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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제49차 백두대간 출진 구간은 백두대간의 남한구간을 마무리하는 휘날레 산행으로 미시령-상봉-신선봉-대간령-마산봉-진부령이다. 대간거리는 15.6km이고 산행 소요시간은 10시간, 참여대원은 26명이었다.
오늘로써 지난 2009년 3월 14일 여원제에서 출발한 백두대간 산행이 남한구간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그간 4년 6개월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번도 빠지지 않고 뚜벅 뚜벅 걷다보니 어느새 백두대간완주의 대장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 동안의 개인적인 소회는 에필로그로 미루고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종주 일지를 적는다.
뒤늦게 대간 총무의 중책을 맞게 되어 마무리 산행 및 종산제 준비에 대한 중압감이 밀려왔다. 업친데 겹친다고 9월9일자로 직장의 대대적인 조직개편으로 기존의 모든 것들이 변하여 하루 아침에 새로운 과로 옮기게 되어 몸과 마음이 붕떠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두대간 휘날레가 너무도 소중하기에 정신을 차리고 하나 둘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우선 참가 회원 확보를 위해 2주 전에 공지를 하니 35명 정도가 참여 의사를 표시하였다. 종산제 준비를 위하여 시루떡과 머리고기, 각종 과일 등 제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예약하고, 대원들의 아침은 수통골 입구의 명품 김밥과 점심은 창억떡집의 답례떡과 수정과로 준비하였다. 백두대간 완주 현수막의 시안을 제작업체에 보내서 수차례의 교정을 거쳐 전체용과 완주자용 2개를 멋지게 완성하였다. 5년여 동안의 대미 장식의 의미를 되새기려 기념품은 죽섬유로 만든 타올로 준비하였다. 마침 타올업체가 예전 중기청에 있을 때 벤처기업 선정시 도움을 주었던 업체였는데, 나를 아직도 잊지 않고 기억을 해 주어서 좋은 제품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또한, 전구간 완주자를 위한 완주증과 완주를 몇 번 남겨둔 아쉬운 종주자를 위한 종주증은 칼라로 만들어 코팅하고 상장 케이스에 넣었다. 종산제를 위한 과일, 초, 향 등 제상 음식은 조남균총무가 시장을 봐 주었다. 그간의 백두대간 경과와 종산제 시나리오, 축문 등도 작성하여 이제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출발만 기다리고 있었다.
13일 저녁 9시 40분경 모든 마지막 산행 준비물들을 리무진 버스에 싣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쏫아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왜이리 일기예보가 잘 맞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모든 것이 다 준비 되었으니 하늘에 맞기는 수 밖에! 폭우 예보 때문에 온다고 했던 대원 몇 명은 민폐를 끼치기 싫다고 중도 하차를 하기도 하였다. 출발시간인 10시 조금 지나 버스에 오르는 대원들은 우비를 입고 비를 맞으며 왔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지만 예정된 26명이 채워져 리무진 버스는 빗속을 뚫고 미시령을 향하여 달렸다. 달리는 중간에 하늘에선 우르릉쾅쾅 천둥소리와 번쩍번쩍 번개가 치며 빗줄기가 더욱 거세게 유리창을 때려 우중 산행 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하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무탈하게 온 것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만 어여삐 봐 달라고 모든 신들께 기도하며 빌고 또 빌었다. 어제 당직을 해 잠을 못 자서 하릴없이 내리는 빗소리를 듣다가 스르르 눈이 감겨 깜박 졸다 눈을 떴는데 버스는 어느새 강원도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간절한 기도발이 먹혔는지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미시령에 도착할 쯤에는 비가 그쳐 내리지 않았다.
드디어, 14일 새벽 2시 30분경 통제구간이라서 미시령 정상 100m전에 버스는 라이트를 끄고 조심스럽게 길가에 정차한 후 대원들 모두가 등반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북쪽 들머리로 다가가려는데, 정체 불명의 승용차가 미시령 정상 부근에 세워져 있어서 척후병으로 이해평, 김천희 대장이 먼저 나가서 동태를 살핀 후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출발신호를 보내왔다. 미시령~대간령이 통제구간이라 철책으로 막혀 있어 하는 수 없이 철책을 뛰어 넘어 능선으로 올라서니 설악산의 시원하고 세찬 바람이 온몸을 감싸 안아 잠이 덜 깨서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간 산행의 묘미는 랜턴 불빛만 따라 앞으로 전진만 하니까 힘이 덜 들고 뜨거운 햇살을 피하여 시원하게 산행하는 장점이 있다. 덤으로 하늘 가득 쏫아지는 별빛은 어렸을적 시골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어서 세던 별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오늘은 달도 별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랜턴 불빛을 동무 삼아 한발 한발 나아갔다. 3시 25분경 전진만 하고 있는데 등산로 옆 나무에 길쭉한 모양으로 털이 무수히 박혀 있는 버섯이 신기하게 붙어 있었다. 누군가가 노루궁뎅이 버섯이라고 알려주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것이라 따서 가져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용도도 알 수 없고 먹는 방법도 몰라 눈으로 본것으로 만족하고 인증샷만 찍고 그냥 지나쳤다.
4시경 너덜바위 지대를 지나니 헬기장이 나왔다. 헬기장 위쪽 바위에는 커다란 태극기가 매어져 있어서 일단 인증샷부터 찍고 다시 헬기장을 내려와서 전체 대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타는 갈증을 막걸리 한잔씩하며 풀었다. 헬기장에서 오늘 출진한 전체 대원들이 단체 인증샷을 찍고 다시 출발을 하는데, 길옆으로 군인들 장비인 듯한 것들이 있었다. 이곳이 예전 육이오 때 전투지역으로 국군 유해 발굴을 한 장소가 아닌가 미루어 짐작해 보았다.
4시30분 오늘의 첫번째 봉우리인 상봉(1244m) 정상에 올랐다. 상봉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니 속초 시내 야경이 반짝 반짝 빛났다. 상봉 정상의 기쁨도 잠시 뒤로 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는데, 이번에는 급격한 암릉의 내리막길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통제구간이라서 밧줄도 없어 오직 손가락으로 바위 틈새를 움켜잡고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내려갔다. 암릉 구간이 연속 이어져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 조심 긴장하며 스릴을 만끽하였다.
6시경 마침내 동이 트기 시작하여 어둠이 걷히었다. 랜턴을 끄니 발걸음도 한결 가볍고 신바람이 절로 났다. 사뿐 사뿐 가벼운 걸음으로 신선봉 갈림길에 도착했는데, 일부 대원들은 그냥 직진해서 지나쳐 갔지만 나와 이상철수석총무, 오영덕대장, 유준과장, 복진요, 박종철총무 등은 신선봉(1214m) 정상에 올랐다. 여명이 트는 신선봉 정상에서의 아름다운 조망은 새벽부터 달려온 모든 피로를 한방에 날려줄 만큼 환상적이었다.
신선봉을 정점으로 다시 1시간 30분 정도 내리막길을 내려와 7시40분경 대간령(큰새이령)에 도착하였다. 이곳의 유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파령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대간령, 새이령, 샛령이라고도 부르고, 지리산을 출발하여 신선봉과 마산봉을 연결하는 백두대간의 일부이며 핵심보호구간이란다. 대간령에서 맛난 아침식사와 막걸리도 한잔씩하며 오랜만에 편하게 휴식을 취하였다. 휴식 후에는 이해평대장, 이상철수석총무, 나 셋이서 백두대간 완주 플랭카드를 펼치고 서로 서로 돌아가며 인증샷을 찍으며 뿌듯해 하였다.
대간령에서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 너덜지대를 지나니 세찬 바람에 몸이 날아갈 듯 하였다. 8시 40분경 암봉(890m)을 찍고 다시 내리막과 오르막길을 지나는데 큰나무 밑이나 등반로 옆에 작은 탑들을 쌓아 놓은 것이 이색적이었다. 등반하기도 바쁠텐데 하나 하나 돌들을 모아서 탑을 쌓은 정성이 갸륵하고 이러한 것들이 모아지면 이 길이 언젠가는 돌탑길이 되지 않을까 상상해 보았다.
9시 30분 바람이 휘몰아치는 병풍바위에 오르니 주변 산하가 다 내려다 보이는 멋진 조망으로 바람에 운무가 춤을 추듯 순식간에 능선이 운무에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병풍바위를 지나면서 하늘에선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빗줄기는 그리 세지 않아서 걷기에 큰 지장은 없었다. 나는 우의는 입지 않고 작은 우산으로 머리와 카메라만 가리고 걸었다.
10시!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이자 하일라이트인 마산봉(1052m) 정상에 올랐다. 마산봉 정상 표지석을 번쩍 들고 호기도 부리고, 이해평대장님과 다시 백두대간 완주 플랭카드를 펼쳐 들고 백두대간 완주 만세를 외쳤다. 이상철수석총무님은 우리보다 앞서 갔는지 아무리 불러도, 기다려도 오지 않아 완주자 셋이서 함께 마산봉우리에서 인증샷을 남기지 못하여 아쉬웠다.
마산봉에서 하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워낙에 급경사라서 발을 땅에서 떼기가 무섭게 저절로 앞으로 내달렸다. 10시 40분경 알프스리조트가 보이고 알프스 스키장 그물망에 백두대간 표찰들이 널부러진 곳을 지나고 리프트를 통과해서 콘도 주차장옆 포장도로에 도착하였다. 이제 남은 구간은 흘리마을을 지나고, 마을 뒷길과 시멘트도로를 거쳐 산길이 아닌 일반길을 따라 가야만 했다. 11시40분경 흘리마을 입구에 지하수가 있어 우리 대원들 모두 웃통을 벗고 등목과 머리, 얼굴을 씻으며 하루 종일 찌든 땀을 닦았다. 이곳은 상추와 피망 제배를 많이 하는 듯 썩어 버려진 피망들이 곳곳에 널부러져 있었다. 임도와 숲길, 시멘트길을 따라 마침내 12시30분 백두대간 종주 기념 공원에 도착하니, 이곳은 그동안 백두대간 종주한 사람들이 완주를 기념하여 표지석 세워 놓았다. 표지석 중에 '기필코 백두산 병사봉까지 이어가리!'라고 새겨진 말이 가슴에 닿았다. 남북한이 통일이 되는 그날! 대간길이 다시 열리면 북녘땅으로 이어가서 백두산 정상에서 만세를 부를 날을 꿈꿔본다.
1시40분경 오늘도 불굴의 투지로 완주한 조용환전원장님의 마지막 후미팀이 진부령 표지석에 도착한 후에 종산제를 시작하였다. 종산제는 백두대간 진부령 표지석 아래에 정성스럽게 준비한 제물들을 진설하고, 지난 4년 6개월동안 안전산행하게 해준 산신령께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 종산제는 이상철수석총무의 그 간의 경과보고를 시작으로 종산제 순서에 맞추어 1시간 정도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종산제를 마치고 백두대간 완주자인 이해평대장, 이상철수석총무, 민인규총무에 대한 완주증 수여와 10회 이상 참여자에 대한 종주증 수여를 하였다. 종산제 마지막은 참여한 대원 모두가 이태근 회장님이 선창으로 외친 "백두대간 만세! 백두대간 만세!! 백두대간 만만세!!!"을 따라 웅렁찬 함성으로 마무리 하였다.
오늘로서 지난 4년6개월간 뚜벅 뚜벅 걸어온 백두대간 종주를 졸업하게 되었다. 올해 완주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난 8월에 가족과 함께 백두산 정상도 미리 찍고 왔다. 그 동안 종주산행 내내 멋진 동료들과 즐겁고 행복하게 동행한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졸업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우리 인연!!! 이제 다시 시월부터 시작하는 '찾아가는 100대 명산'에서 멋진 산꾼으로 다시 만나요~~~Bar Bar Bar~~~ sing sing sing~~!!!
<참고1> 대간령의 유래
인제군 북면 용대리와 간성읍 토성면 도원리를 이어주던 길로 1970년대까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대간령보다는 샛령으로 부르는 원주민들에 의하면 고갯마루(샛령)에는 산신각과 원터(주막)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아직도 고갯마루에서는 돌담과 집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에는 “석파령(石波嶺)”또는 “소파령(所坡嶺)”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현대지도는 대간령(大間嶺) 또는 “새이령”으로 적고 있다.(석파령은 신선봉의 너널지대에 온 이름으로 보인다) 여러 지명으로 불리는 이 고개는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 있는 고개란 뜻에서 "사이령"이 되었고 사이령이 변음되어 새이령-샛령으로 불렸으나, 이두문화 하면서 사이(間)자를 사용하여 "間嶺"이 되고 창암의 간령과 구분하기 위하여 大.小자를 붙여 "大間嶺"이 되었다. 참고로 1970년대 진부령과 미시령 길이 포장되기 전까지는 사람의 왕래가 가장 많았으며 당시만 하여도 인제군수와 간성군수가 대간령에서 산신제를 지내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참고2> 진부령의 유래, 이야기
동서는 잇고 남북은 가른 최북단 고개, 동과 서를 잇고 남과 북은 가르는 게 분단시대의 진부령. 또한, 오랜 옛날 동서를 잇는 유일한 오솔길이었던 진부령이다. 진부령(陳富嶺)은 진부리에서 온 지명으로 높이 559m이며 46번 국도가 지난다. 진부는 신라 경순왕 김부가 넘었던 곳이라 하여 "김부"가 "진부"가 되었다고 口傳되어 왔다. 陳富嶺은 인제군 북면 용대리와 간성읍 진부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진부리에서 온 지명이며 소양강의 상류인 북천과 소하천의 분수령이 된다. 이 길은 경사도가 완만하여 구곡양장(九曲羊腸)의 16km에 달하는 길목마다 영하취락(嶺下聚落)을 이루고 있다. 1632년 간성 현감이었던 택당 이식이 인근의 승려들을 동원 해 좁은 길을 넓혔다는 기록과 1930년 일제시대에 신작로를 내면서 차가 다니기 시작하고1987년 2차선 도로로 포장되어 국도로 승격되면서 인제와 간성을 이어주는 도로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진부령은 또 다른 이름으로 "조쟁이"라 부른다. 영서의 곡식과 영동의 해산물이 고개(진부령)에서 만나 자연스럽게 새벽장(朝場)이 서게 되고, 새벽場이 서던 곳이라 하여"조쟁이'라 하였고 이를 이두문화 하여 "조장(朝場)이가 되었다. 소설가 박연희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현대 소설로 고쳐 쓰면서 홍길동의 산채의 배경으로 삼았던 진부리(陣富理). 진부령은 한국전쟁 전에는 북한 땅이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노동당원이 됐고 전쟁의 와중에서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도 북으로 넘어가거나 경찰과 군인들의 눈길을 피해 고향을 등졌다. 그리곤 그 자리를 외지에서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채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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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완주를 축하드립니다
매회 산행준비...., 산행 후기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