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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6차 전라북도 고창군 소재
선운산 선운사, 도솔암 및 참당암 순례기
1. 9월 53선지식 가는 날
아침에 옅은 안개를 헤치며 보현사 쪽으로 향한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자연 앞에 우리네 인생 초라할 뿐.
엊그제까지 더워 아우성이었는데 이젠 조석으로 청량함이 피부에 묻어오네!
한가위가 코앞이다.
벌초도 가야 한다.
제수도 마련해야 한다.
그런 건 아량 곳 없이
53선지식 참여자가 대형 리무진 2대에 꽉 메운다.
왜일까 ?
좋은 사람이 모이는 곳,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듣고,
좋은 것을 느끼고,
함께 행을 하는 모임 53선지식단
2. 법회
김천 휴게소를 지나서
여느 때와 늘 그랬듯이
천수경, 예불, 이산혜연 선사 발원문, 관세음보살 정근,
한글 반야심경 및 사홍서원 순으로 여법하게 진행하다.
1호차는 법공 임 동명 법우가 집전하다.
3. 단장님 인사 등
인솔자인 혜각 장 춘원 53선지식 총무국장의 사회로
청하 장 재영 단장 인사말씀
대웅 김 상수 고문님 인사 말씀
혜각 장 춘원 총무국장 선운사 및 도솔암 사찰 안내
혜림 장 건환 의식봉사회장이 차량 안전 사항 안내하다.
4. 개인소개 - 골수53 대 새내기 53
스타는 대미를 장식한다.
고로 새내기 53부터 자기소개를 하다.
마하연 박 수경 포교사(아직 계첩에 잉크도 덜 마른?)의 일성으로 시작하여
범공 임 동명법우까지 신심을 돈독히 가지겠다는 다짐의 시간이었다.
이어서 골수 53 대선배님들의 소개를 시작하다.
역시 골수 53은 다르더라.
돈독한 신심
15년 이상 쌓아온 내공
훌륭한 법문들
새내기 53들은 감히 그 어느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공부가 되어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행복도 선택이다.
내 방식 데로 살자 등 숙제를 안고 돌아와야 했다.
5. 지인들 대거 참여
신천 초등학교 1학년 3반 이 현민 양
(47야 반야심 이 영미법우님 질녀)
- 정기법회(지장보궁에서)시 백팔 대참회 끝까지 했다.
지인들 대거 참여하다.
53선지식의 미래는 엄청 밝다.
앞으로 지인 분들 참여가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는 곧 대불대 신입생 확충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6. 점심공양
질서 정연(스님의 칭찬을 받다)한 점심공양 - 과연 대불대 동문다웠다.
선운사는 두 번째 순례였다.
두 번 다 개인적으로 참 좋았다.
공양과 관련이다.
처음 방문 시 공양 간에 가지런히 쌓아둔 수 백 개의 그릇에,
이번에는 스님에게 칭찬받아서 이다.
혼자 조용히 생각해 본다.
오늘 이 사건이
“대불대 총동문회”다운 신조어를 탄생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 “대불대 총동문회다운”의 뜻은 “공양 간에서 질서정연하다” - “대불대 총동문회” 고유 명사를 일반명사로 바꿔 국어사전에 등재될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그렇게 행하여 봅시다.
우리 동문님들의 공동된 큰 서원 한 가지 맹글어 봅시다.
“대불대 총동문회다운”의 뜻은 “공양 간에서 질서정연하다”로
국어사전에 등재되는 그 날까지
7. 지장보궁(전 성보 박물관)에서 정기법회
시설이 좋았다.
모든 사찰에 선운사 지장 보궁 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좋은 시설에서
대불대 53선지식 정기법회 행사 및 108 대참 회를 실시하다.
기분이 배가가 되었다.
선운사 문화 해설사로부터 사찰 해설을 듣다.
간략한 내용을 기록하다.
“선운사는 예로부터 도솔산 자락의 본찰과 산내 암자에 삼지장 보살(선운사 지지 지장보살, 도솔천 내원궁 천장 지장보살, 참당암 인장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어 ‘삼 지장기도 도량’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삼 지장보살좌상 가운데 고려후기에 조성된 금동지지 지장보살좌상이 1936년 일본인들에 의해 밀반출 되면서 한때 시련을 겪었다.
1936년 조선의 지장보살상을 불법으로 취득한 일본인은 지장보살의 현몽을 꾸었다. 꿈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병까지 들고 가세가 기울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겼다.
보살상을 받은 또 다른 일본인 역시 집안에 우환이 끊이자 않자 이 소장자는 1938년 조선으로 연락해 보살상을 반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밀반출 된지 2년 만에 선운사로 돌아왔다.
이후 금동지지 지장보살좌상은 도난과 훼손 등의 우려로 지금까지 박물관 유리관 속에 보관돼 있었다.”라고 한다.
올 7월 7일 새롭게 단장된 지장 보궁에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밀반출돼 환수된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이 여법하게 봉안되어 있다.
대불대 53선지식단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올 7월 7일 새롭게 단장된 지장보궁에서 법회뿐만 아니라 금동지지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을 친견할 수 있는 기회까지 가지다니,
8. 도솔암 및 마애불가는 길
2킬로 남직한 거리를 버스를 오르다.
한결 수월했다.
시간을 단축하는 차원에서
순례단은 쉽게 도솔암, 매애불 및 내원궁을 참배를 하였다.
참 고마운 일이다.
험한 길을 마다 않고 운전해주신 오성관광에 감사를 드린다.
9. 차내 행운권 추첨
순례 시에 기도를 열렬히 하시는 분은 꼭 행운상을 받는다는 후문.
행운상은 열심히 기도하면 받는다니까 당첨되지 않으신 분들은
더 열렬한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 날의 영웅 신천초등학교 1학년 3반 이 현민양 대상 수상
백팔 대참 회 열심히 하고 절도 참 예쁘게 하더라.
이게 바로 일석삼조 아닌가요.
기도 열심히 하고 행운상 받고 기뿐 좋고...
10. 돌아오는 길의 명상도 참 좋다.
이것 또한 멋지더라.
조용히 옆 좌석에 앉은 도반과의 담소
혹은 오늘의 일들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성찰의 시간
순례를 다니니 깨달음 자란다.
명상이면 명상
장기자랑이면 장기자랑
좋다 좋아 모든 것들이
다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게 어디에도 없다.
그 어디에도 없다. 실체가
내 마음의 선택이 아닌가 싶다.
11. 마무리를 하면서
지금 대불 동문회가
솔개의 지혜가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다.
작금의 대불 동문회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솔개의 수명 약 40년에서 70년 정도란다.
70년을 살려면
35년 전후에 중대 결단해야 한단다.
그래야 35년 정도를 더 살수 있단다.
그 결단은 바로
피눈물 나는 고통을 감내해야 가능한일 이다.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높은 바위에 올라
먼저 부리로 깃털과 털을 하나하나 뽑고
발톱도 뽑고
자기 부리까지 바위를 쪼아서 부러뜨리는 후
새로 깃털, 발톱, 부리가 자라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 기간 무려 6개월 정도란다.
그것을 이겨 내면 35년 정도를 더 살수 있단다.
여기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대불 동문회가 개혁 혁신 변화가 없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대동단결하여야 한다.
대불 동문회 재건을 위하여 모든 동문들은 결집하자.
※ 선운사 성보박물관 인터넷 검색한 글을 올려 봅니다.
1. 금동지지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
선운사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1m이다. 머리는 고려시대 지장보살상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두건(頭巾)을 쓴 모습이며, 두건을 묶은 좁은 띠가 이마를 두른 후 귀를 덮고 양 가슴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풍만한 얼굴에 조그마한 아래턱 주위로 살집이 많은 이중턱을 이루어 후덕한 인상을 주며, 목에는 굵게 주름진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하체는 무릎 높이가 낮아서 상체에 비해 빈약한 편이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옷에 덮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어서 엄지와 넷째손가락을 맞댈 듯 굽혔고, 왼손은 아랫배에 붙여서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렸는데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에서 끈으로 매듭지은 독특한 치레장식이 특징적인데, 이는 고승의 진영이나 불ㆍ보살상에서 보이는 형식이기도 하다.
겉옷 안에는 수평으로 가로질러 가슴까지 올라온 군의(裙衣)를 띠매듭으로 단정하게 동여매었다.
이 보살상은 선운사 도솔암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선운사지장보살좌상(禪雲寺地藏菩薩坐像, 보물 제280호)과 목걸이 장식이나 밋밋한 가슴표현 등이 유사하지만, 머리가 크고 하체가 빈약하여 신체비례가 부자연스러운 점, 목이 짧고 어깨가 올라가 움츠린 듯한 자세, 간략한 장식과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선운사지장보살좌상과 함께 그 예가 드문 지장보살상의 하나로, 조선시대 지장신앙의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지장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때 영험함을 보인 사실로 인해 더욱 널리 추앙받고 있다. 1936년 어느 여름에 일본인 2명과 우리나라 사람 1명이 공모하여 보살상을 훔쳐간 뒤, 거금을 받고 매매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지장보살상이 영이(靈異)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였다. 소장자는 다소 이상한 꿈으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후로 병이 들고 가세(家勢)가 점점 기울게 되자 꺼림칙한 마음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지장보살이 소장자의 꿈에 나타났으나 그 역시 이를 무시하였고,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게 되자 다시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이 보살상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소장하게 된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고창경찰서에 신고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시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때가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이었다. 당시 잃어버린 보살상을 다시 모시고 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에도 사건에 대한 개요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주지는 '이우운(李雨雲)'으로 기재되어 있다.
2. 도솔천 내원궁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
선운사 도솔암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96.9㎝이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모두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상체가 늘씬하고 당당하여 고려 후기의 장곡사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이나 문수사금동불좌상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길상좌(吉祥坐)를 한 탄력적인 하체나 부드럽고 단아한 어깨선, 상ㆍ하체의 비례 등이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형태를 지니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는데, 이마를 감싼 후 귀 뒤로 넘겨서 어깨까지 천을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의 두건을 쓴 지장보살〔被巾地藏〕의 모습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던 도상적 특징으로, 현존하는 많은 고려불화에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이목구비 등을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표현하였다. 양 귀에는 만개한 화문(花紋)을 띠로 연결하여 귓불에 묶은 이식(耳飾)을 착용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보살상이 원형 고리를 길게 늘어뜨려 매달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특이한 형태라 하겠다.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인(中品印)을 취하고 왼손은 가슴과 배 중간쯤에 들어 법륜(法輪)을 잡고 있는데, 이는 육도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로서 보주(寶珠)ㆍ석장(錫杖)ㆍ법륜 등의 지물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의 일반적인 특성을 표현한 것이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 무릎에 올린 모양으로 발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어깨나 소매ㆍ무릎 등에 몇 가닥의 간단한 주름만을 표현하여, 상에 나타난 선묘는 유려하게 휘어지는 맛과 함께 단순ㆍ명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3. 도솔암 마애불(보물 제1200호)
도솔암의 서편 암벽 칠송대(七松臺)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불상은 낮은 부조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가 있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평면적인 얼굴에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우뚝 솟은 코에 앞으로 내민 일자형의 두툼한 입술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인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고, 목은 표현하지 않아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상체는 방형에 가슴이 넓고 평면적이며, 결가부좌한 넓은 하체에 손과 발 역시 체구에 비해 큼직큼직하다. 투박한 두 손은 활짝 편 채 아랫배에 가지런히 붙여져 있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으로 두꺼운 편은 아니나 옷주름선이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고, 평평한 가슴 아래로 선명하고 단정한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대좌는 비교적 높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상대(上臺)에는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고 하대(下臺)는 간략한 연꽃무늬의 연화좌로서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다.
광배는 표현되지 않았고, 가슴에는 사각형으로 큼직하게 복장(腹藏)구멍을 나타내었다.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고 부러진 서까래가 꽂혀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누각 형태의 목조 전실(前室)을 마련하였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는데 불상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학농민전쟁 무렵에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4. 대웅보전 (보물 제290호)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하며,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交窓)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佛壁)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5.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제1752호)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高敞 禪雲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의 형태는 넓고 당당한 어깨, 긴 허리, 넓고 낮은 무릎으로 인하여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갖춘 대형 소조상들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상 등 17세기 전반기 각지의 대표적인 사찰에서 조성된다. 대형의 소조불상의 조성 목적은 이전 시대와 달리 새로워진 불교계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고, 전란으로 소실된 불상을 빠른 시간 내에 재건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삼불상은 양대 전란 이후 재건불사 과정과 당시 달라진 시대적 분위기를 직·간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대좌의 밑면에 기록한 묵서명에서 불상의 조성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라는 삼불상의 존명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어 비로자나 삼불상의 도상연구에 기준이 된다. 그리고 1633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와 17세기 전반기의 대표적 조각승 무염과 그의 문하승(門下僧)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정확한 조성주체가 밝혀져 있고, 대형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조각적·종교적 완성도가 높은 우수한 작품이다
6. 참당암 대웅전(보물 제803호)
선운사 산내암자 참당암의 중심건물로서 신라시대 의운화상(義雲和尙)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매 칸마다 4분합문을 달았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다포양식의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앞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양식인 반면 뒷면 공포는 굽면이 곡선이다.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1900년에 후불탱화로서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고려시대 건축 부재(部材)의 양식을 지니고 있어 이채로우며,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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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53선지식 및 명찰 순례 행사 순례글 감사합니다. 순례행사의 역사기록입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마하살 합장 꾸벅
휼륭하십니다 세심한 내용~~
잘보았습니다~~
대단하십니다~~ ^^53이 또한분의 스타를 탄생시켰군요~~^^ 역시 '상수'란 이름이 좋은것 같네요? 황금수레바퀴? 일목조연한 후기글 잘보고 갑니다~~고맙습니다 홍박사님~~_()_
후기글 감사합니다 새롭게 복습공부합니다 너무 너무 감사드림니다()()()!!!
53선지식 순례 후기글 감사합니다.훌륭하십니다..._()_
히~~~~야~~~~~~~~~~~~~~~~~~~~~~~~~~~~~~~~~~~~~~
다시 한번새겨봅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감사합니다.
후기글 상세하게 올려주신 금륜님 감사합니다~~ 훌륭하십니다 ~~ 성불하소서 ^*^
선배님,후기글,잘읽고갑니다,하마터면,참석못할뻔했는데,....정말,함께할수있어 감사합니다.
동문으로 금륜님이 함께한다는게 행복입니다.---()
멋진 인재가 나타난것 같습니다.
색다른 스타일의 후기 글 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대와 함께 53순례를 동행 한것이 기쁨 입니다.
창조와 개혁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상식과 순리에 충실하면서, 끊임없이 새롭고, 즐거움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대와 같이 읽을 거리, 볼거리를 제공할때 53순례는 발전해 나가리라 봅니다.
댓글 달아주신 법우님!
감사드려요.
정성어린 댓글에 용기백배하여 혹 선지식 안
빠지고 가게되면 순례기 계속해서 써보겠습니다.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려요.
한분 한분 댓글에 답 못하여드림을 넓으신 아량으로 헤아려주시길 바라옵니다.
복마니 받을끼라, 댓글 달아 주신분들
힘냅시다!
힘냅시다!
힘냅시다!
즐건 한가위 되세요!
황금수레바퀴 드림.
감사한 마음으로 후기글 잘보고 갑니다~고맙습니다..^^
53선지식에 함께할수있는 시간들이 행복2배를 느낍니다 ^~^
많은 공부가 되엇습니다 ,감사합니다..
황금 수레바퀴님~!!
53선지식에 금륜님이 함께 한다는 건 행복입니다...
행복하고. 행복하고.. 또 행복하고...
선배님 후기글 을 읽으니 순례때의 모습이 새삼떠오름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