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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논단
88 올림픽에 대한 기독교적 반성
김헌수
<이 글은 저자가 1988년의 서울올림픽 직후에 쓴 글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지만 올림픽과 현대 스포츠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그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이 글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림픽과 현대 스포츠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과 깊이 있고 예리한 통찰이 들어 있다. 20년 전에 쓴 글이어서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대목도 군데군데 나오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을 항구적인 통찰이 빛나고 있으므로 독자들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여 저자가 몇 군데를 수정한 원고를 자료실에 올린다. - 편집자 주>
I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련과 동구 바람을 몰고 온 88 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더니, 요즈음엔 광주, 일해, 5공 비리 청문회 등에 온 나라의 이목이 집중된 듯하다. 세상과 구별되어 산 위의 동리로 존재하고 있는 교회로서 그런 소용돌이에 함께 휩쓸릴 필요는 없겠지만, 또한 세상과 유리되어 피안(彼岸)만을 추구하는 이원론적 행습에 빠져 있어도 안 될 것이다.
사실 교회와 세상의 관계는 난제(難題)임에 틀림없으나, 또한 피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드렸던 대제사장의 기도 제목 가운데 하나도 이 땅에 남아 있을 자신의 제자들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께 속하였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실을 말씀하셨다(요 17:9, 11-12, 16).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승천하실 자신과 함께 세상에서 데려가도록 구하시지 않았고 오히려 그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시기를 구하였으며, 또한 진리로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실 것을 말씀하셨다(요 17:15, 17-19).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점에서는 ‘신령’하나, 세상에 거한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인 교회가 이 세상의 소용돌이에 대해 어떻게 파악하고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주요 과제일 것이다. 시사성이 떨어지지만, 88 올림픽을 꺼내 놓고 기독교적으로 반성해 보려는 것은 이것이 신령하면서도 현실적인 기독교적 사회관 모색을 위한 논의의 한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소론에서는, 올림픽에 대한 다양한 입장 혹은 분석틀들을 일별하며 그 한계점을 지적한 후, ‘종교성의 관점’으로 88 올림픽을 재평가해 보려 한다.
II
정부에서는 유치할 때부터도 그러했지만, 올림픽을 대(對) 국민용 선전물로서 최대한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정부는 일본이 1964년 동경 올림픽을 계기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고 이야기하면서, 88 올림픽을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자고 국민을 설득한다. 헝가리와의 통상부 설치, 모스크바 교향악단의 내한 공연과 소련 상품의 직수입 등등이 정부의 좋은 설득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남북통일에 대해서도, 12년 만에 ‘동서 화합’이 이루어지는 88 올림픽의 ‘신 데탕트’ 기운이 남북간의 긴장 완화에도 도움을 주고 평화 통일의 길을 열어 주는 데 기여하리라고 주장한다.
반면 동일한 주제에 대해, 재야권에서는 다른 측면을 강조한다. 비록 교역이 증가한다 하더라도 그에 의해 빈부의 차이는 더 심화될 것이고, 또한 동서 화합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허울 좋은 이름일 뿐, 단일 올림픽을 개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단을 고착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뿐만 아니라 유신 말기부터 구상되었다가, 80년 당시 그것을 통해 갓 출범한 제5공화국의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고, 그것을 구실로 ‘호헌’(護憲)을 선언하기도 했던 88 올림픽은, 아무리 평화의 옷을 입고 나온다 하더라도 독재 정권의 우민화 정책에 의한 집권 연장책의 일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의견 중에서 부의 재분배에 대한 지적은 ‘선진국’ 운운하는 정부의 입안자와 기업가들 뿐 아니라 국민 전체가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또한 독재 정권이 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집권의 연장을 위하여 올림픽을 이용한 사실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지적일 것이다. 그러나 부의 편중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와 결부시키고, 남북 분단에 대한 것도 제국주의와 결부시켜 설명하는 것은 타당성이 결여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상론(詳論)은 본고의 범위를 벗어난 또 다른 주제가 될 것이다. 다만 올림픽에 관계된 한 가지만 언급한다면, 그들은 분단의 원인을 미국 - 미제국주의 - 에 돌리면서 공동 올림픽을 개최하지 않으면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분단이 고착화한다고 주장하는데, 소련과 동구권이 참가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또한 국제 정치의 복잡성에 비추어 볼 때, 반쪽 올림픽이 얼마나 더 분단의 상황을 고착화하고, 또 그 반대의 경우는 얼마나 더 통일을 앞당길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생각이 들며, 이상론적인 주장이라고 판단된다(실제로 올림픽 후에 있었던 한 비판적인 신문의 좌담회에서도, 북한이 분단의 고착화라는 이유로 서울 올림픽을 거부하는 대신 서울 올림픽에 참가했더라면 국민들이 동구권이나 소련에 보냈던 환호보다 더 큰 환호와 성원을 보냈을 것이고, 따라서 오히려 민족 화합에 기여하였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북한은 그 경직성으로 말미암아 민족 화합 기회를 포기한 것’이 그 중간 제목이었다. 참고. 1988년 10월 3일자 <한겨레 신문>).
기독교인들 안에서도 매우 다양한 견해가 혼재하고 있어 과연 한 울타리 안에 같이 거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한 사람이 여러 가지 견해를 취하고 있는 다소 미묘한 경우도 있지만 기독교인들 사이의 생각을 네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겠다.
첫째는, 올림픽이 표방하는 ‘세계 평화’, ‘동서 화해’ 등을 기독교의 ‘평화’, ‘화해’ 등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입장이다. 상당히 비판적인 조간신문의 칼럼에도 등장한 바 있는 이런 견해는 다른 기독교 잡지에서도 빈번히 피력된다. 이들에 의하면, 사랑과 용서의 종교인 기독교는 동서(東西, 공산권과 비공산권)의 화해도 추구하기 때문에 12년 만에 동서가 함께하는 88 올림픽에 크게 기여해야 한다고 한다. 더욱이 한국의 기독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그런 능력을 구비하였기에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실은 매우 피상적인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어떤 의미에서 화해의 종교인가’, ‘올림픽이 근본적으로 인류의 화해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이 반드시 실상과 상부(相符)하는 것은 아니고 소원이나 바람을 피력하는 경우가 많은데, 올림픽을 ‘동서 화합의 대잔치’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념, 인종, 빈부, 종교 등의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는 것은 인간에게 생의 의미와 희망을 제공하기에 정치인, 경제인, 지식인 등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이루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올림픽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개최되고 있다. 그러나 근대 올림픽의 역사만 일별해 보아도, 24회나 개최된 지금이라 해도 처음보다 인류의 화해가 더 증진되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물론 분열과 싸움이 계속되는 것보다는 화해가 바람직한 현상이겠지만 성경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결코 화해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롬 1:28-32, 3:23). 그렇기에 오직 죄의 권세를 깨뜨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그리고 그리스도 안의 다른 지체들과 화해를 누리는 것이다(롬 5:1, 15:1-2, 엡 4:3-4). 이렇게 볼 때 위의 주장은 상당히 지적이고 세련되어 보이는 주장이나, 기실(其實) 복음의 내용을 희석시킨 것이다. 이룰 능력도 없이 떠드는 ‘화해’의 소리에 기독교인들이 뒤따라가면서 복음으로 합리화시켜 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제외한 화해의 시도를 뒤로 하고, 즉 하나님의 심판으로 산산조각 난 바벨탑의 잔해를 뒤로 하고(창 11장) 가나안 땅을 향해 나섰던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창 12장).
둘째로, 해방 신학과 민중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앞에서 언급한 운동권의 논리와 비슷한 논리로 올림픽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올림픽을 물신화(物神化)된 자본의 논리로 설명하는 이들은 역시 소련이나 동구권의 참석을 매끈히 설명하지 못하고, 또 반쪽 올림픽이 분단을 고착화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단순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에 더하여, 이들은 또 다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자신들의 생각을 신학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에서 신학의 방법론을 찾아내려는 진지한 시도 대신에 쉽게 마르크스주의의 방법론을 취하고 거기에 기독교의 옷을 입힌다는 새로운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출발점을 찾는 전형적인 기독교적 방법론을 모색하지 않는 점에서는, 또한 기독교의 사랑을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으로 국한시키거나 자본주의 체제의 타파와 결부시키는 점에서는, 정도의 차이일 뿐 기독교가 동서 화해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올림픽의 종교성에 주목하여 올림픽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지모신(地母神) 숭배에 기원을 둔 올림픽 제전(祭典)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각처에서 선출된 남자들이 사제들 앞에서 한 달간의 엄격한 예행연습을 한 후 나체로 지모신의 제전, 즉 올림픽에 참가한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은 전형적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적 행사였고, 올림픽 제전을 통해 젊은이들은 올림픽 종교의 신봉자로 굳어져 갔던 것이다. 그들은 로마 시대의 올림픽이 황제 숭배 사상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기독교인 황제인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394년에 폐지된 사실을 상기시키고, 또한 이번 올림픽에서도 주문(呪文)과 함께 ‘성화’(聖火)를 채화했고 ‘성화’가 한국의 각 마을에 도착했을 때 지신(地神) 밟기 등과 함께 ‘성화’를 ‘안치’했고, 탈을 쓴 학생들이 밤새워 지킨 사실 등을 지적한다. 이들에 의하면, 올림픽은 우상 숭배에서 기원하였고 오늘날에도 그러한 흔적들이 남아 있으므로 중지되어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심이 있고 그러한 열심이 있기에 우상 숭배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기본적인 입장에는 찬동한다. 그러나 올림픽 제전은 과거에도 단순한 우상 종교 행사에 그치지 않았고 그 시대의 사조나 정치적 목적과 긴밀히 연결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그러한데, 그 큰 줄거리는 놓치고 표면상의 몇 가지만 가지고 언급하는 것은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는 패하는 경우가 되기 쉬울 것이다. 올림픽에 남아 있는 옛 우상 숭배의 ‘잔존물’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오늘의 세속화된 우상의 정체를 파악해 내고,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그것을 격파하는 노력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끝으로, 더 많은 지지를 얻는 입장은 88 올림픽을 ‘전도 올림픽’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영혼 구원에 대한 열심에서 몇몇 단체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준비하였는데, 책임을 맡고 있는 모 신학 대학 학장의 글에 그들의 생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세계 선교 폭발을 가져왔던 사도행전 2장에 있는 오순절 때에 하나님께서 세계 각 곳에 있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하였듯이, 이번 올림픽 때에 세계 각 곳에서 사람들을 한국으로 몰아다 주신다.……소위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본국에서는 복음을 들을 수 없는 저들을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서울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생명의 복음을 듣게 하실 것이다.……만약 사도 바울이 20세기에 살아 있다면, 그는 ‘올림픽 서신(The Epistle to the Olympians)’을 기록했을 것이다. 즉 올림픽이 개최되는 도시의 교회들에게 올림픽을 최상의 선교 기회로 삼으라는 권면의 편지를 썼을 것이다.(<기독교 사상>, 1988년 6월 호, 52-56).
영혼 구원에 대한 열심에서 직장이나 가정의 일도 뒷전에 밀어 놓은 채 거리로 나선 그들의 열정에서 배울 것도 있겠지만, 그 열정이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가에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올림픽 서신’을 쓰지 않았고 - 그 학장 역시 당시대의 올림픽은 우상 숭배와 결부된 것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올림픽 서신을 쓰지 않았다고 부언하고 있다 - 그 대신 지식을 좇지 않은 열심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하나님의 경영의 대상에서 버림을 받게 된 상황을 돌아보며, 그 근본 원인으로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 10:2)고 지적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경고에 따라 위의 인용문을 재검토해 볼 때, 그 운동이 과연 ‘지식을 좇은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된다. 그들은, 비록 ‘소위’라는 단어를 첨가함으로써 약간 완화된 주장을 하지만, 서울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우리나라를 제2의 이스라엘로 간주하고 있다. 교회사를 보면 신약의 한 나라를 구약의 이스라엘로, 그 나라의 수도를 제2의 예루살렘으로 지칭하는 경향들이 계속 반복되었지만, 실제로 그러하다는 역사적 실증을 나타낸 경우는 전무하고, 신약 성경 역시 그렇게 해석하거나 상상할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이들은 또한 성경을 ‘전도의 책’으로만 이해를 하고 있는 듯한데, 만약 성경이 전도용 책에 불과하다면, 사영리(四靈理)나 브리지(Bridge) 정도의, 혹은 그보다 조금 두꺼운 정도의 분량이면 족하지 66권까지는 필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전도를 포함한 당신의 사역을 ‘하나님 나라’라는 말로 요약하셨고(마 4:17, 눅 4:43), 사도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는 말로 예수님의 사역과(행 1:3) 자신들의 사역을 요약하였다(행 28:23, 30-31; 고전 4:20-21). 구원의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이 그들의 생활 면면에서 하나님 나라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할 터인데(마 28:18-20; 딤후 3:16-17), 구원의 목적인 구원 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올림픽 서신’ 운운하며 복음 전파만 강조한 것은 균형 잡힌 온전한 지식에 근거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결핍은 현실에서도 바로 드러난다. 그들은 체육 활동이 정치나 경제에 의해 이용되어 매우 형편없이 되어 버린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도의 수단만 된다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에 세상 사람들의 손에 이용되기 쉬운 단순한 사람(simpleton)이 되기 쉽다. 그 학장의 경우, 바울이 그 시대에 올림픽 서신을 쓰지 않은 것은 올림픽이 우상 숭배와 결부되었기 때문이라고 옳게 지적하였지만, 현대 올림픽이 갖는 그 종교적인 성향들, 즉 스포츠에 대한 종교적 열광이나 후론할 상업주의나 민족주의 등에 대해서는 눈이 가리워져 있다. 이들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기에 성경도 그런 시각에서 보고, 사람들의 ‘육적’ 활동의 정당성을 오직 복음 전도라는 ‘영적’ 사업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데에서 찾는다. 그들은 신체 활동의 내재적인 의미에 대해서도, 그리고 올림픽의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성경은 단지 전도용 책자일 뿐 매일의 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종교 경전’인 것이다.
III
여러 견해에 대한 평가에서 필자의 생각이 어느 정도 드러났지만, 필자는 ‘종교성의 관점’, 곧 하나님과 피조물에 대한 이해의 관점에서 올림픽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가르쳤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5)
바울 사도는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는 말로 우상을 가르쳤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다른 것에 삶의 의미를 준다고 생각하여서 사람의 경배를 받는 것이 우상이다. 옛날에는 눈에 보이는 상(像)을 만들어 놓고서 그것이 비를 내려 주고 질병을 해결하여 준다고 생각하였다. 지금은 눈에 보이는 목상이나 석상을 섬기지 않으므로 우상 숭배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 시대에도 우상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좀 더 고도화하였을 뿐이다. 오히려 ‘세속화된 종교’가 현대 사회를 이끌고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테크놀로지(technology)와 유토피아(utopia)를 합성한 테크노피아(technopia)라는 신조어에서 잘 드러난 것처럼, 현대인들은 과학 기술의 발전에 의해 유토피아가 도래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공학에 관련된 분야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자들은 그 테크노피아의 도래에 일조한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직장 생활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이러한 신앙은 또한 사회화되기도 하는데, 효용성(utility)이라는 기업의 규범이 가정 윤리나 학교의 윤리를 대신하고, 또한 가정과 학교의 조직을 재편하기도 한다. 세속화된 20세기에서 ‘종교’나 ‘우상’ 등에 대한 논의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세속인들’의 행동에 의미와 활력을 주는, 또한 그들의 순종을 요구하는 ‘세속화된 종교’가 버젓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올림픽에서도 그 배후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활력을 제공하며 또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종교적 동인(動因)들이다. 즉 체육 활동은 가치중립적인 영역으로서 스스로 의미와 활력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에 필요한 의미, 활력, 방향 등에서 세속화된 종교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고대 올림픽의 경우는 체육 활동이 종교적 의식과 밀접히 관계되었지만, 체육 활동이 세속화한 종교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고 해서 체육 활동이 곧 종교적 활동으로 환원된다는 말은 아니다). 필자는 ‘인간성 찬미’, ‘상업주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등이 현대 올림픽을 이끌어 가고 있는 근본적인 종교적 동인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올림픽의 우승자는 월계관뿐 아니라 초인적 힘을 찬미하는 시를 함께 받았다. 올림픽 기간 중에는 전쟁이 중지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신과 함께 즐기는, 일종의 ‘인간성 찬미’의 축제가 벌어졌다. 19세기 말의 국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의 상황에서 쿠베르탱 남작이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킬 때의 이상도 인간성 찬미의 고대 올림픽 정신을 계승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번 올림픽에서도 그러한 면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청정한 가을 하늘과 각국 관중들의 환호 아래 전개된, 하늘과 땅과 인간의 대화합을 상징하는 ‘천지인(天地人)’ 등의 식 전후 행사와 풍부한 볼거리와 감동을 선사한 개폐회식, 푸른 잔디 위에서 생동하는 육체와 그 육체를 지탱해 주는 강인한 정신력, 육체와 정신의 균형과 조화, 새로운 기록을 인간 한계의 벽을 깨뜨린 것으로 온 인류가 찬하하며 새로운 벽을 깨기 위해 전신을 내던지는 것, 함께 보고 뛰며 즐기는 것 등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신뢰와 찬미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간성 찬미는 그 자체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거역하고 인간의 자율성(autonomy)을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다른 대상, 즉 피조물에 기대어 그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곧바로 피조물을 창조주처럼 섬기는 우상 숭배에 빠졌다고 가르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롬 1:18-32). 인간의 종교적 한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인간성 찬미를 외치는 올림픽이 왜 종교적 성향이 강한 상업주의나 민족주의, 국가주의 등의 이데올로기에 쉽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올림픽의 이상은 ‘상업주의’를 배척하고 명예와 순수성만을 숭상하는 아마추어 정신이었다. ‘최후의 아마추어’로 불리는 5대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에이버리 브런디지 위원장은 체육 관계 장학금을 받는 자의 올림픽 참가도 금함으로써 많은 원망을 듣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업가 출신의 현 7대 위원장 후안 사마란치는 “오늘의 스포츠는 필요 불가결하게 ‘상업화’가 되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물론 그도 기업이 스포츠에 ‘봉사’해야지 그것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부언했지만, 장사꾼의 치부책에는 봉사와 이용의 경계선이 그리 분명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올림픽 위원회는 오륜 마크, 휘장 등 올림픽과 관련된 무형의 자산을 공식업체나 후원업체에 경매 처분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물론 올림픽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지만 수입이 지출보다 결코 적지는 않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는, 올림픽 위원회가 각 회사와 직접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 88 올림픽의 경우 -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그룹(IMG)이나 아디다스(Adidas) 등에게 독점 대리인의 자격을 준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독점 대리 기업들은 단순히 비싼 가격에 독점 후원권을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올림픽의 개최지 선정, 경기 시간 조정 등 크고 작은 문제에 개입한다. 88 올림픽의 경우도 아디다스가 일본 기업들과의 경쟁을 피하려고 나고야 대신 서울을 택하도록 바덴바덴에서 ‘큰 손’ 역할을 했고, IMG는 인기 종목의 경기 시간을 미국 방송의 황금 시간에 맞추어 결정하도록 하였다. LA올림픽이 열렸던 1984년 미국 방송사들의 총수입은 21억 달러였는데 그다음 해에는 14억 달러로 떨어졌고, LA 올림픽에서 미국의 코닥 회사를 제치고 독점 스폰서가 되었던 후지필름이 올림픽 후 미국 시장 점유율을 8%나 넓혔다는 사실 등에서 우리는 올림픽과 돈의 함수 관계를 보게 된다.
기업의 각축장이 된 올림픽이니만큼 선수들 역시 국가나 기업체에서 내건 막대한 포상금이 그 동기가 되어 경기에 참여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각종 명목의 막대한 포상금이 따를 뿐 아니라 이제부터 그가 각종 대회 때마다 입어 주고 신어 주는 유니폼과 신발은 그에게 수백만 달러의 수입을 보장해 준다. 따라서 0.01초의 차이나 수백 그램의 차이 등 미세한 차이에 의해 막대한 포상금과 그 이후의 수입이 좌지우지되는 이러한 상황에서 순간적 힘을 발휘하게 하는 약물 복용의 유혹은 매우 강력한 것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던, 불가리아 역도 선수들이나 벤 존슨 등의 약물 중독은 바로 이러한 상업주의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 영어책에 올림픽에 관한 내용이 학년별로 여러 번 나오는데, 그중 한 과에서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운동선수가 되는 것이라고 ‘비법’을 소개하고 있다. 사업가가 되거나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유명한 운동선수가 된다면 이미 20대 초반에 상당한 부와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유려한 영어 문장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인생의 성공을 ‘부의 크기’로 측정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제주의적 생각과 올림픽의 상업주의가 완벽하게 결합한 예일 것이다.
올림픽의 배후에서 큰 손 역할을 하는 것이 다국적 기업들이고, 참가하는 선수들 역시, 약물의 힘을 빌어서라도 그들의 인생의 성공을 보장해 줄 황금을 획득하기 위해 운동을 한다면, 이것은 아마추어 정신을 주장하는 올림픽이 상업주의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현저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올림픽의 상업주의에 대한 비난의 글은 주로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몇몇 회사명이나 수치는 그들의 글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올림픽 위원회와 다국적 기업의 결합, 혹은 기업이 선수들에게 자사 제품을 입히고 막대한 돈을 주는 것 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소련이나 동구권에서 메달 획득자에게 상당한 포상금을 수여하고 - 소련의 경우에는 포상금의 1/3을 즉시 지급하여 여기에서 원하는 물품들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메달 획득의 동기를 더욱 강화시켰다 - 선수 전원의 생활을 보장해 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돈이 그 동기가 되어 운동을 하고 경기에 출전하는 한,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기업에서 받든 국가에서 받든, 자본주의 국가의 선수든 사회주의 국가의 선수든 본질상 동일한 상업주의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나 사회주의 사회 모두에서 약물을 복용하는 선수가 나왔다는 것이 그 좋은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올림픽은 또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인류의 화합을 기치로 내세우는 올림픽이 민족주의로 인해 몸살을 앓는다는 역설적 상황에서 인간성 찬미라는 것이 매우 무기력한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비근한 예로,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프랑스의 쿠베르탱 남작이 근대 올림픽을 주동한 것도 보불전쟁(1870년)에서 패배한 프랑스 국민의 사기를 앙양시키기 위한 것과 관련되었다. 연대로는 조금 앞서지만, 1807년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독일에서 체조 운동을 일으켰던 프레드릭 루딕 얀은 단순한 체조 운동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나폴레옹에 대항할 만한 독일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했었다. 체육 활동의 의미와 활력을 민족주의에서 찾고, 민족주의라는 하나의 구호 아래 민족 대중의 체력과 이념을 동원하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19세기 전반을 통해 흥기하였던 유럽 각국의 민족주의 운동은 근대 올림픽의 부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예로 베를린 올림픽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베를린 올림픽의 기본 방향은 바로 게르만 민족의 위대성이었고, 진행의 모든 초점이 히틀러의 강력한 통치력과 군사력 등 나치의 선전에 맞추어졌었다.
소련은 84년 LA 올림픽이 상업주의의 소산이라고 비난하며 불참했었는데, 이번 88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올림픽에서 우승함으로써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것이라는 소련인 관계자의 말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이것 역시 올림픽의 참가 의미와 추진력을 체육 외적인 영역, 즉 사회주의나 국가주의 등의 세속화된 이데올로기에서 찾는 경우일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국민 체육 정책이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낫다는 주장이 있고, 또 사회 정책과 체육 활동의 증진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겠지만, 올림픽의 승리를 곧 체제 우월성의 증거로 삼으려는 것은 확실히 논리의 비약이다. 어려서부터 조기 선발된 소수의 선수들에게 천문학적 재정을 투자하여 올림픽의 모든 메달을 획득한다 해도, 그것으로 곧 그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성 해방을 외치지만 비인간화한 소수의 선수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 - 특히 우리나라 -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정확히 분석하기 힘든 매우 애매모호한 감정이지만,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는 현대 올림픽을 이끌어 가고 있는 주요 동인이다. 그러나 수많은 젊은이들이 ‘애국심’의 미명 아래 응달에서 희생되고 있고, 관객은 단지 승자에게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또한 오늘의 현실이다.
IV
문제로 제기된 것에 대해서만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문제의 분석 방식은 그 해결책의 제시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88 올림픽에 대해서도, 그것을 제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하였던 서구의 부르주아들이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분석한다면, 그 궁극적인 해결책으로는 단순히 올림픽 폐지 정도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이 제시될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본 대로, 그러한 틀은 상황의 분석에서도 상당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므로 그 대안을 제시하는 면에서도 그러하다고 넉넉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종교성의 관점’에서 88 올림픽이라는 현상을 분석하였다. 종교성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올림픽의 근본 문제는 그릇된 신앙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 해결책으로 그릇된 신앙을 바꾸고 피조계에 대한 바른 상을 회복하라고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혹자는 매우 온건하고 지극히 개량주의적 대안이라고 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견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마음의 뿌리(radix)까지 바꾼다는 점에서 실은 매우 과격하다(radical). 사람들은 몬트리올 같은 적자 올림픽을 면하고 올림픽의 규모를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결탁하는 것이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상업주의에 의한 약물 중독의 문제가 있음을 알지만,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 보수(補修)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처방을 제시하지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바뀐다면, 즉 상업주의나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된다면, 올림픽은 우선 그 규모가 작아질 것이고, 상업적 목적에서 만들어진 몇몇 스포츠의 영웅도 사라질 것이다. 비욘디를 통해 수영을 하고 루이스를 통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직접 놀이를 즐기며 진정한 놀이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그릇된 종교적 경향들이 파쇄(破碎)되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들이 제 위치를 되찾는다는 점에서 매우 급진적이고 철저한 대안이 될 것이다. 또한 교회가 그릇된 신앙으로 말미암은 올림픽의 문제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풍요로운 신앙 공동체로 존재하면, 이미 산 위의 동리, 등경 위의 등불이 되는 것이다(마 5:13-16). 이런 터 위에서 체육 등에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나와 ‘대체 놀이 공동체’를 선도해 나간다면, 하나님 나라의 빛은 사회적으로도 훨씬 더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88 올림픽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 본고의 다소 장황하고 복잡한 이야기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고후 10:4)는 사도 바울의 교훈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로잡는다는 것은 전쟁 용어로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승리한 후 그 승리의 여세를 몰아 그 사회를 유지하는 틀을 철저히 파괴하되, 그중 가치 있는 것 - 예컨대, 금 은 보석 등의 귀금속, 포로, 기타 문화적 자산 등등 - 을 사로잡아오는 것을 상기시킨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용어를 신령한 싸움에 사용함으로써 신령한 싸움에도 비슷한 일이 있음을 가르친다. 상술하면,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선한 것들이 보존되는데, 타락한 사람들은 그 선한 것에 기초해서 그릇된 종교적 방향의 그릇된 체계를 세워 나간다. 그런 현상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그 그릇된 틀을 철저히 부수되 하나님께서 주신 바 선한 것들은 사로잡아 만유의 주이신 그리스도께 다시 굴복시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올림픽에 대해서도 진실이다. 이 말씀은, 올림픽에 의미와 활력을 제공하는 그릇된 정신을 파쇄할 것, 하나님께서 지으신 육체를 통한 놀이를 제 위치로 돌려놓을 것, 진정한 놀이 공동체를 형성할 것 등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올림픽을 주도하는 근본정신은 도외시하고 지엽적 문제만을 부분적으로 비판하는 것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또한 올림픽의 우상을 가시적으로만 이해한 나머지 올림픽을 전체로 부정하는 것, 혹은 세상의 문제 제기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후 거기에 기독교의 옷을 입히는 것 등과도 전혀 차원이 다른, 현실적이면서도 신령한 ‘제3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권세를 잡은 ‘그 악한 자’는 올림픽도 이용해서 사람들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 따라서 바른 신관, 인간관, 사회관 등에 기초한 우리의 신령한 싸움은 스포츠와 올림픽에까지도 현실적으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고, 거기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서 높아진 것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