭉툭하니 건네는 메마른 손
해만 넘어가면 속속 불 꺼지는 읍내 어슬렁거리다 끼이익 대문을 열면 혼내는지 걱정하는지 헛갈리는 말들이 셋방 벽을 타고 넘어 초봄의 으실한 몸 금세 후끈해진다
국거리에 반찬거리 좀 나누었더니 조용히 옆방으로 부르는 할매 별것 없이 맑은 국물에 희끄죽죽 물렁한 고깃덩이 둥둥 떠다니고 한참을 망설이다 삼킨 한 숟가락, 까슬까슬 숭숭하니 암것도 모르는 외지인 입속에 남쪽 바다를 한 그릇 붙들어 통째로 들이미는 미끄덩한 염려 같은 것, 다 드러낸 속 한 그릇 비워보지 않고는 모를 어느 뜨거운 말 한마디 같은 것
몇 날 며칠 빨랫줄에 걸린 채 마르던 정체 모를 커다란 바닷고기가 한껏 못난 얼굴로 그날 저녁 한 사람을 울린다 초봄만 되면 자꾸 떠오르는 그 할매 물메기탕 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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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쓰기
흰 종이 차락 펼쳐지는 걸 보니
비가 내리는 게지
쏴아 쏴아
내려앉는 자음과 모음
공명강을 지나 바닥으로
다시 하늘 위로
쏟아지고 솟아나는
아직 투명한
날 글자들
모양을 본뜬다고
소리를 그린다고
하나에 하나를 나란히 더해
새로운 이름 될 때까지
이 비 모으고
저 비 고르며
몸통 가른 자리 뱃길을 긋고
뛰쳐나가 노부터 젓는
깡마른 날보다 받아쓰기 좋은
그런 날인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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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펀 신인상 당선 소감 - 정이원
누군가에게 짧은 문장으로 가닿는 경험
한밤중 깨어나 바라본 달무리 속 말간 당신의 얼굴
흙먼지 아래 뒤덮인 반짝이던 이름들
낡은 골목을 헤매다 우두커니
멈춘 날의 민들레
어머니의 야윈 뺨과
식어버린 밥상 위의 짧은 편지 한 통
아픈 고양이의 메마른 콧잔등 얕고 단단한 심장 소리
두 번 돌아보지 않던 너의 그 발걸음
단추가 떨어지고 다 해져도 버리지 못하는 짙은 잿빛 남방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말할 수 없는 비밀
언젠가 쓰여질 모든
아직은 이름 없는 이야기들
재능이 없다는 무심한 말에 스스로 시달리던 긴긴날도, 느닷없는 난독증에 허우적거리던 십여 년 한때 속에서도, 어슴푸레 무언가 피어오르긴 했을 거라고, 조금씩 밑동 갈라지며 자라난 것들이 모여 아주 작은 생 하나는 틔웠을지도 모른다고, 처음으로 깊은숨을 내쉬며 지나온 길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래오래 겉돌다가 툭 넘어져 조난된 나를 누군가가 잊지 않고 등불처럼 찾아와 준 것만 같았어요. 스무 살 언저리에서 시작된 시와 바로 어제 쓴 시의 목록이 우연처럼 나란히 놓인 10월의 어떤 날이었고, 낯선 일을 저지른 마냥 얼떨떨한 순간, 내 손을 떠난 시어의 조각들이 누군가에게 짧은 문장으로나마 진짜 가닿는 경험이란, 생각보다 큰 파문이었습니다.
어둡고 작고 슬픈 것들을 찾아 발끝 아래로만 머물던 눈길을 잠시 멈추고 문득 바로 앞을 바라보고 싶었는데요. 반짝이는 눈빛으로 마음을 다해 웃어주는 이들이 분명한 얼굴로 거기 있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움을 뽐낸다고 해도 세상이란 온통 미심쩍은 판이었으므로, 쭈뼛거리며 어렵게 뻗어보는 두 손이 무색할 만큼의 환대가 돌아오는 일은 그저 놀라운 것이었고. 어쩌면 나는 가느다란 실눈으로만 살아가며 한참을 오해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라앉히기 바빴던 말랑한 감정들이 비로소 울컥 차올랐습니다.
곧잘 웃고 미안함과 고마움을 기꺼이 뱉으며 스스럼없이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을 보면 참 부러웠다고, 이제야 털어놓습니다. 아직 세상이 너무 무겁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으니 오래도록 눌러온 어제와 오늘이 무의미한 건 아니겠지만, 늘 몇 발짝 더 힘을 들여서 부러 멀어진 채 정말로 솔직한 마음은 오로지 글 속에서만 뱉어낼 뿐이었지요.
아무리 다시 써도 다음 날이면 또 텅 빈 곳이 눈에 띄는 미완의 시를 깊은 물 밑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건져 올려 주신 사이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맙습니다. 2017년 귀촌 때부터 한 해 두 해 같은 시간을 쌓으며 진짜 친구가 되어준 남해의 이름들과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준 ‘시섬’ 동인 여러분, 언제나 따뜻한 송인필 선생님과 남해도서관 분들 그리고 내 첫 동굴이자 애틋한 아지트 ‘시심’에게도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시를 쓸 때마다 가장 먼저 보여주면 머리를 긁적이거나 딴소리로 눙치며 도망가는 귀여운 벗 손창우에게, 수도권 북서부 끝과 경남 남서부 끝으로 뚝 떨어져 자주 보지 못해 그립기만 한 가족들에게 남쪽 바다처럼 은근한 사랑을 보냅니다.
끝으로, 머리맡에 두고 만지작거린 지 몇 년째인 어느 초고草稿의 주인, 우연님의 쾌유와 평안을 빕니다. 당신의 손을 잡고 시를 완성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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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원 ewon0311@daum.net
-1979년 경기 광명 출생. 본명 정보름
-‘시심’, ‘시섬’ 동인
-1인 출판사 ‘남해오늘’ 대표 / 프리랜서 편집디자이너 / 타로 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