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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1-27 오후 4:08:05 조회: 0 |
生物과목 좋아하던 중학생이 세계적 海洋水産學者로…釜慶大 金壽岩 교수
<유 희락 글,사진>
생태 동태 북어 황태 코다리 노가리…. 이렇듯 여러 이름으로 불리면서
우리 밥상에 오르던 명태는
왜 우리 어민들의 그물에서 자취를 감췄을까.
동해가 주어장이라고 배운 오징어가 서해에서도
많이 잡힌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에서 가장 큰 동물인 대왕고래가 새끼손가락만한 크릴을 먹고 산다고?
( 부산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횟집에서 .....김 수암 교수)
40여 년 동안 우리나라 주변 바다는 물론 북극해와 남극해와 그 해역에 사는 수산생물에 대해 연구하고 또 연구해온 세계적인 학자. 釜慶大學校 자원생물학과 金壽岩 교수. 이러한 그의 연구 업적과 성과는 지난해(2015년) 12월 과학기술계의 석학들이 회원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정회원이 됨으로써 부분적으로 공인을 받았다.
특히 기록해야 할 것은 金壽岩 동문은 대학졸업 후 줄곧 서울을 떠나 남극대륙을 비롯해 나라 안팎의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아왔지만 되도록 동창 모임에 참석하려고 노력하는 우리의 친구라는 점이다. 그는 지난해 섣달 19일 22회 정기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부러 부산에서 올라왔다. 그것도 부부가. 이 인터뷰도 그날 김 동문으로부터 어렵게 승낙을 받아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살아온 탓에 친구들과 자주 만나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와 다시 만나 것은 丙申年 새해가 밝은 뒤 열하루가 지난 11일 저녁, 광안대교의 환한 불빛이 보이는 부산의 횟집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수산전문가의 단골집이니 회가 어떠한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거기에 주인 내외의 인상도 순박하다.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학자한테 듣는 바다와 수산물, 그리고 인생 이야기. 회의 맛처럼 담백하고 쫄깃하고 씹을수록 달작지근하다.
중학교 때 편광범 선생님 영향으로 생물 좋아해
- 태어나서 용산고등학교에 입학 때까지의 살아온 과정을 말해 달라.
= 서울의 평범한 가정에서 2남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영등포구 본동(현 동작구 본동)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변두리에서는 일류 중학교라고 칭하는 龍山中學校에 입학했다. 부모님 두 분은 모두 이북 함경도에서 오신 분들이다. 중학교 때 생물을 가르친 片光範 선생님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생물을 좋아하게 되었다. 최원균 동문이 늘 이야기하는데, 당시 생물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학생은 오직 자기와 나라고 하데. 하하. 편광범 선생님은 2학년과 3학년 두해 내리 담임선생님이셨는데, 내 생활관, 교육관, 인생관에 큰 영향을 끼치셨다. 선생님과 한동네에 살고 있어 졸업하고도 자주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10여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용산중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은 마음속에 편광범 선생님이 살아계시리라 생각하네. 요즘은 사제관계가 많이 느슨해졌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우리 주변에 좋은 선생님이 참 선생님이 참 많았고, 그 중에서도 편 선생님은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돋보이셨다고 생각한다.
( 남극 연구단 월동대 )
- 편광범 선생님은 교육계에서 유명한 분이다. 80년대 상문고 비리사건이 터져 관선이사체제에서 교장으로 부임해 석달만에 학교의 복지시설을 획기적으로 바꾼 분으로 그 학교 졸업생들은 기억하고 있다. 龍山高에 진학 후 재학 중에 생각나는 일이 있다면.
= 우리나라의 대부분 고등학생들이 고등학생 신분을 벗고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대학생이 되고 싶어 했듯이, 나도 고등학교 생활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다. 대학진학에 대한 부담 때문에,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학교와 집을 왕복하는 것이 우리 생활의 거의 전부였기 때문이다.자네도 잘 알겠지만, 고1 고2 때 내리 담임이셨던 장재훈 선생님의 혹독한 후배 사랑의 매질이 유난히 기억에 남고, 국어시간에 金相大 선생님에게 많은 질문을 하면서 국어에 대한 재미를 붙이게 되었던 것 같아. 金 선생님과는 1982년 교환교수로 미국 시애틀에서 1년 계실 때,같은 대학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더욱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공부에 관한 것 이외에 등산이라는 취미가 생긴 것이 고등학교 시절에 얻은 큰 소득이다. 고1여름방학에 무전여행으로 혼자 속리산, 경주, 부산, 한라산을 다녀 온 것이 특별한 계기가 되어 산을 좋아하기 시작했고, 고1 가을부터 친구들과 산악회를 조직하여 체계적으로 산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때 사귄 친구들이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되어 지금도 아무리 바빠도 한두 달에 한 번씩은 만나고 있다.
바다 憧憬하고 거기에 生物 살아 海洋學 선택
- 대학에 들어갈 때 海洋學科를 선택한 동기라도 있나.
= 우리가 대학진학을 할 때에는 자신의 적성이라는 것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잖아. 대략 크게 문과와 이과로 나누고, 그 범주 안에서 자신의 성적과 지망하는 여러 학과의 예상 커트라인을 비교해 보고 적절한 학과를 골라 지원을 했었다. 내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화학과를 지원하려다가 그래도 생물이 사는 해양에 마음이 좀 더 끌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해양학과를 지원했다. 마침 당시에 해양이 인류의 마지막 남은 프론티어, 미지의 세계, 식량의 보고 등으로 사회에 조명될 때라 아마 쉽게 선택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의 학업에 대한 억눌림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회생활에 대한 갑갑증이, 바다라고 하는 거대한 대자연을 상대하고 동경하면서 우리가 더욱 자유스러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 사실 해양학을 접한 지 40년이 넘은 지금도 해양학을 택한 것이 후회스럽지 않다. 산과 더불어 바다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거나, 자신의 인생 항로를 정립하는데 숙고를 하게끔 만드는 것 같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편광범 선생님과의 인연도 작용했고.
(남극 세종 기지 전경 )
- 본격적인 질문에 앞서 해양학과 수산학은 무엇으로 구별하고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 쉽게 얘기하면 해양학은 바다에 대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수산학은 바다에 살고 있는 수산생물을 연구하는 분야다. 해양생물 중에서 인간이 식량 또는 약재 등으로 이용하는 생물을 좁혀서 수산생물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니, 해수의 성질, 해저지각, 플랑크톤 등을 더불어 다루는 해양학의 범위가 훨씬 넓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학문적으로 내 전공은 수산해양학이라고 부르는 분야인데, 해양학과 수산학을 연결하는 학문이다. 해양이라는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해양생물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연구하고 있다. 내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온난해지는 동해의 해양환경 속에서 명태는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환경에서 미래에 명태 어장은 어디에 형성될까 등을 연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 해양수산학을 잘 몰라서 그러니 이해해 달라.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연구한 분야를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 앞서도 얘기했듯이 40년 넘게 바다에 대해 공부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먹을거리인 수산생물이 왜 늘어나고 줄어드는지에 대한 문제를 주로 연구했다. 내가 다룬 생물들은 다행히도 세간의 주목을 받는 생물들이어서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았다. 미국에서의 명태 연구, 해양연구소에 다닐 때에는 남극해의 크릴 연구, 부경대학교로 직장을 옮긴 뒤에는 우리나라 해역에서 중요한 오징어, 고등어 등에 대한 연구, 그리고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연어와 다랑어 등에 연구를 했다. 우리 식구들은 음악교육을 공부했는데, 내가 공부한 것이 오징어 명태 고등어 등이라고 하면 모두 이상하다고 깔깔대고 웃는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우리나라에서는 정치학 경제학 문학 사회학 같은 학문을 해야 뭔가 하는 것같고 폼도 나지 않나.
명태 크릴 오징어 고등어 등과 生態界 관계 등을 연구
- 그러고 보니 잘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자주 듣고 먹는 물고기들을 연구했네. 그 얘기는 미루고 우선 김 교수가 살아온 얘기를 듣고 싶다.
= 서울대학교에서 해양학과 학사, 석사를 마치고, 해양 중에서 우리의 식량으로서 중요한 수산생물자원에 대해 더 연구하고 싶어 미국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학에서 박사공부를 하였다.워싱턴대학은 UW라고 줄여서 부르는데, 수산학 분야에서는 공학 분야의 미국 MIT와 같은 위치와 명성을 갖고 있다. 그 곳에서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가장 즐겨먹던 명태를 연구했는데 운이 무척 좋았다. 왜냐하면 미국 해역에서 명태가 그 때 폭발적으로 늘어나 명태잡이가 세계에서 아주 중요한 어업 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에서는 명태 연구 붐을 막 일으킨 때였고, 그래서 박사과정에 다니면서 우리나라의 수산청에 해당되는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에서 명태연구를 하였고, 박사학위를 마치고도 같은 기관에서 몇 년 더 연구하고 1989년에 귀국을 하였다. 그 때 연구한 명태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나를 수산전문가로서 일생동안 활동하게 한 것 같다. 귀국해서는 명태에 대한 연구에 전념할 수 없었는데, 내가 해양연구소에서 남극생태계 연구에 매달리기도 했지만 우리 정부에서는 그 당시 수산연구에 대한 투자를 거의 하지 않을 때여서 명태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할 수 없었다. 여담이지만 1990년대 국제 활동차원에서 베링해 명태연구를 3년 정도 수행한 일이 있었는데, 경제기획원에서 근무하던 이영근 동문이 우리의 제사상에 북어를 올려놓지 못할 것을 염려했는지 고맙게도 명태연구과제를 하나 마련해 준 적이 있다. 당시는 이쪽에 예산배정이 어려운 때였다.
- 명태에 대한 연구는 하지 않고 잡기만 했다는 말이군. 명태는 요즘말로 국민생선인데.
= 최근에 명태가 거의 사라져 버리니까 명태를 살려내라는 여론이 일고 정부에서도 명태 연구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명태가 사라져버렸는데, 어떻게 연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 되지 않는 연구비만 투자하면 사라진 명태가 돌아올 것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 명태자원 회복을 위한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야한다.
- 명태를 다시 살릴 방법은 나중에 다시 듣자.
= 이야기가 옆으로 갔다. 1989년 귀국해 해양연구소의 극지연구센터에서 남극생태계 연구를 시작하였다. 명태를 연구하느라 알래스카 해역에서 돌아다니다가, 또 다른 혹한해역인 남극해에서 연구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흔히 해양학자가 남극과 북극을 둘 다 연구하게 되면 바로 이혼감이라는 것이 미국 친구들의 농담인데, 내 상황이 그것과 비슷했다. 물론 우리부부는 이혼도 하지 않았고 잦은 해외출장으로 꿈에 떡 맛보듯 만났는데도 오히려 부부 사이가 더욱 돈독해져 항상 신혼과 같은 생활이었다. 좀 과장이 심했나. 하하. 남극과 관련된 수많은 해외출장,그리고 북태평양 수산연구에 대한 출장으로 눈코 뜰 사이도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마 1년에 해외출장을 10차례 이상, 날짜로는 110~120일 정도였다. 그래서 가족들에게는 많이 미안했고, 동기회 모임에도 자주 참석을 하지 못했다. 하여튼 남극연구를 하면서 1992년에는 세종과학기지에서 1년간 월동기지대장을 맡기도 했고, 남극해 어업을 관장하는 정부간국제기구인 남극생물자원보존위원회(CCAMLR)에도 관여했다. 요즘 우리나라 국민들이 좋아하는 ‘메로’라고 하는 생선이 있는데 남극해역에서 잡아 들여오는 것이다. 내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가 이 어업을 언젠가는 했겠지만, 그 당시 내가 CCAMLR의 과학위원회 부의장직을 맡고 있어서 우리나라 수산회사가 잡는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해양연구소를 떠난 뒤에는 극지활동이나 연구는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있다
( 남극에서 물개와 한때.....김 수암 교수 )
- 그러면 釜慶大學으로 옮기면서 연구하는 영역도 달라졌다는 것인가.
= 2000년 3월 해양연구소를 떠나 부경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90년대부터 불어온 기후변화 열풍은 인간의 사회 전체에 큰 회오리를 일으켰고 수산학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침 내 전공이 해양학과 수산학을 연결하는 학문이어서 난 비교적 쉽게 이 새로운 분야의 학문을 받아들였고, 국제적으로 추진되는 과학프로그램의 핵심멤버로서 국내외 학계에 기여를 할 수 있었다. 특히 해양연구소에서 부경대학교로 옮길 무렵 국제 활동이 활발해 졌는데,내가 중진국의 과학자였기 때문에 선진국의 과학자들이 더욱 신경을 쓴 것 같다. 선진국에는 우수한 과학자들이 많지만 자기들끼리만 그룹을 만들게 되면 범지구적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니까 중진국 혹은 개발도상국의 과학자들을 끼어 넣으려는 경향이 있거든. 말이 어느 정도 통하고 학문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과학자들이 이러한 활동의 포섭대상이 된다. 내 관점에서 보자면 선진국 학자들과 교류와 협력사업을 통하여 국내의 취약한 과학기반을 향상시킬 수 있고 후진들을 훈련시킬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다고 할까.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적인 정부간 해양기구인 ICES와 PICES에서 조직한 국제과학프로그램의 공동의장으로서 10년 넘게 봉사했다. ‘기후변화가 해양수산자원에 미치는 영향‘에 관련된 여러 국제회의를 주관하거나 국제심포지엄을 조직하여 이 분야의 국제적 과학수준을 향상시키는데 헌신했지. 아마 그 때가 내 인생의 황금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정부를 포함해 어느 연구기관도 이런 새로운 분야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은 국내에서도 이 사안에 대한 인식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지식기반 국가정책 수립’이라는 기본에 많이 미흡해 보여 답답할 때가 있다.
- 부경대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달라. 옮긴 동기는 무엇인지. 연구소 연구원과 대학교수 간에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 국립부산수산대학과 부산공업대학이 1996년에 통합해 설립된 국립종합대학이다. 아무래도 해양과 수산 쪽이 강하다. 내 경우 연구소에서 학교로 옮기니 연봉이 많이 줄었다. 그렇지만 유능한 후진들을 배출하여 수산학 후진국의 오명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게 대학으로 옮긴 이유였는데 다행히도 내 제자들이 잘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 잘 옮겼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은 국제심포지엄에서 우수한 논문을 발표해 상을 여러 차례 받았고, 석사학위를 마친 후 박사학위과정을 가능하면 외국에서 취득하게 하여 국내의 연구소에도 비교적 쉽게 취업이 되는 편이다. 앞으로 이들의 성공적인 활약상을 지켜보는 것이 나의 큰 소망 중의 하나이다. 언급한 것처럼, 여러 과학프로그램의 공동의장직을 수행하기도 했고 북태평양 연어에 관한 국제기구(NPAFC) 의장직을 2년간 맡기도 했는데, 이러한 나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우리나라의 젊은 과학자들이 해외 경험을 취득하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유학 알선, 국제심포지엄에서의 발표경비 지원, 해외 훈련 등에 대학원생을 비롯한 국내의 젊은 과학자들을 보내는 사업을 벌여 그런대로 적지 않은 학생들이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선진국의 해양수산 과학 활동을 맛보게 했다. 대학이나, 연구소, 혹은 정부가 주도하는 큰 사업은 아니어서 아주 큰 성공을 이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국내 스폰서와 국제기구가 공동으로 젊은 과학자들을 지원하는 나의 장학사업 방식 모태가 되어 현재 우리 정부에서 젊은 과학자 지원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있는 중이라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다.
- 우리가 매일 수산물을 접하면서도 그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 특히 김 교수 같은 국제적인 학자를 모르고 살아왔다. 김 교수 같은 학자가 있어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고 우리의 영양이 좋아지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생선요리와 회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평소 궁금했던 몇 가지 물어보려고 한다. 먼저 명태에 관한 것이다. 미국에서 명태를 연구했다는데 미국사람들도 명태를 먹나.
= 먼저 국제적인 학자라는 말은 과찬이고 단지 내 분양서 한눈을 팔지 않고 정진해온 평범한 학자라고 생각한다. 서양사람, 특히 미국사람들은 우리 동양 사람들과는 달리 먹는 어종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바다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동식물을 식용으로 삼고 있는데, 미국 사람들은 연어, 대구, 청어, 게, 조개 등 선호하는 10여 종만 식량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명태의 경우는 지난 40여 년 동안 세계의 바다에서 아주 많이 잡히는 어종의 하나다. 1970년대까지는 서양사람들이 먹지 않았는데, 최근 대구자원이 감소하고 명태 잡는 기술이 좋아져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대구대신 먹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의 보통사람들은 명태인지 모르고 먹는 경우가 많다. ‘Fish &Chip’이라는 음식에는 원래 대구가 이용되었는데 요즘 저렴한 식당에서는 명태를 사용하기도 하고, 우리가 많이 먹는 어묵의 경우 명태가 주성분이다. 미국에서는 명태가 대구 연어 다랑어 등과 더불어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어종 중의 하나이기에 많은 연구가 명태에 초점을 맞추어 수행되고 있다.
명태 사라진 과학적 원인 몰라…남북한 공동연구 아쉬워
- 그 흔하던 명태가 최근 거의 잡히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바다에서 명태가 왜 사라진 것인가.기후변화인가 아니면 어린 물고기를 마구 잡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놈들도 미국을 동경해 그 쪽 바다로 갔나.
= 그것을 쉽게 결론 맺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우리나라 해역에서 명태자원이 쇠락한 원인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우리 정부와 과학자들은 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하고 있다. 동해의 수온이 올라가서 냉수성 어종인 명태가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 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고, 1980년대에 노가리를 너무 남획하여 자원고갈을 부추겼다는 것도 사실이니 두 의견이 모두 맞는 얘기겠지만, 이러한 주장은 과학적 증거가 결여되어 있다.과학적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결론이 도출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행정가, 연구자들은 사실을 확인하기에 앞서 쉽게 결론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명태의 경우 북한의 원산만 해역이 명태의 주 산란장이기 때문에, 남북 공동연구가 추진되지 않는 한 올바른 연구가 수행될 수 없다는 사실도 매우 아쉽다.
- 최근 오징어가 동해에서 많이 잡히지 않고 서해에서 잡히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배울 때는 오징어는 서해에서는 잡히지 않는 어종으로 알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라도 있나.
=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징어는 동해에서만 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모든 바다에서 서식한다. 오징어의 수명은 1년으로 남해 먼바다에서 낳은 알이 부화해 새끼가 동해로 흘러가서 커다란 오징어로 성장하면 어부들이 잡는 것이다. 남해에서 태어난 새끼 중 일부가 서해로 가서 성장을 하고 잡히기도 하지만 동해에서 성장하는 오징어가 훨씬 많으므로 오징어하면 동해만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 동해안의 오징어 어획량이 줄어드니 서해에서도 잡히는 오징어가 부각되는 것이지 특별히 생태계의 변화때문은 아니라고 본다. (필자 주 : 2016년1월19일자 <강원도민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 어선이 북한 동해 해역에서 고기를 잡기 시작한 이후 동해안의 대표어종인 오징어의 어획량이 2004년 22,243t에서 작년엔 10,831t으로 반토막났다고 한다.)
- 명태와 오징어뿐만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조기 꽁치 등 우리나라 대표 어종들이 많이 잡히지 않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오징어도 결국 중국 어선이 많이 잡기 때문에 우리의 어획량이 줄어든 것 아닌가. 그동안 바다 속의 양을 생각하면서 잡았어야 했는데 마구 잡아 수산자원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기 때문인데 우리 어민들에게 자원관리에 대한 방침을 확실히 알려야 한다고 본다. 물론 기후변화와 같은 지구 환경변화에 의해 수산자원의 변화가 유발되기도 한다. 남획에 의한 감소는 관리방침의 강화로 조절될 수 있지만 기후변화에 의한 것은 우리의 힘으로 조절되지 않는다. 단지 기후와 생태계의 변화를 예측하고 적응책을 미리 강구하는 것이 최선이다.
( 러시아 방문객 )
씨 말라가는 魚種 살리려면 일정기간 잡는 것 중지해야
- 그러면 다시 살릴 방법은 있는가.
= 간단하다. 자연의 복원력은 뛰어나기 때문에 몇 년간 물고기를 잡지 않으면 줄었던 어획량이 다시 살아난다. 새끼물고기는 잡지 말고 특히 알이 들어있는 암컷은 잡지 말아야 한다. 일부 어종에 대해서는 모라토리움 선언을 해야 한다. 매스컴에서도 수산자원 보호에 관한 홍보에 동참해야 한다. TV에서 알배기 먹는 장면을 내보내면 안 되는데 우리는 오히려 알이 밴 암컷 먹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있다. 알탕도 좋다고 하고. 어미가 산란을 하여야 새끼도 부화하고 새끼가 있어야 우리가 잡은 어른 물고기도 생기는 것 아닌가.
- 모라토리움? 조업을 일시적으로 중지한다는 말이네. 정부와 우리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하면 좋겠다. 요즘 중앙정부와 강원도에서 살아있는 명태 한 마리를 잡으면 50만 원을 준다고 한다. 이런 것이 명태 살리는데 도움이 될까.
= 내 생각은 그것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정부에서 인공수정을 통하여 명태알을 얻겠다고 살아남은 명태에 현상금을 붙여 가뜩이나 얼마 남지 않은 명태를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래서 이들로부터 만든 수만 마리의 치어를 바다로 방류하면 성어가 되어 어업이 살아날 것이라고 광고를 하고 있는데 참으로 소가 웃을 일이다. 치어 수만 마리가 많아 보이지만 바다 속에 들어가면 티끌만도 못한 양이다. 명태 암컷 한 마리가 최소한 수십 만 개의 알을 갖고 있는데, 수 만 마리의 치어가 수산자원 회복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나. 더욱이 그것들이 바다 속에 들어가자마자 거의 다 잡혀 먹히거나 환경변화로 죽어 버릴 텐데. 작년 8월 정부 실무자들과 이야기할 때 앞으로는 현상금제도를 없애겠다고 했는데 요즘 그 방침이 또 바뀌었나 보다.
우리 南極연구수준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 올라서
- 바다뿐만 아니라 이 산천을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상태로 물려줄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화제를 바꾸어 남극 생활에 대해 들었으면 한다. 남극 월동기지 책임자였는데 역할은. 그리고 우리나라의 남극 연구의 수준은.
= 해양연구소에 근무하던 10년 동안 연구자로서, 그리고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남극해에서 해양학 연구를 수행하면서 남극크릴에 대한 국제공동연구를 조직하여 수행한 것이 연구자로서 갖는 큰 자부심이고, 세종기지 월동대장으로서 1년을 근무한 것이 관리자로서의 보람을 느끼게 한 중요한 일이었다. 월동대장 역할은 기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면서 과학적인 연구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인데,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1년이었어. 그동안 나와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생활해 온 대원들, 즉 전기기술자 요리사 의사 배관공 연구자 기능사 등과 함께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해 준 특별한 1년이었기에,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레슨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극지연구를 담당할 199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남극연구의 후발주자로서 세계적인 각광을 받지 못했었다.하지만 내가 떠난 이후에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극지연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여 우리나라는 쇄빙선을 보유하게 되었고, 북극권에까지 연구를 확대하여 극지연구 및 활동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직 극지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연구진이 어떠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 쇄빙선을 이용하여 공동연구를 하자는 제안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들었다.
- 남극 생활 중 있었던 어렵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 달라.
= 1991년 12월부터 1992년 12월까지 제5차 세종기지 월동대장을 맡았다. 슬펐던 것 중의 하나는 어머님의 임종이었다, 세종기지에 도착하여 업무를 인수한 날이 1991년 12월 19일이었고, 어머님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날이 12월 20일이었다. 일반 대원들은 부모상을 당하면 잠시 귀국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대장으로서 기지를 막 인수받은 터여서 장례식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떠나기 전날 중환자실에서 뵙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는 월동생활을 마치고 이듬해 귀국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라기보다 전 대원이 합심하여 위기를 극복하여 안전하게 기지를 보호했던 사건이 92년 5월에 발생하였다. 남극의 겨울은 보통 3월부터 시작되어 4월이나 5월에는 모든 것이 얼어붙게 된다. 바람이 약해지면 심지어 바다까지도 얼어버리므로 원활한 유류공급은 우리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에 있는 유류저장고로부터 실내의 발전기로 유류가 공급되어야 전기를 생산하고 난방을 할 수 있으며 해수를 담수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데, 5월 어느 날 갑자기 유류 공급이 중단되어 버렸다. 즉, 유류저장고로부터 발전기까지 연결되어 있는 수백m의 파이프 어느 부분에 물이 들어가 얼어서 파이프가 막힌 것이었다. 이미 겨울이 시작되어 외부세계로부터의 지원은 불가능하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원인을 찾아내어 해결해야만 하는 비상상황이었다. 실내에 비축된 유류는 얼마 되지 않아 생존에 가능할 정도만 발전기를 가동하고, 강풍을 헤쳐가면서 유류탱크에 올라가 두레박으로 조금씩 기름을 퍼 올려 발전기를 돌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임시방편이고, 근본적으로 언 부분을 찾아내 새 파이프로 교체하지 못하면 우리 대원 15명의 목숨까지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거다. 다행히 며칠에 걸친 대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말썽이 있었던 부분을 찾아내고 보수하여 위기를 극복했던 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재미있는 사건으로는 10월의 어느 날 안개가 어렴풋하게 낀 아침이었는데, 번쩍거리는 미확인비행물체(UFO)가 창문 바깥에 나타났다. 타원형의 테두리에 중앙의 밝은 돔 모양이 정말 잡지의 사진에서 본 UFO와 아주 유사하였다. 즉각 방송을 통하여 대원들에게 알리고 주의 관찰을 통고하였는데 몇 분 후 안개가 걷히면서 빙하에 반사된 태양이 안개를 통하여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주 흥분된 몇 분간이었지만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 혹한의 긴 겨울을 이겨낸 것은 대장으로서 김 교수의 탁월한 리더십의 결과라고 본다. 모친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하고 임무를 수행한 先公後私의 자세, 그리고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至誠의 마음을 지녔으니까 극한 상황 속에서 이질적인 대원을 하나로 묶어 끌고 간 것이 아닌가. 크릴을 연구했다는데 크릴의 크기는 어느 정도이며 큰 고래가 크릴만을 먹고 살아갈 수 있나.
= 크릴은 5cm정도이다. 이가 없는 고래는 엄청나게 많은 크릴을 바닷물과 함께 흡입한 뒤 걸러내어 먹는다. 약 46 억 년 전에 지구가 탄생한 이래 수많은 동식물이 출현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동물이 현재 생존하는 대왕고래이고 이것의 주 먹이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아주 조그마한 크릴이다. 대부분의 큰 동물들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식물이나 초식동물을 먹이로 하고 있다. 남극해에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크릴이 서식하고 있어 많은 학자들이 향후 인류의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크릴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남극의 해양환경이 아주 혹독하여 크릴이 얼마나 서식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지구온난화가 지금과 같은 속도로 진행될 때 크릴자원의 양이 어떻게 변화할지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극지연구소도 이러한 연구를 계속 추진해야 하는데, 내가 해양연구소를 떠난 이후에는 남극해 수산자원에 대한 연구가 중단되어 안타깝다.
硏究成果 인정 작년 12월 韓國技術翰林院 정회원 돼
- 지난해 12월 한국기술한림원의 정회원이 되었다고 들었다. 아는 분들에게 물어보니 과학기술계에서 한림원 회원이 된다는 건 대단하다고 한다. 설명을 부탁한다.
= 한국과학기술한림원(The Korean Academy of Science and Technology, KAST)은 과학과 기술에 전문적 식견을 가진 석학으로 회원을 구성하여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의 진흥에 기여하고자 1995년에 사단법인으로 등록을 한 학술단체이며, 2001년 과학기술기본법 시행령에 정부지원 육성대상 기관으로 명시되었고, 2005년 기초과학연구진흥법에 한림원의 법적지위를 명기하였다. 과학기술계 전 분야로부터 선정된 정회원의 수는 500명 이내로 제한되어 있으며, 70살까지만 정회원의 지위가 유지되는 일종의 명예직이다. 40년 넘게 해양수산학 연구에 종사한 과학도로서 한림원 정회원이 된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명예직에 눈짓하나 주지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만을 수행하는 많은 연구자들을 보면 죄송스럽다. 국제적 학계활동으로 허명은 얻었지만 학문적 내실을 단단히 다지지 못하여 동료학자나 후진들에게 창피할 따름이다. 참 나도 이번에 알았는데 한림원 조직 중에는 사업을 자문하는 한림원발전자문위원회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 동기인 국순당 배중호 사장이 위원으로 명단에 올라 있는 것을 보았다.
- 참으로 겸손하다. 해양학을 하면서 서울을 떠나 생활을 해온 게 아닌가. 서울 떠나 살아온 게 어떤지.
= 1981년에 유학을 떠나면서부터는 서울에서 직장을 가져 볼 기회가 없었다. 해외에서 8년,귀국해서는 안산의 해양연구소에서 10년, 부경대학교로 옮긴 후에는 부산에서 16년을 살다보니 내 젊은 시절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특히 1990년대부터는 해외출장이 잦다 보니 많은 국내외 친구들이 농담 삼아 내가 어디에 살고 있냐고 물을 때가 있다. 남극에 있는지, 한국에 있는지, 아니면 미국에 있는지. 사실 서울을 떠나 살아 온 삶이 내 인생의 절반도 더 되고, 계속 출장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울에서만 살아왔던 친구들보다는 서울을 떠난다는 것이 혹은 지역을 이동한다는 것이 쉽게 생각된다. 그래서 어디에 가서 살건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고, 각 지역이 모두 살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록 어릴 때 친구들과의 잦은 교류는 없다는 것이, 그리고 우리가 젊었을 때 자주 찾던 곳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적어졌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오래간만에 옛 사람을 만나고, 옛 장소를 찾아가 감회에 젖는 맛도 사실 나쁘지가 않다. 그러한 생각은 서울을 떠나 살게 된 생활의 반대급부랄까.
- 가족관계를 밝혀주면 좋겠다.
= 집사람(金永連 여사)은 내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함께 공부했다. 원래 대학원 공부를 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의료보험비가 비싸 할 수없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무슨 말이냐고? 나는 국비유학생으로 유학을 갔는데 학생의 부인은 의료보험료가 상당히 비싸더라고. 대신 대학원에서 한 과목이라도 수강신청을 하면 국비유학생의 부인은 수험료도 싸고 학생신분이 되어 보험료도 확 내려가기 때문에 할 수없이 학생이 되어 취미로 음악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음악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부산에 있는 新羅大學校 사범대학 유아교육과에 재직 중이다. 우리 부부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 꽃다운 나이인 29살이다. 이름은 김다정. 우리 부부에게 항상 웃음을 선사하는 우리의 복덩이다. 1992년 남극월동생활을 하는 중에 청소년을 위한 남극과학책을 한 권 썼는데, 제목을 “다정이에게 하는 남극과학이야기”라고 붙였다. 지금 부산에서 영어 선생님을 하고 있다. (필자의 손녀에게 주라며 오래전에 절판돼 집에 있던 책을 보내주었다. 어른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海外 돌아다니다 보니 同窓 자주 못 만나 미안
- 동창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 앞에서도 말했지만 해외에서 생활하고 출장이 많은 장돌뱅이 같은 삶이어서 동창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요즘 가끔 송년회나 반창회에서 동기들을 만나도 약간은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친구들도 자주 만나 실없는 농담도 하고 헤픈 짓도 함께 해야 우정이 깊어지는 법인데 내겐 그런 기회가 적었다. 요즈음엔 사정이 조금 좋아져 7반 반창회와 22회 송년회는 가급적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래도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은 것 같아 섭섭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모두 건강하고 되도록 넉넉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여생을 보내자고 말하고 싶다.
- 그동안 살아오면서 좌우명은.
= 거창한 좌우명은 없지만 모든 것을 상식선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한다. 상식이란 것이 우리 보통사람들이 가지는 보편적, 합리적 가치관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안에 따라서 가끔 문제가 되는 것은 상식의 기준점이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의견이 갈리는 것 아닌가. 내 판단이 맞는지, 틀린지 답을 모르고 방황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던데, 하여튼 너무 내 주장만 강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타인을 불편하게 한다거나 제3자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내 수양의 정도가 너무 낮아 자주 사람들을 흉보게 된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남을 포용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니, 내가 늙은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귀담아 들으려는 습관을 가지려고 한다.
- 나이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가에도 자유와 관용을 깨우친다고 하지 않았나. 끝으로 은퇴 후의 계획은.
= 아직 못 정했다. 10여 년 전만해도 나이 60이 넘어가면 은퇴 후의 생활에 대비하기 위하여 나 스스로를 재교육 하겠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벌써 60대도 반이 지나갔으니…. 은퇴 이후의 일은 아직 모든 것이 미지수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은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일 텐데, 즉 완전히 학계를 떠날 것인가, 아니면 활동은 줄이되 학술활동은 어느 정도 유지할 것인지를 정해야 할 것 같다. 교수들은 대부분 정년이 끝나더라도 학교에서 명예교수로 남아 한 학기에 한 과목 정도 강의를 계속한다. 그리고 자문을 요청하는 후배들이 있거나 연구용역 사업이 있을 때에는 정식 교수가 아니더라도 몇 년 동안은 대외활동은 가능하다. 내 경우도 은퇴를 하자마자 학계와 완전한 단절을 선언할 것 같지는 않고 당분간 부산에 살면서 미약하나마 연구와 교육활동을 지속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점은 나의 역할인데 후배 연구자들과 경쟁을 해야 할 분야라면 당연히 피해야 하고 후진들이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차지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은퇴한 많은 선배들이 자신의 활동을 조절하지 못해 후배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경우를 보았는데 그런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려고 한다. 교육에 관해서는 이제까지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젊은 과학자 양성교육이었다면, 앞으로는 더 어린 초등학교 혹은 중고등학교의 과학꿈나무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야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횟집에서 .....김 수암 교수 부부 )
- 바다를 연구한 사람답게 생각이 깊다. 해양수산학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연구성과나 업적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했다. 학문에 정진해온 자세와 넉넉한 마음씨를 조금이나마 드러내보였다는데 스스로 만족하고 싶다. 김 교수의 연구 덕으로 우리 바다의 자원이 더욱 풍부해져서 어민들의 생활도 더 좋아지고 우리의 식생활도 더 풍성해지길 바란다. 오랜 시간 고맙다.
글 사진 柳 熙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