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을 신적 존재로 정립한 조로아스트교의 발상지”
카비르(Kavir) 사막과 루트(Lut) 사막 사이에 위치한 야즈드(Yazd)는 실크와 직물 그리고 카펫을 생산하던 중심지였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인도로 통하는 무역상들(caravan route)의 거점지였다. 마르코폴로는 이 길을 지나면서 “매우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이며 상업의 중심지”라고 하였다.
야즈드는 사막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고온 건조한 기후 조건으로 인하여 통풍을 위해 공기의 내부 순환이 잘 되도록 건축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아무리 더워도 집 안에 들어서면 더위가 가시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건축형태의 주거지를 페르시아인들은 바드기르(badgir)라고 불렀다. 그리고 안뜰 중앙에 풀(pool)이 있어서 필요한 식수뿐 아니라 집안 공기를 시원하게 하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힘들지 않게 물을 공급받기 위하여 카나트(qanat)라고 부르는 지하수로(水路)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곳은 배화교(拜火敎)라 일컫는 조로아스트(Zoroaster)교의 불의 사원인 아타쉬가타(AtashKadah) 사원이 있는 곳이다. 이 사원은 불의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 아후라는 ‘신’, 마즈다는 ‘위대한’이라는 뜻)를 주신으로 섬기고 있다.
조로아스트교의 삼대 교리는 ① 좋은 생각(Pendar-e Khob) ② 좋은 말(goftar-e Khob) ③ 좋은 행동(kerdar-e Khob)으로 삶을 추구하는 종교이며 페르시아의 과거 국교였던 조로아스트교의 기본 교리였다.
사원 안으로 들어서면 1951년에 그린 교주 조로아스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 안에는 유리창으로 가려진 방이 있고 커다란 화로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이 불은 처음에 나히테 파르스(Nahid-e Pars) 신전에서 아가다(Aghda) 지역으로, 그후 1174년에는 아르데칸(ArdeKan)으로 옮겨져 300년간 있었으며, 1474년 이곳 야즈드로 옮겨진 후 지금까지 타오르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란 정부 정책은 조로아스트교의 포교 활동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어서 이곳 신자들이 외국으로 이주하는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조로아스트란 뜻은 아스테르(aster), 즉 별을 상징한다. 이 말은 점성학의 상징으로 불려진 단어이다. 창시자 조로아스트의 이름은 ‘낙타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며 이 말은 유목민의 단어였다. “오랜 전승에 의하면 조로아스트는 피타고라스를 가르쳤고 메시야를 예언하였던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고 헤르츠벨트는 말한다(E. E. Heazfeld : Zoroaster and His World, 2 vols, Princeton : Princeton Univ. Press. 1947).
18세기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볼테르(Voltaire)는 진리를 기독교 밖에서 찾을 수 있는 대안으로 조로아스트교를 언급하였다. 니체 또한 그의 대표작으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트를 가리키며 그가 ‘기독교 교리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조로아스트의 가르침이 페르시아에서 처음부터 즉각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당한 저항에 부딪쳤는데 오랜 옛날부터 페르시아인들은 아나히타(Anagita : 물의 신)와 미트라스(Mithras : 빛과 진리의 신)등을 숭배하였던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후일 조로아스트교가 국교가 되었을 때 이 신들은 아후라마즈다를 도우는 신의 존재로 변형되었다.
후일 기독교 이단의 원줄기였던 영지주의(gnosticism) 사상의 기원이 헬라(그리스) 철학의 이데아(Idea) 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헤롤드 브라운(Harold O.J.Brown)은 기독교 영지주의의 특징 가운데 그 전래가 고대 근동사상을 기반한 복잡한 우주론과 사색적 사상의 헬라적 요소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론을 가미한 형태라고 정의하였다.
특별히 가현설(Docetism)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며 그의 육체적 인간임을 부정하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초기 이단의 영향을 끼친 헬라의 이데아 사상은 기독교 초기 시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영지주의의 교주는 케린투스(Cerinthus)였다. 이에 대항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고 하였다(요이 1: 7).
이러한 영지주의적 요소의 그 기원을 네델란드의 역사학자 루카드불로와(Lukas De Blois)는 고대 근동의 신비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헬라의 종교중 일부라고 하였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적 이분법 사고는 조로아스트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승(tradition)되어 오는 사모스 출신 피타고라스(pytagoras)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platon)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볼 때 페르시아의 신비종교인 조로아스트교가 그 기원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L.de Blois & R.J.Van der spek. 윤진역, 서양고대문명의 역사, 서울:다락방, 2003. pp. 98-99).
또한 문화적으로도 고레스 2세 통치시기에는 많은 그리스 장인들이 페르시아의 건축물 장식을 만드는데 유입되어 파사르가데, 페르세폴리스 궁전 등을 건축하는 데 참여하게 되어 오랫동안 페르시아와 교류하였다.
조로아스트교의 경전인 아베스타(Avesta)는 약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① 성스러운 예배의식에 관한 규정 : 야스나(Yasna), ② 작은 아베스타라는 뜻의 기도의 글 : 쿠르다흐 아베스타(Khurda Arestoy), ③ 기원과 제사 재도에 대한 비스프라트(Visp-rat), ④ 악마를 물리치는 정결의식 : 벤디다스(Vendidad), ⑤ 죽은 영혼에 관한 내용 : 하독스크 나스크(Hadoxst Nask) 그 외에도 젠드 아베스타(Zend Avesta) 경전이 있는데 이 경전은 아베스타 경에 대한 요약과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그러나 교주 조로아스트가 직접 저술하였다고 알려진 것은 ‘야스나’ 안에 들어있는 ‘가타스’라는 송가뿐이다.
후 시대에 큰 영향을 끼친 조로아스트교는 윤리적 유일신적 요소가 있으며 우주에는 선과 악, 거짓과 진실,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며 거짓이 있고 진실이 있으며 죽음이 있고 이러한 선악 속에서 대립하여 싸운다고 보았다. 대표적인 예로 ‘야스나’ 45장 2절에는 이러한 언급이 있다.
“두명 가운데 거룩한 영이 다른 한 영에게 말했다. 우리는 생각, 가르침, 뜻, 신념, 언어, 내면의 모습 등 그 어느 것도 일치하는 것이 없고, 서로 완전히 분리된 존재이다”(나종근 편저, 조로아스트, 서울: 시공사, 2006, 3쇄. p.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