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 1. 20. 대만 타이베이- 국립야류해양공원, 사림관저, 중정기념관, 서문정거리)
둘째날, 아침 일찍 잠이 깨었으나 창밖을 내다 보아도 콘크리트 건물만 보일 뿐 마땅히 산책 할만한 데가 없었다. 8시에 호텔 2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갔더니 다른 숙박객들이 먼저 휩쓸고 다녀간 탓인지 먹을 만한 음식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흰죽과 빵 한조각 등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 오전 9시에 버스를 타고 타이베이에서 북쪽으로 약 1 시간 거리의 바닷가에 있는 국립야류해양공원으로 출발하였다.
사진 1) 3일 동안 먹었던 호텔 아침 식사
이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야류에 도착하니 바람이 조금 부는 것 말고는 날씨가 좋아 다행이었다. 바람도 차갑지 않고 세기도 적당하여 풍경을 감상하며 돌아다니기에 딱 알맞았다. 우리는 안내센터에서 먼저 한국어로 된 홍보용 비디오를 통해 이 지역의 자연 환경과 현황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들은 다음 해안가로 이동하여 자연이 만든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였다.
입구에서 조금 더 걸어들어가 왼쪽 모퉁이로 방향을 틀어 해안가를 바라보니 오랜세월 비 바람과 파도에 깎여 만들어진 대형 버섯 모양의 바위들이 신비한 자태를 뽐내며 우리들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빼어난 해안 절경이야 우리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수 있지만, 야류와 같은 풍경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자연이 조각한 기암 괴석들은 그 모양에 걸맞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왕관을 쓰고 있는 듯한 여왕머리바위, 계란 모양의 계란바위, 목욕하는 미녀바위, 촛대 모양의 촛대바위 등이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여왕머리바위가 가장 유명한 모양이었다. 기념품 가게나 거리의 간판중에서도 그 형상이 자주 눈에 띄었다.
바위 사이로 걸어 다니며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니 영판 이집트 파라오 무덤에서 본 것 같은 여왕의 두상이 연상되었다. 유명세 만큼이나 많은 관광객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 있는 바람에 나는 유감스럽게도 앞 쪽으로 가까이 가서 사진 한장 찍지 못하고 멀리서 힐끗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 보다도 촛대바위가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촛대라고 하기보다는 유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모양에 더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유방의 둥근 모양이야 파도에 깎여 자연적으로 만들어 질 수 있더라도 그 봉우리의 젖꼭지 부분은 어떻게 다듬어 질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하였다. 혹시 누군가가 인공적으로 만들어 올려 놓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어 눈을 크게 뜨고 몇번이나 살펴보았다.
사진 2) 야류 해양국립공원 입구 매표소
사진 3) 야류 지질공원 풍경 1
사진 4) 야류 지질공원 풍경 2
사진 5) 촛대바위 앞에서
사진 6) 촛대 바위 전경(중앙 윗쪽 움푹 들어간 젖꼭지 모양을 보니 자꾸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진 7) 야류 지질공원 풍경 3 (빨간 줄은 출입금지선)
사진 8) 야류 지질공원 풍경 4
사진 9) 야류 지질공원 풍경 5
사진 10) 야류 지질공원 풍경 6
사진 11) 여왕머리바위( 반대편 앞쪽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12) 야류 지질공원 풍경 7
사진 13) 야류 지질공원 풍경 8
자연이 인간에게 준 귀한 선물을 잘 보존하여야 할텐데 너무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개방해 놓은 것 같아 수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에 훼손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다. 나는 1시간여 동안 자유롭게 다니며 야류 풍광을 감상한 후 다시 입구로 나와 안내소 앞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일행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입구에서 모인 우리는 12시경에 '여황'이란 간판을 단 인근 식당에가서 점심을 먹고 다음 일정인 사림관저 관람을 위해 타이베이 시내로 이동하였다. 해산물로 된 점심은 그런대로 먹을 만 하였다.
사진 14) 점심을 먹은 식당(식당 이름에 이 지역의 상징인 '여황'이 들어가 있다.)
사진 15) 점심 식사
사림관저(士林館邸)는 일제통치 때 원예시험장으로 사용했던 것을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 오면서 그 시설을 활용하여 장개석 총통의 관저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원예시험장 용도인 생태원, 원예관, 온실 등의 시설을 그대로 남겨두고 정원도 중국식, 일본식, 유럽양식으로 아름답게 꾸며 놓았는데 1996년부터는 일반에게 개방하여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오후 1시 20분경에 사림관저 입구에 도착하여 야자수로 울창한 진입로를 따라 걸어들어갔다. 입구에는 장개석의 부인인 송미령 여사가 사용했다는 오래된 고급 승용차가 전시되어있었다.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가니 장개석 부부가 살았던 사림관저 정관 건물이 비교적 소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내부가 궁금하였으나 대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담장 틈새로 외관만 볼 수 있었다.
사림관저는 우리나라 청와대와 달리 총통의 집무실이 함께 있는 곳이 아니라 총통이 기거하는 사적 생활공간인데 수만평에 이르는 사림관저 전체 구역은 개인의 정원으로 관리 하기에는 너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약 40여분간 사림관저 공원내의 가로수 길을 거닐며 잘 꾸며 놓은 생태연못과 장미정원 등 이곳 저곳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다시 입구로 나왔다.
아열대 기후라서 겨울이라도 그렇게 춥지 않아 꽃은 피었지만 때가 봄이나 여름이었으면 더 멋지고 화려한 정원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입구에는 몇 사람이 중국공산당의 파룬궁 탄압을 항의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여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파룬궁(法輪功)은 고차원의 심신수련법이라고 하는데 아마 기수련의 일종으로 보인다.
사진 16) 사림관저 공원 입구
사진 17) 사림관저 정관
사진 18) 사림관저 공원 하트 조형물
사진 19) 사림관저 공원의 희귀목
사진 20) 나무 틈 사이에서 피어난 꽃
사진 21) 사림관저 공원내 온실
사진 22) 사림관저 공원 풍경 1
사진 23) 사림관저 공원 풍경 2
사진 24) 사림관저 공원 풍경 3
사진 25) 사림관저 공원 풍경 4
사진 26) 사림관저 공원내 장미정원에서
사진 27) 파룬궁 탄압에 대한 항의 시위(파룬궁은 고차의 심신수련법이라고 한다.)
우리는 오후 2시에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 인근에 있는 대만민주기념관으로 이동하였다. 이 기념관은 장개석 총통을 기념하기 위한 건축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후 그를 그리워하는 교포들의 성금으로 1980년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본래 이름은 장개석의 본명을 딴 '중정기념당'이었는데 2007년 천수이벤 총통 집권때 이름을 '대만민주기념관'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번에 갔을 땐 건축물 중앙 상단에 '중정기념당(中正記念堂)'이란 현판이 다시 걸려있었다. 다만 그 당시 대중지정(大中至正)에서 자유광장(自由廣場)으로 바꾸었다는 정문 현판은 자유광장으로 그대로 달려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인터넷을 뒤적이며 자료를 찾다가 대만에도 우리와 같은 동족 학살의 가슴아픈 현대사가 있음을 발견하고는 기행문 쓰는 것을 잠시 멈췄다. 그동안 장개석이란 인물에 대해 막연히 좋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과연 그가 정말 대만의 영웅이며 존경할 만한 인물인가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념관에서 찍은 사진을 하나씩 살펴보며 대만에 대한 역사 공부를 다시하였다.
우리는 오후 2시 30분경에 차에서 내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대만민주기념관의 옆문인 대충문을 통하여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본당까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옆문으로 대충 들어가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명나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웅장한 대리석 건축물이 우뚝서서 우리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이 기념관의 높이는 70m이며 외부는 청색과 흰색 두 가지를 주로 하고 있는데, 이 색들은 자유와 평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사진 28) 기념관 북쪽 옆문인 대충문(정문은 서쪽에 있고 남쪽 옆문으로 대효문이 있다.)
사진 29) 대충문을 통해 들어가서 바라본 기념관의 모습
우리는 와! 하고 감탄하며 벌렸던 입을 다물기도 전에 가이드에 이끌려 곧 바로 1층 전시실로 들어갔다. 1층에는 장개석의 생애에 관한 유물과 자료를 가정, 혁명, 항전, 내전, 대만, 그리고 집무 모습 등 6개의 테마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었다. 첫번째 테마인 가정관에는 장개석의 가족과 결혼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장개석은 두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나이 40세에 재력가인 송가수의 딸 송미령과 세번째 결혼을 하였다.
송미령의 언니 송경령은 신해혁명을 주도한 손문의 아내이므로 장개석은 세번째 결혼으로 손문과 동서지간이 된셈이다. 장개석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본 부인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면서까지 배경이 좋은 새 여인과 결혼을 감행했다는 사실과 송씨 가문의 3자매를 일러 송애령은 돈을 사랑하였고 송경령은 조국을 사랑하였으며 송미령은 권력을 사랑하였다는 세간의 말을 종합하여 곰곰이 되새겨 보면 장개석이 어떤 사람인지 그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30) 1층 전시실로 들어가는 현관의 모습
사진 31)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 사진
사진 32) 아주 작은 글씨로 그린 장개석의 초상화
사진 33) 그것을 확대한 사진
사진 34) 근엄한 모습으로 그린 장개석 초상화
장개석(1887-1975)은 중국 절강성 봉화현 출신으로 1907년 보정육군속성학당을 수료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진무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했다. 일본 유학시기에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 손문의 신임을 받아 1923년 제1차 국공합작때는 소련으로 군사시찰을 갔으며, 귀국 후 황포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북벌을 시작하였으며 1927년 4월에는 상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축출하고 1928년에 베이징을 점령하여 북벌 완수를 선언했다.
이후 남경에 수도를 정하고 국민정부를 선포, 국민정부 주석과 육, 해, 공군 총사령이 되어 정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확립했다.1930년부터 공산당 토벌에 나섰으며, 이를 항일전쟁보다 우선시하였다. 그러나 1936년 공산당 토벌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에 갔다가 그의 부하인 장학량과 그의 군대에 의해 감금당한 서안사건을 계기로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을 결성하여 공산당과 함께 항일전쟁에 나섰다.
1945년 중일전쟁 끝난 이후 1946년부터 다시 공산당과 내전을 벌였고, 1949년 공산군에 밀려 중국대륙의 본토를 포기하고 대만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중화민국의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 대만을 지배하다가 1975년 사망했다. 각 전시실에는 이에 관한 자료를 주제별로 구분 전시하며 그를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과연 진정한 대만의 영웅일까 하는 의문을 품으며 전시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사진 35) 신해혁명 관련 자료 전시실
사진 36) 대일 항전 관련 자료 전시실
사진 37) 국공 내전 관련 자료 전시실(사진 우측 액자의 인물은 장개석과 손문이다.)
사진 38) 대만 건설 관련 자료 전시실
사진 39) 총통 집무실 모형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안쪽으로 들어가니 웅장한 규모의 홀이 나오고 그 중앙에 엄청 큰 장개석 총통의 동상이 서쪽 전방의 탁 트인 광장을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보는 순간 나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연상되었다. 그곳은 마치 신전과 같았다. 왕조 시대도 아닌 민주주의 시대에 도대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기에 이렇게까지 숭배를 하는지 궁금하였다.
장개석 국민당 정권이 국공내전에서 압도적인 전력과 자원, 그리고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훨씬 열세의 공산당에게 패배하여 대만으로 쫓겨난 것은 지도부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그 수하들의 온갖 패악질로 인한 민심이반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민심이 이반 되었다는 것은 그 정권의 민주적 정당성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1947년 2월 28일,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건너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폭정에 항의하는 대만 본토인의 시위를 군대까지 동원해서 무력으로 진압하여, 수 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통상 ‘2ㆍ28사건’으로 불리며 중국 근대사에서 동족간의 학살이라는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돼 있는 이 사건에 대해 장개석은 책임이 없는가?
또한 장개석이 대만에서 지속적인 계엄 상태로 죽을 때까지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일당 독재를 실시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데, 독재자를 이처럼 우상화하여 찬양해도 괜찮은 것일까? 왜 잘된 것은 모두 독재자의 업적으로 돌리면서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지 이해 할 수 없다. 나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독재자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독재자의 동상을 모조리 망치로 두들겨 부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진 40) 장개석 동상 좌상
나는 대만출신 천수이벤이 왜 ‘중정기념당’이란 이름을 ‘대만민주기념관’으로 바꾸고 정문 현판을 ‘자유광장’으로 변경하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 기념관의 현판이 ‘중정기념당’으로 다시 바뀌어 달린것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였다. 기념관 본당 계단을 내려오는데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찬 육상선수들이 감독의 신호에 따라 계단을 뛰어 오르며 훈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계단의 숫자는 장개석이 89살까지 살았던 것에서 착안해서 89개로 만들었다는데 세어보지는 않았다.
사진 41) 중정기념당으로 다시 바뀐 현판
사진 42) 본당에서 정문을 바라본 광경(사진 왼쪽 건물은 국립극장, 오른쪽은 국가연주회장)
사진 43)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차고 계단을 뛰어 오르는 육상 선수들
우리는 1시간 가량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오후 3시 30분경에 남쪽 옆문인 대효문으로 빠져나와 버스로 타이베이 시내의 번화가라는
서문정 거리로 이동하였다. 이 거리는 서울의 명동가 비슷한 거리라고 한다. 오후 4시경에 서문정 거리 입구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떨어져 그날 비가 올 것으로 예보한 기상청의 체면을 살려줬다. 다행히 우산을 쓸 만큼 큰비는 내리지 않고 가게에 들어가 유명하다는 망고 빙수를 먹고 나오니 비가 그쳤다.
이 거리는 당초 일정엔 없었지만 시간이 많이 남아 학생들의 주전부리를 위해 방문한 것이다. 시간이 좀 지나자 젊은이들의 거리라는 명성답게 어디선가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소년들이 쏟아져 나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우리 학생들은 이곳 저곳 흩어져서 간식을 사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가이드가 제공한 망고빙수 맛을 본 외에 이 곳에서 또 유명하다는 대형 후라이드 치킨을 사서 맛을 보았다. 맛은 우리나라 통닭 튀김과 비슷했지만 치킨이 너무 커서 남은 것을 숙소까지 싸들고 가야했다.
사진 44) 서문정 거리 입구
사진 45) 서문정 거리 입구의 망고빙수 가게
사진 46) 대형 후라이드 치킨 가게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진 47) 닭 한마리 크기의 대형 후라이드 치킨
우리는 오후 5시경에 시내 식당으로 이동하여 대만식 샤브샤브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다른 식당에서와 달리 이곳에서는 종업원이 직접 끓는 물에 재료를 넣고 익혀서 테이블에 앉은 사람 수만큼 작은 접시에 건져내어 공평하게 분배하여 줬다. 식사후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전날과 같은 길을 따라 오후 7시경이 되어 호텔로 귀환하였다. 호텔 도착후 우리는 전날 처럼 바깥에 나가지 않고 임연길 부장교사 방에서 서문정 거리에서 먹다 남은 치킨을 안주삼아 간단히 맥주를 한잔하며 하루일과를 마감하였다.
사진 48) 저녁을 먹은 식당
사진 49) 대만식 샤브샤브
사진 50) 호텔 숙소에서 맥주 한잔
첫댓글 함께 여행한것처럼 느낄수있게 올려놓은 기행문 감사히 잘~읽었습니다
ㅎㅎ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 고맙네요.
도원호텔주변 주택가 풍경
사림관저 입구에 전시된 송미령 여사의 차
젖꼭지모양 감사합니다 ==>> http://cli.gs/0kh6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