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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경기여류 원고
테마수필
식 탁
장 정 숙
오늘도 변함없이 밥상을 차린다. 아침 점심 저녁 굶지 않고 세 끼니의 밥을 찾아 먹을 수 있다는 이 행복함을 식사기도로 바친다. “전능하신 하느님.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몇 가지 반찬에 된장찌개 아니면 무국, 미역국이 순번이 되어 김치까지 썰어놓으면 조촐한 밥상이지만 우리 가족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아이들 키울 때 그 어려운 시절에는 매일 다섯 개의 도시락 반찬까지 나름대로 준비하느라 식탁 위의 반찬은 늘 부족하고 허술했지만 이제 다 지나고나니 추억은 항상 그립고 아름다운 시절로 남아있다.
그 옛날 내가 어릴 적 밥상은 나무로 된 소반과 여럿이 함께 먹을 수 있는 두레 반 밥상에 된장찌개 김치나 깍두기 콩장 하나만 있어도 꿀맛이었다. 그것도 밥그릇 하나 가득 수북한 밥을 배불리 먹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던 시절에는 간식이나 과일이 있는 식탁은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남의 일이었다. 지금은 우리 식탁 위에 언제나 준비할 수 있는 부자가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하면서도 격세지감을 느낀다.
언제인가는 비싸고 좋은 공예품 같은 식탁을 사고 싶어서 남문에 있는 가구거리를 찾아갔었다. 둥글둥글하게 생긴 고급스럽고 멋있는 식탁은 우리 다섯 식구가 둘러앉아 식사하기에 무척 좋을 것 같아 꼭 사고 싶어졌다. 그런데 남편은 너무 비싸다고 사지 말라고 하는 것을 나는 어기고 “미안해.” 하며 주문하였다. 식탁이 집으로 배달이 되니 남편은 불같이 화를 내며 사지 말라는 걸 왜 샀냐고, 자기는 의자 하나에 십만 원이 넘는 의자에 앉으면 방댕이가 아프다며 기어이 그전에 쓰던 만 원짜리 의자를 끌어다 앉고서 이것이 좋다며 그날부터 나와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록 대화를 하지 않으니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내가 견디다 못해서 “ 말을 하던지 이혼을 하던지 하라” 하니까 그때서야 대화도 하고 새로 산 고급식탁 의자에 앉아보더니 “편하긴 편하네.” 하고 좋아하면서 같은 식탁을 사용하게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문경에 있는 ‘숲이 좋아’ 라는 오토캠핑장으로 캠핑을 갔었는데 텐트를 다 치고 점심밥을 맛있게 지어 아주 조그만 상에 식탁을 차렸다. 준비해간 숯불구이를 하려는 중이었다. 날씨도 좋았고 경치도 좋아서 텐트를 친 이웃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순간에 우르릉 쾅쾅 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주위가 밤처럼 캄캄해지며 돌풍이 불어 텐트고 식탁이고 밥솥까지 다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주위에서도 모두들 놀라서 아우성이었다. 텐트 위에 친 터프는 날아가고 나는 무너진 텐트에 갇혀 있다가 겨우 빠져나와 나만 살겠다고 우리 차로 올라탔는데 열려진 창문이라 들이치는 비바람에 할 수 없이 다시 나와 그때서야 남편을 찾았다. 정신없이 냇가 쪽을 바라보니 돌풍에 날아가 뒹구는 텐트들과 밥상, 캠핑도구들이 뒤섞여 널려있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 현실임을 실감나게 하였다.
도청 아래 고등동에 살 때였다. 착한 남편이 우리 집에 밥 얻어 먹으로 온 거지에게 자기 밥그릇에 밥을 퍼서 밥상을 차려 준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사랑이 담긴 식탁! 그런 남편과 사는 나!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배고픈 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여주지 못한 일, 아픈 아이를 모른 척하고 도움을 주지 못한 일, 일부러 찾아온 이들을 모른 척 한 일, 그동안 살아오면서 잘못했던 일들이 가시가 되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주눅 들게 하며 가슴 깊이 엎드려 회개기도를 하게 한다. 나의 죄를 생각나게 할 때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용서를 빌고 있다.
(유월절 잔치) 파스카 축제로 최후의 만찬 식탁에서 예수님과 열 두 제자들이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함께 있었다.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고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이 서로 묻자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다가 그 때라도 얼른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삼년을 하루같이 믿고 함께 따라다닌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겪은 유다가 불행하여라. 스승이며 하느님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반면에 다른 제자들은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성찬례를 제정하시고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 우리 모두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고 깨달아서 믿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다.
이제 자신을 되돌아보며 성찰하고 조금은 더 성숙되어 가야 되겠다. 주위를 돌아보니 나는 가진 게 너무나 많다. 나누는 삶 베푸는 삶을 실천하여 더욱 마음의 부자가 되자. 안방과 부엌에 그리고 서재에도 살림살이부터 줄이고 정리 정돈하여 언제나 준비된 삶을 살아가야지. 헛된 욕심과 게으름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가치 있는 것에 힘써야 될 형편을 깨달아간다.
이다음에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맞이할 우리들의 식탁을 준비하기 위해 나의 남은 일생을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인도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아니 지금 바로 후회를 줄이는 삶을 살기 위해 어렵고 가난한 이웃, 아프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어 그야말로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천국처럼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련다. 무엇이 소중한 가! 무엇이 더 참다운 생명의 길인가를! 나의 삶이 하루하루 하늘 양식을 차리는 식탁이 되게 하소서.
호주 시드니를 다녀와서
장 정 숙
착하고 효성스러운 자녀들 셋이 정성을 모아 우리 부부에게 호주 시드니 4박 6일간의 해외여행권을 준비해주었다. 나의 칠순 생일기념으로 준 선물이었다. 어느새 살아온 세월이 이렇게도 많이 흘렀는지 별로 해놓은 일 없어 되돌아보니 그저 부끄러움과 모두가 감사한 일 뿐이다. 예약을 할 당시에는 그래도 건강하였었는데 어느 날 동네 가까운 매미산으로 운동을 다녀온 후 갑자기 왼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며칠을 쉬어도 낫지 않아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보니 퇴행성관절염이라고 하였다. 한 달이 넘도록 약도 먹고 부지런히 물리치료도 받았으나 쉽게 낫지 않았다. 그래서 여행을 포기하고 취소를 하려고 했는데 마음을 비우니 약간 덜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들 내외와 안사돈 그리고 손녀들이 함께 가기에 그냥 추진하게 되었다. 제일 큰 걱정이 열 시간이나 되는 비행기의 긴 탑승시간이었다. 좁은 좌석에 앉아 아픈 다리를 어쩌나 하고 염려했는데 큰딸이 비행기 좌석까지 편한 곳으로 예약해주었고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여 그런대로 잘 오고갈 수 있었다.
아시아나 항공으로 저녁 8시에 비행기를 탔는데 우리가 잠자는 사이에 밤새도록 달려 드디어 시드니에 도착하니 아침 7시 반이었다. 호주는 우리나라와는 한 시간 빠른 시차였고 남반구에 위치하여 우리와 반대로 초겨울 날씨였다. 입고 간 얇은 여름옷을 벗고 오리털 점퍼로 갈아입었다. 유난히 맑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우선 기분 좋게 청정한 공기가 숨을 쉬는데 아주 상쾌하였고 초록색 싱그러운 나무들이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듯하였다.
호주는 육이오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나라로 지금 현재는 우리나라 80년대 정도 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두 배의 부자나라이며 비교적 치안이 잘 된 나라라고 한다. 인구가 2800만 정도 밖에 안 되는데 땅의 면적은 우리보다 7배나 넓다고 하니 부럽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주로 해변 가에 모여 도시를 이루고 살아가며 대륙 안쪽으로 들어가면서는 초원지대가 펼쳐지고 한가운데는 사막지대라 사람이 살기에 매우 불편하단다. 그래서인지 도로에 자동차나 지나다니는 사람도 적었고 집들도 단층으로 된 아름다운 집들이 많았다. 눈에 띄는 정원도 무척 넓고 가는 곳 마다 정원과 아름드리나무가 많아 여유로워 보였다. 잔디밭에는 사람들이 쉬거나 오가며 아이들도 뛰놀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라는 현실과 대조되었다. 이곳은 진드기나 사람에게 해로운 벌레가 없어서 마음 놓고 앉아서 쉬는 잔디밭, 무공해 채소들만 가꾼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긴 역사를 갖고 있지만 호주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이제 겨우 230년밖에 안되기 때문에 종교는 주로 성공회와 천주교, 기독교 등등이고 오래된 건물은 보호 보존에 힘쓴다고 한다.
제일 먼저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인 블루마운틴으로 갔다. 푸른빛의 유칼립투스라는 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루어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저절로 산림욕이 되었다.
아직도 원시림이 유지되어 태고 적 발길이 닿지 않은 곳도 많다고 하고 여기저기 넝쿨이 축축 늘어져 있어 일행 중에는 타잔처럼 매달려 아~아! 하고 소리쳐 보는 이도 있었다. 처음 보는 유칼립투스나무는 단단하고 살충효과도 있어서 전봇대로 활용하거나 도마로도 만들어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이 나무가 편백나무의 피톤치드 4.7배나 많이 뿜어낸다니 모두들 가슴을 쫙 펴서 마음껏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아, 이 맑은 공기를 우리나라에 가져갈 수 있다면 아니 우리나라도 미세먼지 걱정 없는 이렇게 청정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곳은 일 년 내내 매연 량이 북경의 하루 매연 량과 같다고 하니 정말 복 받은 나라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도 20만 명가량 거주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무엇보다 복지가 잘되어 있어 사람답게 살기가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민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노인복지로는 여자 63세, 남자 65세부터는 연금이 나오고 볼링장이나 클럽을 활용하여 일주일에 네 번 정도 운동을 하면 시간당 9600원씩 지급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병나면 국가에서 무료로 치료해줘야 하니까 국민 건강에 우선으로 신경을 쓴단다. 그래서 무공해 농작물 생산, 첨단 의료 연구, 인공 심장과 경부암 예방주사, 위암 치료법 등등에 앞장서는 공적이 있으며 우리나라 황우석 박사님을 두바이에서 초청이 왔는데도 가지 않으시고 이곳에 초빙되어 와 계시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또한 각종 자원이 풍부하고 석탄, 금, 매장량이 세계 2위라니 인력자원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정말 부럽고 놀랍기만 하였다.
지금은 폐광이 된 과거의 석탄탄광 레일을 개조하여 만든 궤도 열차를 타고 52도나 되는 경사진 곳을 올라간 다음, 케이블카를 타고 블루마운틴의 웅장한 풍경과 기암괴석, 세 자매로 불리는 봉우리, 울창한 숲이 어울려 만들어진 대자연의 장관을 바라보며 정말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난히 산을 좋아하는 남편은 920m나 되는 세자매봉을 뛰어 내려가 직접 보고 짧게 주어진 시간 안에 돌아오느라 헉헉 하여 내 마음이 짠하기도 했다.
특히 우리 손녀들이 좋아했던 시드니 해양 역사를 보여주는 아쿠아리움 관광으로 수중 유리 터널을 따라 바다 속 탐험도 하였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상어와 대형가오리들, 펭귄 가족들 모습, 느림보 거북이의 헤엄솜씨, 각종 물고기 떼들이 눈앞과 머리 위에서 왔다 갔다 하니 처음으로 자세히 보는 광경 앞에 어른인 나도 참으로 신기하고 무척 좋았다.
둘째 날에는 야생 동물원에 가서 유칼립투스 나무위에 올라가 하루 중 스무 시간을 잠만 잔다는 코알라! 네 시간 깨어있는 동안 유칼립투스 잎을 먹고 또 자는 잠꾸러기 코알라가 무척 귀여워 손녀들과 쓰다듬어주기에 바빴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는 걸 보니 잠에 흠뻑 취했나보다. 배에 달린 주머니에 새끼를 안고 있는 캥거루! 먹이를 주니까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는 수많은 캥거루(‘원주민어로 모르겠다는 뜻’)들, 그 중에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캥거루 한 마리가 내 손바닥을 잡고 먹이를 먹어 안타까웠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장애를 갖고 있으면 얼마나 불편한가? 넓은 풀밭의 양떼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모습과 희귀한 동물들도 보았는데 바라보는 내 마음까지 넓어지고 평화스러웠다. 좁은 우리에 갇힌 우리 동물원과도 비교되었다.
다음에는 커다란 크루즈에 탑승하여 동부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고래와 해안에서 서식하는 야생 돌고래를 발견하였는데 마치 우리가 탄 배와 경주를 하듯이 유연하게 헤엄치며 오르내리는 커다란 돌고래 여러 마리가 신기하여 동영상으로 찍어 두었다.
이번에는 오래된 트럭에 좌석을 몇 개 만들어 관광객들을 태우는 휠 자동차로 옮겨 타고 바닷물에 의하여 저절로 운반되어 와 쌓였다는 모래언덕에 올라가 모래썰매를 신나게 탔다. 맨발로 걷는 고운 모래밭은 마치 인절미에 묻혀 먹는 콩가루처럼 부드럽고 감촉이 좋았다. 나도 오랜만에 어린 아이 시절로 돌아간 듯 부드러운 흙을 만져보고 웃으며 동심에 젖어 보았다. 손녀들도 신나게 뛰어다니며 큰 소리를 마구 지르고 제일 기분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마치 눈썰매 타듯이 작은 널빤지( 꽤 무거웠음. 플라스틱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같은 판 하나로 관광수입을 올리는 나라! 그걸 마음껏 즐기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모습! 호주는 정말 자연 그대로를 잘 이용하고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관광객을 불러들일 수 있으니 이 점은 우리도 배워야 될 것 같다.
호주는 우리와 반대 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자동차들이 좌측통행을 하며 달렸고 운전사는 오른쪽에, 자동차 출입 여닫이문이 왼쪽에 있어 여러 번 헛갈렸다. 집들을 모두 북향집으로 짓고, 무덤들이 마을 앞에 가까이 있었으며, 밤 문화가 발달되지 않아 거리가 조용하고 저녁이면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아 어두워지는 거리는 우리나라의 밤이 대낮처럼 환히 밝히는 불빛만 보다가 좀 불편하게 느껴졌다.
백호주의에서 벗어나 이제는 일자리와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나라처럼 다문화 민족들이 모여 살게 된 호주. 아프리카 다음으로 오래된 대륙 퇴적암층이 많아 집을 지을 때 벽돌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산들이 우리나라 산처럼 삼각형이거나 높낮이가 심하지 않고 일자형으로 평평하여 융기산맥을 이루고 있어, 맨 처음 이 호주를 발견한 사람들이 멀리서 볼 때 바다처럼 푸르게 보이고 산들조차 평평하여 조그만 섬으로 착각할 만큼 푸른 섬 오스트레일리아!
셋째 날에는 뉴사우스 웨일즈의 제3도시 울릉공이라는 해안도시에 들렀다. 번쩍 우리나라 울릉도 생각이 난 울릉공은 호주 원주민어로 ‘바다의 소리’라는 뜻이란다. 아름다운 하늘과 맞닿은 바다를 바라보다가 벼랑 위에서 바닷바람이 내륙 쪽으로 불 때에 맞추어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도 직접 구경할 수 있었다.
부서지는 하얀 파도와 아름다운 해안선의 본다이 비치, 갭 팍, 영화 빠삐용 촬영지를 직접 보면서 멋진 남태평양의 절경을 즐기기도 했다. 그곳에서도 시드니의 전경이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선택 관광으로 시드니 야경을 보여주었는데 시드니와 북쪽 도시를 연결하는 세계적인 명소라는 하버 브릿지와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하여 구경하고 우리들은 자동차 길 옆으로 난 넓은 인도로 그 긴 다리를 직접 걸어야 했다. 맞은쪽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경쾌하게 뛰어 오가는데 나는 왼쪽 아픈 다리를 스틱에 의지하고 천천히 걸으며 백번 후회를 했다. 그냥 버스에 앉아 있을 것을 괜히 다리를 건너며 바라보는 오페라 하우스나 바닷가 근처에 앉아서 보는 오페라 하우스 정경이 별반 다르지 아니한데 말이다.
다음날에는 또 오페라하우스 내부 콘서트장도 관람하였는데 일 년에 1800회 이상 활용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잠시 오케스트라 공연 연습하는 모습을 다행히 볼 수 있었다. 지휘자의 손짓에 따라 은은히 들려오는 감미로운 기악소리는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올해 개관 46주년을 맞이하였다는 예술극장 오페라하우스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고, 덴막 건축가 욘웃준이 어마어마한 예산으로 14년이나 걸려 지은 기둥 하나 없이 조립식으로 끼워 만든 공법이란다. 흰색 무광택 타일 백오만 장으로 지붕 전체 겉에다 과학적 공법으로 붙여놓아 빛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여 보인다고 하며 세계적인 이 무대에 누구나 예약하고 설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세계 3대 미항이라는 시드니 항에서 선셋 디너크루즈를 타고 한 시간 동안 기름에 튀긴 생선 요리를 먹으며, 어제 오늘 이틀을 본 풍경! 가까이서 보고, 멀리 버스를 타고 가서 또 보고, 안에 까지 들어가 본 오페라하우스와 하버 브릿지를 이틀간 실컷 보며 호주의 낭만을 즐겼다. 정말 바다 위 양쪽에 튼튼한 주 기둥 둘로 떠받힌 근사한 하버 브릿지 위에 약 백 미터 높이의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아취교 위를 걷는 사람들을 (안전상 줄로 몸을 묶고)올려다 보았는데 나는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만큼 아찔하였다.
서울 한강대교처럼 생긴 시드니 바다위의 커다란 아취 교와 그 사이를 오가는 배들과 오페라하우스 건물 하나로 세계 각국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호주의 관광 사업에 우리나라도 본받아야 할 깨끗한 자연환경 조성과 특성화된 관광정책이 필요한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제주도를 비롯하여 울릉도, 독도, 경주, 부여, 설악산, 지리산 등등 그밖에도 관광지가 얼마나 많은가! 삼천리금수강산 이라 할 만큼 더욱 귀한 우리나라 국토와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고, 여행 기간 내내 서로를 배려하고 일일이 챙겨주는 아들 며느리의 사랑과 손녀들의 재롱가운데 가족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더욱 깨달았다. 새삼 인생의 참맛을 느끼고 내 삶의 흔적으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하고 늦었지만 제법 철든 생각도 하게 된 보람 있는 여행이었다.
사노라면
장 정 숙
인생의 봄은 돌아오지 않는다. 굽이굽이 살아온 세월이 일흔 해!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이 일곱 번이나 변할 만큼 살아왔다. 믿어지지 않지만 고왔던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검버섯이 핀 얼굴과 하얗게 백발이 되어가는 머리, 여러 개의 틀니가 끼니때마다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멀쩡하던 다리도 갑자기 관절염으로 아프고 가끔은 허리도 시원치 않다. 어디 몸만 그러한 가, 엊그제 들었던 일도 금방 잊어버리기 여사이고 복잡한 일은 적어놓지 않으면 자신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차츰 메모장이 늘어만 가고 있다. 무언가 삶의 원동력이 있어야 하겠기에 몇 년 전부터 성경을 필사하고, 재미있는 두뇌계발 스도쿠 풀기, 이야기세계사와 여러 가지 책을 자주 읽으려고 곁에 쌓아놓고 있다.
누구나 사노라면 힘들고 나름대로의 갖가지 고뇌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은 무척 더 바쁜 세상이다. 예전보다 편리하고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무엇엔가 쫓기듯 시간을 내야하고 한가하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는 나대로의 삶과 신앙생활, 위로는 부모님 찾아뵙기, 아래로는 가끔 손녀 돌보기, 취미생활 등등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래도 행복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친정 엄마가 편찮으셔서 자리에 누우신지 여러 해째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간병인이 집에 가는 날 딸들이 돌아가며 엄마 곁을 지킨다. 올해에 구십 세를 맞이한 엄마는 아기처럼 순진 무궁하신 표정으로 눈도 초롱초롱 하시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셔서 매우 불편해 하고 식사도 못하시어 뉴케어 라는 종합영양식으로 연명하고 계시다. 그래도 아직까지 사람을 알아보시고 반가워하며 특히 손자손녀들이나 애들을 좋아하신다. 너무나 외로웠고 고달팠던 생활고와 당뇨 때문에 빨리 치매가 온 것 같다. 가장 가슴아파하시는 아버지께서 헌신적인 사랑으로 간병인과 함께 병수발을 하시는 모습이 죄송스러워 가슴이 아프기만 하다.
가만히 엄마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보면 실핏줄이 다 비치고 말캉말캉하니 아기 손목처럼 가늘고 뼈만 남았다. 손가락도 제마다 구부러져 휘었고 물건도 제대로 잡지 못하신다. 두 다리도 누워만 계시니까 뼈만 앙상하여 주물러드리기 조차 겁이 난다. 얼굴을 씻겨드리면 가만히 눈을 감으신다. 마음대로 움직이시던 그 옛날을 생각하시는지 안타까운 현실에 기가 막혀 소리 나지 않는 울음을 우시는지도 모른다.
온종일 누워만 계시니 창이 생길까 자주 이쪽저쪽 모로 돌아 눕혀 드리고 등도 긁어드리면 “아, 시원하다.” 하고 말씀하신다. 이가 없으셔서 수박이나 토마토를 갈아서 과일 물을 갖다드리면 “맛있다.” 하시며 잡수신다. 우리 오남매 어릴 때 그토록 정성껏 키우셨을 텐데, 지금은 호강하실 형편이 되니 그만 편찮으신 것이다. 엄마에게도 젊고 싱싱한 봄날이 있었을 텐데 인생무상이란 말이 실감이 나는 현실이다.
엄마는 어떤 날은 잠만 주무셔서 겁이나 깨우고 말을 시켜도 소용이 없고, 어떤 날은 기분이 좋은 날인지 말씀도 잘 하신다. 주로 옛날 외갓댁 이야기를 하시는데 이퇴계 자손 진성 이씨라고 자랑하셔서 외할아버지 성함을 여쭈었더니 또렷하게 ‘이문호’ 라고 하셨다. 외할머니는 ‘안동 권씨’라고 하신다. 이름이 없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외삼촌과 엄마 이모 이렇게 삼남매가 의좋게 지내시다가 우리 집으로 아버지 얼굴도 못 보고 시집 오셨단다.
넉넉한 집에서 사시다가 가난한 우리 장씨 집으로 시집오셔서 남달리 공적을 쌓으신 우리 엄마! 시집올 때 가지고 오신 비단을 팔아 아버지를 사범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내조를 하시고 학비가 모자라자 다시 모시와 베를 짜서 그것을 팔아 학교를 시키셨단다. 그 덕택에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일을 벗어나 교단에서 40년을 넘게 근무하셨으니 오늘날에 그 은혜를 지금 갚고 계신 것 같기도 하다. 한 사람의 일생이 누구나 책 한 권의 역사를 쓸 만큼 다양하고 복잡하고 눈물 나게 아름다운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지만 내 엄마 아빠의 일생은 참으로 자랑스럽고 고맙고 애달프기만 하다. 시동생을 데려다 어려서부터 20년 넘게 자식처럼 키우시고, 시골에 사는 조카들이 학교 다닌다고 번갈아가며 몇 년씩 와 있고, 나까지 직장에 다니느라 큰 애를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친정에 맡겼었으니 그 수고와 고달픔은 말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런 측은한 마음으로 엄마 곁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주일 낮에 집으로 오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만일 내가 그렇게 아프다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 삶과 죽음의 철학적인 의미보다 생 노 병 사를 피할 수 없는 인생에 대하여 역지사지로 깊은 연민에 빠지곤 한다.
한 달에 한번은 우리 가족 열네 명이 우리 집에 다 모인다. 함께 식사를 하고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삼남매가 손자손녀들을 데리고 오면 우리 내외는 자식들 보다 더 반갑고 좋은 손주들 여섯 명을 안아주며 어쩔 줄 모른다. 짝사랑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기특하고 예뻐서 마냥 바라만 보아도 행복한 시간이다. 어릴수록 더 사랑스럽고 커갈수록 더 듬직하여 마냥 자랑스러운 보물단지들이다. 세상에 어느 보석에 견주랴.
어려서부터 손자 손녀들이 하는 말 중에 잊지 못할 말들을 모아 공책에 어록을 기록까지 하고 있으니 이만하면 손주 바라기에 손꼽힐 만 할 것이다. 하룻밤을 자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면 자기 집에 안가겠다고 차창 밖으로 고개와 팔을 내밀고 울던 손녀는 이제 초등학생이 되어 제법 의젓해졌다. 큰 손자 손녀 세 명은 어느새 중학생이 되었고 아래 셋은 초등학생, 나는 그만큼 긴 세월을 보내고 지낸 것이겠지.
그 누가 말했는지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여 깊은 생각에 잠겨본다. 추수할 날에 어떤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지 저 맑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동안 좋은 나날들 보내고 더 아름다운 꿈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리라.
그 예쁜 꽃밭에
장 정 숙
이 세상에 식물이나 꽃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아니 자연이 없다면 생명체가 살아갈 수조차 없으니 정말 귀한 존재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가꾸어야 될 것이다. 나무들이 많은 숲속에 가면 얼마나 상쾌하고 저절로 심호흡이 쉬어진다. 그래서 집을 짓거나 아파트를 지어도 어느 정도의 식물 환경조성이 되어야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곳이라 한다. 우리집 베란다에도 크고 작은 식물 화분들이 꽤 많다. 이곳에서 산지도 십 칠년이나 되었으니 나무들도 청장년이 되어 위 천장까지 닿는 나무들도 있다. 올해는 나뭇가지를 좀 잘라주어 키를 줄여주고 거름흙과 영양제를 알맞게 공급해주었더니 더운 여름을 좀 시원하게 나도록 해주는 것 같다. 목이 마르지 않게 물을 주고 잎도 닦아주면 사랑을 받는 걸 아는지 식물들도 더욱 싱그럽게 자란다.
매일 운동을 하거나 성당에 가려면 도로 건너 1차 아파트를 지나다니게 된다. 그곳은 우리 3차 아파트보다 대단지로서 사이의 공간이 넓고 나무들도 많아 조경 환경이 훨씬 잘 되어있다. 소나무들과 벚나무 목련 등 어울리는 나무들이 거기에 사는 주민들은 물론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늘과 평안함과 유익을 나누어준다. 역시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이다.
작년인가 어느 날이었다. 누군가 나무들 사이의 빈 공간에 조그만 꽃밭을 만들어 놓았다. 백일홍, 봉숭아, 국화, 이름을 잘 모르는 조그만 꽃모종들이 줄을 맞춰 수줍게 심어져 있어서 보기가 좋았다. 며칠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엎드려 물을 주며 풀도 뽑고 계셨다. 참 착하고 고마우신 분이라 생각하며 지나다녔다. 아파트 장날이면 그 아주머니는 또 다른 꽃들을 사다가 심어놓고 정성껏 가꾸셨다. 가장자리엔 키가 큰 칸나들도 심어서 쑥쑥 자라 빨간 꽃들을 피웠고, 잎들이 늘어지는 녹색식물은 화분 째 여러 개 매달아놓기도 하였다. 화단에 꽃들이 예쁘게 자라는 걸 바라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의 아낌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자기의 사비를 들여 여러 사람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나누어준다고 생각하니, 매일 물을 주고 땀 흘려 애쓰시는 아주머니를 만나면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도 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녀는 “별말씀을요.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하고 웃으신다. 그렇게 꽃밭은 두 군데 세군데 여러 곳으로 늘어나 그늘 식물은 그늘에, 양지 식물은 나무가 없는 빈 공터에 심어져 시골의 소박한 꽃밭처럼 작은 돌멩이로 가장자리를 만들어놓은 모양이 정겨웠다.
아마도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친구인지 이제는 두 분이 꽃을 사다 심고 양동이 몇 개를 갖다가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할 만큼 아름다운 꽃밭이 꾸며졌다. 이듬해도 다년생 뿌리 식물은 추운 겨울을 견디고 살아서 파랗게 고개를 내밀었다.
올 봄에도 천사 같은 아주머니 두 분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자기들의 큰돈을 들여 또 예쁜 꽃들을 사다가 빈 화단에 심고 물주고 거름 주며 풀을 뽑아 정성껏 가꾸셨다. 나와 함께 성당에 다니는 반식구들은 그 꽃들을 볼 때마다 “예쁘지요? ”, “예뻐요. 사람들도 이 꽃들처럼 예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모두들 감동하고 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주민들 중에는 아닐 수도 있나보다.
올 여름이었다. 누군가 아파트 관리실에 항의를 했는지 그 예쁜 꽃밭마다 한가운데 팻말이 박혀있고 여기저기 풀이 함께 자라고 있었다. <공용화단 무단점유 사용금지>
오늘도 그 꽃밭을 지날 때마다 아주머니의 입장이 되어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