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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신앙칼럼 스크랩 육군대학 교관 이종명 대령
에바다 추천 0 조회 352 12.01.16 20: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종명 대령은 "육군대학 뒤편 364m 높이 금병산에 도전하려는 목표를 정해 2004년 달성했다. 보통사람 1시간 반 걸리는 산행을 5시간 반 만에 완주했는데 자신감이 커졌다"고 했다. 그는 "다시 진로를 선택할 처지라도 군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 신현종 기자


                10년 전 DMZ서 부하 구하려다 지뢰사고…

             두 다리 잃은 이종명 육군대학 교관

  
   DMZ 내 군사분계선 앞에 선 이종명 당시 중령 "진실 말해도 믿지 않고, 진실 말하기를 회피하는 세태 안타까워"


   이종명(李鍾明·51) 육군대학 교관(대령)은 10년 전 자신의 두 다리를 앗아간 끔찍한 지뢰사고에 대해 술회하면서도 천진한 웃음을 지었다. 아픈 과거를 캐묻기 주저하는 기자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도 했다.


   이 대령을 전쟁 60주년인 25일 대전 육군대학에서 만났다. 비극이 닥친 날짜의 이틀 전이었다. 대령은 들뜬 표정으로 "내일(26일) 사고가 났던 파주로 아내와 나들이를 간다"고 말했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같이 있었던 '진짜 전우(戰友)'인 부하 셋과 그 가족들이 매년 사고 난 날을 전후해 그곳에서 모인다는 것이다.

 

   이·취임 열흘 전 수색정찰후임 대대장 지뢰 밟아 구하러 들어갔다가 사고


   때는 2000년 6월 27일 오전 10시 47분이었다. 파주지역 수색대대장이었던 이종명 중령(이하 당시 계급)은 후임 대대장 설동섭 중령에게 인수인계를 위해 비무장지대(DMZ) 수색 정찰에 나섰다. 이 중령과 설 중령, 박영훈 중대장(대위)은 군사분계선(MDL) 앞까지 접근했고, 다른 장병들은 후방 30m 거리를 두고 엄호하고 있었다.


   설 중령이 돌아 나오려다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었고, 박 대위는 파편을 맞아 쓰러졌다. 이 중령은 둘의 소총·철모를 챙겨 빠져나와 무전병에게 상황 보고를 지시했고, 두 후배를 구출하기 위해 홀로 현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후임 대대장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도 역시 지뢰를 밟았다.


   ― 사고 상황을 돌이켜도 될까요?


   "그럼요, 어차피 지난 일인데.(웃음) 이·취임식 딱 열흘 전이었습니다. 제가 그곳 미확인 지뢰지대에 40개월 근무해서 길을 훤히 알았어요. 전날 억수비가 내렸는데, 그날 완전히 갰어요."


   ― 그 비가 비극을 불렀군요.


   "적어도 대여섯 번 가본 곳이니까, 비 때문에 지뢰가 떠내려가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죠."


   ― 혼자 구출하려 뛰어든 것은 옳은 판단이었습니까?


   "부하들을 빨리 구해내야겠다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이 안 들었어요. 과다 출혈로 목숨이 위태로웠으니까요. 거긴 녹음(綠陰)이 우거져 엄호 병력은 MDL 쪽 우리들이 전혀 안 보입니다. 첫 번째 지뢰폭발이 났을 때 엄호 병력이 동요할까 봐 상황을 알리려 나왔고, '내가 들어갔던 지역이니까 내가 가겠다'고 한 거죠. 잘한 판단인지는 몰라도, 길 모르는 병사들이 갔다면 피해가 더 컸을 테니까요. 만약 지금 제 다리가 멀쩡하다면 자괴감 때문에 폐인이 돼 있었을 거예요. 제가 직접 안 갔다면 지금의 저보다 훨씬 못한 제가 돼 있을 겁니다. 부하들이 응급처치를 잘 해줘서 이렇게 살아 있으니 감사하죠."


   ― 지뢰를 밟았을 때 어떤 느낌이던가요?


   "영화에 나오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웃음) 발로 밟았다 뗐을 때 터지는 지뢰는 전 세계에 없습니다. 밟는 순간 '꽝' 터졌고 두 다리가 날아갔습니다. 몸이 붕 떴다 떨어졌는데 손가락 관절을 다쳐 굽힐 수 없었죠. '내가 (지뢰를) 밟은 것인가, (1차 폭발 때 들었던) 환청인가' 혼돈스러운데 다리 아래에 뜨거운 느낌이 왔습니다."


   ― 그 순간 부하들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외쳤지요?


   "엄호 병력이 소리를 듣고 뛰어들어오려는 움직임이 보였어요. 손을 다쳐 소총을 팔뚝에 올린 채 팔꿈치로 기어 나왔죠. 15m쯤 포복해 안전이 확인된 그 길을 통로로 삼아 설 중령, 박 대위를 구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 그런 대처는 훈련한 것입니까, 임기응변입니까?


   "교본에는 원칙만 있고 전장 상황에 맞게 융통성 있게 판단·지휘합니다."


   ― 함께 지뢰피해를 겪은 두 사람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설 중령은 후유증으로 혈류(血流) 이상이 왔어요. 기억력·지능이 떨어져 사람을 잘 못 알아보는 데다 대인기피 때문에 주로 집에서 지냅니다. 육사 한 기수 후배라 잘 알고 군에서 큰 역할을 할 장교였는데, 정말 참…. 박 대위는 전방근무를 자원해 지금도 고성 지역에서 소령으로 근무 중입니다."


   ― 2년 2개월을 병원에서 지냈습니다.


   "재활에는 엄청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단순 행동을 반복 훈련하고, 딱딱한 의족이 주는 고통과 압박감을 참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해내겠다, 현역으로서 부족함 없이 역할을 다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염력을 넣었습니다. 저는 비관하거나 절망한 적이 없습니다. 건강도 이제 웬만한 사람보다 낫다고 자부합니다. 어머니가 큰 힘이 됐어요. 제 병실 수발을 하면서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지요. 참 대단한 분입니다."


   ― 불편함은 얼마만큼 극복했습니까?


   "군의관이 보행연습을 시키면서 '팔자걸음으로 걸어야 안정감이 있다'고 조언했는데 '나는 현역 복귀할 사람이니까 똑바로 걷는 연습을 하겠다'고 했어요. 처음엔 잘 넘어졌고 아직도 계단 올라갈 때 불편하지만 속도가 좀 처질 뿐 괜찮습니다. 의족 만드는 분이 '이 대령처럼 잘 걷는 사람 본 적이 없다'고 해요. 손으로만 조작할 수 있도록 개조된 차량을 손수 운전하고요."


   ― 육사 지원 동기는 무엇인가요?


   "집이 몹시 가난해 국비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국해양대에도 합격했는데, 어머니가 육사를 권하셨어요. 저는 느낄 수 있어요. 무학(無學)에 빈농이었던 아버지(1991년 별세)가 (공부를 제대로 못 시킨 것을) 늘 미안해하신 것, 그래서 어머니 결정을 묵묵히 따랐던 것을요."


   ― 육사 생활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나요?


   "상상보다 훨씬 좋았어요. 제복 입고 서울 시내 나가면 주목받았고 절도 있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장애인으로 첫 현역복무임무 계속할 수 있어 감사. 한국, 전쟁 끝나지 않아 전방서 한 번 실수는 죽음"


   ― 장애인으로서 현역 복무를 계속한 최초 사례지요?


   "저를 계기로 나라와 군을 위해 희생한 사람이 임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된 점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 원망이나 후회를 해본 적이 없습니까?


   "당연히 할 일을 했는데 누구를 원망해요. 나라를 위해 한 일이고, 제가 잘 이겨 나가고 있는데요."


   ― 그런 긍정의 힘은 천성인가요, 후천적 노력인가요? 아니면 신앙인가요?


   "글쎄, 저도 모르겠습니다. 비장애인이라면 못했을 경험을 하고 있으니 되레 감사하지요. 주말엔 교회 봉사활동을 열심히 합니다. 목포·여수·인제로 다니면서 '아버지 학교'에서 봉사를 합니다."


   ― 사고 당시 가족 반응은 어땠나요?


   "아들 둘이 그때 중 2, 초등 5년생이었어요. 철이 든 큰놈이 뉴스를 우연히 접해서 동생이 상처받을까 봐 신문 치우고 TV 끄고 그랬다더군요. 지금은 둘 다 제 장애를 자랑스러워해요. 여자친구도 스스럼없이 데리고 와서 소개시켜 주고요."


   ― 아내는 책망하지 않았나요?


   "사고 덕에 가정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사고가 없었다면 부대(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을 거라면서요. 제가 맡은 작전임무가 매일 야근이어서 가정을 별로 돌보지 못했어요."


   ― 내면적으로는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그전엔 바늘로 찔러야 피 한 방울 안 날 사람이었어요. 제가 생각해도 냉정했지요. 성격도 표정도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주변 사람들이 그래요."


   ― 이 대령을 주인공으로 육군본부가 건군 60주년 기념 군(軍) 최초 뮤지컬 '마인(Mine)'을 제작했죠?('마인'은 직업군인 아버지와 신세대 아들의 갈등을 담은 내용으로 2008~2009년 공연했다. 실제 이 대령의 지뢰사고는 모티브가 됐을 뿐 상당 부분 각색됐다.)


   "제겐 부자 갈등이 없는데 관객들이 그런 줄로 오해하더군요.(웃음) 상관없습니다. 군 전체를 홍보하기 위한 거니까 저는 기꺼이 '교보재'(교육훈련 보조재료)가 될 의향이 있어요."


   ― 울컥한 부분이 있던가요?


   "대대장이 '위험하니 내가 (지뢰지대로) 들어가겠다'고 말하는 대사가 나와요. 그 장면이 뭉클하더군요."


   ― 눈물이 났습니까?


   "…."(그는 물만 들이켰고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 뮤지컬 제작자이자 육사 동기인 이영노 중령 얘기로, 동기들이 사고 소식을 접하고선 '우직한 촌놈이 능히 그랬을 일이다'라고 했다더군요.


   "하하,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군인이라면 분명 그 상황에서 그렇게 했을 겁니다."


   ― 6·25 60주년에 천안함 폭침 등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안보강연 때 '대한민국은 전쟁이 끝난 게 아니다. 전방에서 한번 실수는 바로 죽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진실을 말하는데 믿지 않고, 그래서 진실을 말하기를 회피하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역사의 정확한 실상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교관으로서 현역 임기를 마치고, 그 이후엔 저처럼 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해 어떤 역할이건 맡고 싶습니다."

 

   "ROTC 1년차인 둘째아들 직업군인 할지 고민 중…그런 고민하는 것 자체가 반갑고 대견스러워"


   ― 최근 가장 기뻤던 일은 뭔가요?


   "육사를 지원해 실패했지만 해안(海岸)부대 트럭 운전병으로 복무했던 큰아이가 전역해 복학한 것이 자랑스럽고, 학생군사교육단(ROTC) 1년차인 둘째가 직업군인을 할까 고민 중인데 그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반갑고 대견합니다." 이 대령은 아들에게 진로를 강요한 적이 결코 없다고 말했다.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해라. 어떤 결정이건 적극 지지하겠다"고만 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종명 대령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대구 달성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39기로 임관했다. 화천·연천·파주에서 각각 소대장·중대장·대대장을 지냈다. 1994년부터 파주에서 근무했고 2000년 6월 판문점 북동쪽 5㎞ 지점 비무장지대(DMZ)에서 인수인계 도중 지뢰를 밟은 후임 대대장을 홀로 구출하려다 지뢰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었다. 그로부터 26개월간 병원에서 치료·재활훈련을 받았고, 사고를 계기로 군 인사법 시행령이 개정돼 신체장애 군인으로서 처음으로 현역 복무의 길이 열려 2002년 퇴원 직후부터 육군대학 교관으로 근무 중이다. 영관 장교를 대상으로 작전술과 지상군 기본교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각급 부대와 중·고교에서 안보특강을 하고 있다. 사고 당시의 살신성인(殺身成人)으로 보국훈장, 2002년 육사 총동창회가 처음 제정한 올해의 육사인상을 받았다. 파주 통일공원에 그의 공적을 기린 살신성인탑이 세워져 있다. (2010.6.28. 조선일보 / 박영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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