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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작물 |
봄 |
여름 |
가을 |
겨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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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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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
벼 |
못자리 모내기 수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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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
고추 |
파종 첫수확 끝수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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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 |
첫수확 수확 수확 수확 모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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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
수확 모종 〓〓〓〓〓〓〓〓〓〓〓〓〓〓〓 |
1) 1950∼60년 전후 작물
(1) 누에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군수품, 특히 낙하산 만드는데 사용하기 위해 착취의 목적으로 누에치기를 권장했다. 해방 된 후에도 누에치기는 계속되었고 농사보다 오히려 소득이 더 많았다.
월 작물 |
벼 |
고추 |
참외 |
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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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입춘 우수 |
고추씨 구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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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경칩 춘분 |
2월 중순∼3월 초순무렵에 비닐하우스에 옮겨심기 |
2월 하순 무렵에 첫 수확, 거름주기 |
전지(초순) 살충제 살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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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청명 곡우 |
상토 만들기 |
본밭 갈기 비닐 씌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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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입하 소만 |
4월 20일 무렵에 볍씨 소독 |
4월 중순 무렵에 수확하기 |
4월 초:포도 순이 나온다. 임시 순 묶기, 대를 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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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망종 하지 |
5월 초 무렵에 못자리 준비하기 |
5월 초순∼중순 무렵에 본밭에 고추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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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소서 대서 |
6월초 모내기하기 6월 중순 무렵에 제초제뿌리기, 거름주기 |
6월 중순 무렵에 고추대 세우기 |
6월 초순 무렵에 수확하기 |
본격적으로 순 묶기 |
7월 |
입추 처서 |
피사리 7월 하순: 이삭거름주기, 논에 물대기 |
7월 초 무렵에 첫물따기, 약치기 |
7월 중순 무렵에 수확하기 |
7월 하순경부터 수확(포도종류마다 수확시기 다름) |
8월 |
백로 추분 |
8월 초순 무렵에 캠벨 수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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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한로 상강 |
9월하순∼10월초까지추수, 탈곡 |
서리가 내기기까지 고추를 딴다. |
9월 초순 무렵에 수확하기 |
9월 중순 무렵에 거봉 수확 |
10월 |
입동 소설 |
벼 말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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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대설 동지 |
수매 |
11월 초순 무렵에 수확하기 (수확은45일만에 한번씩 한다) 모종, 접붙이기 |
세레단 수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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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소한 대한 |
짚단 묶기 논 관리 |
12월 중순 무렵에 비닐하우스에 심기 |
(2) 대마
1950∼60년대에 이 마을에서 50%의 가구가 대마를 재배했으나 경제성도 없고 정부에서 대마 잎(대마초)의 위험성 때문에 대마 재배를 금지하면서 차츰 사라지다가 30년 전부터는 재배하지 않는다. 대마는 종자를 사다가 밭에 심는다. 심은 후 음력 7월 무렵이 되면 대마가 수확할 정도로 자라는데 이 때 삼대를 잘라서 솥에 넣고 푹 삼는다. 삼대가 물렁물렁해지면 건져서 잠시 식혀 두었다가 껍데기를 벗긴다. 벗긴 껍데기는 양잿물에 4∼5일간 담가 두었다가 물에 헹군다. 그 다음 물레에 이어서 실을 만든 후 실로 삼베를 짠다. 이렇게 해서 짜여진 삼베는 선산, 김천 등지에 팔기도 하고 옷을 해 입기도 했다. 1950∼60년대 당시 삼베 한 필에 20원 정도 했는데 가계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3) 서숙
과거에는 날이 가물고 비가 오지 않으면 모를 심지 못했기 때문에 대파 작물로 서숙을 많이 재배했다. 요즘은 수리 시설이 잘 되어 있고 먹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에 과거처럼 생계를 위해 재배하기보다는 별미음식으로 조금씩 하는 집이 있다. 서숙은 7월 중순에 밭에 종자를 뿌리는데 수확은 10월 하순경에 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잡초가 자라면 호미로 뽑아 준다. 수확한 서숙은 잘 말려두었다가 이삭만 잘라 도리깨로 때려서 탈곡을 한다. 탈곡한 서숙은 팔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식량으로 이용되었다.
(4) 보리
보리는 가을에 파종해서 이듬해 여름에 수확을 하는데 벼와 이모작으로 재배했기 때문에 보리 재배할 당시는 농한기가 없었다. 15년 전까지만 해도 보리 재배가 행해졌지만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수확량이 증가하여 현재는 재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보리가 벼농사보다 소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2) 2000년대 전후 시작된 생업활동
(1) 포도
12월에 나무를 심으면 1년 후에 열매가 달린다. 2∼3월경에는 새순 두 마디만 남기고 가지치기를 해 준 후 벌레에 의해 탄재병, 흰가루병이 생기지 않도록 유황제를 살포해서 살충을 해 준다. 4월 무렵이 되면 순이 나는데 이 때 포도 가지가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임시로 순을 묶어 준다. 그리고 포도나무가 30-40㎝ 정도로 키가 자라면 대략 지름 2㎝ 정도의 철근을 T자형으로 만들어 포도나무가 타고 올라가게 나무 근방에 박아 준다. 6월 무렵이 되면 본격적으로 순을 묶어 주고 7월말 무렵이 되면 포도를 수확한다. 거름은 포도나무를 심고 나서 3∼4번 정도 주는데 소똥 거름, 요소 비료 등을 준다. 수확은 포도 종류에 따라 달라지는데 캠벨은 8월초에, 거봉은 9월 중순, 세레단은 저장 포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11월에 수확을 하며 껍데기가 두껍고 당도가 높아 저장이 가능하다. 수확한 포도는 습자지, 문종이 등을 구입해 포장하여 구미 공판장에 수매하는데 수매가는 10㎏에 22000원, 18000원, 8000원이다.
(2) 참외
11월에 모종을 시작해서 순이 나면 호박을 심어서 접을 붙이고 45일이 지난 후 12월 중순에 비닐하우스에 심는다. 참외는 2월말에 첫 수확을 하는데 한달 반마다 수확을 계속할 수 있고 11월까지 수확을 한다. 5월부터는 벌이 번식을 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수정이 되어 덜 바쁘지만 겨울에는 인공 수정을 하기 때문에 일손이 바쁘다. 수확한 참외는 한 상자에 15㎏씩 담는데 4, 5단위 한 상자에 18000원에 팔린다. 지난해(1999년)까지는 선산 조합을 이용해 참외를 수매했는데 올해부터는 무을 조합을 이용했다. 그 이유는 선산 조합보다 무을 조합에서 더 높은 값을 쳐주기 때문이다. 조합에서는 여러 곳의 참외를 거두어 함께 서울에 있는 영등포 공판장에 내는데 운임료는 1000원이다. 참외는 일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농한기가 없다.
(3) 젖소
이 마을에서 처음 젖소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1984년 정부로부터 융자를 받아 각 농가에 4마리씩 14농가에서 50마리 내외의 생후 1년 5∼6개월(300∼350㎏) 된 젖소를 분배받으면서부터이다. 정부로부터 받은 융자는 2년 동안은 이자만 내고 2년 후부터는 이자와 원금을 조금씩 갚아 가는 형식인데 10년 후인 1995년도에 융자를 다 갚았다. 현재 젖소를 기르는 농가는 5집인데 1984년 14농가에서 5농가로 줄어든 이유는 젖소를 기를 터와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대부분 대량 사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간에 충분히 사육할 수 있을 정도인 35∼40마리 내외를 기르기 때문에 따로 일꾼을 쓰지 않는다.
젖소는 생후 14개월이 지나면 선산이나 김천에서 수의사를 불러서 수정시킨다. 한 번 수정하는데 2만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인공 수정 외에 자가 수정하는 집도 2집 정도 되는데 수정 과정이 복잡하고 어려워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많은 집에서 하지 않는다. 수정 후 285일 후에 젖소가 태어난다. 먹이는 사료와 짚을 주는데 아침, 저녁 착유(젖 짤 때)할 때 주고 물은 기계로 자유 급식된다. 사료는 선진 사료를 쓰는데 논산에서 가지고 와서 대리점에서 공급을 받고 짚은 논 한 마지기(200평) 당 2만원을 주고 산다.
젖은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 5시 30분에서 6시 사이에 짜고 사람이 손으로 직접 짜지 않고 착유기라는 기계를 이용한다. 짜기 전에 배타진이라는 소독약을 묻혀 젖 주위를 닦아준 후 착유한다. 착유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시간 30분 정도이다. 짜여진 우유는 냉각기에 모여서 살균, 소독의 과정을 거친 후 매일 아침 10시에 경산 중앙 낙협과 매일 유업에서 가져간다. 그리고 보름에 한 번씩 등급 판정을 받는데 등급 판정 기준은 체지방과 세균, 체세포에 의해 A등급, 1등급, 2등급, 3등급으로 나누어진다. 1등급은 ㎏당 30원씩 더 쳐주고 2등급과 3등급은 ㎏당 30원씩 깎인다. 우유값은 보름에 한번씩 한 달에 두 번 받는데 대략 300만원 정도이다. 수입의 반 이상은 사료비, 약품비, 수정비 등으로 쓰여진다.
젖소가 잘 걸리는 병은 대부분 유방염, 부재병(발이 썩어 들어가는 병) 등이고 병에 걸려 죽은 소는 빈터에 묻는다. 젖소에서 나온 배설물은 똥장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한 달에 두 번씩 15일마다 가지러 오는데 돈 안 받고 그냥 준다. 가져간 배설물은 저장해 두었다가 한 차에 6∼7만원씩 주고 사과나 포도밭의 거름으로 팔린다. 현재 젖소 한 마리의 가격을 보면 송아지는 암소 구별 없이 30만원, 암소는 ㎏에 관계없이 젖을 짤 수 있는 걸로 120만원, 숫소는 500㎏ 기준에 200만원, 젖이 나오지 않는 폐소는 15∼40만원정도이다.
3) 전통적 생업활동
(1) 벼농사
넓은 농토와 수원과 같은 좋은 자연·인문환경을 바탕으로 벼농사가 주요한 소득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1970년대 초 정부 사업의 일환으로 국가의 전액보조를 받아 경지정리를 해 전보다 논농사 짓기에 좋은 여건을 갖추었지만 현재는 마을 농경지에 중앙고속도로와 I.C가 생기면서 약 700마지기에 달했던 농경지가 300마지기로 줄어들어 이 곳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고속도로와 I.C가 생기기 전에는 한 평 당 7만원 받던 땅이었는데 국가에서 지급한 보상비는 그의 절반에 미치는 3만원에서 3만 5천 원 정도를 받았다.
벼농사는 3월경이 되면 비료와 흙을 섞어서 모판흙으로 사용할 상토를 만든다. 4월에는 보온 못자리를 준비하고 논갈이를 한다. 4월 20일 무렵에는 볍씨를 소독하는데 소포탁유제라는 소독제 한 병에 물 한 말을 넣고 희석 시켜 사용하고 매일 하루에 한번씩 물을 갈아준다. 이렇듯 볍씨를 소독하는 이유는 병충해를 방지하고 불량 볍씨를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5월초에는 못자리를 하는데 모상자에 흙을 뿌리고 볍씨를 넣은 후 다시 흙으로 덮는다. 60년대에는 손으로 직접 했으나 요즘은 결속기라는 기계를 사용한다. 결속기는 자동과 반자동이 있는데 자동은 전원만 켜면 볍씨가 자동으로 뿌려지는데 반자동은 손으로 기계를 돌려야 볍씨가 뿌려진다.
모상자에서 한 달 동안 키운 후 모상자를 못자리에 가지고 가서 보온 비닐을 덮어둔다. 60년대에는 비닐도 씌우지 않고 논에 씨를 뿌려서 한 달 정도 후에 손으로 뜯어내는 손모를 했다. 6월초에는 이앙기를 사용해서 모내기를 하는데 기간은 보름 정도 걸리는데 60년대에는 손으로 모내기를 했기 때문에 6월 중순부터 말까지 모내기를 했다. 모내기한 후 일주일 이내에 잡초를 제거하는 제초제를 기계로 뿌리는데 올해(2000년)는 구미시에서 헬리콥터로 두 번 정도 살포했다. 그리고 모내기 후 12일 이내에 가지벌이(벼가 가지를 치는 것) 거름을 준다. 7월에는 뿌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4일간 논에 물을 데고 5일간은 물을 빼주는데 물을 계속해서 두면 뿌리가 썩는다. 7월 하순에는 이삭 거름을 주고 논매기는 틈틈이 피나 잡초가 있으면 뽑아준다. 빠르면 9월말에서 10월초에 추수에 들어가는데 콤바인이라는 기계를 사용한다. 콤바인은 추수와 동시와 탈곡까지 해 준다. 수확한 벼는 마당에 갑바(파란색 양면 코팅 천)를 펴고 그 위에 말리는데 날씨가 좋으면 3일, 흐리면 4∼5일 정도 걸린다. 수분이 많으면 공판장에서 받아 주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게 말려야 한다.
말린 벼는 11월 무렵에 공판장에서 수매하는데 수매가는 올해 농사가 잘 되어 1등급 40㎏에 59,600원, 2등급 57,600원, 3등급53,000원을 받아 작년의 1등급 40㎏에 56,000원, 2등급 52,000원보다 더 많이 받았다. 수매 수익금은 통장으로 자동 입금된다. 수확량을 보면 다른 마을에서는 보통 논 한 마지기당(200평) 400㎏정도지만 봉곡 1리에서는 약 600㎏정도가 수확된다. 그래서 봉곡 1리에서 지금까지 전국 다수확왕이 2명이 나왔다. 추수가 끝난 12월 농한기에는 짚단을 묶어 주고 논 관리를 한다.
벼의 종류는 1970년대 이전에는 일본 종자인 일진을 사용했으나 그 후부터는 통일벼가 들어와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통일벼를 사용하게 되었다. 통일벼는 생산량은 많지만 질이 떨어져 다시 일반벼로 바뀌어 현재는 대산벼, 화양벼, 일미, 남강, 남평, 대안, 추정 등을 심는다. 볍씨 파종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조파, 산파, 건답직파가 있다. 조파는 모판에 골이 나 있어서 줄을 맞춰서 씨를 놓는 방법인데 현재는 잘 쓰이지 않는다. 산파는 거의 대부분의 농가에서 사용하는 방법으로 모판에 골이 없어서 결속기로 모판 전면에 씨를 뿌린다.
건답직파는 새로 생긴 방법이다. 마른논에 그냥 씨를 뿌리는 방법으로 밭에 씨를 파종하는 것과 비슷하고 싹이 트고 난 후 초기에 김매기를 잘 해서 풀을 없애면 잘 되고 풀을 없애지 못하면 나중에 벼가 자라 김매기가 힘들어져서 잘 되지 않는다. 또, 점질토(진흙)에 건답직파를 했을 때는 비가 오면 씨가 진흙 속으로 묻혀서 싹이 트지 않고 사토(모래흙)는 물 공급이 어려워 잘 나지 않는다. 사질양토(점질토와 사토의 중간)에 건답직파를 하게 되면 물의 공급과 양분이 잘 맞아 잘 된다. 조파와 산파의 수확량을 보면 재배 나름이겠지만 일반적으로 산파가 수확량이 많다. 봉곡 1리에서는 동장 댁에서만 건답직파를 올해 처음 시도하고 나머지의 농가에서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모두 산파법을 이용해서 모판을 만들었다.
구미시에서 1997, 1998년 2년 동안 벼의 특산물화를 추진해 봉곡 1리를 특산물 단지로 지정했다. 특별히 이 마을을 특산미 단지로 지정한 이유는 일조량과 풍부한 물 등 여러 가지 조건이 벼농사 짓기에 알맞은 곳이기 때문이다. 특산미 단지는 농촌지도소와 동장이 땅도 좋고 외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지정했는데 포상 가는 길 양쪽에 300마지기 정도를 단지로 지정했다. 특산미는 시예산으로 종자, 비료, 농약, 포대 등의 지원이 있었고 정부 수매하고 남은 쌀을 가져가기 때문에 개인 상인에게 팔지 않아도 되고 또 정부수매가보다 10%를 더 받는 이익이 있다. 그러나 구미시에서 원하는 물량이 정해져 있는데 그 물량을 채우지 못해서 98년을 마지막으로 포상, 옥성면, 초곡으로 넘어 갔다.
(2) 고추농사
고추는 집집마다 거의 다 재배하는데 대량으로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먹고 조금 팔 정도로 소량으로 재배한다. 그러나 밭작물 중에서는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다. 1월초에 농약방에 가서 씨를 구입해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아랫목에 놓아두고 불린다. 불린 고추씨를 고운 흙에 섞어 모판에 뿌린 후 모판을 차곡차곡 챙긴 후 계속해서 물을 뿌려 준다. 2월 중순에서 3월초에 키운 고추를 비닐하우스에 골을 파고 옮겨 심는다. 3월초에 밭을 갈아주고 골을 판 후 비닐을 씌운다. 5월초에서 중순경에 고추를 밭에 옮겨 심고 6월 중순경이 되면 소나무 막대를 고추 포기 옆에 밖은 다음 끈으로 묶어 준다. 그리고 바람이 많이 불면 끈을 막대기 사이로 엮어 고추 포기마다 묶어 준다. 7월 초 무렵이 되면 첫물을 따는데 날씨가 좋으면 2∼일, 아니면 일주일에 한번씩 서리 오기 전 9월말까지 딴다.
수확한 고추는 집집마다 비닐하우스에 말리는데 4일 정도 응달에 두었다가 비닐하우스에 넣어 햇빛에 말린다. 기계에 말리면 가격이 떨어져 기계는 잘 쓰지 않고 또 기계에 말릴 정도로 많은 양의 고추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마을에서는 고추 말리는 기계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또 기계에 말린 고추는 단 시간 내에 건조해 버리기 때문에 고추색이 누렇게 변하고 속이 타는 경우가 많아서 맛이 좋지 않아 태양초보다 1000∼2000원 정도 낮은 가격을 받는다. 수확한 고추는 태양초를 기준으로 작년에는 1근에 4000원을 받았는데 올해에는 작년보다 1000원 더 많은 5000원을 받았다. 탄저병, 역병 같은 병 때문에 고추 딸 때마다 농약을 뿌려 주고 거름은 복합요소를 2번 정도 준다. 모종으로 구입할 때는 선산에서 포기 당 100-120원 정도를 주고 구입한다. 고추는 다른 작물에 비해 수확이 빨리 되는 편이고 소량으로 재배하기 때문에 일손은 가족들만으로 충당한다.
4) 농업용수
한 해 농사의 풍·흉년을 결정하는데 여러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작용하겠지만 그 중에서 물의 확보가 벼농사에서 결정적인 역할로 작용한다. 이런 면에서 봉곡 1리는 혜택을 받은 마을이라 할 수 있다. 봉곡 1리는 마을에서 2㎞ 떨어져 있는 옥성면에 있는 대원저수지의 물을 이용한다. 대원저수지의 원래 이름은 관할이 옥성면이여서 옥성저수지인데 마을 사람들이 동네 이름을 따서 대원저수지라고 부르고 있다. 대원저수지는 1946년에 완공되었다. 저수지는 철기 레일을 이용해서 흙을 옮기고 바닥에 암반이 나올 때까지 파서 암반이 나오면 부식을 막기 위해 점토를 넣고 모레 토분을 다 씻어낸 후에 시멘트와 몇 번씩 배합을 해서 만들었다. 기계가 없어서 인력으로 공사를 했는데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로, 의무적으로 얼마 정도의 기간 동안 공사에 참여했다. 대원저수지는 건설된 후 한 번도 수리한 적이 없다.
위치 |
준공년도 |
인가면적 |
몽리면적 |
만수면적 |
유효저수량 |
제당길이 |
높이 |
구미옥성 |
1946 |
448.8ha |
358.8ha |
36.0ha |
1,898.0ton |
229m |
1.4m |
5) 노동력 교환
기계가 도입되기 전인 1980년대 이전에는 품앗이가 주를 이루었고 울력(주인이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무료 봉사 차원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스스로 도와주는 것)도 가끔 행해졌다. 그러나 기계가 보급된 1980년대 이후부터는 품앗이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고 1990년대 초반까지는 사람을 사서 일당을 지불하는 노동력 형태가 늘어났다. 일당은 보통 여자는 2만원, 남자는 3만원 정도를 받는다. 1990년대 초반부터 마을에서 이앙기, 콤바인, 트랙터 등의 기계가 보편화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아 사람의 일손보다는 기계가 농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노동력이 되었다. 기계를 가지고 있지 않는 집에서는 기계를 가지고 있는 집에 돈을 주고 부탁하는데 가격은 기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결정한다. 이앙기는 보통 한 마지기당 16000원, 콤바인은 20000원, 트랙터는 15000원을 받고 있다.
6) 농기구와 농기계
경운기 |
트랙터 |
관리기 |
콤바인 |
이앙기 |
탈곡기 |
52대 |
17대 |
7대 |
3대 |
4대 |
50대 |
과거의 재래식 농기구들과 현재의 최신식 농기구들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면 과거(1980년대 이전)에 쓰이던 농기구들로는 써레(갈아 놓은 논바닥을 반반하게 고르거나 흙덩이를 깨는 데 사용), 호미, 괭이(흙을 파고 깨며 골타기, 김매기 등에 쓰고 밭을 일구거나 정지 작업을 할 때 사용), 낫, 쟁기(소를 이용해 논밭을 가는 데 사용), 풍구(쌀, 보리, 콩 등 곡식의 쭉정이, 겨, 먼지들을 가려내는데 사용), 지게 등이 있고 현재 사용되는 현대식 농기계들로는 이앙기(모 심는 기계), 콤바인(추수할 때 탈곡해 주는 기계), 트랙터(논·밭을 가는 기계)부터 탈곡기(수확한 콩이나 홍화와 같은 작물을 타작하는데 사용하는 기계), 파종기(싹 낸 볍씨를 모상자에 담는 기계), 직파기(논에 물 안 데고 벼 직파하는 기계), 관리기(골도 타고 비닐을 씌우는데 사용하는 기계), 비료살포기(비료를 살포하는 기계), 사개배일러(추수한 후 남은 볏단을 묶는 기계) 등 그 종류와 쓰임새가 다양하다. 현대식 농기계의 구입은 정부 보조와 융자를 받거나 아니면 자부담으로 충당한다.
2. 마을 사람들의 하루살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먹고 자는, 가장 원초적인 면에서는 거의 같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많다. 과거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공업화, 도시화 등의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도시와 농촌이라는 생활 공간의 구분이 생겨났으며 도시와 농촌 사람들의 생활 모습도 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농촌 사람들의 생활 모습도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지금부터 봉곡 1리의 변화된 현재의 생활 모습 중에서도 하루살이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기로 한다.
1) 남자들의 하루살이
(1) 벼농사만 짓는 경우
① 농번기
5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들에 나간다. 7시쯤에 들에서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논에 나간다. 농번기 때는 점심을 굶을 때가 많고 대신 오전 10시와 오후 4시무렵에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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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 |
들에 나간다 |
아침식사 |
농사일 |
참 휴식 |
농사일 |
참 휴식 |
농사일 |
저녁식사 |
TV보기 마실가기 |
취침 |
② 농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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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6 |
7 |
12 |
기상 |
아침식사 |
낮잠 TV시청 |
점심식사 |
시내에 나가거나 TV시청 |
저녁식사 |
TV시청 마실가기 |
취침 |
(2) 벼농사와 젖소를 함께 하는 남자의 경우
벼농사와 젖소를 함께 할 경우에는 농한기에도 젖소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농번기와 농한기의 생활 패턴에 특별한 차이가 없고 비슷한 하루 일과를 가지고 보낸다. 다시 말하면 농번기와 농한기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① 농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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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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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 |
착유 |
휴식 |
아침식사 |
소여물만들기 |
논에 나가기 |
점심식사 |
논에 나가기 |
착유, 휴식 |
저녁식사 |
TV보기 |
취침 |
② 농한기
5시 30분에 일어나서 7시까지 1시간 30분 동안 착유를 한다. 아침식사는 8시에 하고 아침식사 후 오전 시간은 옥수수대를 베어서 썬 후 소에게 줄 여물을 만들며 보낸다. 점심식사는 12시 30분쯤에 하고 식사 후 오후 시간은 낮잠을 자거나 볼일을 본다. 5시 30분에 또 한 번의 착유를 하고 저녁식사는 8시에 한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TV를 시청한다. 다음날 착유 때문에 10시쯤에 잠자리에 든다.
2) 여자들의 하루살이
(1) 나이든 노부부만 사는 경우
① 농번기
5 |
6 |
7 |
12 |
1 |
3 |
6 |
7 |
9 |
10 |
||
기상 |
아침준비 |
아침식사 |
논에 나가기 |
점심준비 |
점심식사 |
휴식 |
논에 나가기 |
저녁준비 |
저녁식사 |
TV시청 |
취침 |
② 농한기
7 |
8 |
9 |
10 |
12 |
1 |
5 |
6 |
7 |
11 |
기상 |
아침준비 |
아침식사 |
집안일, 소일거리 (땅콩 까기) |
점심준비 및 식사 |
경로당 가기 (화투치기) |
저녁준비 |
저녁식사 |
TV시청 마실 가기 |
취침 |
(2)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부부가 함께 사는 경우
5 |
6 |
7 |
8 |
11 |
12 |
1 |
6 |
7 |
8 |
12 |
기상 |
아침준비 및 식사 |
아이들 학교보내기 |
논에 나가기 |
점심준비 |
점심식사 |
논에 나가기 |
저녁준비 |
저녁식사 |
밀린 집안일 TV시청 마실 가기 |
취침 |
6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7시에 아침 식사를 한다. 식사 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8시쯤에 논에 나간다. 12시쯤에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시간에는 다시 논에 나간다. 논에서 6시쯤 돌아와 저녁 준비를 하고 7시에 저녁 식사를 한다. 식사 후에는 TV를 시청하거나 밀린 집안 일을 하고, 또 마실에 나가기도 한다. 잠자리에는 11시쯤에 든다.
② 농한기
5 |
6 |
7 |
8 |
11 |
12 |
1 |
6 |
7 |
8 |
12 |
기상 |
아침준비 |
아침식사 |
아이들 학교보내기 집안 일 |
점심준비 |
점심식사 |
사회활동(기술센터에서 교육받기, 사물놀이) 개인 일 보기 |
저녁준비 |
저녁식사 |
TV시청 마실 가기 |
취침 |
3. 가옥구조 변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가옥 구조를 살펴보면 그 시대가 담고 있는 사회상이나 발전상을 볼 수 있고, 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 변화를 알 수 있다. 그래서 한 마을의 가옥 구조로 현 사회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봉곡 1리의 가옥 구조는 한옥, 반양옥, 양옥의 세 가지 형태가 있는데 이들 가옥의 변화 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이복례씨댁
이 집은 지은 지 37년째 되는 한옥집인데 결혼한지 5년만에 논에 흙을 돋우어 직접 지은 집이다. 현재 아랫방은 두지(?) 삼아 쓰고 있고 작은 방은 아들·딸이 명절 때오면 묵는 용도로 쓰인다. 마루는 수장목을 사용해 만들었다. 현재 부엌의 지붕은 옛날 그대로의 서까래이지만, 8년 전 그 위에 흰 페인트를 칠하고 씽크대를 들이고 바닥에 장판을 깔아 입식으로 바꾸었다. 지붕은 옛날에는 기와였는데 올해 봄에 슬레이트로 교체하였다. 두지에는 옛날에 쓰던 농기구나 쓰지 않는 장롱 등이 있으며 화장실은 땅에서 물이 솟아서 자리를 옮겨 새로 지었다.
2) 임병두씨댁
광복 이후 지은 집으로 초가집이었는데 20년 전에 기와를 올렸다. 기와로 된 옛 건물과 두지, 외양간도 20년 전 기와를 올릴 때 같이 지은 건물로 지은 후 한 군데도 고친 적이 없으며 지금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9년 전 주택개량을 했는데 정부에서 100만원정도 지원을 받고 나머지는 자가 부담으로 충당했다. 개조 당시 보일러를 들이고 방문, 창문, 부엌 욕실 등을 입식으로 바꾸어 지금은 반양옥집이다.
3) 임병환씨댁
이 집은 95년 정부에서 주택 개량을 할 때 융자를 받아 동네의 다른 집과 함께 양옥으로 개조를 했고 개조 전에는 초가집이었다. 지금은 자녀들이 모두 출가해서 부부 둘이 살고 있으며 명절 때 자식들이 오면 작은 방 두 개를 쓴다. 외양간과 두지는 개조하지 않았는데 나무로 만든 40년 된 건물이다. 외양간에는 소 1마리 키우고 있고 두지 안에는 농기구만 있다. 이 집의 총 대지는 50평이고 건물의 평수는 28평이다.
4. 마을의 현대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구미 공단이 설립된 이후 일자리의 증가 등으로 인해 많은 수의 젊은 사람들이 마을을 빠져나가 구미 공단으로 흡수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구미 공단에 인력이 부족해서 100% 취업이 가능했으며 현재 이 마을에서 5가구가 공단에 나가고 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빠져나간 인구는 많은데 반해 새로 들어오는 인구는 거의 없다.
1) 전력공급
1971년 농어촌 전기사업으로 12월에 공사에 착공하여 다음해인 1972년 7월 26일 100V 전기가 마을에 공급되었다. 면장의 추진으로 마을에서 한 가구 당 30만원씩, 30년 기한으로 융자를 받아서 공사를 시작했는데 융자 금액은 매달 82원씩 전기세로 내고 있으며 2002년이면 만기가 된다. 72년도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호롱불을 사용했다.
2) 상수도 설치
1995년 8월 15일에 상수도가 완공되었는데 마을 회의를 열어서 호당 6만원씩 자부담으로 내어 동장이 읍사무소에 의뢰를 해서 읍사무소의 건설계를 거쳐 상수도과에서 공사를 했다. 상수도 건설비로 국가의 보조는 없었다. 상수도가 생기기전에는 동 회관 앞에 있는 공동 우물을 이용하거나 집에 펌프를 설치하고 지하수를 파서 식수로 이용했다.
3) 난방시설의 변화
1980년대에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연탄이 보급되기 전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땔감으로 사용했다. 그 당시 나무를 많이 베어서 산에 나무가 없어 멀리 3㎞ 밖에까지 가서 나무를 해 왔다. 기름 보일러는 1990년대 초에 들어 왔으며 현재는 대부분의 집에서 기름 보일러를 사용하고 있다.
4) 주택개량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만드는 사업을 했는데 이 당시에 많은 집들이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기와집은 찾아 볼 수 없었고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다. 현재 이 마을에는 초가집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생활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해 대부분의 집이 입식 주택으로 바뀌었고 양옥집도 많이 볼 수 있었다.
5) 전화와 TV의 설치
전화는 1970년대 말에 보급이 시작되었고 1980년대 중반부터 보편화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대부분의 집에 전화가 설치되어 있다. TV는 베트남 파병 시기에 최초로 흑백 TV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6) 교통 수단의 변화
이 마을에 30년 전인 1970년대에 오토바이가 처음 보급되었는데 현재 70%에 이르는 가구에서 오토바이를 소유하고 있으며 선산에 나가거나 논, 밭에 갈 때 등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트럭, 자가용 등의 차는 현재 20%의 가구에서 소유하고 있다.
Ⅳ. 세시풍속
현대의 세시는 설과 추석과 같은 큰 명절을 제외하면 거의 행해지는 것이 없다. 물론 이런 큰 명절도 간소화된 것도 사실이다. 가을에는 군에서 주부대학을 운영해서 졸업하신 분들도 몇몇 있고 선산농협 문화회관에서 챠밍과 사물놀이 같은 것들을 강의하고, 농촌지도소에서 꽃꽂이와 요리를 강의해 젊은 층 주부들이 취미 생활과 여가 시간을 즐긴다. 봉곡 1리에서는 요즘도 장은 직접 담아서 먹고 있는데 정월에서 삼월 사이 좋은 날 중 말날을 선택해 담근다.
4월에 꼼비기는 행해지고 있는데 못자리를 해 놓은 후에 그 해 1년 동안의 남·여 품삯과 기계값 등 품을 조정하고, 회의가 끝난 다음에 부녀회에서 음식을 마련하여 함께 먹고 마시며 논다. 이 때 경비는 선산읍장과 조합직원들이 찬조금을 준 것과 마을의 일부 사람들이 찬조한 돈으로 충당한다. 7월 꼼비기는 세 벌 논매기 후 사람들이 모여 함께 노는데, 2년 전 동장이 꼼비기를 두 번 하자니 돈이 부족하다 하여 지금은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노는 꼼비기는 하지 않지만 추수가 끝나면 동네 어른들이 경로당에 모여 노신다. 또 1년에 한 번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관광을 간다. 한식날에는 나무를 심고, 묘를 둘러보고 묘 주위를 다져주고 술도 뿌려준다.
어버이날은 동네 어르신들께 돼지를 한 마리 잡아서 술과 함께 경로당에서 대접한다. 어버이날 유일하게 공동 윷놀이가 행해지고 있는데 부녀회장님 댁에서 부녀회원들이 노인정에선 어른들이, 그리고 동사에선 작은 윷놀이를 한다. 과거에 행하여 왔던 다양한 세시풍속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정월
정월 달에는 약이 된다고 송편을 해먹는다. 송편은 땅콩이 많이 나서 땅콩과 설탕을 섞어 고물로 사용한다. 봉곡1리에는 과거부터 한 집 건너 한 집이 점집이었을 정도로 점을 보는 집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점을 보는 집이 3집이 있는데 대부분이 보통 할머니(김정순 30살부터 ....)에게 사주를 보러 간다.
1) 설
추석과 함께 우리 나라 최대의 명절이다. 밥 제사를 지내지만 떡국은 만들어 먹고 깨강정, 땅콩강정, 쌀강정과 술을 만든다. 제기차기, 연날리기, 윷놀이 같은 민속놀이를 즐긴다.
2) 대보름
찰밥을 해 놓고 그 위에 숟가락을 놓고 기도하며 가정의 안녕을 기원한다. 귀밝이술을 마시고 부럼을 깨물고 강정을 해 먹는다. 봉곡2리 사람들과 횃불놀이를 한다. 횃불놀이는 40년 전까지 놀았던 놀이로 정월 대보름 저녁에 봉곡1리와 2리 아이들이 두 마을 중간 논에 모여 놀았다. 불을 깡통에 넣고 돌리며 노는데 편을 지어 깡통을 돌리며 상대편으로 갔다가 오는 식으로 서로 상대편으로 깡통을 돌리며 우르르 갔다가 돌아온다. 편은 봉곡1리 아이들끼리 한 편이 되고, 2리 아이들끼리 또 한 편을 만들어 두 편으로 나누어 논다. 놀이를 할수록 깡통을 돌리는 시간도 많아지고 세게 돌리게 된다. 그렇게 놀다가 상대편에서 무서워서 이쪽으로 깡통을 돌리며 오지 않으면 이기게 된다.
3) 귀신날
야광귀가 집집마다 다니며 신발을 맞추어 보기 때문에 해를 당하지 않으려고 신발을 엎어놓는다.
2. 2월
1) 영등날
2월 초하루 날로 영등 할마이가 내려오는 날이라고 한다. 이 때 딸이 함께 내려오면 바람이 불고 며느리가 함께 내려오면 비가 온다고 한다. 이 날은 집안 이곳 저곳에 쌀밥을 해서 두고 두지(고방)에도 밥그릇을 둔다(부자가 되라는 의미라고 한다).
2) 물방새날
2.9일 2월 초하루에 영등 할마이가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날이라고 하다. 이날을 장독에 물을 떠다 놓는데 매일 물을 간다. 이 날은 손이 없어 장담그기엔 좋은 날씨라고 했는데 이 날에 담그지 못하면 정월에서 삼월 사이 말날에 장을 담근다.
3. 3월 삼샛날
온갖 짐승이 다 나오는 날이라고 한다. 특별히 행하는 놀이나 음식은 없다.
4. 4월 한식
1) 한식]
묘를 이장하기 좋은 날이라고 해서 묘를 이장한다.
2) 봄꼼비기
다른 지역의 풋구를 의미한다. 음력 4월에 행해지는 꼼비기를 봄 꼼비기라고 하며 못자리를 한 후 하루동안 휴식을 취하면서 노임을 조정하는 날이다.
3) 초파일
절에 가고 연등을 단다.
5. 5월 단오
봄에 행해지는 명절 중 가장 큰 명절로써 쑥떡을 해먹으며 머리결이 좋아지라고 쟁피(창포)에 머리를 감기도 하고 논물에 머리를 감기도 한다. 궁기(궁궁이)도 꽂는다. 봉곡 1리에서는 15년 전까지 단오날 그네를 뛰었다. 단오 날 2∼3일 전에 마을의 청년들 10여 명이 모여서 새끼를 꼰다. 새끼를 꼴 때는 모인 인원수 모두 만들지만, 꼰 새끼를 그네 줄로 엮을 때는 3명만 그네 줄을 만든다. 그네 줄은 꼬아 놓은 새끼를 함께 엮어 3가닥으로 만들고, 이것을 다시 한 줄로 엮어 만든다. 이때 사용되는 새끼는 집집마다 짚을 1단씩 낸 것으로 충당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네 줄은 단오날 아침에 솔밭 옆의 소나무와 마을 앞의 버드나무 두 곳에 메게 된다. 그네는 할아버지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마을사람들이 뛰는데, 그네를 뛰면서 노래도 부른다.(노래도 부르며 소원도 빈다.) 15년 전부터 그네를 메지 않은 이유는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없어, 그네를 맬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6. 6월 유두
과거에는 쌀이 부족했기 때문에 밀가루에 콩을 넣어 찐 떡(밀래떡)을 해서 논머리에 가서 풍농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제를 지낸다.
7. 7월 꼼비기
7월 꼼비기는 세 벌 논매기 후 떡(밀래떡)과 술을 준비해 3일 간 머슴들이 휴식을 취하는 날을 말한다.
8. 8월 추석
땅콩이 많이 나 땅콩을 고물로 한 송편을 해 먹고 성묘를 간다. 가족들끼리 윷놀이를 즐긴다.
9. 10월 고사
10월중 추수가 끝난 날 중 하루를 택해서 햇곡식으로 지낸다. 할머니 대에 성주단지를 마루에다 모셨는데 10월 추수가 끝난 깨끗한 날에 제를 올렸다. 성주단지 안에는 맨 먼저 추수한 것 중에 가장 좋은 나락을 담았다.
11. 동지
팥죽을 쑤어 먹는다. 팥죽을 뿌리거나 바르거나 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12. 섣달 초닷새
호박떡을 해먹는다. 왜 해먹는지 이유는 모른다. 단지 과거부터 어른들이 그렇게 해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먹었다고 하셨다.
13. 섣달 그믐
집안 여러 곳에 불을 밝혀 둔다. 솥 안에 종지에 참기름을 조금 넣고 문종이로 심지를 만들어 불을 피운다. 종지가 많이 그을면 그 해 농사는 흉하고 종지가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좋은 일과 풍년이 온다고 한다.
Ⅴ. 민속신앙과 의례
1. 동제
봉곡1리의 동성승제는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고 잡귀를 쫓아내기 위하여 약 30년 전까지 정월 초나흗날 밤에 지내왔다. 봉곡1리의 동제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누가 제관을 했는지 어떤 절차로 행해지는지에 대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또 너무 오래된 일인데다 제관을 했던 분들은 세상을 떠나서 알기 어렵다. 다만 우리는 점을 보시는 '보통할머니'가 과거에 동제의 제관을 맡아 보셨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지는 않았다. 동제를 지내던 소나무는 과거에는 나지막한 키에 성인 남자 둘이서 마주 않을 정도 크기에 넓게 그늘을 차지하는 가지가 주위로 넓게 퍼진 형태였다. 그 소나무는 주위에 온통 논뿐인 곳에 큰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었는데 이를 신성시했다(임종덕). 동제를 지내지 않을 무렵부터 이 소나무는 조금씩 시들어 가고 있어서 동제에 대한 신성성이 더 떨어지게 되었고 동제를 지내지 않고 몇 년 후 이 소나무는 완전히 시들어 버려서 지금은 나무기둥 밑둥만이 남아 있다.
이 마을은 평택 임씨 집성촌이지만 동제의 제관은 각성받이들이 맡았다. 제관은 마을 동회에서 공식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1년 동안 마을 사람들의 입을 오가면서 '올해는 누구가 괜찮겠다'라는 말이 동장 귀에 들리면 동장이 적당한 제관을 선정한다. 제관이 정해지면 동제 지내기 10여일 전에 동장이 찾아와서 제관을 하라고 권한다. 처음에는 사양했다가도 여러 번 권하면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동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샘물은 따로 있었다. 이 샘물은 마을의 중앙을 가르는 큰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마을이 끝나는 곳 왼쪽에 있다. 이 우물은 마을에 처음으로 생긴 우물이었다. 동제를 지내는 데에만 사용하고 다른 용도로는 쓰이지 않는다. 우물이 깊지 않아서 동제 사흘 전에 우물을 청소할 때 청소하기 쉽고 금방 다시 물이 고여서 마르는 법이 없었다. 또 물이 아주 맑았다. 사흘 전에 우물을 청소하고 제관은 우물에 금줄을 친다. 동제를 지내기 3전 일 동안 이 우물에 가서 여러 번 목욕을 한다. 신성시되었지만 동제가 사라지면서부터 이 마을에는 공동 우물이 여러 곳 생겨났고 수도시설도 생겨나 이 우물 또한 무형지물이 되어 버렸다. 이 우물은 동제가 사라지고 한참 동안 그대로 방치해 두다가 약 7∼8년 전에 묻어서 지금은 뚜껑만 보인다. 철조망 속에 다른 나무들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동제 음식은 다른 제사상처럼 형식에 꼭 맞게 복잡하게 차려지지는 않았다. 제관으로 선출되면 우선 동제 지내는 날짜에 맞춰 샘물로 술을 담근다. 돼지를 잡아 통째로 가마솥에 넣고 삼는다. 동제를 지낼 때도 돼지 한 마리를 그냥 올린다. 떡은 다른 고물과 간이 들어가지 않은 쌀만으로 한다. 또 제사 지낼 때처럼 여러 가지 과일을 장만한다. 동제에 쓰일 음식 장보기는 남자제관이 하고 음식장만은 여자제관이 한다. 제관으로 선출되면 집안에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이웃과 말도 하지 않고 부부관계도 갖지 않는다. 2년 동안 궂은 일도 보지 않고 상가집에도 가지 않는다. 집에 아이들이 있으면 아이들을 이웃집에 맡긴다.
제관은 우선 동제 지낼 때 맞춰 술을 담근다. 사흘 전에 여자제관이 샘물을 청소하고 금줄을 친다. 14일날 새벽에 붉은 흙(황토?)을 뒷산에서 퍼와서 동네 곳곳에 뿌려 두고, 동목에 금줄을 친다. 동제에 사용한 음식 모두는 샘물의 물을 이용해 만들고 동제 지내기 전에 남자 제관이 샘물에 가서 목욕을 여러 번 한 후에 여자제관이 가서 목욕을 한다. 목욕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밤 11시가 되면 남자제관이 음식을 짊어지고 동목 앞으로 가고 그 뒤를 여자제관이 따른다. 동제는 제관 부부가 함께 지낸다.
衁. 처 놓은 금줄을 걷는다.
遁. 자리를 펴고 그 위에 문종이를 편다.
鑁. 음식을 차린다
鱁. 향과 초를 흙위에 꽂아 두고 소지를 올린다.
ꁁ. 술잔에 술을 붓고 절을 두 번 한다.(이를 세 번 되풀이한다.)
동제를 다 지내면 술은 그 자리에서 음복하고 나머지 음식은 모두 집으로 가져온다. 다음날 정월 대보름날 회관에 정기 총회가 있는 날이므로 모든 음식을 회관으로 가져가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동제를 없애기로 한 것은 정월 보름에 개최하는 정기 동총회에서 결정했다. 예전에 동총회(사업계획, 동장 선거...)는 정월 보름에 했으나 동제가 사라지고 난 몇 년 후 신년 초부터 새로운 해에 시작과 함께 마을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사람이 모이기 쉬운 휴일 양력 12월 25일로 바꿨다. 동제가 없어질 때 이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다수의 의견에 밀려 결국 동제는 사라졌다. 동제가 사라진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나 타종교가 많이 들어오면서 자신의 종교에 대한 믿음으로 동제에 대한 정성이 결여된 것과 동제의 금기가 귀찮아서 동제를 맡을 제관이 없었다는 것, 또 동목이 시들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임중배). 또 다른 말로는 어떤 사람이 솔끼(송진)를 따서 기름을 만들어 썼는데 그 뒤로 시름시름 앓다가 소나무가 죽게 되어서 동제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임종덕). 그 당시 1969년 임운규씨가 동장을 할 때 과자, 명태, 소주를 가지고 동목 앞으로 가서 이제부터 동제를 지내지 않겠다고 고했다.
2. 시제
봉곡1리는 평택 임씨들이 태반을 차지하는 평택 임씨 집성촌이다. 시제는 음력 10월 9일날 지내는데 봉곡1·2리의 평택 임씨들뿐만 아니라 외지에 있는 평택 임씨들도 모두 참석한다. 평택 임씨의 시제는 예전에는 봉곡2리에 있는 묘지에 직접 음식을 짊어지고 가서 제사를 지냈으나 궂은 날씨에도 묘지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1984년 3월 1일 봉림재가 신축되었다. 또 봉곡2리에 청송 심씨의 재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터라 평택 임씨 가문의 재실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어서 16년 전에 어려운 살림에도 조금씩 모아 재실을 지었다고 한다(임중배). 본채와 아랫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기 방 2칸이 배치되어 있다. 이 곳 봉림재에서는 시제 뿐 만 아니라 문중 회의도 개최한다. 답사 마지막날인 9월 23일에도 족보문제로 문중회의가 봉림재에서 열렸다. 봉림재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고 왼쪽에 있는 철대문을 이용한다. 평택 임씨의 집성촌에 있는 재실이어서 관리가 잘 되고 있으리라는 기대에도 불구하고 제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시제에 모셔지는 조상은 호조참판할아버지, 절충장군 할아버지, 통정대부할아버지 모두 세분이다. 가장 연장자 3명을 제관으로 선출한다. 이 중 한 명이 참석하지 못하면 다음 연장자가 자동으로 제관이 된다. 시제 절차는 보통 제사와 같다.(임병균) 종답관리자는 봉림제의 아래채에 거주하면서 시제에 쓰이는 음식을 장만하고 묘벌초까지 담당한다. 또 제실을 관리한다. 하지만 지금 제실의 아래채는 비어 있다. 반듯하게 지어진 제실에 비해 아래채는 허술하고 제실 보다 더욱 관리가 안되고 있어서 조금 아쉬웠다. 종답을 관리하는 사람은 되도록 평택 임씨가 맡지만 타성이라도 무방하다. 종답에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제실과 시제에 여러 가지 해야할 일이 많지만 다른 땅에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더 이득이 가도록 했다. 그래서 과거에 가난하게 살 땐 서로 종답 관리를 맡으려고 했지만 요즘은 번거러워 서로 하지 않으려고 한다.
3. 개인치성
봉곡1리의 가신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신신앙을 아주 먼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고 미개한 신앙으로 여기고 있었다. 대개 시어머니가 모시던 것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모시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봉곡1리 사람들은 태반이 시어머니 때부터 모시지 않았다. 일부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모시지 않았다고 하는데 가신을 모시던 집안에서는 그냥 버리기가 뭣해 깨끗한 곳에 가져다 둔다고 산에 가져다 놓기도 하고, 점쟁이를 찾아가 가신단지 치우는 날을 받기도 했다. 아니면 그냥 곡식을 담지 않았다고 한다. 또 고방에 가져다 두기도 하는데 옛날에 곡식을 담았던 단지조차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 만약 딸을 낳으면 금줄에 숯만 끼우는 것이 아니라 고추까지 끼워서 다음에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기를 기원하고,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가거나, 강이나 산의 진귀하게 생긴 큰 바위에 가서 빌기도 한다. 또 동제의 제관을 맡기도 한다.
4. 일생의례
1) 출생의례
현대 여성들의 출생은 병원에서 이루어지고 태교에다 산후조리까지 하지만 과거의 여성, 30∼40년 전의 봉곡1리의 여성들만 해도 임신의 특혜를 받지 못했다. 봉곡1리의 태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뱃속에 아이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양서를 읽는다거나 좋은 음악을 듣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현대의 여성들은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집에서 아이를 낳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하지만 과거에는 집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봉곡1리의 여성들은 산파가 도와줘서 아이를 낳기보다는 이웃의 또래 사람이나 시어머니가 출산을 도와주고, 남편이 도와주는 경우도 있다.
과거에는 마땅히 따로 버릴 때가 마땅치 않았다. 탯줄은 뜨거운 물에 가위를 삶아 아이를 낳은 즉시 자른다. 탯줄을 끊자마자 바로 부엌으로 가서 밥을 하는 아궁이를 제외한 다른 아궁이에 넣어 태운다. 보통 소죽을 끊이는 아궁이에 넣어 태운다.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입는 옷을 배냇저고리라고 한다. 당연히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 놓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봉곡1리에서는 먹고살기에 급급한 시절에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배냇저고리를 만들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살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아이를 알몸으로 있게 할 수 없어서 아이 출산 후 집에 남은 천조각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산모가 직접 만들어 입힌다.
현대 여성들은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태반이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하기 때문에 대문에 금줄을 걸 필요도 없고 또 금줄을 칠 대문조차 사라진 것이 현실이다. 금줄은 출산 즉시 새끼줄에 숯과 고추를 꼽아 대문에 건다. 태어난 아이가 야무지게 크라고 돌을 꼽는 경우도 있으며 딸을 계속 낳는 사람에겐 밉다고 소깝(소나무껍질)을 꼽는 경우도 있다(김정순). 금줄은 일주일 후에 걷어서 담벼락에 그대로 걸쳐놓고 그대로 없어지게 둔다. 금줄은 외부 사람들에게 아이 출산을 알리고 액막이의 역할을 한다. 드물지만 현재까지도 집안에서 아이를 출산하면 금줄을 친다.
출산 후 쌀밥과 미역국을 먹는다. 붓기가 빠지라고 일주일 동안 호박죽을 먹기도 한다(조종이). 30∼40년 전에는 출산 후 쌀밥과 미역국조차 먹지 못하고 다음날 바로 일을 하러 가는 경우도 있었다. 삼칠일이란 말이 있었지만 봉곡 1리 여성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은 얘기였던 것 같다. 아이 낳을 직전까지도 밭에서 일을 하고 출산 후 3∼4일, 먹고살기에 급급한 나머지 바로 다음날에도 일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삼신을 신체를 두고 직접 모시지는 않지만 출산 후 상에 물을 떠놓고 그 위에 미역을 걸쳐놓고 안방에서 태어난 아이가 잘 성장할 수 있게 빈다(조종이). 삼신의 신체를 모시지는 않지만 삼신의 존재는 인식하고 믿고 있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짓는데 이름짓는 전문가를 직접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어른이 지어 주시거나 부부가 상의해서 그냥 짓는 것이 태반이다. 그럴 여유가 안되시는 분들은 "그냥 벌로 지었지 뭐"하신다.
2) 혼례
40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부모님들의 합의에 의해 혼인이 이루어지고 꽃가마를 타고 시집왔다. 봉곡1리에는 과거 마을 입구에 공동 꽃가마가 있어서 경제 사정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가 다 꽃가마를 탈 수 있었다. 30년 전쯤에는 선산읍에 택시가 생겨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꽃가마 대신 택시를 타고 시집오는 경우도 있었고 과거 성당을 다녔던 임중배씨는 성당에서 식을 올렸다고 한다. 요즘에는 연예와 예식장결혼이 대부분이지만 과거에는 같은 마을에서 이미 혼인한 사람이 중매를 서서 이루어지는 것이 태반이었다. 김정순 할머니의 경우를 보면 남편의 누나가 할머니의 마을로 시집오셨는데 할머니를 볼 때마다 "○○댁이 삼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시간이 흐른 뒤 남편의 누님이 중매를 서 혼인이 맺어졌다고 한다.
요즘은 서양식 예식장 결혼이 대부분이다. 요즘은 모두들 서양식 예식을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혼례가 아주 특별한 혼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모두들 전통혼례로 혼례식을 했다. 예식장문화는 약 35년 전쯤에 선산 읍에 있는 문화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으면 결혼식장을 대여해 주는 형태로 이 마을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사진 촬영료는 9000원으로 비싼 비용이 아니었으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해서 예식장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문화 사진관을 시작으로 점차 예식장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간소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예식장 문화가 정착되었다. 예식장은 보통 신부쪽 고향에서 많이 올리지만, 손님이 많이 참석하는 측 편의에 맞게 예식장을 잡는다. 4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전통혼례로 결혼식을 치르고 친정에서 1년을 살다가 1년 후에 시댁으로 온다. 신랑은 혼례 후에 집으로 돌아오고 신부를 1년 동안 친정에서 살게 하는데 당연히 신랑의 출입이 잦아지고 1년이 지난 후에 시댁으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
요즘에는 손님접대를 거의 모두가 예식장에서 혼례식을 하고 뷔페에서 손님을 접대하거나 식당에서 남에 손에 맡긴 채 손님접대를 한다. 과거에는 외국수로 손님을 접대하고 외국수가 비쌌기 때문에 집안 가족들은 집에서 만든 국수를 먹었다. 요즘에는 신부측에서 어른들의 예단과 가전제품을 장만하고 신랑측에서는 집을 장만한다. 현대의 혼수가 과거보다 엄청나게 늘어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니 과거에는 혼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제적 형편이 되면 신랑에게는 40∼50년 전에는 최고 혼수품이었던 구두를 주고 신부에게는 은비녀, 은가락지, 양단 치마저고리를 주고받았고(임병균, 조종이), 30년 전에는 반지, 시계, 목걸이를 교환했다.
과거에는 부조금을 받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또 결혼식 비용이 지금처럼 많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부조금을 굳이 받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 전통혼례에서 예식장결혼으로 변화하면서 부조금을 받기 시작했고 지금은 결혼식 비용에 부조금이 큰 보탬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결혼식 후 신혼여행 가는 것이 당연한 결혼식의 한 절차와 되었지만 과거에는 가지 못했다. 아니 경제적 여유가 되어도 가지 않았다. 신혼여행은 서양식 예식 문화가 확산되면서 함께 들어온 서구 문화다. 서양식 예식 문화가 도입된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해 가지 못했고, 봉곡1리의 신혼여행은 지금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를 둔 분들부터 약10∼20년 전쯤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상례와 제례
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일생의례가 많이 간소해지고 편리해졌지만 상례만큼은 아직도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어른이 먼저 죽으면 아랫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아내...)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1주일 동안 밖에 나오지 못한다. 사람이 임종을 하면 즉시 손과 발을 거두고 코와 귀를 막는다. 이를 '염'이라 하는데 예전에는 동네 어른들이 했지만 요즘은 하기를 꺼려 장의사가 와서 한다. 호상은 부고를 인쇄해 친인척들에게 보내고 상복을 사는 것 이외에도 상주를 대신해 상례의 모든 것을 맡아서 돌본다. 호상은 상주가 주위에 친한 사람에게 호상을 맡아달라고 권한다. 사람이 죽은 즉시 초혼 부르는데 타성이 해도 무관하나 모두들 하기를 꺼린다. 초혼은 쌀 세 그릇과 입던 옷, 신발을 갖다 놓고 "복 복 복 ∼(죽은 이의 본관)신이 빨리 나가시오."라고 외치고 옷을 지붕에 던지기도 하고 죽은 이의 방에 가져다 놓기도 한다. 초혼에 사용되었던 쌀을 이가는 사람이 먹으면 낳은 다는 설도 있다.
봉곡 1리 사람들이 기억하는 장례식은 3일장이었다. 보통 3일장을 치르는데 궂은 날씨를 만나거나 명절이 끼어 있으면 5일장을 지내기도 한다. 관이 나갈 때는 6명이 관을 들고 동서남북으로 두 번씩 흔들면서 "중상 막소"라고 외치고 문 앞에 바가지(과거에는 박 바가지를 사용했지만 요즘엔 플라스틱 바가지를 사용하기도 한다)를 엎어놓고 맨 먼저 나가는 사람이 밟아 깬다. 집이나 골목길에서 관이 나가면 위패를 모셔놓고 술 한잔을 부어 놓고 절을 하는데 이를 발한 이라 한다. 봉곡1리 입구에 길 건너편에 상여집이 있다. 상을 당하면 상여 관리자(임병고)가 주관하기도 하고 상을 당한 집에서 주관하기도 한다. 상여집 안에는 요즘 사용하는 물건이 들어 있고 사용 명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이 난 집에서 일정한 금액 없이 형편이 되는대로 돈을 주면 마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상여 나가기 전날 저녁에 빈 상여를 메서 놀리며 앞소리를 하며 놀았으나 요즘은 하지 않는다. 상여가 나갈 때 상여소리는 묘 쓸 곳에 도착하면 그만둔다. 차를 타고 가는 경우에는 차안에서도 계속 상여소리를 한다. 산에 차가 올라가지 못하고 관을 메고 산을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밭 옆에 묘를 많이 쓴다. 봉분을 다질 때는 3번 상여 소리를 하며 그런 후에 묘에 잔디를 입힌다. 묘자리는 명당을 찾기 보다 지사가 상주가 가지고 있는 땅에서 묘 쓸 방향을 정해 준다. 현재 지사에겐 최소 20만원을 지불해야 한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지낸다. 이는 묘를 다 만든 후 집에서 하는 제사처럼 묘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며 지내는 제사다. 평토를 지낸 다음 남은 음식은 상여를 멘 사람들이 함께 먹는다. 정상적인 죽음이 아닌 노처녀 노총각, 젊은 사람이 죽었을 때나 몹쓸 병에 걸렸을 때 화장한다. 화장은 보통 터가 좋은 곳이나 절에서 한다. 제사는 옛날처럼 행해지고 있다. 대부분이 장남이 아니면 아버지대의 제사만 지낸다. 5대 봉사하는 할머니도 계셨는데 외지에 있는 자식들과 함께 지내지 않고 혼자서 지내시고 계셨다.
Ⅵ. 민속문학
봉곡 1리의 생업이 농업인 까닭인지 민요가 상당히 전승되고 있다. 그래서 모심기노래, 논매기노래, 방아소리 등의 농산 노동요와 상여계를 중심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는 상여소리를 채록할 수 있었다. 농산 노동요와 상여소리는 각기 이 마을의 전통이나 정체성과 관련되어 현재에도 남아있는 듯 하다. 특히 모내기 소리와 상여소리는 이 마을을 대표하는 민요로서 모내기 소리는 선산군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입상한 적이 있다. 또한 상여소리는 지금도 운상시 불려지고 있다. 이는 사회 변화의 흐름 속에서 현재와 과거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또한 이것을 구비 전승하는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하고, 전통문화를 향유할 때 연결의 고리 역할을 하며, 마을의 문화를 알리고, 이를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긍지를 심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설화
1) "무실"에 관한 이야기
왜 무실(茂實)이라고 하냐면 이 동네가 봉곡이라 봉이 사는 동넨데, 봉은 상상의 새지. 없잖아 용하고, 이것은 죽씨(대나무의 열매)를 좋아한대여. 열매를 좋아한대요, 그래서로 이 동네에 봉이 오래 앉아 있어야지 이 동네가 번영하고 잘 되고 이래서 몇 백년 전인가는 몰라도 아무도 어른들이 그리 무실이라고 안 지었나. 열매가 무성하게 잘 자라는 골짜기. 이 동네에 보통 내려오는 말이 "무섭다 ". 이 동네 청년들이 옛날 더세가지고 장날이 되면은 저 오늘 저 앞에 나가보자 해가지고. 요 와서 이래 앉았다가 장꾼 신찬한 놈 골라 가지고 시비 걸어 가지고. 술을 한잔 뺏아먹고 이랬대여. 그래 여기를 지내야지 장을 저쪽으로 가게되는거야. 무실 앞 봉곡을 무사히 지내면 그 날 장을 잘 봤다. 그런 말이 100여 년 전부터 와 가지고 해방 전에까지 그런 말이 있었는데, 나는 그 말이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2) 가재와 굼붕이 이야기
가재와 굼붕이가 한 곳에서 만났뜨란다. 만내 가주고 가재는 수염은 있고 굼붕이는 수염은 있어도 눈이 없다. 뭐 이런 이야기 하나 해 가주고 (제보자께서 아이목소리를 내며)할아버지 그랬어요. (이번에는 제보자께서 할아버지 목소리를 내며)그래 그래가주고 우했냐 하면, 가재하고 눈하고 바깠다. 수염하고 띠준게 눈도 없는 눔이 수염은 달면 뭣 하겠노. 고마 가재나 갖따 날랐는기뿌라.
3)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인간은 부지런해야 한다카지. 토끼하고 어 거북이하고 경주를 안 했나 했었는데 토끼가 거북이를 가소롭게 보고 낮잠 자다 본께 하마 거북이는 정상에 올라갔었어. 그래 갖고 거북이한테 졌다.
4) 평택 임씨 입향 전에 성씨들이 살았다
나는 추리컨데, 내 혼자 생각하기를 그렇게 생각하노 하면 뒷산에 올라가면은 대장군이라는 하는게 있어. 그 우에 가면은 산 우에 엄층 큰 분지가 있는데 그 오래됐어 30년도 더 됐지 싶어요. 그 당시는 여름 요새 되면 십일초 한다고 산에 풀을 비다가 반별로 갱지로 가 가주고 인제 모다가 때고 이를 적에 오래됐어. 그래 가니깐 아주 큰 비들이 옹기 조밀하게 마이 있어. 근데 고 당시는 벌초를 안 해도 지대로 벌초가 돼. 왜냐 소가 모심기 끝나면 산에다 풀어놓고 전부 소가 뜯어먹고 지대고 몰고 내려오고 이랬어. 자연히 벌초가 돼갖고 묘소가 깨끗했는데 요새는 그런게 없어졌어도. 뭐 산이든지 산소든지 간에 사람이 낫으로 깎아야 만이 산소가 좋아지는데. 고 당시는 가니, 소를 믹일지니깐 산에다가 방목할 때니깐 미들이 등기 등기 마이 있어. 그래 나는 거기도 이 동네 살아도 갈 일도 없고, 생긴 안 가 봤는데 첨 가보니, 아주 산이 좀 올라가기가 험한데 그기 올라가기도 힘들고, 근데 올라가니 핀핀한데 아주 큰 산소들이 마이 있는 거야.
이상하다. (요즘 볼 수 있는 무덤보다도 훨씬 더 큰 무덤입니까) 어느 시대인지 몰라도 이꼬지 산소를 들이자면, 보통 돈 없는 사람, 가문 없고, 세도가 없는 사람은 산소를 드릴 수가 없고, 자손이 번창했든지, 돈이 있든지, 세력이 있든지 그런 사람이 할 수 있는데, 할 수 있다고 해도 봉초가 요렇게 작지. 그렇기 클 수가 없단 말이라 (아∼) 그래 내가 어떤 어른한테 물으니깐 산소가 이렇기 있냐 하니, 이룰성자. 성씨네들 산소라 그럼 자손이 있냐그면 없어요. 오도 안하고 없는데, 그래어 내가 추리 큰데 우리가 오기 전에 그 사람들이 살았다. 생각하는 생각하는 기고(추측한다 이거죠) 저 쪽에 보면 산이 하나 있는데 이를 성자 성씨들의 산이 있는데 자손도 아무도 없어요 (네네 알겠습니다.) 한 사람이 마실에 사는 사람이 있긴 있는데. 우리보다도 그 앞에 살았다고 생각하고 또 저 (몇 대 조무덤 이라고 얘기 안 합니까, 그 분들이) 고 때 할아버지 청정한 할아버지가 옛날 할아버지가 오랜 친구 자식이 살았다 하는 기라 친구자식이, 그 자식을 누가 키웠냐 하면은 어느 시댄지 몰라도 이를 성자 성씨니가 살았다. 아무도 몰라요. (그런 전설이 내려오군요, 전설이) 그런말이라. 그래서 내가 추리컨대 아마 우리 앞에 그 사람들이 안 살았겠나 이것 뿐이지.
5) 소빼미들 이야기
올 저녁에 동장이 이캐여 여 소빼미들이 정식들이라. 정식이란 뜻이 솥안의 밥이라 이카지.(예) 들었어 (예) 됐어 그리 말하면, 그치만은 첨 듣는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여 어떻게 말하냐하면, 이 들은 비옥하고 살은 찌는 토지는 안 좋아도 일간 햇빛을 보는 시간이 길어여, 해가 뜨면 막 개운에 들이비치고, 산에 넘어갈 때까지 들이 봐 가주고 태양을 빨아땡겨여 첫째조건이 고 다음에, 자네들은 그런 것은 모르지만 옛날에 이 동네 땅들은 비가 많이 와 가주고 요세 태풍 오면 죽도 사자 가카낳는 나락이 물이 채 가주고 물 안에 들어앉아 가주고 밑이 물이 안 빠져 들에, 그럼 나락이 다 녹아 썩어버려. 알겠어. 그래서는 못 먹고 또 앞으로 가뭄단 말이라. 많이 날이 가물면은 물이 없어가주고 나락이 빌빌 돌아가 주고 못 먹고, 그래 가주고 지우 살아 붙었는데 가물다가 태풍이나 큰비가 오면 막 비가 들썩 와 가주고 나락이 묻히여. 그래가주고 낫을 가주고 비려 가는 거 아니라 모작에는.
배래치라고 알아, 비래치, 모르지 바구니 꽃 바구니 옆에 끼고 처녀들이 산나물 뜯으러 갈 즉에 바구니, 꽃바구니 싸리는 알아, 싸리나무 옳지, 싸리 싸리나무로 만들었는 이런 그륵 플라스틱 그륵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걸 나무로 만들어여. 그걸 옆에 끼고 산나물 뜯었거든 옛날에, 그런데 들에 가서 그걸 가주고 나락논에 이삭을 손으로 꺾어 넣여. 얼마나 없길래 그러노. 그러니 여기는 한 마지기가 200평이라, 토질이 좋은데는 150평짜리도 있고. 강원도는 감순은 한 마지기가 저 80평이 되고, 경주 영천지부는 같고, 상주지방으로는 150평이 한마지기라. 여기는 땅이 안 좋아서 200평이 한 마지긴데, 한 마지기 나락 다하면 한 되기도 안 되는 수가 있어. 잘 머야 두 솥, 나락 네 가마니 먹은 기라. 그런 시절이라.
그런데 이 들은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못이 갇혀 가주고 물이 잘 빠져 나가여. 그리고 아무리 날이 가물 라도 요 밑에 산밑에 가면은 수은이 좋은게 있어 못이 있어 하나, 그 못이 면적이 천평인데, 임진갱이라고 지금부터 약 60 및년전에 큰비가 와 가주고 여게 제방이 터져가주고 실어 묻었는 것을 우리 큰 아버지께서늘 정부로 신청을 해가주고, 동제 자체로 그 못을 새로, 옛날에 못이 조마난데 새로 맨들났어. 크게 맨들났어. 그래 우리 큰아버지께서 그래 했다 이기라. 그래서늘 지아무리 비가 안 와도 거기서 수은이 좋아서 물 대가주고 나락이 잘 되고, 아무리 비가와도 물이 쭉 빠져 나락이 잘 돼. 그래서 솥 안의 밥처럼 굳어났는기라. 그렇기를 솥 안의 밥, 솥뱀(鼎食).
6) 친구 이야기 1
친구 친구카면 자네들은 요 같이 있으면 친구, 학교 댕길 때 봐서는 참 떨어져서는 우앨꼬 싶우고, 졸업할 때 울고불고 난리나, 그렇지 (네) 그러나 오래 가다보면 다 잊어버려지고, 그런 친구들 생각이 가끔 날 때도 있고 이래. 과연 그 사람이 옳은 친굴까 또 과연 그 사람이 내 몸과 같이 걸길 친굴까, 선산지방에 흔히 흔해 빠진 이야기 자네도 알란지도 모른는데, (몰라요) 아들이 친구 친구 카면서 친구들 그렇게 좋아하더래. 그래 "애 이놈자식아 니 친구 얼마나 그러길래 친구 친구카노, 그래 친구 한 번 시험 한 번 해봐야 되겠네" 개를 잡아라 카더라. 집에 개를 개 껍데기 빗기면 우에데노. 벌겋게 피가 흐르잖아. 지게 다 지고, 바소쿠리 알지 (예) 달고, 홑이불, 여름에 덮고 자는 이불 얄부리 한거 그 걸 뚝 덮으깨노 피가 배 올라오잖아. 져라 카네 지게로, 그래 아버지는 뒤따라가고 누가 질 친하노 니가, 안 들었어여 이런 거 이야기 (들었어요, 근데 기억이 안나요, 예전에) 그래 거 아무니가 친합니다.
그래 그 집에 가가라. 지게를 살짝구니 내려놓고 반쯤에, 불려라 친구, 친구 불려가주고 아무게 보게 누구하고 이야기하다 본께 직였네 내가 그 사람을, 혼자 치울라 카네 겁이 나 죽겠네 나 좀 도와주게 부탁을 해 봐라. 이 카. 아부지는 숨고, 아들이 그 집 불러내간께 쫓아와가주고 어이 왠일이라. 그래 그게 아니고 사람을 직어가주고 보니, 묻으려 갈라 까니 겁이 나서 좀 도와주게. 우에 돼 그래. 거 같이 같이 묻어 가 주면 안 되잖아 걸리잖아. 아. 각중에 배가 아프고, 오늘은 어떠고 저뜨고 핑계를 대가주고 방에 들어가뿌드래, 그래 아버지가 나가주고 그게 친구야. 또 한 집에 더 가보자. 역시 그렇기 거절하더래. 그렇기네 아버지가 어느 집에 가더니 지게를 내려놓고 너 저짜 가거라. 여보게 아무개 자는가 카니 묻더래 아버지가, 아버지 친구야. 어이 카니 나간 게네, 다름이 아니고 이만저만해서 내가 하다보니 사람을 직였는데 좀 도와주게. 아 이 사람아 어애다 그랬노. 가만 있어봐. 집에가 방에 들어가 잠깐 옷 좀 갈아입고, 깨 좀 가지고 오겠다고 그래 도와주더라. 이것이 친구지, 지낼 적에 좋다 카면 그게 어디 친구야.
7) 친구 이야기 2
옛날 어떤 친구가 있었단다. 헌데 우연한 기회에 이 친구가 잘못해가주고 재판소에 걸려가주고 재판을 하다본께 사형이래 사형집행을 받게됐는데, 죽기 전에 재판장님한테 제발 부탁합니다. 나는 죽는 건 좋은데, 나 많은 노모가 계시는데 함 만내도록 해 달라고, 내가 효도하고 오겠으니 만나게 해달라고, 누가 신용을 해 주겠어 그 말을, 사형 받았는 사람을. 금방갔다오는가 해도, 빨리 갔다와도 한 사흘이 걸리는 그른, 거리는 안 멀어도 옛날에는 걸어가기 때문에 안 그래 (예) 그 말을 우에 믿노, 그럼 우에면 좋겠습니까 하니, 안 된다, 예 그럼 내가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사람한테 부탁해보겠습니다. 하이고,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말아라. 니가 암만 친구라 캐도 누가 그런 걸 들을 친구가 어데있노. 안 되면 안되고 함 불려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 좀, 그래 죽는 놈 원이나 들어준다고 불렸대 그 사람을, 그래 와 가주고 너는 아무개하고 친구냐, 예, 그 사람이 인제 아무날 아무날 사형 집행되는데 엄마가 보고 싶어서 간다카는데, 니가 그 동안 대신에 들어앉겠나. 네 들어앉지요. 니 돌안놈 아니나 혹시나. 예 안 그렇습니다. 안 오면 어에 되는 거 아나. 네 지가 죽는거지요, 죽는 거 알면서 그런 거 허락할 수가 있나. 예 친구간에 그것도 못해가주고 어째 친구라 칼수가 있겠습니까.
좋다. 둘이 대면시켜 가주고, 친구야 내 틀림없이 올깨 걱정하지 말아라. 마음놓고 갔다 와 걱정하지 말고 갔다 와 카더래여. 갔디여 3일 후 오후 1시에 사형집행을 이야기 줄거린 단두대라, 단두대가 어느 나라에 있어 (단두대요 중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는데) 없어. 우리나라꺼는 단두대 작두가 하늘에서 내려와 가주고, 꽝 해가 주고 모가지 끊는 건데, 우리나라 총살이고 미국도 총살이고, 가스·전기 직이지 그래 안 직이여. 요새는 주사 나 가주고 직인다 카더구만은, 목안지 내밀면 우에서 작두가 내려와 탕 끊는데 그 걸 프랑스 사람이 연구했어 어떤 사람이, 그 연구했는 지가 제일 먼저 고걸로 죽었데여. 그리 죽을 긴데, 그래 아무날 한시에 죽는데 알고 있거라, 예. 그래 마음놓고 갔다와 이카더니 갔대요. 12시가 돼도 안 와 허허, 사형집행장에 끌려갔어. 요샌 말로 말하자면 목사 와 가주고, 불교 중이 와 가주고, 뭐 해주고 봉제는 어데니 설명 확실히 한 번 더 하게 하거든, 정각 한시가 됐어. 사형집행 딱 할라할게노 "멈춰 주시오" 카더라. 사육신 사형할 적에 그런 이야기들은 적 있어.
사육신 알지 (예) 단종 때문에 북소리, 천어소리 성삼문이가 지은 게 있어 그런 게. 다 아는 게 시간을 제촉하느라 죽음을, 그런데 막 먼데서 막 헐러덕헐러덕 헤헤 카면서 그 사람이 오더래. 쉽게 말해서 10분만 늦었어도 직였어. 기왕 같으면 직이는데, 그 직이는 사람 뭐라 캐, 이름이 망나니 막 춤을 추잖아. 망나니가 춤을 추고 있으면서 고개 숙이고 가만히 있었데. 미안하네. 아니 괜찮해여. 나는 자네가 내가 죽고 난 뒤라도 올 줄 알고 있어, 죽어도 자네가 오지는 안 하네. 난 죽고 난 뒤라도 자네가 온다고 믿고 있지 안 온다고는 생각 안 했네 그래여. 딴 사람이 왜 늦었노. 예 오다보니까 배가 건너야 돼는 데 뱃사공이 없어가주고 좀 배를 건네니라고 오다니깐 늦었습니다. 이것이 말로 친구지 히 그런 친구가 잘 인나 이야기란께 그런가 몰라도. 그리 이야기는 거서 끝인데
8) 효자 이야기
흔히 효자는 겨울에 잉어 잡어다 믹이고, 맞지 잉어(예) 복숭아 사다 믹이고 또 엄마가 뭐 아픈께로 살을 비어다가 엄마 삶아주고, 신라시대에는 자기 엄마 눈 멀은 엄마, 미느리가 저 만날 삼시시때 고기를 해줬다. 이야기 들었제 (예) 지렁이 잡아 삶아 주고, 봉사라고 살이 이렇게 졌다 카잖아. 그래 아들이 어데 갔다와 가주고, 아고 어머니가 어예 살이 이케나 뾶나 하니, 야야 새아가가 삼시시때 고기를 삶아 줘가주고 머서 살이 이렇게 졌다카네, 이상하다 가난한 형편에 어째 고기를 살 형편이 없는데, 정제 가서 이래 솥우방 뚜께로 보니, 지렁이가 한 그 있잖아. 만날 지렁이를 잡아다 줬대 엄마를 그래 살이 졌다. 그런 이야기가 있지만은 특별한 이야기라. 옛날에 옛날에 어느 곳에 이름난 효자가 살았어요.
그리 한 번은 우리 동네로 말하자면 조 5리쯤 떨어진 동네가 잔치가 있었어요. 그래 아침에 사람 나가주고 친구야 잔치 안 갈란 가 이카니, 가야지 그럼 가세. 어머님 다녀오겠습니다. 어데 갈 때 인사해야 되고. 그래 옛날사람은 어디 갈 때 곱게 인사하고 갔다와서 인사하잖아. 잔치 집에 갔어요 막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잔치를 잘 했든 기라. 그래 친구하고 겸상에는 하는 거라. 상 하나에 같이 묵는 걸 (예 겸상) 혼자 묵는 건 이상이고. 상을 받더니 효자라고 하는 사람이 (할아버지 고개를 숙인 채) 이카고 앉았어 안 묵고, 먹어 왜 캐여 음음사면서 안 먹더래여. 알았네 자네 맘 엄마 생각이 나서늘, 이 음식을 내가 엄마를 못 주고, 내가 이렇게 맛있는 것을 내가 혼자 어예 먹어여 미안하거늘, 자네 맘 알아먹어 그러면은 내가 갈 적에 지방 카면 알지, 그런 거 만들어내는 그 잔치 집에 안 주고 적이고, 고기고, 썰어 가주고 담아내 놓는데를 가방이라 그래.(가방이라고 그래요) 가방 (네) 내 얻어줄게 마음놓고 먹게.
그러니 먹드래여 다 먹고 그래 얼매간 있다가 이젠 가야 되겠는데, 아 참, 좀 있어 봐 내가 가방에 가 볼게, 자기가 돌란 소린 못 하고 친구가 친구엄마 갖다 주라고 또 다 머라고 내 얻어다 줄게, 다 머라고 캤거든. 그래가서 고게 다름이 아니고 그 마른 거, 젖은 건 안 돼, 마른 거 있거든 좀 싸주게. 그런 일이 있었어 잔치 갔다오면 할아버지 쌈지에 대추, 곶감, 과자 같은 거 넣 가주고 손자들이 달아매고 빼 수고, 그런 거 안 봤지 (네) 당신 시대는 없잖아. 우리시대는 그런 게 있었거든. 아고 미안하네. 생각했는거 보다 손님이 마이 와 가주고, 음식이 다 떨어져부려 아무것도 없네 카더래여. 어애겠노 할 수 없지. 친구 보게 생각했는 것 보다 손님이 많이 들어 와 가주고, 음식 장만했는데 다 떨어져가주고 아무것도 없다네. 그럼 할 수 없지 가세. 그래 왔어요, 와 가주고 친구는 저 집에 가고 그 사람은 이 사람은 집에 가야 되는데 들어갈 수가 없더래. 집에 왜 나만 맛있는 거 먹고 와 가주고, 어무니한테 어떻게 대하나.
집 나가서 뒤안으로 돌아가가주고 돌담 밑인데 돌아가더니만 앉아가주고 손가락에 (할아버지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은 흉내를 낸다.) 다 기아네 더래여 다 기아네고. 그래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오냐 잘 갔다왔나 전에 같으면 아들이 틀림없이 뭐 좀 갖다 주는데, 아무것도 안 주드래여. 그래 미느리가 왜 저렇고 싶어서로 눈치를 볼께로 왜 안 갖다주나 그 소리 못하잖아 안그래여, 그래 안 말도 안하고 말았는데. 그래 밤에 자면서 어머니 드릴 라고 뭐 좀 가져오는데 오늘은 잊었소 못 가져왔노. 글쎄 안 먹고 미리 쌀려고 하니 뒷집의 아무개가 얻어 줄라고 먹어라 뭐라 캐서, 하도 맛있고 먹고 싶고 좋은 음식 기라서 다 먹어 뿌龶디만은 그래 올라할께로 그 사람이 얻으로 가니깐 가방에 손님이 생각보다도 많이 와가주고 음식이 모자라서 다 나가고 아무것도 없다 캐서 그래 기냥 왔네. 그래 자네 당신이 올 때 볼께로 얼굴이 눈빛이 안 좋아 왔는데 왜 그래여. 기우고 나면 눈이 안 좋아여. 안 그라도 응 자네만 알고 있게 어머니한테 미안해서 어예 내가 대할 수가 있는고, 담밑에 가서 다 토했뿌렸네 네가. 이카더란다. 자 이야기는 끝이라. 얼마나 효자라 첨듣지 이런 이야기는.
9) 풍수 이야기
옛날에 임금님이 요새 말하자면 암행어사 식으로 가만히 민정을 살펴볼 라고 무관 하나, 문관 하나 하고, 유사시 써먹어야 되잖아 무관은 안 그래. 둘을 데리고 요새 말하자면 신촌이나 가 변두리를 간깨로, 크다란 종각에 지게에다 둘둘 말아 가주고 뭘 얹어놓고, 엉엉 울고 앉았더래 그래 내려본께 그 앞에 사람 죽으면 묻을 라고 구딩를 파 낳았드래 강정석이 사람. 그래 왕이 이보게 총각 왜 울고 있노. 예 지게로 지가 주고 우리 어머니가 죽어서르 가난하기 때문에 지게로 짊어지고 어디 묻으려 갈라할케로, 어떤 영감이 여 묻어라 카더래여 여게 여묻어여 명당인데 여묻어라캐서, 그래서르 죽자사자 파보니깐. 요거 이야기 끝나거든 박정희 대통령 아버지얘기 좀 해달라케 나한테. 여 묻을라케서 판케로 물이 이캐 나왔는데, 내가 가고 난 뒤에 묻고 난 뒤에 물이 나는 것은 내가 안 보니케르 모르겠지만 아무리 우리 어머니 묻을 데가 없다카지만은 물구덩이에다 어예 묻겠습니까.
그래서르 기진맥진하고 어데 갈 수도 없고, 인제는 그래 울고 있습니다. 그래 그따우로 갈채 주는 사람이 어데노 어데있노. 예 저 적에 갈천사가 있는데 그래 물으니 갈쳐줍디다. 거 갈천사란 영감이 어데 있길래 그래 말을 하노 에데 있노. 저조 저 집이 겝니다 저게 있습니다. 여여 본께로 방하나 정지하나 쪼만한 집에 다 찌그러기는 집에, 그런 집 안 봤지 자네는. 방하나 정지하나, 그래 문이 잠겼드래 문이 잠겼는데, 저 집에 있는 갈천사 그리 말하드래. 그라면 갈천사 문슨 말이겐노 갈은 실갱이 갈이라 실갱이갈. 민, 면옷이지 고려말쯤에 누가 가져왔어 목화씨 문익점 알지 들었지 그라가주고 경남 의령이 고향이야 거기다 씨를 심어 그래가주고 심어서 목화가 퍼졌지. 그전에는 옷을 모로 입는고. 미로 짰는 명지, 감히 꿈도 못 꿔, 부자가 돈 있는 사람 아니면 그래 갖고 이런 백성들은 모 입노. 1945년에 해방됐는데 6·25사변 날 때까지도 이불이 없고 옷이 없는 사람이 이 마실에 조씨라고 한 집이 딱 사는데. 그 집에 이불이 없어 가난해서르 밭이 없기 때문에 목화를 못 해여, 그러면 어떻게 자노 겨울게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가주고 방을 뜨시게때서 그냥 자는 기라. 일찍이 잔치가 나면은 아버지가 어른일께로 옷 입고 갔다오면은 아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갈아입고 갔다고.
거짓말이 아니야 실제로 우리동네도 그런디. 지금부터 말하면 고려말일께로 암만 안 데도 600년 가까이 됐네 옛날이야 안 그래여. 몇 십년 되지 안 했는가, 그때만 해도 이 동네 이불이 없고 가난한 사람이 이 동네 그래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600년이야 어떻겠어. 돈이 없기 때문에 이런 옷을 못 사입은께로 실갱이 알지 산에, (실갱이 예 알아요) 실, 실 툼불랑하는걸 그걸 사다가 끊어가주고 우에 우에 해가 주고 짜다가 옷을 하는데 있어 그래 갈이라. 그래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겨울엔 다 뿌사지잖아. 그게 그래 갈처사라 벼슬 안 했는 사람이 처사, 학생, 대자학, 정승, 우의정, 자의정, 영의정 그런 거 다 할라카면 너무 길고, 그래 갈처사가 그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갈케줘서 묻었다 카더래.
이 놈 영감 혼을 내줘야 되겠다. 이봐라 너는 당장에 대궐 안에 가가주고, 이 총각을 800냥을 돈을 지불하도록, 요새 말하자면 수표를 써 가주고 돈을 가져오너라 이랬더래. 총각 걱정하지 말고 이 돈 가주고 어머니 장래를 치루게 나는 왕이라 그런 소리 안하고, 그래 무관 데리고 이놈 영감 혼을 낼려고, 요런 빈달 졌는데 올라갔어여 정지하나 방하나. 이리오너라 이캤다 말이지. 밑에 사람이 대답을 한참 두 번 부르느께로 누구요 하면서 문을 확 열더니만은 빡빡 얼은 조그만한 영감이 누구 시오 이카더래. 당신이 저 아래 울고 있는 총각 어머니 거 묘를 거다 써라고 시위를 봐 줘가주고 그래 터를 잡아줬나할게. 예 그렇습니다. 어째서르 모르면 모르고 풍수가 아니면 그만이지 해필 물구덩이에다가 남 미를 써라고 잡아줘가주고 난처하게 맨드냐고, 천하에 고한 사람이라고 할케로. 당신이 뭘 안다고 이카노. 영감이 당신이 저기 저 800냥 생기면 그만이지. 얼마나 좋은 좋은 미터가 있냐고, 하마 800냥 준다는 거 다 알고 앉았어 허허 이해하여 이야기를 (예 그래 그 정도로 좋은 묘잖아요) 그 정도는 좋은 묘가 어디있노. 땅 속에 드가도 안 했는데, 돈이 공짜배기로 800냥, 그러면 자네는 800냥 돈이 얼마만큼 큰 돈 인줄 알겠는가, 모르지 나도 모르지 근데 추리를 해보자고.
우리 옛날 유행가에 노래에 이런 것이 있어 안장 우에 실어준 아 엽전 열닷냥 들어봤어. 엽전 열닷냥 가주고 출발지가 어딘지 몰라도 서울 과거보러 갔는기라, 밥사먹고 열닷냥 가주고. 암만 갈 때 차비만 안 줬어, 올 때 차비도 줬을 기라. 혹시 낙방하면은 열닷냥 가주고, 어디서 출발해 가주고 갔다가 왔는가 몰라도 열닷냥 가주고 서울까지 갔다 왔을께로. 800냥카면 및배라 열배하면 150냥밖에 안 되잖아. 40배 40배가 넘지. 사 오 이십. (큰돈이네) 큰돈 이제 그만하면 명당이지 무슨. 야 보통사람아니다. 뭘 알고하매 잡아졌다, 800냥 가주고 초상 잘 치루라고 그만하면 됐지 왜 카느냐고 하더래. 아이참카더니 잠깐만 기다리시오 카드만, 일어서드만 책이 나처럼 이런 헌책을 이렇게 수북히 해 났드래여. 이긴가 자꾸 책을 찾드만은, 아 여 있구나 하디만은 아차 카더래여 아차 카더래여 카디만은. 저기다가 두루매기 깨끼 입드래여 그 사람이 몰라 뵈셔 죽을 죄를 졌습니다. 아랫묵에 앉으라 카더래여.
시키는 데로 않을께로 아주 큰 절을 하는데, 눈에 이상으로 손을 올려가주고 딱 큰절을 하더래여. 내가 우엔 줄 알고 이렇게 절을 하오. 예 왕께서 오셨는거 아닙미까. 허 임금 아니냐 카더래. 당신이 그래 우에 알았어 하니깐 한 삼년인간 오년인가 잘 몰라도 카디만은 책을 끄잡아냈어. 네 5년전에 일진을 받아본께로 오늘 임금 여기 온다앖는데 적어 놨는데 만날 살다보니 잊어뿌라가주고 실수해서 미안하다고. 5년전에 임금이 오는 걸 오는 걸을 알았어 참 기가 맥히네. 당신이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우찌 집이 이렇게 찌까닥하는 집에 사오 하니. 무슨 말씀을 그래 하십니까 세상천리 여러 수백만 호가 살겠지만 집에 왕이 가는 집은 및집이나 되겠습니까 이만하면 이보다 더 좋은 집이 어데 있냐고. 알아듣겠어 (네) 앗고 듣고 보니 기가 맥힌기라 그래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예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배웠습니다 그래여.
그러면 대궐 와 가주고 나 죽으면 관원자리 하나 잡아줄라요. 잡아드리죠. 언제쯤 가면 되겠습니까. 경이 여가 나는 데로 말해라. 그래 언제 언제 만나자 그래 갔어여 갔는데 그래 다 해졌대. 대궐 안에 인제 임금마누라가 뭐라케 동궁마마가 저 원비가 들었는데 아주 악질이드래여. 왕비가 그래 돈을 줄라카더래. 왕이 그래 돈을 주는데 얼마 받어라 하나도 안 받을라 캐. 여기 살았던 우리 큰아버지가 글은 그렇게 좋은데 풍수는 안해여 안 할라캐여. 왜냐 풍수를 하면 돈을 받아야 되는데, 선비는 돈하고 멀어야지 가까이 하면은 더러버서 안 되여. 깨끗한 사람이 안 되여 돈을 멀리해야 그게 참다운 선비라. 그래 풍수를 안 배워여 그래 이 사람도 역시 안 받으라캐서, 왕이 하도 받으라캐서 못 이겨서 쪼매 받아 가주고, 가가주고 다리 다 졌뿌랬어.
다리 다 주고 하나도 안 받고 오는데, 왕비가 그 소문을 듣고 그 날 하인을 시켜 가주고 가면서 나한테 들러래 데궐 안에. 그래 간께로 그래 왕의 미터도 잡아줬는데 내 미터도 잡아 돌라고, 잡아드리지요. 그래 사례금은 3만냥을 줄라 카드래요. 예 미터 써 놓고 받지요. 임금한텐 십원 하나도 안 받을라 케놓고, 3만냥 줄라 까네 받지요. 언제쯤 할까요. 언제쯤 오면 되겠노. 왕비가 정실, 정실부인이 아니고 후실이라 첩이라 말하자면. 그래 사람이 인격적으로 안좋드래여. 그 사람이 이름을 내가 안 캐여 알아도 나도. 그랬는데 아무날 아무날 그래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래라고. 갔어. 그 날 지녁에 아무 연락이 없어. 그래서늘 수소문해 가주고 그 영감 사는 집에 가본께로 나간지가 뭐 및일 됐는데 하매 어데 사는지 모르고 말아여. 그 뒤로는 그 사람이 없어졌어. 그 이야기는 거서 끝이고
10) 박정희 대통령 부친 묘 쓴 이야기
박정희 대통령 아부지 이야기 이 참 재밉어여. 이건 실화라. 아께 그것도 실화래여 오래되어서 믿을 수 없지만은. 박정희 대통령이 원래 선산 사람이 아니야. 상주 살았대여 (상주요) 성주, 성주 살았는데 하도 가난해서 구미로 오게 되었는데, 구미로 오게 된 동기가 어데 있냐 하면, 박정희 대통령 할아버지 처가가 백씨래요. 박정희 대통령 할매가 백씨래여. 흰 백자 백씨들 제실이 구미 어디에 있었대여. 그래 그걸 관리하고 땅 부쳐 가주고 농사 지 갔고 먹고 살라고 구미로 이사를 왔대여. 그래 왔는데 박정희 대통령 할아버지가 나이가 얼매 살았노. 난 그것도 몰라요 나도 이거는 나는 책이 아니고 신문이 났는 걸 봤는기라.
옛날에 또 박정희 대통령이 선산에 살았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 총에 맞는 날부텀 김재구 알지, 총 싼 사람 재판기록에 남아 막 모다 나 신문을 아끼고 그 바람에 우리가 잘 살게 됐어. 선산 뿐 아니라 전국에 안 그래. 존경하고 애석한 마음으로 남가놨고. 그래 백씨가 박정희 대통령 할머니가 백씨기 때문에 왔는기라 성주서 이리. 그래 하다가 박정희 대통령 할머니 죽었단 말은 모르고, 할아버지가 죽었는데 언제 죽었냐 하면은 소한날 죽었대여. 대한이 소한 집에 놀려와 가주고 얼어죽었다고 소한이 더 춥다 못 땠다 이 말이다 말하자면. 하필 그 날 죽었는데 눈이 그렇게네 왔대여. 그래가주고 천지가 눈이 돼 가주고 바람이 쌩쌩 불고, 이래서늘 초상을 칠라카니 칠 수가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믹일 것도 없고 가난해 가주고, 가난한 사람들은 상여를 못 메여. 지게 지게 지고 가고 이랬어.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할아버지도 역시 못 살아서르 상여를 모하고, 여 말로 소군틀이라고 그래여. 나무 이렇게 두 개 미다고 사다리 그치.
해가 주고 거 얹어가주고 앞에서 두 사람 놀고 뒤에 깨자루 들고 가는 기라. 가보니깐 천지가 눈이 얼어가주고 어디 땅에 묻을 데가 없어. 가난하게 살다보니 미터가 어데 있노, 미터도 없는 거야. 가짠도 안해여. 도저히 안 되겠어. 그래 여보게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네. 집으로 갔다가 나도 저물고 낼 새로 와가주고 어데 묻어야 되겠으니 안 되겠다. 돌아 올께로 동네어른들이 나와가 주고 안 된다. 죽은 눔의 송장이 밖에 나갔다가 들오면 동네 망하니깐, 어디 가서 묻어도 인제 나가서 묻어라 카더네. 기가 맥히네. 하마 해는 다 져가고 어디 날은 추운데 어데를 갈꼬 어떻게. 그래 동네서 해 난다카니 또 새로 짊어지고 가지. 한 곳에 가니깐 눈이 요鶽게 녹아들어가 있더래여. 됐다. 우선 조게 다가 하고, 나중에 날 좋으면 파내다가 좋은데 인기자. 박정희 대통령 아부지가 아버님 용서하소서. 살아서 불효자 죽어서도 불효잡니다. 우선 여게다 계시면은 날 따시고 좋으면은 좋은데 내가 이장해드리겠습니다.
눈물 바가지 바가지 흘리면서로 땅이 얼어서 되나 안 그래여. 제우 해 가주고 이름만 이래이래 갈고, 다음에 어데로 인긴다고. 그래 마치고 집에 왔대여 그카다 보면 날도 저물었겠지. 그렇게 초상을 쳐가주고 나중에 이장한다 생각하고 피곤하겠지. 그카자면 상주가 안그래여 (네) 잠이 들었는데 어느땐가 몰라도 꿈을 꿨지. 박정희 대통령 아버지가 꿈을 꾼케로 십만 대국이라 카고 백만 대국이라 카면서 군사들이 마 새카맣게 창을 들고, 기를 들고 막 빠글 빠글 하드래 사람들이. 그래 이래본께로 저게가 자기 아버지 묻은 산손데, 그 앞에서르 백만대군이 막 만세라고 외치드래여. 하 아무리, 아무래도 기분이 나쁜 꿈이 아니라 이기라, 기분 좋겠지 안 그래여. 그래여 그러면 이장할 거 없다. 났또야 되겠다 그래 났뒀어여. 근데 박정희 대통령 아버지가 노래삼아 만날 아들한테 느그 할아버지 돌아가실적에 소한날 죽었는데 묻을데가 없어가주고 그래 하다가 이렇게 됐다 카는 이야기를 꿈이야기도 듣기 싫도록 이야기해 줬대여.
죽은 사람한테는 손자고, 박정희 대통령 아버지가 그 박정희 대통령 형제한테 이야기를 해 줬데여. 근데 그 동안의 이야기. 혹시나 자네들 우리 2댄가 초기에 장태석이라고 국무총리가 있었어. 모르지 그 사람이 경상북도 사람인데, 그 당시 세계에서 최고가는 학벌 영국 무슨 학교라 제일 (옥스퍼드 대학이요.) 옥 무슨 대학 나온 사람이라. 형제간에 육만석 칠만석이란 그런 부자집에 아들로 태어났어 장태석이가. 그게 그 터가 장태석이라카는 그 사람들 집안에 터고 장태석이 집안에사 내중에 미 쓸라고 애껴났는 (아, 귀한거네요.) 옛날에 죽을직에. 그래 해 놨는건데 모르고 이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 아버지는 옛날에야 모르고, 그 당시는 박정희 아니라 그 사람들 뭐했는 사람이냐 하면 경상 감사했어. 요새 말하면 경상북도 도지사라 그런 사람 터라. 그걸 모르고 박정희 대통령 아버지가 묘로 썼는기라. 그리 미를 써 놓고 세월이 마이 갔어여.
천하에 고한 놈 같으니라고 감히 어데다가 남의 터에다가 물어보도 안하고. 그 카겠나 안 카겠나 (그래요) 자네라도 그 카겠나. 우리턴데 왜 물어보도 안 하고. 그게 명당이라고 이름났는 턴데, 가만히 묻어 놓고. 당장 캐내라. 아이고 잘모했습니다. 캐내지요. 인제 났둬. 고 얘기는 쪼금 뒤에 미루고 나서늘 있다가 할께로. 박정희 대통령 아버지로부터 만날 그 야기 많이 들었다는 기라. 그래 가난하게 살다가 느그 할아버지 장래를 했다. 하고 나서늘 내중에 인길라 칼게. 꿈에 백만대군이 만세라고 기를 흔들고 막 하는 걸 봤다. 그래서늘 아니讶다. 인길만 한데도 없고 기가 따갑도로고 들었지. 그래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어 안그래. 잡아자주고 하루 생가하니깐 아버지가 하던 생각났어. 아차 십만대군이 만세라고 기를 흔든다니깐 구미 고향에 다가 공단을 채려야 되겠다. 싶어 가주고 산을 깎아가주고 들을 미어가주고 구미 땅에 공장을 채렸거늘. 그래서 심 또는 할아버지 장래 지나고 꿈을 꾼게 자기 아버지가 십만대군 그 얻었다 그래. (그래잦고 묘자리는 안 옮겼겠네요.) 안 옮겼지.
지금도 그 자리라 그런데 그 이야기는 끝이야 인제는. 거서 끝인데 장씨들이 세력이 시고, 양반집에서 아주 놓은 소리하는 양반의 자손들이 그냥 있나카인케로, 국무총리로 나오고 이런 사람들인데 박정희 대통령 이름도 없고 안 끝도 없는 사람인데 그때는 캐네라 캐네라. 잘모했다고 자꾸 안 캐네고 있드라니깐 해방이 됐데. 해방이 돼가주고 막 시끄럽게 나라가. 그케로 고마 조용해 지드라네 재촉을 안 하드래, 바빠서르 제촉할세가 없고 이렇트래여. 그러다가 당장 캐네라고 아고, 국무총리 됐는데 그 집안에서는 막 난리가 났대. 잘모했습니다. 하마 및 십년됐노. 언제부터 캐내라 앖는데 이렇게 캐내지도 안하고. 이번 즉시 안하면 큰일난다고. 아고 잘모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집안이 가난해서 캐낼라 카니, 마땅한 데가 없서늘.
6·25사면이 났어. 전쟁이 나서 도망댕기 느라고, 이장이고 뭐고 정신이 없는기라 알겠는가. 응 그래 수복해갔고 나라가 질서가 없고, 인제 산소가 그는 뒷전 문제거라 우선은 막 정치하고 싸움하고 이카던차 쪼금 안정이 되니 또 와가주고. 이제는 이장하라. 예 할랍니다카니. 이미 박정희 대통령 할아버지 산소에 풍수설에 말하는 명기가 돌아왔다 이기라. 구테타를 이라가주고 정치를 꽉 잡으니, 감히 어느 눔이 말을 해. 안 그래 그래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 박정희 대통령이 한 거 알지.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에 고속도로를 맨들었는 거야 (예 알아요) 알지, 처음인가 세 번인가 직접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대여. 자기가 설계했는데 서울서 부산까지 가는 고속도로가 대체로 이렇게 생겼고, 이렇게 생겼지, 요렇게 생긴데는 딱 구미 여기 한 군데 있어요. 왜 그랬슬꼬 (묘있는데) 그 은혜, 아이라. 그 은혜 갚을라고. 장씨네 산소가 아주 웃대 높은 사람 산손데, 계급이 높은게 아니라. 옛날에 조상들 산소가 이렇게 했뿌리면 이 산이 날라가겠드래. 산소가 그레서늘 자기 할아버지 미터 양보해준 그걸로 갚았데여. 그래 지금도 고속도록가 그래있다. 그래서늘 명당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도, 명풍수들이 말하는 데로 할 것트면. 있어, 어데 풍수이야기 할라카면, 또 마이 있지 만은, 우에꼬 고만하지 뭐.
2. 소리와 노래
마을에는 1992년에 2년마다 열리는 선산군 민속경연대회에서 입상한 논매기 소리가 있다. 따라서 이 논매기 소리는 이들에게 있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내기 소리는 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그런 반면에 상여소리는 지금도 상례 때마다 불리고 있다. 그럼 상여소리의 앞소리꾼은 누구이며, 이 마을에서 어떤 존재 인가? 이 마을에서 조사된 상여소리, 농산 노동요, 유희요의 대부분은 임명수(남. 71)씨가 부른 것이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민요라는 말을 던졌을 때, 처음으로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이 마을에서 임명수씨는 사라져 가는 민요를 뚜렷이 기억하고, 이 마을의 농산노동요인 모내기소리가 대회에서 입상하도록 한 공로자이다. 마을 사람들이 과거의 민요를 떠올릴 때 기억을 되살리고, 그때의 현장을 재구성하는 역할을 이 사람이 하고 있으며, 민요에 대한 그의 자리는 이 마을에서 확고하며, 앞소리꾼의 조언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 왜 논매기소리는 사라져 가고, 상여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첫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논매기소리와 달리 상여소리의 현장이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다. 논매기소리의 현장이 농기계의 보급과 농약의 발달로 인해 그 효용성을 잃어 사라진 반면, 상여소리의 현장은 지금도 상여를 맴으로써 살아있다. 이것은 상여소리가 현재에도 불리워 질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상여소리는 이 마을사람들이 단결하는데 있어 일정부분 몫을 차지하고 있다. 상례와 같은 마을의 큰일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 사건중의 하나이며, 따라서 이러한 자리에서 불려지는 상여소리는 이 마을 사람들이 하나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상여소리의 부르는 형식에서도 이와 같은 구조를 읽을 수 있다. 상여소리는 앞소리의 선창이 있은 후에 참여인원이 모두 부르는 후창이 있다. 따라서 상여소리를 부를 때 소외되는 사람은 상주를 제외하고는 없다.
1) 평상시에 즐겨 불렀던 노래
(1)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낭께 앉지마라.
녹디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시가 울고 가네.
(2) 닐리리야
친구야, 명산 달 밝은데 오동초야 달 밝은데
이모야 생각이 절로 난다 닐리리야 ∼ 닐리리 닐리리
닐리리리∼ 아 애로 애로니, 바래로다.
2) 유희요
(1) 동대문놀이 노래
- 어렸을 때 고향에서 동대문 놀이를 하며 불렸던 노래로, 계속 반복해서 부른다. 동대문 놀이란 두 명의 아이들이 팔을 들어 문을 만들면 다른 아이들이 손을 잡고 지나가는 놀이이다.
"문열어라, 문열어라" "동대문 열어라"
(2) 그네를 뛰면서 부르던 노래
-단오 날 그네를 뛰면서 부르는 노래로 계속 반복해서 부른다.
"궁치야, 올려가라." "궁지야, 멀리 멀리 올려가라."
(3) 장구소리
- 장구소리는 장구를 칠 때 부르는 노래로, 이 노래는 봉곡1리에서 제보자 한 분만 부르실 줄 아는 노래이다.
안일 노지는 못하리라 안일 섯지는 못하리라.
춤나온다 춤나온다 이고리 장단에 춤나온다.
이 장단에 출넉차리면 대장군 남자가 졸장불세.
얼씨구나 좋다 저얼씨구 안일 섯지는 못하리라.
늙은 처녀가 갈 때는 이렇기 갈 줄을 내 몰랐다.
나에 집은 강원도 골짝 초가 단칸이 내집이오.
겉옷을 낡을 더도히 희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주소.
얼씨구 좋다 절씨구나 좋다 안일 노지는 못하리라.
안일 섯지는 못하리라.
3) 농산 노동요
(1) 논매기 소리
- 논매기 소리는 예전에 협동적으로 논을 멜 때 부르던 노래이다. 이 부분은 선창으로, 선창을 한 사람이 하면, 후창은 합창으로 대꾸를 해 주어 노래가 불려진다. 선창은 제보자처럼 마을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으로, 논매기 소리이외의 다른 여러 농산노동요에서도 앞소리를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봉곡1리의 논매기 소리는 8년 전에 선산군 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순위 안에 입상한 노래이다.
에에이 에이∼해요 어허오 어허어허오오 어허여 헤애.
우리가 몇백년을 산다고 논가운데서 이 짓을 하고오.
마른딸 진딸 다 흘리고 이이야 에이∼에효.
하오 하오 하오제 어호 오라 오
(2) 방아타령
- 방아타령은 각자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이 때 주인집으로 사람들과 함께 들어가 이 노래를 부르며 마당을 돌면, 주인집에서 술을 내온다. 평소보다 주로 비가 와서 일을 하다 멈추는 경우에 방아타령을 부르며 찾아간다.
에헤이 방아오.
이 방아가 누 방안고, 에헤이 방아오.
절철 초자 방아도, 에헤이 방아오.
이 방아가 어떻기 생긴 중 아나, 에헤이 방아오.
방아소리가 찰난도 하다, 에헤이 방아오.
저날적에 나도 낫지, 에헤이 방아오.
소리가 같다고 알 수가 있나, 에헤이 방아오.
값을 갚는 것도 오날 뿐. 에헤이 방아오.
방아소리도 찰난도 하다, 에헤이 방아오.
(3) 모심기 노래
- 예전에 모심기를 할 때 불렸던 노래로, 이 부분은 앞소리부분이다. 모심기 노래는 정해져 있지 않고, 그때그때 뒷소리가 앞소리를 되받아 불려지는 노래로, 30년전에 사람의 노동력으로 농사를 지을 때에는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이 노래를 불렸지만 지금은 제보자처럼 앞소리를 불렸던 사람이 아닐 경우에는 거의 노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저게 꼽고 저제 꼽고 지네 양반 허리도 꼽고,
태상걸랜 허든하고 집으로 가세 태상걸랜 얼른 손보고 집으로 가세.
이만하고 대귤하길 오늘 뿐일세∼
4) 생소리(상여소리)
봉곡1리에서는 상여소리를 생소리라 부른다. 생소리는 상조계가 존재하여, 상례 때 상여를 메고 가면서 부르는 노래로 앞소리와 뒷소리로 나누어져 있다. 앞소리의 경우는 한 사람만 부르며 일정한 가사가 있지만, 뒷소리의 경우 단지 후렴만 존재한다. 다른 노래들이 현재에는 불려지지 않는 것과는 달리 생소리는 상례 때 불려지고 있으며, 한·두 사람만 알고 있는 노래가 아니라,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은 알고 있는 노래이므로 전승력을 가지고 있다.
어하아 너허∼ 너영차 너하오
어하 오호 어호오 너하∼ 호이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어하 어호
너하영차 너하오 어∼호호이 너하오
북만삼천이 어데 생긴노 어호 어호
너하영차 너하오 어호호이 너하오
언∼제 가면은 언제 오나 어하 어호
너하영차 너하오 어어호이 너하호야
에해∼ 한심하고 나른 하다 어호 어호
너하영차 너하오 어어영차 너하호야
인생 유자고 하고 나자고 가나 어하 어호
너하영차 너하오 어어영하 너하호야
(다 가가주고: 묘 쓸 곳에 도착해서)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라 어하 어호
너하영차 너하오 어호 영차 너하오
새해 복만은 산천이 어디 생긴 노 어호 어호이
너하영차 너하오 어하 영차 너하호야
해에∼ 곳간에 싸고 나는 간다 (간다 : 합창) 어호 어호이∼
너하영차(합창) 너하오 너하 호아
무정하고 가련하다 어하 어호
너하영차 너하호 너하영차 너하호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어하 어호
너하영차 너하오 너하영차 너하호야
저승이라고 왜 생겼노 어호 어호
너하영차 너하호 너하영차 너하호야
자료출처 :- http://www2.andong.ac.kr/%7Eludence/%C0%FC%C3%BC%B4%E4%BB%E7/2000/%BA%C0%B0%EE1%B8%AE.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