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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부진도사람 원문보기 글쓴이: 박 지기
물고 물리는 당쟁(黨爭)의 소용돌이와 맞물려 되풀이 되는 유배(流配)의 악 순환 속에서 1년 농사지으면 3년은 먹을 수 있다는 따뜻하고 기름진 섬, 멀고 먼 남쪽 낙도(落島)는 유배지(流配地)로서 갑지(甲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 고려 배 중손 장군이 삼별초를 이끌고 대몽항쟁(1270-1272)의 근거지로 군내면 용장리에 터(용장산성)
를 잡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왕조의 세력판도가 바뀌면 언젠가 그들도 귀향길에 오를지 모르는 것 아니든가.
먹고 살기 좋은 고장으로 보내기로 생각했다면 진도는 선택된 땅이었으리라.
멀지 않은 날 부산에서 고향에 가려면 경부선 열차를 타고 대전에 내려 서울에서 오는 호남선 열차를
갈아타든가 아니면 먼지 나는 시골 길을 종일 털털거리며 달려가는 시외버스를 타야했다.
경전선이 개통되고는 일 1회 저녁에 출발하는 야간열차를 타고 새벽에 목포에 내려 역시 하루에 한번
출발하는 ‘옥소호’나 ‘명성호’(?)를 타고 서너 시간 통통거리며 험한 물길을 달리거나 제주행 밤배(가야호)를 타고가다 벽파에서 내려야 했다(잠들면 제주까지 직행이다).
다리가 놓이기 이전이고 고속 포장도로가 뚫리기 전으로 그리 오래된 세월이 아니다.
아니면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프로펠라가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고(일 2회 출발로 기억됨) 광주(송정리)에 내려 버스와 배를 갈아타고 가면 당일 고향도착이 가능했다.
월출산을 바라보며 성전, 해남을 지나 도선(渡船)을 타고 물길(우수영-벽파)을 건너 다시 버스를 타고..... 고향집에 급한 일이 있을 때 허둥대며 겪어보았기에 기억이 새롭다.
고향이야기를 하려니 서설(序說)이 길어진다.
한양에서 멀리멀리 있고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島)이야 말로 귀향지로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 땅에 살았든 그들이 이 고장 문화 전반(시, 서, 화, 관혼상제-冠婚喪祭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일 것이다.
타임머신(time machine)의 시계바늘을 뒤로 돌리다 보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는 귀양길 남도천리 황톳길을 터벅터벅 걸어갔을 그들의 심경(心境)을 생각하니 온 몸에 전율(戰慄)이 느껴진다.
* 경남 남해군은 남해읍에 35,000m² 면적의 유배문학관(유배문화 전시실, 향토 역사관, 영상실, 수장고, 야외 체험시설, 야외 공원 등)을 2010. 7월에 개관 예정이라고 하며, 서포 김만중 문학상을 제정하고 선생의 유배지인 상주 노도에 유배 체험관(2012년 완공)도 건립한다고 한다.
* 제주도에는 완당 김정희를 위리안치한 대정현이 있으며 관광코스로 각광을 받고있다고 한다..
* 진도군이 의신면 접도(구 금갑도)에 조성한 유배지공원이 있다는데 가보지 못했다.
유배지로서의 진도에 대한 연구, 정리는 학자나 관련 전문가의 몫이겠지만 흥미를 느끼는 게시(揭示)자는 기존의 자료(백과사전 외 관련문헌 참조)들을 개괄적으로 간추려 봅니다.
* 공의(公儀 1126년 이자겸의 난, 고려 이자겸의 아들)
* 이주(李冑 1498년 무오사화, 연산군4년 정언으로 재직, 1504년 갑자사화 때 사형)
* 윤필상(尹弼商 1504년 갑자사화, 영의정 지냄)
* 충암 김정(金淨 1519년 기묘사화)
* 소재 노수신(蘇齋 虜守愼 1545년 을사사화,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진도로 유배되어 19년을
지냄, 후에 복권되어 영의정을 지냄)
* 임해군(臨海君 1608년 조선 선조의 맏아들)
* 인선군(仁城君 1628년 유효립의 역모사건, 조선 선조의 일곱째 서자)
* 정만조(鄭萬朝 1858-1936 조선말기 학자로 진도유배)
* 1915년 진도읍 *
* 공의(公儀)
- 고려 인종(17대) 때 부친(이자겸)의 반란 실패로 1126년 진도로 유배
@ 이자겸은 고려 예종, 인종의 장인이며 인종의 외조부로 1126년(인종4) 12월 유배지 영광에서 죽었다.
* 이주(李冑 미상- 1504)
- 연산군 시대 문신으로 1488년(성종 19) 별시에 급제, 1498년(연산군4) 정언으로 재직 중 무오사화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 1504년 갑자사화 때 사형되었으며 문집 “망언집”이 있다.
* 윤필상(尹弼商 1427-1504)
- 成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연산군(燕山君)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
禍)시 폐비 윤씨(연산군의 생모)의 폐출(廢黜)을 막지 못한 죄목으로 진도에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 그가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갔을때 운세를 보았는 바, "壽位具隆 但終死於三林之下- 수명과 지위가
융성할 것이나 삼림(三淋)아래에서 죽게 될 것이다"라는 점괘가 나왔었다
진도 유배 중 주변 지명을 물으니 위쪽부터 상림(上林), 중림(中林), 하림(下林)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죽음을 예견(豫見)하였고 곧 이어 사약(賜藥)을 받았다고 전한다.
* 충암 김정(金淨 1486-1521)
- 성종에서 중종때의 문신으로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되어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1520. 5월)를
거쳐 제주도(1520.8-1521.10 제주 풍토록 저술)로 이배되어 1521. 10월 사약을 받는다.
(그는 조광조, 김식 등 과 개혁정치를 추진하다 기묘사화를 당한다.)
진도를 떠나면서 벽파진에서 시 한수(渡碧波口號 -벽파를 떠나며)를 읊었다.
* 소재 노수신(蘇齋 虜守愼 1515 - 1590)
- 중종에서 선조 때의 문신으로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 壁書事件)으로 순천에서
진도로 이배되어 1548년부터 1567년까지 19년(32세 - 50세) 동안 진도에 있으면서 ‘봉암 서원’을 열어
후학을 육성하고 주민들에게 시문(詩文)을 가르쳐 학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 그가 평생 1509수의 한시를 지었는데 그중 1023수가 진도생활 중 지어졌다고 한다.
- 선조 임금이 즉위(1567년)하고 그 해 8월에 유배가 풀리었고 10월에는 복직되어, 대사간.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내고 1573년 우의정. 1578년 좌의정. 1585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 진도사람들을 개화시키려 책을 읽도록 하고 예법을 가르친 소재의 공을 기려 1602년에 봉암 서원에
신위를 모시었다하나 서원은 남아있지 않고 귀양 중 살았던 지산면 안치리에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한다.
* 임해군(臨海君 1574년 선조7년- 1609년 광해군 1년)
- 조선 선조(제 14대)의 맏아들로 이른은 진(津)이며 세자의 물망에 올랐으나 성질이 좋지 못해 동생
인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다(1592년 선조25)
- 1608년 선조가 죽은 후 광해군에 의해 진도로 유배되었고 강화 교동에 옮겨져 이듬해 사약을 받았
다.
-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작(復爵), 신원(伸寃)되었다.
* 인성군(仁城君 1588 - 1628 )
- 이름은 이공으로 조선 중기를 살다간 선조의 일곱째 서자로 1599년 인성군에 봉해져 사용원, 종부
시의 도제조, 중친부에 재직하였다.
- 이괄의 난(1624년)에 연루되어 간성과 원주로 유배되었다 1626년 풀려났으나 유효립의 역모사건
(1628년) 때 왕으로 추대되었다하여 진도로 유배되어 죽었으며 그 후 1637년 복관되었다.
* 정만조(鄭萬朝 1858 - 1936)
- 조선 말기의 학자로 과거에 합격(1889년)하여 예조참의, 승지, 내부참의 등을 지냈다.
- 세도 세력과 대립하다 정치적 사건에 말려 진도로 유배되었다.
- 개화사상을 지닌 지식인으로 대한제국(1907년) 고종 퇴위 이후 사면을 받아 관계로 복귀하였으나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고 있다.
- 유고집에 무정전고(茂亭全稿)가 있다.
(後記)
* 충암 김정(金淨 1486-1521)이 제주로 떠나면서 벽파진에서 시 한수를 읊었다. (1521. 10월 제주도에서
사약을 받는다).
渡碧波口號(벽파를 떠나며)
宇宙由來遠 人生本自浮 扁舟從此去 回首政悠悠
세상은 넓고 넓은데 인생은 부평초 같은 것
조각배같이 떠나는 이 몸 나랏일 돌아봄만 아득하네
* 송인수(1499-1547)가 전라감사 때(1543-1544) 벽파정을 찾아와 시 한 수를 남긴다.
그는 감사를 마친 3년 후(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사약을 받는다.
珍島碧波亭 借忠岩金淨韻(충암의 벽파정시에 차운하여)
孤忠輕性明 端棹任沈浮 日落芳洲遠 招魂意轉悠
외로운 충성은 밝고 가벼워 노 끝에서 파도에 흔들리네
해는 지고 섬은 멀기만 한데 끝없이 떠도는 혼을 부르노라.
* 노수신(1515-1590)도 벽파정에 올라 시 한 수를 남긴다.
二公天上在 孤客海中浮 辛緩今朝死 前導尙自悠
두 공은 천상에 있으나 외로운 나그네는 바다 가운데 떠 있네.
다행히 오늘까지 목숨을 이었으나 앞날은 오히려 멀기만 하네.
* 노수신1 흉년에 관한 시다 *
온 고을에 흉년이 들었네.
옷가지를 찐 보릿가루나 밀기울과 바꾸어 먹고
모두가 사나운 병에 걸렸네.
그리고 쑥 풀만 무성하니
노약자는 모두 구렁에 빠져버렸네.
근심하고 외로운 사람끼리 서로 붙잡고 다니니
두려워서 반쯤 열려진 사립문을 닫아버리네.
버려진 아이들의 울음소리 들리네.
* 노수신 2 *
碧亭侍人- 벽파정에서 사람을 기다리며
새벽달에 허전히 그림자 끌고 가니
누런 꽃 붉은 잎은 정을 듬뿍 머금었네.
구름 모래 아마득해 물어볼 사람 없어
나루 누각 기둥 돌며 여덟아홉 번 기대었소.
* 노수신 3 *
천지의 동쪽 나라 남쪽
옥주의 성 아래에 두어 칸의 초당
용서받기 어려운 죄와 고치기 어려운 병을 얻어
불충한 신하. 불효한 자식이 되었도다.
3천 4백일 귀양살이 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요
태어난 해인 올해 년 병진일이 부끄럽구나.
너 노수신은 그래도 죽지 않았으니
임금님에게 받은 은혜
어떻게 갚으려느냐.
* 옥주(沃州)는 진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은 유배중 자기의 심사를 이천자(二千字)로 적어 놓은 글로
당시의 풍속과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로 선생의 문집에 실려 있다.
내가 귀양살이 온지도 어언 반년이 되었구나.
온 포구는 왜적들이 발동하여 피에 젖었고
석가래 사이에 시(詩) 몇 편 걸려 있어 읊으려니
목이 먼저 메이는 구나.
멀리 우수영(右水營) 바라보니
움막들이 언덕 위에 의지하고 있는데 흩어진 군졸들의 거처라네.
온 고을은 분탕되고 전답(田沓)에는 쑥풀만 무성하네.
가엾은 사람들이 서로서로 붙잡고 떠돌아다니니
애처러워 차마 볼 수가 없어 싸릿문을 닫아 버렸네.
* 은파유필(恩波濡筆) *
-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는 궁내부 참의관 시절 명성황후 시해관련 혐의로 1896년 진도 금갑도(金甲
島)에 유배되어 1907년까지 12년간 이곳의 생활을 기록하였는 바, 조선 말기 진도의 풍속을 알려주고
있다.
- 일기체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진도의 독특한 풍속들이 기록되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
- 강강술래, 차첨지 놀이, 씨름, 수건놓기, 외따기 놀이 등에 대해 묘사하였으며 세습 무계 박덕인(朴德
寅)이 창, 가야금, 퉁소, 무용 등에 능한 악공이었음을 기록하고 있고, 특히 그의 춤사위를 예찬하고
있다.
- 진도에서의 교유, 풍속 등의 서술은 진도 향토사 연구 자료로 그 가치가 매우 높아 진도문화원에서
1998년 '국역은파유필' 번역본을 간행하였다.
첫댓글 한때는 유배온 사램덜이 하도 만해가꼬 진도 백성덜이 당최 못 살겄다고 군수가 임금님께 상소까장 올린 기록이 있을 정도로 무쟈게 만한 분덜이 진도로 귀양오셰가꼬 모든 생활 문화에 겁나게 만한 영향을 끼쳤겄지라? 그랑께 진도말도 육지짝 목포 무안 광주 말보담도 표준말하고 같응것이 더 만하고 말투(억양)도 그래람짜.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이죠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옛 말에 알아야 면장 하죠
가져가네요 너무좋은 자료라서 감사합니다
조병현, 김영만, 박경구님 댓글 감사합니다. 오랫만의 방문으로 답글도 못 드렸네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소재 노수신(蘇齋 虜守愼)의 유배지가 혹 봉암마을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봉암 서원’을 열어 후학을 가르쳤다니, 그 봉암마을에 유배지의 흔적이 있으며, 유배객이 계시는 동안 군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인사차 왔다는 전래까지 있으며, 유배객이 머물던 바로 그 터가 봉암마을 우리 집 근처에 있어 그 곳이 바로 그 곳 이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지금으로 부터 460여년전 명종 2년에 나룻배에 실려 제일 먼저 도착지가 접도였다는데 ...
반갑습니다. 오랫만에 서울(카페) 나들이를 했습니다. 고향집이 유서깊은 그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확인되리라 생각합니다. 건강하시고.......
훌륭한 자료를 올려주셨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반갑습니다. 비가오니 선선해서 좋습니다. 태화강변의 체육대회. 종화체육관 부근의 배꽃(梨花)길이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생각납니다. 건강하시길.......