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VER ARTIST
김형근
Kim, Hyung Geun
韓國性 精神主義 畵幅에 담은 頂上의 元老
對談 : 김형근 / 서양화가 김남수 / 본지주간, 미술평론가
序言
지난 70년 국전은 아카데미즘 등 사실주의가 주도를 했다. 원로 서양화가 海里 金炯菫은 당시 응모작품 <과녁>을 출품하여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때 한국화단은 그의 수상작을 놓고 ‘조형적 파괴를 시도한 미술사의 반란자’ 또한 다른 시각으로는 ‘영혼까지 그리는 은백의 화가’ ‘불멸의 미의식을 추구하는 화가’ ‘투명한 백자의 시심을 그리는 화가’ ‘섬세한 묘사력에서 생의 환희를 모색하는 화가’등 평자들의 격찬이 쏟아져 나왔다. 본란은 김형근 화백과 본지 김남수 주간과의 단독 인터뷰 내용을 지상을 통하여 공개한다.
김남수: 선생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건강은 좋으신지요?
김형근: 네. 그런대로 하루하루 건강을 유지하면서 즐거운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김남수: 지난 70년 제19회 국전 때 선생님의 작품 ‘과녁’이 대통령상을 수상하셨는데 당시 우리 화단은 이 작품을 놓고 새 시대를 앞서 가는 세계적인 미술사조를 이끌고 가는 선구자, 또 반대쪽에서는 아카데미즘 등 전통을 파괴하는 이단이요
저항주의자로 폄하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
김형근: 그때만 하더라도 건국 이후 아카데믹한 사실주의가 우리 화단을 주도했던 시기요, 특히 서구주의가 팽배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식민지 하의 교육 등 영향을 크게 받았던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본인은 새로운 미술양식에 도전함으로써 한국의 창조적인 예술행위가 세계질서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의욕과 바램이 본인으로 하여금 그런 작업을 하게 한 것 같습니다.
김남수: 하지만 선생님은 당시 사실주의를 추구하면서도 대통령 수상작 ‘과녁’처럼 예리한 관찰과 하이퍼 리얼리즘을 압도하는 선묘, 그리고 평원법을 파괴하는 구성기법 등 초현실주의 까지도 저항하고 부정하는 미술사적인 반란이나 이단으로 까지 일부 전통주의 반발을 산 것이 아닙니까?
김형근: 김선생의 지적이 맞습니다. 조선시대의 겸재 정선도 진채(眞彩)화법을 발견 했는데 오늘까지도 후학들에게 교육의 의미가 큰 것 아닙니까. 예술의 선견지명은 인간을 앞서 간다는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이죠.
김남수: 선생님의 경우 사실주의 회화를 추구하면서도 회화의 영역이나 표현의 진폭이나 스케일이 크다는 것을 후학들이 인정하고 있으며 주어진 소재는 무엇이나 표현이 가능하며, 영혼까지 그리는 강인한 정신력의 예술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동의나 공감을 하시는지요?
김형근: 창작을 전제로 하는 예술행위가 자화자찬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죠. 적어도 한 시대를 마감하는 훗날 역사가들의 몫이 아닌가요. 굳이 저의 예술의 바램 같은 것이라면 비록 유화이기는 하지만 우리 민족의 예술이 세계질서와 공존하고 그 반열에 낄 수 있는 경지에 까지 가는 것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본인도 남은 여생을 열심히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김남수: 참으로 바람직한 철학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선생님은 자의식이 강한 우리 화단의 정상의 원로이십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유화를 매재로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민족의 마음과 혼을 그리는 화가 즉, ‘한국의 정신이 항상 그의 화폭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이 선생님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의 자전적인 에세이 ‘나의 삶, 나의 생각’이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소개되고 있다.
‘집 뒷산에 오르면 산 넘어 하얀 바다 위에 회청색 작은 섬들이 떠있는 충무가 내 고향이다. 일 백평 남짓한 흙마당,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아래채와 대청마루 아래로 십리쯤 되는 가느다란 바닷물이 밀려와 늘 갈대숲을 이루고 있는 그곳이 내 어릴 적 살았던 시골집이다’이는 어릴 적 작가의 예민한 감수성과 예리한 관찰력이 이미 작가 안에 생래적으로 태어나고 있음을 시사하는 글이며 오늘의 작가를 탄생케 한 원동력이 되었지 않나 싶다. 이어 그는 작품론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론을 편다.
‘73년 2년간의 미국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나는 국내 화단활동에 전념하기로 하고 나 자신을 대표할 개성창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동양의식의 세계화’가 목표였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나만의 작업, 불생불사(不生不死)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물론 이 꿈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은백색과 흔적의 무한성, 화면을 장식하는 해와 달, 구름과 별, 새와 바다, 꽃과 여인은 그래서 내 예술세계의 상징화된 대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특히 <꽃과 여인>은 나를 구원시켜준 핵심인자였음을 새삼 되새기고 싶다’라고 적고 있다. 서양화가이면서 한국성 발현을 위해 집요한 천착을 해온 海里 金炯菫의 예술은 백자나 토기, 목기, 청동합, 날나리 등 한국적인 생활용구와 포도와 배 등 향긋한 과일이 화폭에 수놓아지고 있다
의 예술은 색채미와 예리한 선묘로 이루어지는 화면분할의 특징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
김남수: 벌써 10년이 흘렀군요. 선생님께서 광주광역시가 제정한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상(오지호미술상)을 타셨지요?
김형근: 살아 생전에 내가 가장 존경했던 선생님 가운데 한 분이시죠. 인상주의 화풍도 그렇지만 선생님의 색채이론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김남수: 미국 동부의 뉴저지주 져지시의 공원에는 ‘김형근 거리’가 탄생했다는데 무슨 뜻인가요?
김형근 : 사실은 그 고장에서 내가 20년동안 작품생활을 했습니다. 2000년 처음 지정된 져지시의 ‘4월의 작가상’에 내가 첫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이 날은 ‘김형근의 날’로 각종 행사가 벌어지고 본인도 참가하고 그렇습니다. 놀란 것은 국적이 다른 외국인 작가들에게 까지도 그들이 공인을 하면 국내의 유명작가와 차별을 두지 않고 성원과 축제를 아끼지 않는다는데 감동을 했습니다.
김남수: 지난해에는 ‘대한민국미술인상’을 수상하셨죠?
김형근: 그렇습니다. 미술관련 전문가, 평론가, 미술관장, 화랑협회 등 미술계 인사들이 심의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한민국미술인상’을 추천하여 수상했습니다.
김남수: 통영은 선생님의 고향이자 공예도시가 아닌가요. 이 고장의 공예가 한국미술계에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선생님의 지도와 선견지명이 적중한 것이라는 미술계의 여론이 전해지고 있는데 사실인가요?
김형근 : 통영은 장농, 갓, 나절칠기, 가구공예 등이 활성화된 공예 도시입니다. 도립 공예학원장을 역임하는 등 많은 공예인을 양성을 하고 있습니다.
홍익대나 인천대학 등의 공예 연수교육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경남도 공예인협동조합 등도 이 고장에서부터 탄생한 것입니다. 지금은 6~70대의 인간문화재도 탄생했습니다. 수백명의 공예인 졸업생도 배출했습니다.
김남수: 선생님처럼 훌륭한 예술인이 우리의 미래세대인 후학들에게서 많이 배출되기를 진심으로 기대를 합니다.
맑은 물에 고기가 살수 없듯이 지나치게 투명한 은백의 공간 위에 펼쳐지는 그의 예술은 한마디로 한국미술의 진수를 연출하고 있다고 하여도 지나치지는 않다. 한국 최대의 벽화를 그린 서초동 검찰청사의 벽화도 그 크기에서 무려 1만호(세로 18m, 가로45m)이라는 초대형의 작품이지만 명제 <진실, 소망>을 상징하듯 은백색의 바탕 위에 해와 달, 봉황과 사군자 그리고 연꽃과 잉어들이 노닐며 그 사이에서 동자들이 평화의 나팔을 불고, 행복의 종을 치는 정경은 이름 그대로 작가가 추구하는 한국미술의 얼과 진수를 그 벽화 속에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벽화는 인간의 염원과 한국인의 바램과 인류의 희망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일시적인 실수로 좌절과 절망을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은 조형욕구가 이러한 걸작을 낳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지방출신인 그가 국전에 도전하면서 출품한 작품 <정물> <공방의 노장들> <古玩>등 서구주의 가 팽배하고 있는 화단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한국화단에 충격과 신선함을 동시에 안겨준 대통령상 수상작 <과녁>은 소재의 선택에서 한국성의 심볼로 평가받았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구성력, 순도 높은 조형성 등 주제와 정신, 표현의 방법론 등에서 추종을 불허하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평론가 이경성氏는 ‘현실적 시각을 지니고 있으면서 추상적 화면구성에 도달하고 있다’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과녁에 꽂힌 세 개의 화살이 한 치의 틈새도 주지 않는 예리한 기하학적인 선으로 이루어진, 리얼리즘의 완벽한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평가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또한 그는 海里 金炯菫의 작품세계를 ‘화면의 명랑성, 화면의 투명성, 화면의 설화성’으로 압축하고 있는데 이는 구김살 없는 밝고 화사한 색채, 백자처럼 투명하고 해맑은 은백의 시심, 유재를 사용하면서도 설화적인 한국의 얼과 혼을 작품 속에 담고 있다는 데서 감득한 평자의 미학적 결론이 아닌가도 싶다.
그러나 김형근의 작품<과녁>은 당시 화단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미 있었던 미학개념이 몰락하고 새로운 조형질서의 태동을 예고하는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삼원법 등 원근을 무시한 평면구성 등 대담하게 화면구성을 시도함으로서 기존질서를 파괴하는 미술사의 반란자로 비쳐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현대미술이 회화기법상의 많은 변주를 해온 것은 김형근의 <과녁>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구상양식에서 새로운 예술양식의 신조형주의 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 것은 김형근 예술에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가정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리얼리즘 화가로 그를 단정 짓기에는 그의 예술의 폭이 넓고 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가 뜨겁게 달아올랐던 60년대 전후하여 국전에서 작품<바다의 인상> <양지터>추상작품이 입선을 따내는 경력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강인한 실험정신을 통한 조형의 영역을 폭넓게 섭렵을 했다는 증거가 된다. 1960년대가 그의 예술의 은회색시대라고 전제한다면 1970년대 이후는 은백색시대가 보다 구체화되고 심화되어가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볼 수가 있다.
結 論
그의 작품세계를 정리해 보면 그는 독자적인 작가만의 오리지날리티를 만들어 낸 화단의 원로이며,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한국성을 집요하게 천착해 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세계시장을 예견하는 번득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며, 특히 그가 추구하는 사실주의 경향의 작품들은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컨템포러리한 리얼리즘을 창출해 낸 최초의 작가라고 볼 수가 있다. 얼핏 관찰하면 그가 작화한 인물이나, 정물, 꽃그림 등은 정교하리만치 극사실기법으로 연출되고 있지만 소재나 물상과는 또 다른 그만의 독특한 사실주의를 추구 하고 있다는 데 우리의 공감을 얻고 있다. 이른바 순결무구한 환상적인 미감의 극치를 이루고 있으면서, 그 속에 인간이 추구 하는 영원한 이상향을 실현하려는 것이 작가의 구극(究極)의 목적이 아닌가 싶다.
COVER ARTIST
김 형 근
Kim, Hyung Geun
銀白의 透明한 詩心 畵幅에 담는
頂上의 元老
김남수 / 미술평론가
지난 70년 국전은 아카데미즘 등 사실주의가 주도를 했다. 원로 서양화가 海里 金炯菫은 당시 응모작품 <과녁>을 출품하여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때 한국화단은 그의 수상작을 두고 ‘조형적 파괴를 시도한 미술사의 반란자’ 또한 다른 시각으로 볼 땐 ‘영혼까지 그리는 은백의 화가’ ‘불멸의 미의식을 추구하는 화가’, ‘투명한 백자의 시심을 그리는 화가’ ‘섬세한 묘사력에서 생의 환희를 모색하는 화가’등 평자들은 격찬을 아끼지 않았고 작가에게 무한한 갈채를 보냈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사실주의를 추구하면서도 회화의 영역에서 표현의 진폭이나 스케일이 크다는 것을 뜻하며, 주어진 소재는 무엇이나 자재로운 표현이 가능하면서도 영혼까지 그리는 강인한 정신력이 그의 예술세계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유화를 매재로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민족의 마음과 혼을 그리는 화가 즉, ‘한국의 정신이 항상 그의 화폭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그의 자전적인 에세이 ‘나의 삶, 나의 생가’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소개되고 있다.
‘집 뒷산에 오르면 산 넘어 하얀 바다위에 회청색 작은 섬들이 떠있는 충무가 내 고향이다. 일 백평 남짓한 흙마당,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아래채와 대청마루 아래로 십리쯤 되는 가느다란 바닷물이 밀려와 늘 갈대숲을 이루고 있는 그곳이 내 어릴 적 살았던 시골집이다’이는 어릴 적 작가의 예민한 감수성과 예리한 관찰력이 이미 작가 안에 생래적으로 태어나고 있음을 시사하는 글이며 오늘의 작가를 탄생케 한 원동력이 되었지 않나 싶다. 이어 그는 작품론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론을 편다.
‘73년 2년간의 미국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나는 국내 화단활동에 전념하기로 하고 나 자신을 대표할 개성창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동양의식의 세계화’가 목표였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나만의 작업, 불생불사(不生不死)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물론 이 꿈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은백색과 흔적의 무한성, 화면을 장식하는 해와 달, 구름과 별, 새와 바다, 꽃과 여인은 그래서 내 예술세계의 상징화된 대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특히 <꽃과 여인>은 나를 구원시켜준 핵심인자였음을 새삼 되새기고 싶다’라고 적고 있다.
서양화가이면서 한국성 발현을 위해 집요한 천착을 해온 海里 金炯菫의 예술은 백자나 토기, 목기, 청동합, 날나리 등 한국적인 생활용구와 포도와 배 등 향긋한 과일이 화폭에 수놓아지고 있다. 그의 예술은 색채미와 예리한 선묘로 이루어지는 화면분할의 특징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
맑은 물에 고기가 살수 없듯이 지나치게 투명한 은백의 공간 위에 펼쳐지는 그의 예술은 한마디로 한국미술의 진수를 연출하고 있다고 하여도 지나치지는 않다. 한국 최대의 벽화를 그린 서초동 검찰청사의 벽화도 그 크기에서 무려 1만호(세로 18m,가로45m)이라는 초대형의 작품이지만 명제 <진실, 소망>을 상징하듯 은백색의 바탕 위에 해와 달, 봉황과 사군자 그리고 연꽃과 이어들이 노닐며 그 사이에서 동자들이 평화의 나팔을 불고, 행복의 종을 치는 정경은 이름 그대로 작가가 추구하는 한국미술의 얼과 진수를 그 벽화 속에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벽화는 인간의 염원과 한국인의 바램과 인류의 희망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일시적인 실수로 좌절과 절망을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은 조형욕구가 이러한 걸작을 낳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밖에도 작가는 한려수도 경남도청과 외환은행 본점, 수출입은행 본점 등에 벽화를 남겼는데 약6천호 크기의 세라믹 백자판 2천장을 연결하여 제작한 백자벽화 <영원의 場 >은 세계최초의 시도라는데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해방 후만 하더라도 그렇다. 50년대의 한국미술은 일정시 식민지하의 미술교육과 서구주의가 홍수처럼 밀어닥치면서 인물이나 풍경중심의 아카데미즘이 주도를 했으며, 소재의 빈곤이나 획일적인 조형성 때문에 국전의 무용론 등 저항세력이 태동하면서 60년대는 전통과 추상이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이 전개됐었다. 이때에 혜성처럼 나타난 무명화가가 바로 김형근이다. 지방출신인 그가 국전에 도전하면서 출품한 작품 <정물> <공방의 노장들> <古玩>등 서구주의 가 팽배하고 있는 화단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한국화단에 충격과 신선함을 동시에 안겨준 대통령상 수상작 <과녁>은 소재의 선택에서 한국성의 심볼로 평가받았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구성력, 순도 높은 조형성 등 주제와 정신, 표현의 방법론 등에서 추종을 불허하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평론가 이경성氏는 ‘현실적 시각을 지니고 있으면서 추상적 화면구성에 도달하고 있다’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타켓트에 꽂힌 세 개의 화살이 한 치의 틈새도 주지 않는 예리한 기하학적인 선으로 이루어진, 리얼리즘의 완벽한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평가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또한 그는 海里 金炯菫의 작품세계를 ‘화면의 명랑성, 화면의 투명성, 화면의 설화성’으로 압축하고 있는데 이는 구김살 없는 밝고 화사한 색채, 백자처럼 투명하고 해맑은 은백의 시심, 유재를 사용하면서도 설화적인 한국의 얼과 혼을 작품 속에 담고 있다는 데서 감득한 평자의 미학적 결론이 아닌가도 싶다.
그러나 김형근의 작품<과녁>은 당시 화단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미 있었던 미학개념이 몰락하고 새로운 조형질서의 태동을 예고하는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삼원법 등 원근을 무시한 평면구성 등 대담하게 화면구성을 시도함으로서 기존질서를 파괴하는 미술사의 반란자로 비쳐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현대미술이 회화기법상의 많은 변주를 해온 것은 김형근의 <과녁>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구상양식에서 새로운 예술양식의 신조형주의 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 것은 김형근 예술에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가정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리얼리즘 화가로 그를 단정 짓기에는 그의 예술의 폭이 넓고 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가 뜨겁게 달아올랐던 60년대 전후하여 국전에서 작품<바다의 인상> <양지터>추상작품이 입선을 따내는 경력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강인한 실험정신을 통한 조형의 영역을 폭넓게 섭렵을 했다는 증거가 된다. 1960년대가 그의 예술의 은회색시대라고 전제한다면 1970년대 이후는 은백색시대가 보다 구체화되고 심화되어가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볼 수가 있다.
結 論
그의 작품세계를 정리해 보면 그는 독자적인 작가만의 오리지날리티를 만들어 낸 화단의 원로이며,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한국성을 집요하게 천착해 왔다는 사실이다. 다시말해 세계시장을 예견하는 번득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며, 특히 그가 추구하는 사실주의 경향의 작품들은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컨템폴러리한 리얼리즘을 창출해 낸 최초의 작가라고 볼 수가 있다. 얼핏 관찰하면 그가 작화한 인물이나, 정물, 꽃그림 등은 정교하리만치 극사실기법으로 연출되고 있지만 소재나 물상과는 또 다른 그만의 독특한 사실주의를 추구 하고 있다는 데 우리의 공감을 얻고 있다. 이른바 순결무구한 환상적인 미감의 극치를 이루고 있으면서, 그 속에 인간이 추구 하는 영원한 이상향을 실현하려는 것이 작가의 구극(究極)의 목적이 아닌가 싶다.
다음은 김형근 화백의 ‘예술과 생애’와 관련한 몇 가지 대담을, 원로 언론인 본지의 김남수 주간과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金 :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건강하신지요.
炯 : 적조했습니다. 잡지를 만드시느라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金 : 벌써 10년이 흘렀 군요. 선생님께서 광주광역시가 제정한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상(오지호미술상)을 타셨지요.
炯 : 살아 생전에 내가 가장 존경했던 선생님 가운데 한 분이시죠. 인상주의 화풍도 그렇지만 선생님의 색채이론에 많을 것을 배웠습니다.
金 : 미국 동부의 져지시의 공원에는 ‘김형근 거리’가 탄생했다는데 무슨 뜻인가요.
炯 : 사실은 그 고장에서 내가 20년동안 작품생활을 했습니다. 2000년 처음 지정된 져지시의 ‘4월의 작가상’에 내가 첫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이 날은 ‘김형근의 날’로 각종 행사가 벌어지고 본인도 참가하고 그렇습니다. 놀란 것은 국적이 다른 외국인 작가들에게 까지도 그들이 공인을 하면 국내의 유명작가와 차별을 두지 않고 성원과 축제를 아끼지 않는다는데 감동을 했습니다.
金 : 지난해에는 ‘대한민국미술인상’을 수상하셨죠.
炯 : 그렇습니다. 미술관련 전문가, 평론가, 미술관장, 화랑협회 등미술계 인사들이 심의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한민국미술인상’을 추천하여 수상했습니다.
金 : 통영은 선생님의 고향이자 공예도시가 아닌가요. 이 고장의 공예가 한국미술계에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선생님의 지도와 선견지명이 적중한 것이라는 미술계의 여론이 전해지고 있는데 사실인가요.
炯 : 통영은 장농, 갓, 나절칠기, 가구공예 등이 활성화된 공예 도시입니다. 도립 공예학원장을 역임하는 등 많은 공예인을 양성을 하고 있습니다. 홍대나 인천대학 등의 공예 연수교육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경남도 공예인협동조합 등도 이 고장에서부터 탄생한 것입니다. 지금은 6~70대의 인간문화재도 탄생했습니다. 수백명의 공예인 졸업생도 배출했습니다.
金 :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는 평면회화와 오브제 등 공예품과 전혀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 오랜 역사의 전통으로 되어 있더군요. 다시 말해 우리처럼 순수니 비순수니 하는 사례는 일체 볼 수 없다는 것이죠.
炯 : 너무나 좋은 지적을 하셨습니다. 예술의 고장 파리에서도 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 행사에 세계의 명품으로 너무나 많은 공예품이 퐁피두 제2전시관 비렛트에 출품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金 : 통영을 중심으로 전국학생미술실기대회에 선생님이 후원하는 등 2세들을 양성하기 위한 많은 업적을 남기시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炯 : 사실 이들 청소년들은 우리의 꿈이요, 희망입이다. 세계주의에 영합하고 공존할 수 있는 훌륭한 후배들이 많이 배출되여야죠.
金 : 앞으로의 계획은 없으신지....
炯 : 21세기는 문화예술이 그 나라의 명운을 결정 짓는다는 일부 석학들의 주장도 있습니다. 우리의 미술문화가 세계 속에 우뚝 서고 빛냈으면 합니다.
金 : 장시간 인터뷰 고맙습니다.
炯 :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1930년 경남 통영 출생 • 2008 월드미스유니버시티 세계대회 문화심사위원장 • 2006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 2002 대전광역시 금강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역임 • 2000.4 미국 져지 CITY에서 매년 4월은 ‘김형근의 달’ 제정 • 1998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역임 • 1995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 1989 경상남도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 1983 국전 심사위원 역임 • 1982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중앙일보미술대전 초대작가 서울시초대전 초대작가 • 1976-1982 수도여자사범대학 회화과 교수 • 1970 AMERICAN ART SCHOOL 수료 수상경력 • 2008 대한민국미술인상 수상 • 1999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상 수상(오지호미술상) • 1995 통영시 문화상 • 1981 서울시 문화상 • 1970 대통령상(작품: 과녁) 제19회 국전 • 1969 문화공보부 장관상(수석상) 제18회 국전 • 1968 경상남도 문화상(미술 창작상) 외국 초대전 • 2000 미국 져지 CITY 미술관 초대전 • 1995-99 남북평화미술초대전 일본 세계미술 • 1994 무로마치 미술관 초대전(일본 동경) • 1988 NEW YORK Alpain 화랑 초대전 • 1983 유고슬라비아 국제판화전 초대작가 • 1983 독일 본케니 미술관 초대 • 1978 아세아미술제 초대(일본 동경) • 1971 뉴욕 문화회관 초대전(Culture Center) 학위 1999 명예문학박사 (세종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