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작은 비밀 하나
지은이 : 박금출
개업 후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검은 얼굴에 깡마른 할머니 한 분이 치료를 받으러 오셨다. 구강검사를 해보니 뽑을 치아도 많고 손볼 게 너무 많았다.
"그 동안 식사를 어떻게 하셨어요? 치아가 너무 안 좋으십니다"
"이를 해 넣으려면 얼마나 들까요? 오늘 상담 좀 해 주세요."
치료 후 원장실로 들어오시게 했다. 백 만원 가량 들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돈이 조금밖에 없는데요, 원장님 제 이 좀 해주실 수 있어요? 밥을 못 먹어서 기운이 없네요."하면서 실은 길음동에 살고 있는데, 동네 슈퍼 아주머니가 잘 부탁해 보라고 해서 찾아왔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가족이 없으세요?"
할머니는 아들이 넉넉지 못해서 이 해달라고 할 형편이 아니고, 딸네 집에서 아침에 우유 배달, 신문 배달하며 같이 산다고 하셨다. 남편이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고, 국가 유공자 연금으로 한 달에 오 만원씩 받는데, 삼 만원은 먹고사는데 쓰고, 손자들 학용품과 용돈으로 만원 쓰고, 한 달에 만원씩 삼 년을 모은 돈 삼십 이 만원이 있다고 하시며, 삼십 육 만원이 안 된 건 손녀들 병이 났을 때 약값에 쓰셨다고 하셨다.
"원장님, 많이 부족하지만 염치 불구하고 부탁합니다."
사실 그 당시 내 사정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개원 할 때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비용이 많이 드는 진료기구들은 할부로 샀었다. 서울에 연고도 없이 종로에 개원했더니 정말 너무 어려운 시기였다. 개업 초기에는 빚도 갚기 어려웠고 그래서 동두천에 계시는 부모님 생활비도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증축 건물에 개원을 했는데 건축 허가가 안 나서 결국 삼 개월 후에 바로 옆 건물로 이전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걱정 하실까봐 집에는 알리지도 않았고, 큰아버지 소개로 사채까지 얻게 되었다. 내 코가 석자였을 때라, 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때 치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던 중학교 시절 어느 날 밤이 생각났다.
그 당시 아버님이 내가 초등학교 때 심장병과 갑상선 질환을 앓으셨다. 그 후로는 어머님이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되셨고, 각종 계를 많이 하셨다. 그 당시엔 대다수 사람들이 어려운 시기였다. 자주 야반 도주하는 계원이 생겼고, 그때마다 계원들이 집으로 몰려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그 날도 낮에 소란이 있었던 밤이었다. 그 당시 가난했던 우리 집은 부모와 4형제가 한방에서 같이 잤었다. 깊은 밤 이야기 소리에 잠이 깨게 되었다. 부모님은 앞으로 아이들 공부도 못 시킬까봐 걱정에 걱정을 거듭해서 잠을 이룰 수 없으셨던 것이다. 두 분은 오늘의 힘든 상황을 서로 위로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금출이가 커서 치과 의사가 되어 아버지의 한을 풀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러다 내일부터 독하게 마음먹고 빚잔치를 해서라도 우리 애들을 공부시켜야겠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깨어 있는 것을 눈치 채실까봐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흐르는 눈물은 이내 베개를 적셨다.
나는 커서 부모가 나를 키우기 위해 세상에 진 빚을 갚아드리겠다고 결심하며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나는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가 치과 의사가 되어 부모님의 빚을 갚게 해주세요. 부탁입니다. 훌륭한 의사가 될게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이 먼훗날에 나를 키우느라 세상에 진 빚 때문에 좋은 곳에 못 가시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 기도를 올렸던 것이 어느새 베개는 젖어서 누워 있기 힘든 상태로 푹 젖어 버렸으나, 그래도 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할머니의 부탁을 듣는 순간 그때 생각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할머니 해드릴게요."
"선생님 너무 고마워요." 하시며 얼굴이 환해지셨다.
하지만 나는 내가 더 고맙다고 했다.
3~4개월이 지나 틀니를 끼는 날이었다. 치료비를 가져오셨는데 꼬깃꼬깃 오래된 신문에 누렇게 쇤 돈을 원장실 탁자에 올려놓으시며 고맙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 감사해 하셨다. 그 낡은 돈을 보는 순간 남편을 잃고 어렵게 살아온 그분의 생애가 검게 타고 마른 손마디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저 돈이 저분의 전 재산인데…. 그 순간 마음이 찡해왔다.
"할머니 반만 받을게요."
"이거라도 다 받으세요. 무슨 말씀이세요."
서로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계속됐다. 결국 일부라도 돌려 받은 돈을 들고 있던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기어이 복받치는 울음을 터뜨리셨다. 서로 손을 마주잡고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