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는 자칭, 죽음의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죽음에 대해 많은 시를 썼기 때문이다.
소피의 <유서>는 구달의 유언과 너무 닮았다. 놀랍다. 그래서 이 글을 퍼왔다. 같이 읽어보자고...
생명의 신비
2018년 5월 1l일, 안락사 지원단체인 '엑시트 인터네셔날'은 호주의 저명한 생태학자인
데이비드 구달(David Goodall)이 스위스 베른의 한 병원에서 104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밝혔다.
구달 박사는 이날 정오쯤 의료진과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사량에 해당되는 신경안정제 주사를 맞고
숨졌는데, 주사액을 정맥 안으로 주입하는 밸브는 구달 박사가 스스로 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유언도
남겼다고 한다.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 나를 기억하는 어떤 추모 행사도 갖지 말라. 시신은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그는 또한 "이제 삶을 마감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며 마지막으로 베토벤 교향곡 '합창'을 듣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과 죽음의 방식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엑시트 인터내셔널의 창립자인 필립 니슈케는
"내가 아는 한 구달 박사는 불치병이 아니라 고령을 이유로 안락사를 택한 최초의 사례"라고 전한다.
고령을 이유로 안락사를 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가 안락사를 택한 진정한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닌가.
삶과 죽음에 대해서 그토록 확신을 갖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근거는 무엇인가.
그는 식물 생태학의 권위자로서 호주와 영국, 미국의 5개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거쳤으며, 36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세계 생태계' 시리즈를 출간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렇다면 그는 생명의 본질을 지나치게
생태학적 관점으로만 조명하고 이해했던 것은 아닌가.
보도에 의하면 안락사 직전에 구달 박사는 본인의 결정에 대해 기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고 하는데, 한 마디로 "더는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퇴직한 후 호주의 오지 곳곳을 찾아다니며 연구를 이어갔다. 1998년 84세가
되었을 때 운전면허가 취소되면서 삶이 크게 변했다고 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호주나 미국 같은
곳에서는 운전을 하지 못하면 외출하기가 매우 불편하고 행동에 제약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 후 그는
매일 마땅히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하는데, 90세가 되어서도 테니스를 할 만큼 체력을
유지했지만 100세 무렵에는 빠르게 건강이 악화되었다. 무엇보다도 급속히 시력을 잃게 된 것이다.
구달 박사의 죽음은 분명히 바람직한 죽음 혹은 이른바 '웰 다잉(well-dying)'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유형의 죽음 혹은 '자살'을 권장하거나 미화하고 싶은 마음이 선뜻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는 생태학이나 유전 공학, 의학 등의 발달에 의해서, 혹은 그밖에 다양한 종교적
신념에 의해서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으며, 생명의 신비를 외면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숙고하는 태도와 겸허한 자세를 갖는 것도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
관점에 따라서는 의사들이 규정하는 어느 특정한 질병뿐만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불치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이 어차피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이라면 어떤 종류의 확신을 갖고 미련 없이 포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시들어가는 화초를 가꾸듯 그것을 가능한 한 정성껏 소중하게 돌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상념에 젖어본다.
출전: 성숙의 불씨, 5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