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의미의 논리(1969), 왠 논리냐?
- 방향 논리학: 다방향으로 발산하는 다양체 논리학의 창안.
철학이란 학문을 분류하면서, 철학학력평가시험(바칼로레아)에서는 첫째로 시간과 공간, 자유와 행복 등을 다루는 부분이 있고, 둘째로 수학과 논리학과 더불어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이 있으며, 셋째로 인간의 의식을 다루면서 내재의식(무의식)과 더불어 자아와 연관된 모든 상식(공통감각, 오관)과 양식(영혼과 신체)의 두 방식을 다루고, 넷째로 인간들 사이 관계들의 학문으로 사회학, 정치경제학, 역사학, 인류학, 언어학, 생태학 등등이 있다고 한다. 이들 중에 문제를 내는데, 문교부가 정하지 않지만, 20세기에 프랑스 고교철학의 기본 편재였다. 나로서는 하나를 덧붙여서, 다섯째로 문화(예술)에 관한 부분을 보태야 할 것이라 했었다.
둘째 분야에서 수학과 논리학은 서로 비슷하게 대상을 다루는 것 같지만, 서로 다른 측면이 있고, 서로가 발전하고 확장하는 가운데 상호 도움과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수학이란 상징(symbole)을 다루며 정합성을 이루어 체계화를 하는 것이라고 해두자. 수학들은 여러 분야들로 나누어지는 것은 수학의 상징이 사물의 대상과 형식적으로 정합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소위 말하는 사물의 운동(장소 이동)을 좌표계보다 세부적으로 다루면서 미적분으로 확장 설명하게 되고, 게다가 사물들의 내부를 파악하기 위해 원자와 전자 또는 열과 전자기장을 다루면서 수학은 미적분에서 사용하던 함수(fonction)를 사물들의 흐르는 상태(유동상태)를 규정하는 상관관계 함수들로 확장되면서, 물리학과 화학에서 상태들의 실재적 흐름을 함수의 효과들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열역학에서 줄-톰슨 효과(Joule-Thomson Effect)의 효과에서 수학적 함수는 물체의 운동의 함수와 다른 차원이라 한다. 이처럼 수학은 대상화가 가능한 부분들에 대해 모두를 함수관계로 표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무한을 대상화하면 무한에 대한 함수 관계도, 단위로서 0과 1의 관계를 표현가능한 것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무한 속에서, 마치 수학들처럼, 무한들이 있다. 수학들은 이런 상징과 대상들(물체든 흐름이든) 사이의 관계와 효과가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학문의 발달과정은 인간이 사물을 대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는데, 사물의 항(끝점)으로서 다루다가, 항들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항들이 서로 미치는 영향(효과)을, 나아가 항이라기보다 상태로서 사물의 성질들을, 더 나가가 사건에 연관있는 다양한 항목들과 문장들의 관계까지 표현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이에 비해 논리학은 사물들을 또는 대상들을 기호들(les signes)로서 다루고, 이 기호들의 기호 작용(signification)은 대상들 서로 간에 관계를 서술하고 나아가 그 대상들의 모습과 형식의 변화를 설명한다고 한다. 한 기호를 한 항목(끝점, 형식) 또는 한 단어(개념)를 다루는 것처럼 설명하게 되면 수학과 친근성이 있으며, 이 항들 사이의 관계는 마치 수학의 단위들처럼 배열하고 배치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 기호들의 배열과 배치는 수학의 형식과 달리 사물들이 현존하는 평면(공간)을 차지하는 방식을 순서에 맞게 나열하거나 위계를 세우는 작업을 한다. 수학에서 점, 선, 면, 몸(체적)의 체계와 달리 언어에서 항들이 포함관계에 따라 류와 종으로 나누듯이, 상부항과 하부항이 있다. ‘소는 동물이다’에서 동물 속에서 소, 말, 개 등이 있다고 하며, 항들의 관계에 위계 배치 나열 배열을 할 수 있다. 이런 배치와 배열에서 순서의 우선성, 경중에 따른 중요도, 나아가 가치를 부여하여 선, 미, 성까지도 설명하려 든다. 고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항들 사이의 관계를 문장으로 표시하여 사물들의 현존방식에서 맞거나 틀리거나를 규정하려 하여, 문장의 네 가지 판단 방식을 규정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 항, 명제, 삼단논법, 변증론, 해석론 등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항들 사이의 관계가 먼저와 나중 사이에 원인과 결과로서 정해지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을 항을 물체로서 표현할 수 있는데 비해 마치 영혼처럼, 기호화하여 표현할 수 없지만 언어로서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수많은 신화의 기호들과 우화의 기호들이 (정태적으로) 생산되었다. 여기서 의미 생산의 문제가 있지만 나중으로 돌리자.
수학의 체계화와 정합성에 비해, 언어의 것들은 그리 정확성을 갖지 못한 듯하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 삼단논법의 256개 판단에서 21개는 사실에 맞지만, 다른 것은 오류라고 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말을 해서 문장으로 기호작용을 표시할 때, 맞는 것과 틀린 것이 있다고 구별을 함으로써 판단을 통한 사유의 정확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런 판단들을 통하여 여러 개별 학문들도(첫째와 둘째 부류에 속하는) 체계화 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반 학문들(도덕학, 정치학, 자연학, 천문학, 생물학 등)을 다루었다. 이런 학문들이 나름으로 정합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상식(오관, 공통감관)의 판단으로 정해진 형식을 쉽사리 반박할 수 없기에 맞는 것으로 치고, 그에 체계 속에 들어오는 것과 들어오지 않는 것 정도를 구별하는 방식이 거의 중세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사물들의 구별에 의해 대략적으로 하늘의 운행과 지상의 운동을 설명했지만, 구체적으로 천문학과 물리학의 사물들을 다루면서 기호작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쪽은 수학이었다. 언어에서 여전히 표현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기호화가 여전히 유효하였다. 간단히 천사와 은총은 대상화의 방식은 달라도 기호화의 의미는 여전히 통용되는 것으로 여겼다.
항들의 관계에서는 외연적 형식이 내재적 성질의 규정방식보다, 오관을 통한 설명이 유효하다며 그럴 듯하게 여기지만, 사물의 내재적 운동의 힘이든 에너지든 여러 상태들을 언어의 항으로 표현하기 곤란한 것을 문장으로 명제로 바뀌어서 표현 가능한 것들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항들의 관계는 현존하는 대상과 관계없이 이데아(관념)들을 다루면 거의 정확하게 설명되는 대응성과 정합성이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런 대응성이 정합성과 함께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언어의 기호와 수학의 상징의 유비가 상식적으로 그럴듯하게 맞아들어 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여기서 기호와 상징은 현존재라기보다 존재자이다. 즉 현존하는 대상으로서 “있다”라기보다, 존재의 기호로서 “이다”이라는 점이다. ‘이다’의 세계가 현존하는 “있다”의 세상에 당연히 대응하고 또한 수학의 체계처럼 정합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말이다.
일단 물리학이 물체가 가만히 있는 것처럼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지구상의 물체는 지구의 자전 속도로 돌고 있고, 또한 지구의 공전 속도로 돌고 있음에도 지구와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처럼 상식적으로 그렇게 보인다. 이런 상식을 벗어나는 시기가, 이상하게도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로 항(끝점, 가장자리) 대 항(끝점, 가장자리)의 관계가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관계에서는 둘 사이의 결합(connection, 연결)보다 더 합리적이고 추론적인 이법(la raison)이 내재적으로(또는 하부적으로) 깔려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항들의 관계보다 이 내재성의 연관들 사이에 성질들이 포함되는지 아닌지를 구별해야 할 때, 언어학 쪽에서는 오랜 동안 문법학과 변증법을 다루던 것을 종합하면서, 문장들 또는 명제들의 서술과 관계들이 사물들의 현상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방식(방향)으로 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항들의 논리에서 명제의 논리로 바뀌면서, 명제들 간의 관계에서는 명제들이 서로 나란히 연결하는 연접도 있고 연결이 안 되는(반작용과 같은) 이접도 있다는 것이다. 명제들을 연결에서 연접과 이접을 표현하는 방식을 수학에서 함수관계와 유사한 것을 보면서, “명제들을 계산한다” 또는 명제들을 함수로 표현한다는 명제논리학이 등장한다. 항들 논리학에서 명제논리학의 이행은 산술학과 기하학의 결합으로 좌표기하학을 거쳐서, 미적분학으로 이행만큼이나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명제를 다루는 함수들의 방식이, 물리학에서 물체들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 상태들의 표현과 효과를 다루는 방식과 닮아서, 명제 논리학(우리 번역어로는 기호 논리학)은 산술학의 체계와 항들의 체계와 닮았듯이, 수학의 상관 함수의 표현이 명제 논리학과 닮았다고 보기에 이른다. 이런 명제 논리학이 수학의 상관함수로 이행하는데 아마도 중요한 역할을 한 이는 칸트일 것이다. 칸트는 고대의 항들 논리와 달리 명제를 다루면서 12개의 범주와 판단표를 만들고, 이 판단표에 의해 물리학이 운동과 성질을 수학으로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험 논리학으로 표현 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물론 칸트는 물질 자체의 성질의 변화와 효과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1830년대 이전에 세상을 떴기에, 그는 유동하는 물질자체를 말하지 않고서, 그저 물체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선험적 논리학이 있기에 세계의 변화를 표현 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좀 더 나아가면 표현 가능하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양식이 있다)는 것이고, 이 표현가능한 것은 데카르트의 양식의 방향을 무한히 이어가서, 의식의 무한성을 인정하면, 무한까지도 표현 가능한 것이 되고, 라이프니츠의 미세한 미분소까지도 좋은 방향(봉상스)을 따라 설명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런 시대의 전개가 물리학과 과학기술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이런 설명이 표현가능하다고 아는 이성(베르눈프트, die Vernunft)의 위대함을 강조한 것이 인식론 계보의 신칸트학파이다. 그러나 이들의 설명이 소립자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들의 이동과 조합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채는 데는 다른 영역에서였다. 화학과 생리학(생물학)에서 이런 수학적 모델(상징체게)로 설명가능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관계의 방식은 좋은 방향(의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여러 다른 분자들의 형성에서는 다른 방향들(말상스? mal sens, 이런 용어는 없다)도 많다는 것이다. 즉 좋은 방향에만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해로운 듯 하지만 없어서 안 될 다른 방향들이 있고 보다 중요한 의미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생리학에서는 한 방향의 과도함은 생명체의 분해를 가져다주고 너무 모자라도 파손된다. 이런 관계 방식들을 연관이라 부르면서, 다양한 연관들이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봉상스만이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상스(농상스)들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생리학과 생물학뿐만이 아니라, 심리학은 더욱 더 다양하고 재치 넘치는 농상스의 덩어리 같은 것에서 많은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덩어리 실재하는 내재의식(무의식)이다. 인간의 각 개체로서 인격은 농상스를 생산하는 특이한 현존자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언어의 논리학은 수학의 체계와는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언어를 다루는 학자는 언어학이 다른 여러 학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독립된 학문이라 한다. 언어가 문장과 명제로서 다룬다는 것은 언어학을 규정하는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문화론이 있다고 하듯이, 시와 소설로 대표되는 문자의 음소 기호에 따른 이야기들의 전개는 언어학이 논리학의 규정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문학은 형용모순도 자유롭게 쓰며, 그 작품안에서 의미있다(루이스 캐롤 작품을 보시라). 언어학이 논리학으로 떨어져 나온다는 것은, 수학 원리와 체계와 같은 정합성의 기준으로 논리학에 언어의 규정을 틀 지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어학에는 기호들과 다른 영역들이, 발생의 기관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의 논리학은 전혀 다른 방향들(농상스)과 그에 걸맞는 발생적 과정에 대한 관심이 솟아나게 이른다. 구강성(l’oralité)이 제기된다. 이것을 소쉬르와 프로이트는 달리 전개하였지만 말이다.
우선 언어학에서 논리학과는 다른 여러 국면들이 있다는 것이 제기되었을 지라고 여전히 언어에는 의미가 있고 그 의미에는 논리가 있다고 여긴다. 여기서 들뢰즈는 마치 심심풀이 삼아, 의미의 논리학이 있다고 제안한다. 아마도 미국의 물리학자인 소칼(Alan Sokal, 1955-) 같은 이는 들뢰즈가 농상스를 말하고 있다고 착각할 것이다. 그가 쓴 책 “지적 사기꾼”에서 프랑스 판으로 번역한 책 속에는 들뢰즈 부분이 없다(영어 판에는 들뢰즈 부분에 벩송이 나오기에 원문을 찾기 위해 프랑스어판을 샀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소칼이 들뢰즈 학위 논문조차 읽지 않았을 것이고, 그 속에서 동일한 용어 반복이 장과 절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의미의 논리”를 읽고서 논평이 있다면 봐주겠지만, 그와 같은 물리학자들이 생물학과 심리학을 대하는 태도에서 농상스가 왜 발생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멜빌의 “바틀비”가 철학이 자료들로서 다루는 여러 분야 중에서 다섯째 항의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언어학은 논리학이 아니다. 소위르는 언어학 강의에서 입말(랑그, 말씨)와 말투(빠롤, 말씀)을 구별하면서, 언어학은 사물자체 또는 실재적인 것과 관계없는 입말과 말투를 다룬다고 하였다. 이 말에서 소칼 같은 이는 학문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물리학과 같은 학문은 아니다. 그러나 철학이 다루는 중요한 세 가지 하늘, 땅, 인간에 관해서, 인간에 관한한, 즉 인간의 삶에서 언어(langage)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지식보다, 양자역학 보다 더 중요한다. 물리학자가 어머니가 애를 키우는 것을 어찌 알까? 세상에 나와서 아는 것이 많다고 교수이며 박사라고 하겠지.
들뢰즈가 이 책에서 자세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논리학을 다루면서 언어가 취급하는 구체적 자료들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언어로서는 기호, 목소리, 입말과 말투 일 것이고, 논리라는 것이 항, 문장이 사실들과 대응이 있느냐에 진위를 다루는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말투(말씀)의 항도 문장도 명제도 진위를 이전에 삶과 연관이 먼저이지 않을까? 어쩌면 삶에서 타인이 문장과 명제로 말하기 이전에 표출화(manifestation)나 기호화(signifcation)가 먼저 있을 것이고, 그 항과 문장의 지시화(désignation)도 따라 나올 것이다. 이런 표명화, 기호화, 지시화가 시작에서부터 생성되고 규정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진위 이전에 삶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이 뭘까? 그리고 입에 들어가는 것은 뭘까? 하는 문제가 철학적이 아니라고 여긴 것은 상식과 양식에서 의미에 맞지 않는 것이 의미가 아니라고 여긴 때문이다. 문제제기는 심리학의 발달로 신체의 질병과 달리 영혼(프쉬케)의 질병도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제기는 평시에는 미친 이 취급하고 격리하면 되지만, 전쟁에서는 너의 목숨이나 그의 목숨이나, 피의 무게는 같다는 것이다. 이 피의 무게를 감당하는 미치광이가 무기를 들고 아무 짓이라 할 경우 문제는 심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질병의 치유하기 위해 심정에서 나온 영혼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정신분석학에서처럼 병리학의 연구를 점점 더 깊이 파고들어가니, 그 증상자의 태어날 때의 이야기도 들어야 했다.
산다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태어나면서 갓난 애기가 무엇을 하는 가, 젖을 빤다. 그 입으로 젖을 빨고, 먹고 자고 하면서 자라서 입을 통해 입말을 한다. 그 입말은 말의 씨앗이지만, 오마니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말투(말씀)는 아니다. 애기는 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입을 통해서 한다. 그리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입으로 먹는다. 들뢰즈는 먹다-말하다를 의미의 논리에서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 입의 기능(함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애기를 젖을 먹기 위해 젖가슴을 빠는 데는 애정관심(sexualité)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프로이트가 갓난애에게 성욕이 있다고 했을 때, 그 잘난 사람들이 얼마나 비판과 비난을 했던가? 어린이도 생명체로서 살아간다.
그 입이 먹고-말하기와 또 다른 기능이 있다. 애정을 즐기고 또는 배척한다. 말하자면 입은 먹다-말하다-성교하다를 한다고 나중에 안티외디푸스에서 말할 것이다. 그런데 생리학적으로 숨쉬다-먹다-말하다-성교하다가 하나의 기능 속에 함수로서 상관관계를 갖고, 자아라는 영혼에게서 수학적 함수처럼 기능하고 작동하고 실천한다. 이런 네 가지 함수가 시대와 환경에 삐끗한 정도가 도를 넘어서면, 증후를 드러낸다. 이로서 정신병리학이 다루는 학문이 성립한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먹다와 말하다가 뒤섞인 함수의 상호관계는 연결(connection)이 주일 것인데, 그 연결이 연접인지 이접인지는 말씀에서야 구별한다는 것이다. 숨쉬고 성희도 겪는 통로(구강)에서 먹다와 말하다의 연관의 항들과 단어들 사이의 조합도 있고, 그리고 문장들과 명제들 사이에 문법화와 의미화(sémantique)도 있지만, 그것의 발생은 기호화와 표명화가 기본이다. 애기는 자기의 삶의 일부로서 소리(목소리) 그리고 요구사항을 온몸으로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를 듣는 오마니는 고개를 돌리고 일할 때조차도, 애기의 옹알이만 듣고도 오줌마려운지, 배가 고픈지, 몸이 잘못되었는지를 기화화된 표현을 지시화시켜서 애기를 달래고 재우는 방식들을 사용한다.
입을 통한 말씨(입말)가 먼저인데, 왜 말투(말씀)이 먼저인 것으로 착각하는가? 말투는 사회적이고 교육적이다. 입말은 생성적이고 인격적이다. 그럼에도 자아는 전자(말투)로서 표현되는 것을 익히며 점점 자란다. 사람들은 입말을 강조하기보다 말씀을 강조한다. 그래야 그 사회가 또는 그 가정이 정상적으로 보인다. 정신분석을 다루는 병원에서 쓰는 말씀이란 환자를 어떻게 지배하고 명령하는 지를 말하는데, 이는 현 사회가 말씀으로 인민을 지배하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암시한다. 태어난 터전과 그 속에서 말씀은 이미 고착되고 규정적이다. 규정상으로 정태적 사회 속에 사는 것이 정상이고 이를 이탈하는 것이 비정상이다. 문화적으로 예술 활동하는 이들이 정태적 사회와 다른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기도 하다. 그런데 사회라는 곳에서 공무와 직장을 다니는 이들은 사회화 다른 기호화를 하면 소외 또는 미친자 취급을 받는다. 들뢰즈 그게 번개치듯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듯이, 새로운 생성은 미친 것도 광기도 아니라 생성 즉 농상스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먹고- 말하고- 애정관심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함수를 만든다고 해도 경우의 수가 8가지인데, 이 차원들이 촉각, 시각, 후각과의 연관을 이어가면, 함수의 상관계수는 매우 복잡하다. 이런 복잡한 함수들 중의 하나의 형성체가 개인의 자아라고 하는데, 그 자아가 함수의 연관 속에서 하나로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자아 자체가 다양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논리”라는 단어를 썼다는 의미에서, 말하다가 이 책을 쓰는 이유였을 것인데, 우리는 여기서 ‘먹다’를 먼저 말해보자. 매일 동일한 음식을 먹지 않지만 한 달을 거슬러 보면 먹는 음식의 종류는 거의 한정되어 있다. 그 음식은 사는 터전의 방식의 표현이다. 말하자면 ‘먹다’에서 음식을 단순화시키면 그 정도라고 할 수 있지만, 자연계는 그렇지 않다. 이미 같은 채소라도 한 달 전의 채소와 한 달 후의 채소가 다르고, 같은 고추와 같은 대파라도 마찬가지로 다르다. 게다가 계절이 바뀌면 채소의 종류도 바뀐다. 이런 변화들과 연관해서 입의 활동 중에 먹다와 연관들이, 우선은 입에 들어오는 것은, 마치 언어가 하는 방식의 초기처럼 연결(connection)처럼 보인다. 그런데 먹는 것을 보면 잘 먹히는 것이 있고(연접, conjonction) 또는 먹기 싫은 것도 있다(이접, disjonction). 그런데 입의 기호화(signification)에서 의미 없는(non sens)것이 없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둘 다 필요하다. 입말이 아니라 입의 말투도 그러한가? 그리고 애정관심도 그러한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삶의 터전에 먹다 만큼이나, 사회적 연관 속에서 말하다가 중요하다. 이로서 들뢰즈는 의미의 생산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 책의 기본은 의미 생산은 농상스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자아가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라고 말할 수 있을 특이성이 있는 영역은 실재로는 농상스(non-sens)라는 것이다. 농상스가 왜 자아라는 특이성과 연관이 있을 것인가? 그것을 이 책에서 그가 다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푸꼬 논평의 장점은 이 책이 주제와 근거를 제공하려고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이 책의 진솔한 이야기는 이 농상스의 내재성이 무엇을 생산하는 지를 알려줄 작품은 다음에 나올 것이라 한다.
푸꼬의 말을 되씹으며 의미의 논리의 의미를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먹다-말하다 보다, 20세기에 마치 중요한 선문답처럼, 중요한 것은 애정관심에 관한 것이다. 비정상이라고 꼭 주장할 것도 없지만, 그 시대의 경향에서 벗어난 세 부류, 즉 파라노이아, 뻬르베르, 스키조프레니들이 있고, 이들이 어떤 생성과 기호화를 하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들뢰즈는 먹다와 말하다도 중요하지만, 씹하다는 것도 중요한데 그 애정관심을 다루는 방식의 입말과 말투에 비추어서 다룬다 어떤 이야기가 진솔한 이야기가 될까 하고 쓴 것 같다.
그래서 서문으로 쓰여진 1쪽짜리 “실마리(avant-propos): (루이스 케롤에서 스토아학자들에게, de Lewis Carroll aux stoiciens)”라는 글에서, 이 책이 정신분석학적 소설과 같다고 했다. 이 말에서 풍기는 것은, 나로서, 들뢰즈가 가타리를 만난 것이 아니라, 이 글의 내용을 잘 읽은 푸꼬도 있지만, 사유의 방향(sens)의 다양체임을 깨달은 가타리가 들뢰즈를 찾아간 것이 더 합당한 설명일 것이다. 둘은 라깡에 대한 비판으로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안다. 그 시작이 안티외디푸스이다. 이 작품 속 나오는 라깡의 비판의 토대를, 벩송의 물질과 기억에서 찾은 평자 뒤몽셀(J. C. Dumoncel, 1944-)은, 나로서는 그의 평을 여러 번 읽고 나서야, 두 철학자만큼이나 들뢰즈의 이 작품을 잘 해명한 철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6:04, 57SLH) (6:31, 57SLI) { 평들1925LS1969뒤몽셀V11}
덧글 ** 생각을 달리하면: 구강성과 인터넷의 플랫폼
인격의 유지의 통로이자, 자아의 발설자이며, 애정표현의 도구이기도 하며, 살아있는 숨결의 통로인 구강성에서 언어의 역할을 가장 중요한 것 같지만, 함수관계의 하나의 요소이다.
이 구강성이 외부에서 실행하는 정거장과 같은 기관이 있다면, 빛을 통해 수렴과 발산을 하는 인터넷의 플렛폼(Platform)이 신체의 구강성과 같은 역할을 한다(?) 플랫폼은 들숨 날숨의 재료는 전기 에너지이다. 에너지가 기호화하는 것은 다양하다: 그림, 말, 소리, 동영상, 비데오, 영화 등등으로 보내고 받아들인다. 물론 이것들을 0과1이라는 요소에 의한 기호화가 먼저 이라고 한다. 그러나 점들과 항들 다루는 시기를 지나, 면과 활동하는 상태들도 다룬다. 이 플랫폼의 소통은 먼저 주어진 것이 아직 없다는 것인데도, 자료들과 재료들을 기존의 방식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구시대의 기호화에 대한 복습이 먼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자연의 빛은 복습만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이 있다. 에너지의 이동을 전자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연의 빛과 동류로서 생각해보라, 플랫폼은 자연의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 기원과 원인에 대한 탐구에서 드러날 것이다, 빛의 발산과 수렴의 과정을 리좀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57S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